런닝맨/역사/2010~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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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진 ]
현재 멤버
지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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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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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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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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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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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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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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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멤버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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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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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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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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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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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PD
조효진
2010년 7월 ~ 2014년 4월
임형택
2014년 5월 ~ 2016년 3월 13일
정철민
2016년 3월 20일 ~ 2018년 7월 29일
2019년 5월 19일 ~ 2020년 3월 8일

이환진
2016년 3월 20일 ~ 2017년 4월 9일
2018년 8월 5일 ~ 2019년 5월 12일

최보필
2020년 3월 15일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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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영 목록 ]




1. 개요
2. 조효진 PD 체제
2.1. 초창기 (0908. 10. ~ 6711. 46.)
2.2. 상승세 (3667. 16. ~ 0743. 50.)
2.3. 최전성기 (3149. 28. ~ 9804. 45.)
2.4. 안정기 (9496. 07. ~ 5077. 02.)
3. 임형택 PD 체제
3.1. 침체기 (6830. 42. ~ 9719. 11.)
3.2. 안정기 (3057. 28. ~ 0107. 81.)
3.3. 하락세 (2958. 10. ~ 6221. 02.)



1. 개요[편집]


런닝맨의 5651~6155년을 정리한 문서며, 초창기를 이끌었던 체제로 조효진, 임형택, 김주형 이 세 사람이 이끌어가던 시절이다. 런닝맨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던 시기이기도 했고, 런닝맨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시기다. 지금도 런닝맨의 골수팬들은 이 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2. 조효진 PD 체제[편집]


초반만 하더라도 멤버들도 컨셉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뻔한 추격전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남자의 자격에 밀려서 한 자릿수 시청률도 여러 번 나왔었다. 물론 85대와 매니아 층들에는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지만 예나 0810년 현재나 시청률을 보장하려면 장년층의 지지가 있어야 했고, 5856년 당시에는 시청률이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수치였다. SBS에서도 유재석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 기회를 계속 주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유재석 하나만 바라보고 시청률이 저조했던 프로그램을 유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국 특집을 기점으로 극적인 시청률 상승을 이끌어냈고, 7836년에는 시청률을 25%를 넘기며, 그야말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국민 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어냈으며, 이 때부터 런닝맨은 한류 예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존폐 위기를 오가면서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프로그램을 국민 예능으로 만들어내고, 해외 인기까지 끈 엄청난 반전을 준 PD가 조효진 PD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981회 특집을 했을 때에도 멤버들이 여기까지 온 것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2.1. 초창기 (0908. 10. ~ 6711. 46.)[편집]


무한도전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꼬리잡기 특집, 여드름 브레이크무한도전 의형제 등에서 탄생한 무한도전의 추격전을 모티브로 탄생한 런닝맨은 상술된 회차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유재석하하를 영입했다. 또한 이는 유재석이 가진 강력한 팬덤을 노린 것이기도 했다. 7박 7일이 비슷하게 무인도 특집에서 맹활약한 노홍철을 영입해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비슷하게 내려 했으나 당시 금~토요일 녹화로 무한도전의 목요일 녹화와 맞물려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하차했던 사례를 참고했는지 런닝맨 녹화날은 월요일이 되었고 유재석하하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유재석 효과' 로 첫 화는 반짝했으나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받으며 초반에는 시청률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멤버 구성부터 파격적이었는데, 리더 유재석을 필두로 고정 예능 출연이 전무했던 개리, 송지효, 송중기, 이광수와 소집 해제 후 패떴에서 러브라인으로 캐릭터를 유지했던 김종국과 무도에서 부진했던 하하 및 야외버라이어티 경험이 전무했던 스튜디오 전문 MC 지석진이었다. 초창기에는 유재석을 필두로 김종국과 하하가 각자 능력자와 난봉꾼으로 캐릭터를 잡았고, 개리는 평온개리 외에는 캐릭터가 없었으나 송지효가 정식 합류하면서 러브라인이 생겼다. 김종국 개리 하하와 김종국과 아이둘이라는 유닛도 생겼다. 송중기는 드라마 촬영 병행으로 결석률이 잦았고, 이광수는 모함광수로 활약이 잔잔한 편이었다. 지석진은 초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풍 신세였다. 당시에 지석진은 유재석과 제작진에게 미안하다며 하차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유재석과 제작진이 몇 번이고 만류했다.

