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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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이며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어머니에 대한 내용은 헤센의 마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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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сс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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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러시아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영어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Maria Alexandrovna Romanova)
독일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Marija Alexandrowna Romanowa)
출생
1853년 10월 17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사망
1920년 10월 24일 (향년 67세)
스위스 취리히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1874년 결혼 / 1900년 사망)
자녀
알프레트, 마리, 빅토리아 멜리타,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어머니
헤센의 마리
형제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세르게이, 파벨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결혼
3.3. 에든버러 공작부인
3.4.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3.5.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기타



1. 개요[편집]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부인이자 영국의 왕자비.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로 러시아 제국의 공주이기도 했다.


2. 작위[편집]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853년 10월 17일 알렉산드르 황태자헤센의 마리의 6남 2녀 중 차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에서 태어났다. 위로 언니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 있었지만 마리야가 태어나기 4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고명딸로 자랐다. 17개월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여 아버지가 알렉산드르 2세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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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진[1]

어린 시절은 매우 호화롭고 행복하게 보냈다. 첫째 딸 알렉산드라 여대공을 잃은 후 얻은 유일한 딸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헤센의 마리 부부는 마리야를 정말 금지옥엽으로 아꼈다. 형제들과도 사이가 좋았는데, 특히 남동생 세르게이, 파벨과 친했다. 남자 형제만 6명이어서 그런지 마리야는 독립적이고 여장부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교육은 대부분 가정교사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마리야는 영국인 보모들의 영향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발음했고, 독일어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3.2. 결혼[편집]


1868년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방문한 마리야는 그곳에서 누나 앨리스 대공비[2]를 만나러 온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를 만나게 된다. 이후 알프레드 왕자는 해군에 복무하면서 2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했고, 1871년에 마리야와 재회했다.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2세와, 영국인이 차갑고 불친절하다 생각한 헤센의 마리는 이 결혼을 반대했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역대 영국의 왕자들 중 러시아의 공주와 혼인한 전례가 없었고, 러시아 정교회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가의 어머니들인 빅토리아 여왕과 헤센의 마리는 자녀들에게 다른 짝을 찾아주려고 노력했지만, 알프레드 왕자와 마리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1873년 7월 11일 두 사람은 약혼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양가의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마리야는 알프레드 왕자와 결혼할 생각에 행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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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사진

두 사람의 결혼식은 1874년 1월 23일 겨울 궁전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영국의 왕자와 러시아 제국의 공주가 결혼하는 만큼, 수많은 하객들이 참석했다. 결혼식을 마친 이후 알프레드 왕자와 마리야는 영국으로 떠났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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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3.3. 에든버러 공작부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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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공작부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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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가족 초상[4]
알프레드 왕자와 결혼한 이후 에든버러 공작부인이 된 마리야는 알프레드 왕자와의 사이에서 1남 4녀의 아이들을 낳았다.

하지만 결혼 전 모두의 우려대로 마리야는 영국 왕실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특히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의 갈등이 컸다. 마리야는 종종 어머니 헤센의 마리에게 편지를 써 빅토리아 여왕을 "바보같고 고집 센 늙은 바보" 라며 험담했고,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남동생 세르게이 대공과 시조카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5]의 결혼을 반대하자 고부갈등은 더욱 극대화됐다. 특히 마리야는 러시아 황제의 딸인 자신이 덴마크 국왕의 공주이자 손위 동서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보다 신분이 높다고 생각해 대놓고 무시했다. 이러다보니 안그래도 사이가 안좋았던 빅토리아 여왕이 둘째 며느리인 마리야가 큰 며느리인 알렉산드라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고 대놓고 무시당한 알렉산드라도 마리야를 싫어하게 되었다.[6][7] 설상 가상으로 남편 알프레드 왕자도 해군 일에 열중하다 보니 아내 마리야에게 점점 소홀해져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져 갔고[8][9] 마리야는 영국에서 외톨이 신세가 되버렸다.

게다가 마리야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큰오빠 니콜라이 황태자가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는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다녔고, 심지어 자신보다 어린 정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사생아들이 황족처럼 대우받는 광경[10][11]을 봐야 했다. 결국 마리야의 어머니 헤센의 마리는 추운 러시아의 날씨, 장남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 남편 알렉산드르 2세의 불륜으로 심신이 상한 끝에 1880년 6월 3일에 사망한다. 어머니가 사망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1881년 3월 13일에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끔찍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1886년 알프레드 왕자몰타에서 근무하게 되어 남편을 따라 몰타에 정착했다. 몰타에서의 삶은 즐겁지는 않았으나, 영국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마리야에게는 큰 휴식이 되었다. 또 해군인 남편을 따라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들을 여행했다.


3.4.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편집]


1893년 8월 22일 남편의 큰아버지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인 에른스트 2세가 자식 없이 죽자, 후계자인 남편 알프레드 왕자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이 된다.

안그래도 영국이 싫었고 왕자비 신분에서 엄연한 공국의 공작부인으로 급상승하게 된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던 마리야는 남편을 떠밀어서 코부르크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공작 부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남편과의 관계[12]는 회복되지 않았으며 마리야는 이런 현실에 대해 우울해 하고 아이들에게 하소연했다.

