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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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공자
알렉산더 루트비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에밀
Prinz Alexander von Hessen und bei Rhein


이름
알렉산더 루트비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에밀
(Alexander Ludwig Georg Friedrich Emil)
출생
1823년 7월 15일
독일 연방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사망
1888년 12월 15일 (65세)
독일국 헤센 대공국 제하임유겐하임
배우자
율리아 하우케 (1851년 결혼)
자녀
마리, 루트비히, 알렉산더, 하인리히, 프란츠 요제프
아버지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2세
어머니
바덴의 빌헬미네
형제
루트비히 3세, 카를[1], 엘리자베트, 마리
1. 개요
2. 생애
2.1. 러시아
2.1.1. 첫 사랑
2.1.2. 코카서스 캠페인
2.1.3. 첫사랑의 실패
2.1.4. 두 번째 사랑
2.1.5. 결혼
2.2. 오스트리아
2.3. 이후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2세의 3남이자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헤센의 마리의 오빠.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의 외삼촌이다.

폴란드 귀족[2] 율리아 하우케귀천상혼해 바텐베르크 가문을 창시했다. 또한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앨리스, 2대 밀포든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1데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의 친할아버지이다.[3]

2. 생애[편집]


1823년 7월 15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2세와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의 3남이자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4]은 성격 차이로 사이가 벌어져 아들 세 명을 낳은 뒤 별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만에 알렉산더와 마리를 포함한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당시 유럽의 궁정에서는 그 아이들이 루트비히 2세가 아니라 빌헬미네와 불륜 관계에 있는 시종무관의 아이라고 소문이 났다.[5]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알렉산더와 마리를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했다. 알렉산더와 마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시절 대부분을 유젠하임의 작은 성 하일리겐베르크에서 지냈다.


2.1. 러시아[편집]


1840년 4월 16일에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동생 마리의 약혼이 발표됐다. 어린 마리가 러시아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알렉산더는 러시아에 같이 가자고 제안받았다. 1840년 6월에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라 황후, 차녀 올가 여대공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마리를 데려가기 위해 다름슈타트에 왔다. 알렉산더는 마리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1840년 9월 7일 러시아 차르스코에서 다시 만났다.

1840년 9월 8일 알렉산더와 마리는 화려하고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차르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 입성했다. 조용한 헤센과는 전혀 다르게 러시아는 굉장히 웅장하고 화려한 곳이었다.[6]

1841년 4월 28일에 알렉산더의 여동생 마리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결혼했다. 알렉산더는 성 안드레이 훈장을 받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결혼식 이후에도 러시아 궁정에 남았다.


2.1.1. 첫 사랑[편집]


19살의 알렉산더는 니콜라이 1세의 차녀인 22살의 올가 여대공[7]에게 빠져들었다. 니콜라이 1세는 올가 여대공과 알렉산더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알렉산더는 연회에서 올가 여대공 근처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언제나 즐거워했다.

올가 여대공 말고도 많은 결혼한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곧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황태자비의 오빠가 수많은 여성들과 연애한다는 소문들이 퍼졌다. 알렉산더는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은 관계에서까지 언급됐다. 알렉산더의 사생활은 심지어 황실 가족 저녁식사에서도 언급됐다. 그럼에도 알렉산더는 올가 여대공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였다.

올가 여대공에 대한 알렉산더의 관심은 니콜라이 1세를 화나게 했다. 니콜라이의 1세의 다른 자녀들은 외교 관계를 진전시킬 타국과의 중요한 정략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은 올가 여대공만은 꼭 중요한 결혼을 할 필요가 있었다.[8]

1843년 9월, 동생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세례식 날에 알렉산더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 1 근위 연대[9]에 배치됐다. 10월에 황태자 부부가 다름슈타트로 가자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더에게 긴 휴가를 주었다. 알렉산더가 돌아오기 전에 니콜라이는 스테판 대공과 올가 여대공의 결혼을 성사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쪽의 반대로 스페판 대공과의 결혼은 없던 것으로 됐다.

1844년 4월에 알렉산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시 돌아왔다. 황실 가족들은 알렉산더에게 러시아에 방문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녀 루이제와 맺어주려 했다. 루이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알렉산더는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했지만 성과없이 루이제는 다시 8월에 독일로 떠났다.