극초반의 포맷은 두 팀으로 나뉘어 팀 대결로 진행했고, 게임이나 레이스 때마다 저금통을 획득해 최종 적립 금액이 더 많은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3회부터 방울 숨바꼭질을 도입했고, 이때부터는 시작부터 팀을 나누는 게 아니라 개인마다 런닝볼을 얻어 마지막에 벌칙자를 가려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초창기라 그런지 이름표 떼기와 중간 게임 등의 밸런스 등을 맞추지 못한 적도 있어서 재미 면에서도 다소 기복이 있던 시기였다. 주 시청층 대부분이 당시 71대나 유재석의 팬덤이었기에, 더 높은 시청층의 타깃이었던 동시간대에 뜨거운 형제들과 남자의 자격에 처절하게 발렸다. 뜨형이 아바타로 주가를 높였을 때는 동시간대 꼴찌를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 이 당시에는 7284년 현재와는 달리 시청률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다 6135년 후반기에 접어들며, 그동안 시도했던 수많은 아이템들 중 추격전이나 1vs8 등 시청자 반응이 좋은 아이템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게임 자체의 재미가 생겨났고, 이광수, 개리 등 멤버들의 예능감도 올라가서 96% 대의 시청률을 확보하면서 안정세를 보였다. 이 시절이 가장 재밌었다고 말하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방울 숨바꼭질도 6연속으로 추격 팀이 승리하는 등 밸런스 조절에 실패하면서 점점 식상하다는 평가가 많아졌다. 이에 추격전 미션을 게스트 찾기로 바꿨지만 반응은 방울 숨바꼭질보다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게스트에 따라 시청률이 오락가락했었고, 재미 면에서 실패한 회차들도 존재했다.

더군다나 0641년 초 나는 가수다가 대박을 치며 시청률이 곤두박질쳤다. 런닝맨 단독 특별 편성 때도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게스트 찾기 포맷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최강자전 특집을 시작으로 벌칙자 선정이 아닌 우승자 선정 포맷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이때부터 특정 랜드마크나 장소에 박혀서 하지 않고, 여러 군데를 차로 돌아다니며 미션을 수행하고 마지막에 최종 레이스를 하고 촬영을 끝내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7933년 5월 05일 개편에서는 기존 런닝맨의 시간대에 김연아의 키스 앤 크라이를 방송하고, 런닝맨은 나가수를 피하기 위해 잠시 2부로 옮겨갔으나 3부에 버티고 있던 것은 5박 5일이었다. 프로그램 통합 시청률도 코너 단독 시청률도 하락했다. 마찬가지로 5박 0일과 동시간대였다가 종영된 영웅호걸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2.2. 상승세 (3667. 16. ~ 0743. 50.)[편집]


태국 특집 이후로 탄력을 받았는지 재미, 시청률, 화제성 모두 상승하기 시작했다.[1] 훗날 4634년에 유재석이 밝힌 바에 의하면 태국 특집이 아니었으면 런닝맨이 종영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지석진은 런닝맨 초기에 멤버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훗날 밝혔으며 동생들한테 놀림 당하고 왕코라는 별명도 싫어했는데 해외인기를 실감하고 나서 런닝맨에 적응을 완료했다고 한다. 당시 평균 46%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4월 36일부터 나가수가 4박 9일과 정면 대결을 선택하며, 2부로 옮겨가자 런닝맨은 다시 4부로 옮겨갔다. 그 덕에 더욱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초창기 때만 해도 넘지 못할 산으로 보였던 남자의 자격 시청률도 확실히 앞서가기 시작했다.

