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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踏頓
? ~ 207년
1. 개요
2.1. 오환족 규합
2.2. 원소와 우호
2.3. 조조에 대항
4. 기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기 오환족의 수령으로 요서 오환의 왕을 자칭했던 구력거조카다.


2. 정사[편집]



2.1. 오환족 규합[편집]


어려서부터 기질이 강하여 사나웠고 기민하여 무예가 뛰어난 한편 모략을 잘 꾸몄기에 부족장로들에게서 경외시되어 오환 사람들은 모두 답돈을 흉노선우 묵돌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묵돌이 동호를 멸망시킬 때 도망쳐 나와 오환산 일대에 정착한 것이 오환의 시초였고, 묵돌 이후로 수백년간 흉노에게 종속되어 세금을 바치고 견제를 받던 신세였던 것이 오환의 역사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그에 대한 평가는 꽤 기이한데, 오환에게 강한 자는 일단 존경부터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굳이 답돈을 묵돌에 비유하며 묵돌의 환생이라고 모두가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답돈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구력거가 초평 연간(190 ~ 193년)에 사망하고, 그 아들 누반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답돈은 실질적으로 삼촌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당시 오환족은 후한의 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대부분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주하여 유주 10군에 제각기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나, 후한 말에는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각군의 유력한 족장들은 저마다 자칭하며 세력을 넓히던 상황이었다. 본래 오환교위라는 관직이 따로 있어 이들의 통제를 맡고 있었으나 영제 말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오환교위의 입지도 매우 좁아졌고, 초평 연간 무렵의 오환교위였던 형거는 아예 오환족에게 살해당했으며 오환에게 붙잡힌 포로였던 염유가 오환, 선비의 추대로 오환교위를 자칭했다. 그러나 이때는 사실상 오환 측에서 그를 데려다 자리에 앉힌 꼭두각시인 셈으로, 오환교위로서 염유의 오환에 대한 감시, 통제는 거의 유명무실했다.[1]

답돈의 삼촌인 구력거 이외에도 상곡군의 난루, 요동속국소복연, 우북평군의 오연은 제각기 왕을 자칭하고 있었으나 답돈은 즉위한 이후 이 삼군의 왕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그 무리들은 모두 답돈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답돈이 '무략'이 있어서 삼왕이 모두 복종했다는 서술의 뉘앙스로 봐서는 아마 무력으로 제패했거나 어떠한 공통된 목적이 있어 이를 이루기 위하여 무략이 출중하던 답돈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2.2. 원소와 우호[편집]


건안 초(196~197년 사이로 추정), 원소공손찬이 전쟁을 벌일 때 여러차례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때마침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파견하고 화친을 제의해 원소를 연합하며 공손찬을 격파한다.

그 일로 원소는 황제 헌제의 명령을 위조해 답돈을 오환선우로 임명하고 양림을 사자로 보내 초왕 소복연과 한로왕 오연을 각각 좌,우 선우로 임명하여 답돈을 견제 보좌하도록 했으며, 원씨 일족의 여성을 자신의 양녀로 삼는 형태로 답돈에게 시집보내 답돈을 사위로 맞아들인다.

이후 누반이 장성하자 소복연과 오연 등은 누반을 선우로 추대하였다. 어찌 보면 누반을 앞세워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에 답돈은 선우 자리를 순순히 내주고 왕으로 강등되며 한때 힘을 잃는 듯 했으나, 본인의 주도면밀함과 원소의 후원 덕분인지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고 한다.


2.3. 조조에 대항[편집]


이토록 세력이 강하고 원소에게 후대를 받았기 때문에, 원소 사후 그의 아들인 원상원희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답돈에게 의탁하게 된다.(205년) 답돈은 원상을 받아들임은 물론 원상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의 망명 이후 기주 출신을 중심으로 무려 10만 호의 백성들이 오환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에 원상은 상곡군에 주둔하면서 오환의 기병들을 이끌고 유주를 여러차례 침입해 유주 자사를 살해하고 유주 백성 10만 호를 끌고 가는 등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인데, 후한서에 언급된 10만 호 망명과 동일한 사건을 범엽과 진수의 시각 차이로 다르게 적은 것일 가능성도 있고, 후한서 쪽의 10만호가 대체로 기주인 중심인 반면 이쪽은 유주인들이라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침내 207년 8월, 조조는 직접 원정에 나서 답돈의 근거지였던 유성을 공략하게 된다. 여기서 유성은 요서군 유성현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으나 만리장성 밖에 있었다.