알렉산더는 점점 더 올가 여대공에게 빠져들었다. 겨울에는 같이 사냥하고 스케이팅을 하는 등, 올가와의 시간을 즐겼다. 결국 알렉산더와 올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알렉산더는 코카서스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추천받았다. 황제의 제재가 심해지자 올가 여대공은 알렉산더를 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루트비히 2세마저 코카서스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떠나기 전에 알렉산더는 새로 태어난 조카의 세례식에 참석했다. 세례식에서 올가 여대공에게 코카서스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올가 여대공은 형식적인 말만 할 뿐 그를 차갑게 대했다.

이젠 올리(올가 여대공의 애칭)가 날 정말 사랑하긴 하는지 모르겠다.

알렉산더의 일기



2.1.2. 코카서스 캠페인[편집]


알렉산더는 보론초프 백작[10]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더가 위험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보론초프에게 안전할 때만 알렉산더를 전선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은 실제 캠페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적었다. 지휘 경험은 없지만 장군인 22살의 알렉산더는 총 27명의 사람들을 함께 데려왔다.[11] 알렉산더는 보론초프와 좋은 친구가 됐다.

캠페인은 생각처럼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측이 우세했으나 점점 적군에게 밀렸다. 1845년 적장 샤밀의 군대는 보론초프가 이끄는 러시아의 주요 공격을 견뎌냈을 때 가장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알렉산더는 전쟁의 현실을 알게됐다. 다르고를 적에게 뺏긴 후, 다르고 주변에 있던 알렉산더를 포함한 러시아의 군인들은 위기를 겪는다. 전쟁 중에도 알렉산더는 일기를 썼는데, ‘돌아왔던 길로 가지고 못하고 숲과 알지 못하는 길에 놓여있다.’라고 적었다. 후퇴 중 적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 적들은 사방에 불을 지폈다. 상황이 나빠져 후퇴는 거의 불가능했다. 7월 14일, 공격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다른 부대의 도움으로, 그들은 성공적으로 후퇴했다.

알렉산더는 동생 마리에게 “마리, 나는 3일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너를 못 볼 줄 알았어. 자주 죽음을 가까이 느꼈다는 것은 군인에게 큰 가치가 있어. 나는 이제 당당히 군복을 입을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생각해.”라고 편지를 보냈다.

정복한 곳은 곧 뺏기고 20%의 원정군을 잃는 등의 큰 성과가 있던 캠페인은 아니었지만 적의 도시를 불태우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알렉산더는 가장 높은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가자 알렉산더는 모두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2.1.3. 첫사랑의 실패[편집]


오스트리아와의 혼담에 실패한 니콜라이 1세는 올가 여대공과 뷔르템베르크의 왕세자와의 혼담을 성사시켰다.

올가 여대공과 뷔르템베르크의 왕세자와 약혼이 발표되자, 마리는 잠시 다름슈타트에 가있던 알렉산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직 올가는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 솔직한 그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어.

마리, 너는 내가 올가를 좋게 생각하는 걸 알고 얼마나 그녀의 행복을 신경쓰는지 알 거야. 올가같은 천사를 가지기엔 누구도 충분치 않아. 그녀의 선택을 하늘이 축복하시고, 올리(올가의 애칭)가 평생 행복하길…

1846년 2월 1일, 동생 마리의 편지와 알렉산더의 답변


동생 마리를 포함한 황실 가족들은 알렉산더가 다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공녀와 만나리라 기대했지만 알렉산더는 거절했다.

2.1.4. 두 번째 사랑[편집]


알렉산더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는데 그 대상은 시녀 소피야 슈발로브나 여백작이었다. 슈발로프 가족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려고 노력했다. 한번은 동생 마리의 시녀인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이 알렉산더에게 소피야와 춤을 추면, 그녀의 어머니가 당신들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하겠다고 했다는 경고를 전해주었다.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슈발로브나

소피야와의 연애는 니콜라이 1세를 화나게 했다. 알렉산더는 소피야와 너무 사랑에 빠져서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다.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더에게 소피야 슈발로브나와 관계를 끝내고 자신의 조카 예카테리나 여대공과 결혼하라고 했다.

소피야의 부모님은 소피야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도록 했고 알렉산더는 마리의 설득으로 소피야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때 알렉산더는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이제 황실 가족들은 알렉산더가 예카테리나 여대공과 결혼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았다.