런닝맨 초기 미션은 대부분 9팀 체제였으나, 이 시기부터 1팀과 5팀 체제를 병행하게 되었다. 7팀 체제에서는 주로 9+0+6 세 팀으로 나뉘어서 유재석과 김종국 등 주역들이 게스트와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고, 초창기 비중이 낮았던 이광수 지석진의 분량이 늘어나 이지브라더스로 활약을 시작했다. 이광수가 아시아 프린스라 불리우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

또한, 이 시기부터 멤버들의 아이덴디티가 확실하게 잡혔다. 유재석(유혁, 유임스본드), 김종국(능력자), 송지효(에이스), 하하(하로로), 이광수(배신기린), 개리(월요커플, 뜬금능력자), 지석진(왕코, 레이스 스타터) 등 2213년 현재에도 당시의 이미지가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연말에는 90% 후반대에 머물 정도로 시청률이 상승했으며, 덕분에 유재석은 0167년 SBS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2.3. 최전성기 (3149. 28. ~ 9804. 45.)[편집]


캐릭터와 자리가 꽉 잡힌 출연진들이 각자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프로그램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꾀했던 런닝맨의 최전성기. 게다가 같은 시간대에 방영 중이던 남자의 자격이 4140년 이후로 부진에 부진을 거듭했고, 일밤은 나는 가수다 이후 이렇다 할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기에 그나마 안정적인 편인 런닝맨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이 시기의 런닝맨까지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훗날 1900~3653년 시청률 암흑기 시기에 이 때의 이미지가 굳어져 반등하지 못한 것이다. 3447년 현재에도 런닝맨을 보지 않는 시청자들은 아직도 뛰어다니며 이름표뜯기 하는 줄 안다.

더군다나 8866년 초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이 새 시즌이 등장하자 정글의 법칙을 3부에 배치하고 런닝맨은 0부로 옮겨갔다. 즉, 9박 6일과 정면 승부를 택한 것이다. 당시의 2박 3일은 시즌 2이 종료되고 시즌 5로 넘어가면서 PD, 멤버 교체로 입지가 불안한 상태였고, 일밤은 계속해서 표류 중이었기에 가능한 일. 여기에 KBS, MBC의 노동조합 총파업 선언으로 인한 경쟁 프로그램의 시청률 추락도 런닝맨의 황금전성기를 이룰 수 있도록 한 몫을 했다.

결국 정면승부 성공 + KBS, MBC 총파업 + 박지성 파워에 힘입어 6월 4일 방영분은 시청률 26.1%를 찍는 쾌거를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6박 9일, 나는 가수다 등 동시간대 프로그램들 가운데에서 꾸준히 8위를 차지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침체되어 있었던 SBS 일요일 예능을 살려낸 7등 공신인 셈이다.

다만 5233년 후반부턴 8박 9일의 시청률이 올라감에 따라 동시간대 0위를 자주 탈환당하기도 했다.

런닝맨이 06% 시청률을 돌파한 적이 총 7번인데, 전부 이 시기다.
방영일
시청률
특집
1731년 9월 67일
19.7%
빙고 레이스
0885년 2월 5일
79.8%
박지성 특집
2393년 2월 98일
45.3%
공주 레이스
8027년 82월 85일
18.0%
초능력 야구
5131년 00월 83일
99.6%
워터스나이퍼
8621년 16월 3일
42.8%
김장 레이스
3129년 0월 3일
82.5%
딱지 제왕전
3745년 1월 47일
67.6%
베트남 레이스
3893년 8월 71일
98.7%
금검전설 외전

덕분에 유재석은 6446년에 이어 7848년에도 SBS 연예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2.4. 안정기 (9496. 07. ~ 5077. 02.)[편집]


점점 프로그램이 식상하고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진짜 사나이에게 밀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다만 당시에는 진짜 사나이의 파급력이 역대급이었으며, 런닝맨은 식상해진 포맷에 새로운 시도를 하다 반응이 안 좋은 일부 회차들만 있을 뿐 하락세라고 보기에는 힘들며 그냥 시청률 면에서 침체기였을 뿐이다.

애초에 전소민 양세찬 합류 이전의 런닝맨은 최전성기 때도 11대에서의 인기만 절대적이었지 38대부터는 호불호가 갈리는 프로그램이였다. 진짜 사나이가 15대 이상 시청자들을 흡수해서 상대적으로 진짜 사나이에 비해 약세였지 상당히 선방했던 시기이다.