설상가상으로 1899년 알프레드와 마리야의 결혼 25주년 기념 파티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알프레트 공세자[13]가 심각한 성병과 여자 관련 문제[14]로 권총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에 알프레드는 자식의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아내 마리야를 비난했고 부부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남편 알프레드가 과도한 흡연음주로 인해 인후암에 걸려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 당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은 살라카 법을 따르고 있었고 마리야의 남은 자녀들은 전부 딸이었던 지라 결국 공작위는 16살의 시조카 카를 에두아르트[15]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3.5.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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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하루 아침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자리가 어린 시조카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넘어가게 된 것에 마리아는 무척 한탄했고 그러다보니 시조카와 사이가 서먹했다. 그러나 조카가 마리야의 막내딸 베아트리스[16]와 스페인의 알폰소 왕자와의 결혼을 지원해준 이후로는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고, 러시아 대공과 재혼한 둘째 딸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를 보러 러시아에도 종종 방문하며 여생을 보내었다.

조카 손녀의 결혼식 참석 때문에도 친정인 러시아에 방문해서 조카 부부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그리고 성인이 된 올가와 타티아나 황녀가 가장무도회에 참석해서 어색하게 서있는 자발적 아싸같은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 돌아 키운 탓이라고 대판 까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마리야는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독일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러시아의 공주인데다 영국의 왕자비였던 마리야를 싫어했기에 코부르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하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남동생 파벨 대공과 조카 니콜라이 2세 일가족 등 많은 러시아 황족들이 살해당했고 마리야 또한 많은 재산을 잃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은 사라지는 등 큰 고생을 겪었다.

67세 생일을 맞이한 지 8일 후인 1920년 10월 25일, 마리야는 자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유해는 코부르크의 남편과 아들 곁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파벨 1세
(Paul 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urg)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1세
(Louis 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Darmstadt)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세자 알프레트
(Alfred, Hereditary Prince of Saxe-Coburg and Gotha)
1874년 10월 15일
1899년 2월 6일

1녀
루마니아의 왕비 마리아
(Marie, Queen of Romania)
1875년 10월 29일
1938년 7월 18일
페르디난드 1세
슬하 3남 3녀[17]
2녀
러시아의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Victoria Feodorovna of Russia)
1876년 11월 25일
1936년 3월 2일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18]
슬하 1녀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19]
슬하 1남 2녀[20]
3녀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공비 알렉산드라
(Alexandra, Princess of Hohenlohe-Langenburg)
1878년 9월 1일
1942년 4월 16일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 에른스트 2세
슬하 2남 3녀
4녀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Princess Beatrice, Duchess of Galliera)
1884년 4월 20일
1966년 7월 13일
갈리에라 공작 알폰소 왕자[21]
슬하 3남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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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 왼쪽이 마리야 여대공이다.[2] 마리야의 외사촌 루트비히 4세의 아내이기도 하다.[3] 알렉산드르 2세는 딸 부부가 러시아에 살길 희망해서 호화로운 신혼방을 준비했지만, 두 사람은 떠났고 이에 매우 낙담했다고 한다.[4] 아이들은 장남 알프레트, 장녀 마리이다.[5] 둘째 시누이 앨리스 공주의 차녀.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루트비히 4세가 마리야의 외사촌이기 때문에 5촌 조카이기도 하다.[6] 사실 알렉산드라는 마리야보다 일찍 결혼을 해 5명의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고, 무엇보다 남편인 에드워드 왕세자가 알프레드의 형인 만큼 마리야보다 서열도 높았다. 아무리 마리야가 황제의 딸이라고 해도 엄연히 방계 왕자비로서 차기 왕비이자 손윗 동서인 알렉산드라를 무시하는 행동은 상당히 무례한 처사였다. 당시 영국이 입헌군주국이고 유럽 왕실이니까 이정도에서 넘어간 것이지 만약 동양 왕실의 경우 마리야의 행동은 엄연한 하극상이나 다름 없었기에 엄청난 처벌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7] 참고로 마리야의 동서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마리야의 올케언니인 덴마크의 다우마의 언니다.[8] 나중에 마리야는 자녀들에게 자신이 그저 알프레드의 합법적인 정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9] 이후 알프레드 왕자는 자신의 딸 마리가 조카인 웨일스의 조지 공자와 결혼하길 바랐는데, 마리야는 딸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서 마리를 영국 왕실로 시집보내지 않았다.[10] 어느 정도였냐면 알렉산드르 2세 일가를 노린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알렉산드르는 아내 헤센의 마리와 그녀의 오빠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가 보는 앞에서 돌고루코바와 사생아들의 안위만 챙겼다. 결국 이를 듣고 폭발한 마리야는 친정을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벌였다고 한다.[11] 그에 대한 업보인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사생아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마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러시아 황실에서 쫒겨났고 결국 풍족한 연급을 지급받는 대가로 두번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채 평생 해외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마리야의 작은오빠 알렉산드르 3세를 주축으로 한 러시아 황가는 돌고루코바 일가를 몹시 냉대했고 아예 비밀경찰까지 동원해가며 감시했다고.[12] 둘 다 모두 음악을 제외하고 관심사가 극와 극으로 달랐는데 알프레드는 마리야가 좋아하는 문학과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마리야는 알프레드가 좋아하던 사냥이 멍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 아버지의 애칭 애피에서 따와 영 애피(Young Affie)라고 불렸다.[14] 아일랜드 귀족인 4대 린스터 공작 찰스 피츠제럴드의 손녀 메이블과 1898년에 비밀 결혼을 했다고 한다.[15]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의 장남.[16] 후에 갈리에라 공작부인이 된다.[17] 카롤 2세, 그리스의 왕비 엘리사벳, 유고슬라비아의 왕비 마리야 등[18]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다.[19]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이다.[20] 프로이센의 왕자비 키라 키릴로브나,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21] 이사벨 2세의 외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