2.1.5. 결혼[편집]


소피와의 이별로 슬퍼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는 동생 마리의 시녀인 율리아 하우케를 자주 보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며느리 마리의 방으로 가려다가 옆에 있는 율리아 하우케의 방의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알렉산더와 율리아를 발견했다. 니콜라이 1세는 분노하며 알렉산더의 궁정 출입을 며칠 동안 금지시켰다. 하지만 황실가족들은 그들의 연애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여전히 알렉산더가 예카테리나 여대공과 결혼할거라고 믿었다. 1850년 1월 3일날 알렉산드라 황후는 다시 한 번 알렉산더에게 예카테리나와 결혼하라고 충고했다.

알렉산더는 1850년 1월 30일에 알렉산더 보브론스키 공과 소피야 슈바로브나의 약혼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더는 “하늘에게 감사하지만, 소피야가 다른 남자의 것이 되는 걸 상상할 수 없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7월에 결국 예카테리나 여대공마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게오르그 공과 약혼했다.

잠시 여행에 떠났다[12]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알렉산더는 다시 율리아와의 관계를 이어나갔고, 결국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율리아의 부주의로 둘이 결혼한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사람들은 감히 알렉산더가 율리아와 결혼해 황실에서의 지위, 유망한 장래를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알렉산더가 ‘폴란드인 고아’가 아닌 자신의 계급에 맞는 여성을 찾길 바랐다.[13] 헤센의 친정 가족들도 알렉산더가 러시아의 여대공과 결혼하길 바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대사관들은 각국에 니콜라이 1세가 얼마나 알렉산더에게 화가 나있는지를 전했다.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더에게 율리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를 러시아 군대와 궁정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협박했다.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한 알렉산더는 율리아 하우케와 야반도주해 브레슬라우에서 결혼했다.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작위를 공유할 수 없었던 율리아에게 형 루트비히 3세는 바텐베르크 여백작(Her Illustrious Highness The Countess of Battenberg)의 작위를 부여했다. 이후 바텐베르크 공비(Her Serene Highness Princess of Battenberg)로 승격됐다.


2.2. 오스트리아[편집]


니콜라이 1세는 불명예스럽게 알렉산더를 장군직에서 파면했다.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알렉산더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에게 알렉산더가 명예롭게 퇴직하고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니콜라이 1세는 듣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러시아에서 받던 월급과 율리아의 연금이 끊기자 루트비히 3세와 동생 마리가 비밀리에 보내준 2만 루블에 의존하며 스위스 호텔에 머물렀다. 알렉산더는 다름슈타트에 정착해 루트비히 3세가 안정적인 자리를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헤센에서 알렉산더의 존재는 수치였다. 헤센측은 알렉산더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떠나라고 했다.

결국 알렉산드르와 마리 부부까지 헤센 대공국에 방문해 루트비히 3세에게 알렉산더를 위한 장군직을 마련해달라고 했지만 끝내 루트비히 3세는 거절했다. 이에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오스트리아 측에 알렉산더를 고용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니콜라이 1세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알렉산더의 5촌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14]는 부탁을 거절했다.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를 설득해 파면을 전역으로 정정해줬다. 그제서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의 5촌 외당숙인 알렉산더를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복무하게 된 알렉산더는 그라츠의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라츠는 귀천상혼한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15]이 사는 곳으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나름의 배려였다.

1866년 헤센 대공국은 오스트리아, 뷔르템베르크, 바덴, 나사우와 함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했다. 알렉산더는 타우버비쇼프스하임 전투에서 연방 제 8군단을 이끌었지만 프로이센 군에게 졌다. 그 결과 헤센 대공국의 북부를 잃었다. 끔찍하게 반프로이센주의자였던 알렉산더는 전후에 프로이센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조카 하인리히[16]와 프로이센에 호의적이었던 조카며느리 영국의 앨리스 공주[17]에게 분노했다. 이후 알렉산더는 군에서 은퇴했다.

2.3. 이후[편집]


전쟁이 끝나고 은퇴한 알렉산더와 가족들은 겨울에는 다름슈타트의 알렉산더 궁전에서, 여름에는 하일리겐베르크 성에서 살았다.[18]

1855년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면서 러시아의 황제와 황후로 즉위한 매제 알렉산드르 2세와 여동생 마리야 황후는 자주 헤센에 방문했다. 러시아 황제 부부는 헤센의 대공인 루트비히 3세와 함께 있기보다는 알렉산더와 함께 하일리겐베르크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 연례 방문은 대공국의 국제적 명성을 높였다. 또한 알렉산더의 자녀들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아이들은 고모와 고모부인 황제 부부는 물론 비슷한 나이대의 사촌들인 마리야 여대공, 세르게이 대공, 파벨 대공과도 친해졌다. 각국의 외교관들은 황제와 헤센 대공국의 시골의 친밀한 환경에서 대면하고 싶어해 이 연례방문을 항상 기다렸는데 이로 인해 바텐베르크 가족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후 1879년 불가리아 공이 된 둘째 아들 알렉산드르[19]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알렉산더는 1888년 12월 15일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내 여동생은 나에게 자기가 천국에 있으며 행복하다고 말했고 나 또한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Meine Schwester sagt mir, dass sie da ist, und sie sagt, dass sie glücklich ist, und dass auch ich glücklich sein werde.