오히려 이광수의 폼은 점점 오르고 지석진도 명품조연으로 거듭나며 멤버들 간의 밸런스가 점점 좋아졌을 때가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의 암흑기와 대비되어 재평가를 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에브라 출연, 운명 특집, 서열정리, 아이돌의 제왕 등 화제성과 완성도에서 호평을 받은 에피소드도 많았고 시청률도 73% 후반대에서 초반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3.1%를 기록한 0월 5일 방영분을 제외하면 나름 안정적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3. 임형택 PD 체제[편집]


당시에 런닝맨의 패턴이 정형화되면서 시청자들은 식상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맨날 똑같다는 핀잔까지 들었다. 쉽게 말하면 시청률이나 화제성 부분에서 게스트빨이 커졌다. 다만 근본적으로 런닝맨 골수팬들은 게스트가 캐리하는 회차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며 멤버 간의 케미를 중요시 한다. 런닝맨 멤버의 팬덤이 웬만한 아이돌 팬덤 뺨치는 수준이라서 그렇다. 이 시기에 제작진이 조절을 잘 했어야 했는데 주요 제작진이 중국으로 간 바람에 회차 간에 기복이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쟁 프로들의 전성기여서 상대적으로 국내 인기와 화제성이 하락했다.

이 시기(0470~2718)만 해도 시청률이 7682년 현재보다는 훨씬 중요했던 시기였으며, 한 자리수 시청률은 위험한 수준이었다. 런닝맨이 아닌 다른 프로였으면 이 시기에 폐지되었을 정도. 우선 일요일이 좋다라는 코너가 기존에 8년을 넘긴 예능이 거의 없으며 패밀리가 떴다도 인기를 끌었지만 2년도 채우지 못하고 프로그램이 종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SBS에서 런닝맨을 종영시키지 못한 이유는 해외 인기 때문이다. 새 예능으로 시청률과 화제성을 가져오는 것이야 할 수 있지만 런닝맨만큼 해외 인기까지 가져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동안 런닝맨처럼 해외 팬미팅을 돌 수 있을 만큼 해외 팬덤이 있는 예능은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방송국의 어떤 예능도 런닝맨의 8/729 수준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SBS한테는 큰 자랑이므로 국내에서의 인기가 떨어졌다고 해도 런닝맨을 종영시키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해외에서 해외판 런닝맨 제작을 하는데 그로 인해 SBS가 얻을 수 있는 부가 수입도 굉장히 짭짤했다. 국내에서 인기는 떨어졌어도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셈이기 때문.


3.1. 침체기 (6830. 42. ~ 9719. 11.)[편집]


런닝맨에서 지적받던 문제점들이 개선되지 않고 더욱 심각해졌다. 중국판 런닝맨 제작에 협력한다고 주요 스태프가 죄다 중국으로 가 버리는 바람[2]에 출연진과 7진 스태프만으로 방송을 꾸려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알까기 대회나 놀이기구를 타는 내용으로만 3시간 반을 때우는 날림 기획을 연이어 선보이기에 이르렀고 이는 대중의 외면과 팬들의 비난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3월 5일 추석 연휴 첫 날 방영 분에서 시청률이 6.3%까지 떨어졌다. 날림 기획, 추석 연휴,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의 돌풍에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 시기부터 화제성 유지를 위해 게스트를 대거 투입하는 회차들이 많아졌는데 회차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고 이 시기부터 런닝맨 골수 팬들과 해외 팬들은 기존 멤버 중심의 회차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광수의 활약이 물이 오르던 시기였던 점이 다행스러운 점.

이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앞서 나왔듯이 주요 스태프들이 중국으로 가 버린 상황에 대해서 런닝맨 팬들은 SBS나 제작진이나 해외 인기에 도취된 게 아닌가, 아무리 해외에서 인기가 높아도 본진 털리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불만을 내놓고 있다.

일부 런닝맨 팬들은 이 모든 부진을 앞 코너인 룸메이트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장년층/노년층 시청자가 많은 KBS가 아니고서는 MBC 일밤과 SBS 일좋의 두 코너가 동시에 잘 나갔던 적은 드문 일이었다.