본래 조조는 5월에 무종현을 거쳐 진군했지만 장마로 인해 큰 길이 진창이 되고 여러 샛길은 오환군이 먼저 선점하여 단단하게 지키고 있어서 7월까지 유성으로 진군하지도 못한 채 손해를 보며 시간을 끌고 있었으나, 마침 오환을 토벌한다는 소식에 조조에게로 합류한 전주가 20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잊혀져 있던 노룡새의 샛길을 소개하자 이에 따랐고, 군사를 돌려 노룡구로 진입하는 한편 오환군과 대치하던 무종에는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글을 남겨 퇴각하는 척 기만전술을 폈다.

몇 차례의 척후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찾을 수 없자 답돈은 낚여서 정말로 조조가 퇴각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달에 유성에서 불과 2백 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발견되자 그는 경악하여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답돈은 수만 기를 이끌고 원상, 원희, 누반, 능신저지 등과 함께 범성에서 조조를 맞아 싸웠는데, 마침 인근에 있던 백랑산에 올라갔다가 우연히도 조조와 직접 마주쳤다.

이때 조조가 이끌던 군대는 본대와 떨어진 소수 병력으로 오환군에 비해 확연히 적어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장료는 기백을 떨치며 맞서 싸울 것을 권했다. 저지대에 있던 답돈군이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본 조조는 장료를 선봉에 세워 답돈군을 격파했고, 답돈 본인은 조순 휘하의 기병들과 싸우다가 붙잡여 참수되었다. 우연히, 혹은 갑작스럽게 오랑캐들과 조우했다는 무제기와 장료전의 표현이나 조조가 고지에서 살펴보니 오랑캐들은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오환전의 표현을 보면 조조에게는 물론 답돈에게도 예상치 못한 조우전이었던 것 같으며 양군 수장들이 한판 싸움에 앞서 현장을 시찰하다가 벌어진 일로 여겨진다. 영웅기에 의하면, 조조는 여기서 답돈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수장이 살해되자 범성의 오환군 또한 대혼란에 빠져 붕괴되었다. 그들은 이어진 조조군의 공격에 의하려 말살되었고 들판이 시체로 뒤덮였다고 한다. 이에 원상은 누반 등 삼군오환의 선우들을 이끌고 달아나 요동공손강에게로 망명했으나 곧 공손강에 의하여 살해당하여 조조에게 수급이 보내졌다. 조조는 오환족을 재차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주시켜 기병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조조의 북방 정벌이 흔히 삼국지연의에서의 비중으로 원소 토벌전에 부속된 잔당 사냥쯤으로 치부되나 사가들은 조조의 오환 토벌이 후한말 북방민족의 세를 크게 꺾어논 업적이라 평하며 조조의 오환족 토벌이 없었더라면 오호십육국시대가 1세기 더 빨리 도래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답돈은 오환족을 통일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시대 또한 그한테 영 좋지 않았으며 또 충분한 능력이 없어 오호(흉노족, 선비족, 갈족, 강족, 저족)들이 그의 뒤를 이어 영가의 난을 일으켜 위진남북조시대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를 펼쳐나가게 되었다.


3. 연의[편집]


답돈을 비유한 모돈으로 나와 역사처럼 원희, 원상을 받아들였다가 조조군의 공격으로 전사한다.


4. 기타[편집]


2차 고구려-수 전쟁(612년) 때 수나라 좌12군의 이름 중 오환의 답돈과 한자가 같은 답돈도(踏頓道)가 언급된다. 다른 군의 이름들이 지명에서 따온 만큼 답돈이라는 지명이 별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의 인물과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5.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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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염유는 나중에 원소, 조조에게 차례로 줄을 대어 오환교위로서 그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고 정치적, 사회적인 입지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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