알렉산더는 죽기 전 여동생 마리야 황후의 환영을 봤다고 딸 마리에게 전했다. 마리야 황후의 아들로 알렉산더의 조카인 세르게이 대공은 매일 자기 어머니의 영혼이 나타나 죽어가는 외삼촌을 위로할 수 있도록 기도했는데 이 말을 듣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접은 손을 하늘로 들고 '맙소사!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군!‘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다른 대공가 가족들과 함께 로젠회에에 있는 알테스 영묘[20]에 묻혔다. 하지만 부인인 율리아 하우케는 헤센 대공가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같이 묻히지 못했다. 1894년 8월 3일, 알렉산더의 유해는 율리아가 의뢰한 하일리겐베르크의 크로스 가든에 있는 바텐베르크 기념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902년에, 그들의 유해는 마침내 예배당 밖의 무덤에서 함께 묻혔다.[21] 그들의 무덤 앞에는 지역 사회가 세워준 1979년 IRA 폭탄 테러로 사망한 손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기념비가 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헤센 대공국의 공자 알렉산더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Grand Duke Ludwig II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1세
(Grand Duke Ludwig I
of Hesse and by Rhine)

헤센-다름슈타트의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여백작 카롤리네[22]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빌헬름
(Prince George William of Hesse-Darmstadt)
라이닝겐-다그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마리 여백작
(Countess Maria Louise Albertine of Leiningen-Dagsburg-Falkenburg)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바덴의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Princess Caroline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여백작 카롤리네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에어바흐쇤베르크 공비 마리
(Marie, Princess of Erbach-Schönberg)
1852년 2월 15일
1923년 6월 20일
에어바흐쇤베르크 공 구스타프
슬하 3남 1녀
1남
제1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루이 마운트배튼
(Louis Mountbatten, 1st Marquess of Milford Haven)
1854년 5월 24일
1921년 9월 11일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슬하 2남 2녀[23]
2남
불가리아 공 알렉산더르
(Alexander, Prince of Bulgaria)
1857년 4월 5일
1893년 11월 17일
요하나 로이싱거
슬하 1남 1녀
3남
하인리히 공자
(Prince Heinrich)
1858년 10월 5일
1896년 1월 20일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슬하 3남 1녀[24]
4남
프란츠 요제프 공자
(Prince Franz Joseph)
1861년 9월 24일
1924년 7월 31일
몬테네그로의 안나 공주[25]


4. 여담[편집]