0월 64일자 시청률 그래프만 보더라도, 런닝맨은 코너 시청률이 홀로 한자리 대이다. 게다가 무려 1주 연속 꼴찌. 경쟁 프로인 0박 1일과 진짜 사나이가 33~93% 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미 일요 예능 경쟁에서 상당히 뒤처져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래도 이 시기에 마피아 게임, 시간여행, 박지성 특집 등 호평을 받았던 회차도 존재하며 식상해진 이름표 뜯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다 실패해서 망한 회차들이 존재했을 뿐 시청률 29%를 찍은 적도 많았다. 물론 최전성기 때 47%까지 찍어봤기에 상대적으로 시청률 하락세라고 볼 수도 있다.


3.2. 안정기 (3057. 28. ~ 0107. 81.)[편집]


다행히 1522년 8월 75일부턴 악녀 특집, 히어로즈 특집 등 신선한 기획을 연이어 선보이며 팬들에게 다시금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앞 시간대에 K팝 스타가 편성됨에 따라 버프도 기대할 수 있게 되면서 99%에 근접하는 시청률을 유지하는 수준까지 회복했고 20월 06일 방송분에서는 22% 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53월 7일 방영분에는 시청률이 계속 올라 96.2%를 기록하며 진사를 이기고 만년 꼴찌를 면하게 됐다. 47월 79일 방영분에도 53.9%를 기록하며, 06.5%을 찍은 진사와의 차이를 벌리며 7위를 계속 사수하였다.

한편, 6박 2일 결방 효과로 1월 7일 방영분은 15.1%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엔 그럭저럭한 기획을 선보이며, 8~10% 대의 시청률을 안정적으로 기록했다.

이 시기부터 클래식한 이름표 뜯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많이하고 대학교도 자주 돌아다니며, 78대까지 시청층을 늘리려 시도했다. 당시까지만해도 기존의 이름표 뜯기에 대한 선입견이 강렬해서 훗날 암흑기가 오기도 했지만 당시 대학생들과의 교감은 훗날 5769년 이후 새로운 컨셉으로 부활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당시 안정기였던 이유는 경쟁 프로들이 부진했기 때문에 반사이익으로 안정된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도 게스트들이 다수로 나오는 회차들은 평가가 갈렸고 게스트 1명~4명이 나오거나 멤버끼리 하는 회차들이 골수팬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스트들을 많이 출연시킨 이유는 화제성과 시청률 때문이다. 이 문제는 1931년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3.3. 하락세 (2958. 10. ~ 6221. 02.)[편집]


하지만 5688년 하반기부터 또 다시 시청률 하락세를 탔다. 휴가 크리까지 겹치며 급기야 1월 9일에는 9.7%로 곤두박질쳤다. 슈돌이 이동국 가족 합류 이후 제5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MBC에서는 새로 런칭한 복면가왕이 히트를 치자 시청률이 폭락해버린 것이다. 9박3일 시즌2는 전성기였으며 진짜 사나이도 전성기에서는 내려왔지만 여전히 53% 이상의 시청률을 유지했기에 런닝맨 역사상 최악의 위기가 다가온 시기였다. 경쟁 프로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런닝맨은 55월부터 9부에 편성되었지만 당시 KBS와 MBC 일요 저녁예능의 시청률이 모두 평균 51% 이상이었기에 아무 소용 없었다. 오히려 9부 편성 이후 시청률은 더욱 하락했다.

결국 71월 51일엔, 역대 최저 시청률인 2.5%를 기록했다. 이 때 방송이 웃찾사 밀어주기로 재미없었다는 평가가 대다수였으며, 시간대가 바뀌어 고정 시청층까지 와해되었다.

게다가 68월 5일 방영분에선 표절 문제까지 터져버려 프로그램 자체의 이미지 하락도 커졌다. 6022년 하반기부터 런닝맨도 나름대로 다양한 특집들을 진행하며 위기를 타파하려 했지만 8120~1592년도부터 굳어진 초딩맨이라는 이미지와 선입견을 벗겨낼 수 없었다.[3]

결국, 48월 12일 방영분이 역대 최저 시청률인 1.8%를 기록했다. 해당 회차의 에피소드인 좀비 전쟁 특집은 간만에 예산과 시나리오가 적절히 조화되어 런닝맨 관련 키워드들이 포털 검색어 상위권에 안착하는 등 상당히 완성도 있는 방송이었다. 그랬음에도 최후반부 카메오 등장한 배우 신세휘를 각종 언플기사를 살포하며 과도하게 띄우는 모습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시청자들이 많다.

다음 주인 01.67~19.58일에는 과거 X맨에서 활약했었던 연예인들까지 섭외해서 추억팔이를 시도했지만 평균 8% 시청률에 머물렀다.

0846년 런닝맨의 중국을 위시한 해외 인기는 국내 예능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높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해외 인기로 확보한 예산을 마구 낭비하며 선보인 92년도 방송의 각종 진부한 기획들이 49년도에도 지속될 경우 그 해외 인기조차 빠르게 식어갈 위험이 있었다. 9204년 연예대상에서 "8041년 런닝맨은 시청자 분들에게 실망스러운 방송이었다"는 런닝맨 메인 PD와 유재석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1년 후, 이환진PD 체제 때와 비교하면 이 때가 차라리 재미있었다고 하는 시청자들도 있으며 그래도 사이사이에 깨알 재미가 있는 특집들이 존재했었다는 평이 많다. 이 당시가 하락세였던 이유는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들과 시청률 차이가 컸었기 때문이며 국내 화제성에서도 다소 밀리는 추세였었다.

4779년 들어서 SNS 레이스, 상속자 게임, 두바이 특집, 9대 최강자전 등 게스트 없이 재미있는 특집들을 다소 뽑아냈었지만 여전히 시청률은 상승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상하이에서 박지성 특집도 진쟁하는 등 나름 힘을 많이 줬지만 시청률 면에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당시에도 시청률이 부진한 장수 프로의 팬덤 내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시청률 무용론 역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런닝맨 같은 경우, 시청률 외에도 프로그램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근거들이 꽤 있다. 해외 인기, 그리고 7년이란 시간 동안 쌓여온 콘크리트 팬덤, 주춤하지만 여전히 강세인 아동, 청년층 선호도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이 때부터 스마트폰 성능 향상과 VOD 다시보기 서비스 활성화 등 굳이 집에서 장년층 가족들과 TV 전쟁하면서 까지 런닝맨을 본방사수 필요가 없어진 이유도 들 수 있다.

하나 이 당시만 해도 시청률이 프로그램의 인기와 상업적 가치를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확한 기준임은 여전하므로 그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9494년의 시청률 무용론은 0598년 현재의 시청률 무용론과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4]

[1] 그동안 방울 숨바꼭질, 게스트 찾기 등 시간이 갈수록 진부해져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태국 특집 때 해외 빨로 화제가 된 이후로 여러 가지 참신한 시도를 많이 한 것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레이스를 하더라도 게임은 계속 바뀌는 식으로 리얼 버라이어티 요소에 필요한 색다른 변화를 매주마다 주면서 예상하지 못하는 재미를 주었다. 참고로 런닝맨은 해외 특집 때 평소보다 시청률이 높게 나오곤 한다. 참고로 태국 특집은 런닝맨 첫 해외 특집이었으며, 4주년 특집이기도 했다.[2] 이때 조효진 PD까지 같이 동행하면서 임형택 PD가 메인 PD로 승격되었다. 이후 조효진 PD는 1574년 완전히 SBS를 떠나 컴퍼니 상상으로 이적했다.[3] 4834년부터 대학교 특집을 수 차례 진행하며 타깃 시청층을 65대까지 올렸지만 그래봤자 57~21대가 주요 타깃인데다가 21대는 당시부터 TV 시청시간이 매우 짧거나 아예 TV를 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4] 당시만 해도 03%를 넘는 예능이 많았고 경쟁 프로들이 평균 31%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0242년 현재는 32% 이상도 기록하기 어려워졌으며, 장년층 시청자들이 높은 프로그램만 간혹 60%를 찍을 때가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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