  • 알렉산더와 율리아의 장남 루트비히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고, 3남 하인리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하는 등, 아들들이 하나같이 혼사를 잘 맺은 걸로 유명하다.[26] 이윽고 알렉산더의 손녀 대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비, 스웨덴의 왕비, 스페인의 왕비까지 배출하면서 바텐베르크 가문은 매우 번성했다. 이후 바텐베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반독감정으로 인해 마운트배튼 가문으로 개명했다.
  • 재밌게도 차남 알렉산더[27] 역시 아버지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 출신 여배우와 귀천상혼했다. 어머니 율리아 하우케는 아들이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귀천상혼을 하자 크게 상심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28]
  • 여동생 헤센의 마리는 사후에 자신의 모든 문서, 특히 알렉산더의 편지들은 꼭 알렉산더에게 전해주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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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트비히 4세의 아버지[2] 폴란드 귀족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일인이었다.[3] 다시 말해 현 영국 왕실의 직계 조상 중 한 명이다.[4] 루트비히 2세와 빌헬미네는 사촌이었고, 루트비히 2세가 빌헬미네보다 11살 많았다. 또한 루트비히 2세는 자주 외도를 했다.[5] 아우구스트 폰 그란시 남작. 그란시 가문은 헤센 대공가와 오랫동안 관련됐다. 알렉산더와 마리가 정말 그란시의 아이들이라면 불가리아, 독일, 루마니아, 세르비아, 스페인, 스웨덴, 영국, 러시아의 군주가 그의 후손이 된다.[6] 하지만 화려한 황궁과는 다르게 러시아 제국은 당시 심각한 가뭄이 들어 나라 전체가 힘든 상황이었다. 굳이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제국은 황실과 귀족들의 삶만 화려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는 시기가 대부분이었다.[7] 훗날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된다. 자식이 없던 그녀는 조카이자 그리스의 올가 왕비의 동생인 베라 여대공을 키웠다.[8] 니콜라이 1세는 올가 여대공을 오스트리아의 스테판 대공과 결혼시키려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외교관들은 니콜라이 1세가 딸을 이용해 헝가리에 영향을 뻗으려고 한다고 여겼다.[9] Major General. First guards division[10] 후에 보론초프 공[11] 개인 의사, 개인 집사와 하인, 지휘 경험이 없는 두 명의 장교, 12명의 경비병들, 그리고 37마리의 말들 등.[12] 여행 중에 알렉산더는 헤센의 공자보단 러시아 장군의 신분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거의 러시아인처럼 여겼다. 런던을 방문할 때 헤센 대공의 안부를 묻고자 하는 앨버트 공에겐 초대받았지만,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과는 만나지 못했다. 런던에 방문한 알렉산더는 신문들이 빅토리아 여왕의 사생활에 대해서 자유롭게 쓰는 걸 보고 감탄했다.[13] 오빠를 언제나 지지했던 마리도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화를 냈다고 한다. 니콜라이 1세는 루트비히 3세에게 알렉산더가 율리아와의 결혼 계획을 포기할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다름슈타트로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루트비히 3세는 알렉산더와 율리아의 관계가 정말 진지했다고 믿지 않았다.[14] 알렉산더의 이종사촌 조피 대공비의 아들.[1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6남으로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이라는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했다. 2009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온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안나(Geliebter Johann Geliebte Anna)라는 90분짜리 단편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16] 둘째형 카를 공자의 차남으로 프로이센 군에서 복무했다.[17] 조카 루트비히 공자(둘째형 카를 공자의 장남)의 아내.[18] 며느리 헤센의 빅토리아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부인인 율리아 하우케는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 알렉산더 궁전에서 계속 지냈다고 한다. 율리아 하우케마저 사망하자 아들 루트비히는 알렉산더 궁전을 다름슈타트의 은행에 팔았다.[19] 본명은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자(Prince Alexander of Battenberg).[20] Altes Mausoleum 직역하면 옛 영묘.[21] 부부가 함께 묻히는 것이 알렉산더의 유언 중 하나였다.[22] 알렉산더의 부인, 율리아 하우케의 할머니 마리아 살로메 슈베펜호이저는 카롤리네 여백작 밑에서 일했다.[23]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앨리스,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제2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24] 스페인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25]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 1세의 딸. 이탈리아의 엘레나 왕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의 동생.[26] 당연히 둘 다 연애결혼이었고 아내인 빅토리아와 베아트리스 모두 남편보다 신분이 월등히 높았다. 그래도 루트비히와 하인리히 모두 죽을 때까지 아내와 해로했고 아내들도 자신의 신분이 아닌 남편의 신분에 따라 행동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기에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다.[27] 고모부 알렉산드르 2세의 추천으로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 알렉산드르 1세가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알렉산더가 꼭두각시 군주가 되길 원했다. 알렉산더가 불가리아의 힘을 키우려 하자 당시 러시아의 황제이자 바텐베르크 남매들에게 매우 냉정했던 사촌 알렉산드르 3세의 허락을 받고, 친러시아파 군인/정치인들은 1886년에 알렉산더를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풀려난 알렉산더는 러시아와의 갈등을 염려해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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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쳐들어온 친러시아파 군인들이 알렉산더에게 강제로 퇴위 문서에 서명하게 하는 모습.
[28] 충격받은 율리아는 알렉산더가 죽었을 때도 찾아가지 않는 등, 두번 다시 아들을 보지 않았다. 이후 딸 마리의 강력한 설득으로 다시 수도원에서 나와 새로 태어난 손자녀들을 돌보며 살았다. 율리아는 아들 루트비히 부부가 해군 일로 몰타로 자주 떠났는데, 다름슈타트에 남겨진 손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를 열심히 돌봤다. 덕분에 며느리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말에 따르면 너무 오냐오냐해줘서 앨리스가 버릇없어졌다고 한다. 앨리스는 할머니 율리아를 굉장히 사랑했으며 헤센의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율리아가 사망하자 앨리스가 특히 상심했다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