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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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
永嘉之亂

시기
308년 ~ 316년
장소
중원 일대
원인
팔왕의 난 이후 진나라의 세력 쇠퇴
교전
진(晉)
한(漢)
지휘관
회제 사마치†
민제 사마업†
광문제 유연
소무제 유총
장수
왕연
사마월
유곤
구희
사마단†
가필
탁발의로
왕준†
배헌
조염
사마모
사마확†
사마보
사마전†
이구
이운†
국윤
위준
노충†
양위†
탁발육수†
탁발보근†
유연†
범반
유요
유찬
석륵
왕미
조억
호연안
유영†
기무달(綦毋達)
왕상†
장봉
조고
유경
유려†
호연랑†
유아
근충
복후
유풍
형연†
은개†

결과
진나라의 북방 영토 상실과 남천(南遷)
영향
오호십육국시대 도래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절정
5. 결말
6. 한국사
7. 언어학적 의의
8. 기타



1. 개요[편집]


永嘉之亂

중국 서진 말기, 북방의 이민족들인 오호(五胡)에 의해 일어난 대침공을 지칭한다. 중국 한족 역사상 정강의 변, 토목의 변과 함께 3대 굴욕으로 손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역사적 여파를 미쳤다. 영가의 난이라는 것은 이 난이 진회제(懐帝) 사마치(司馬熾)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연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까지로 보지만, 넓게는 흉노유연에 의한 전조의 건국부터 서진의 멸망까지를 영가의 난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게르만족대침입서로마 제국멸망의 과정과도 닮은 점이 많다. 다만 서로마 제국은 분할 전부터 몇세기간 쌓여온 문제점들로 인해 서서히 약해지다가 망한 것과는 달리 영가의 난은 이전 시대들이 촉발한 문제점들이 없는건 아니나 근본적으로 팔왕의 난이라는 대사건으로 국력과 지방 통제력이 바닥을 친 상태에서 벌어진 사건이며 때문에 영가의 난은 10년도 안 돼서 서진을 끝장낸 반면 서로마 제국은 수십년은 존속했다.


2. 발단[편집]


진혜제(恵帝) 사마충(司馬衷)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화북(華北)지역은 큰 혼란에 빠지며 많은 수의 유민(流民)이 각지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고, 과거 한나라 시대 이후 중원에 들어와 살고 있었던 새외민족들에게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사마영이 무력화되자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1]을 본거지로 삼으며,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올랐다.

또한 한나라 때 내려진 유씨 성에 의거해 한왕(漢王)을 칭했다. 이 나라는 후에 (趙)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산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 하북성산동성도 지배하에 두었다.


3. 전개[편집]


팔왕의 난이 수습되었을 때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사마월은 예장왕 사마치를 황제(진회제)로 세우고,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307년 회제의 조서를 빙자해 스스로 승상이 되었으며, 308년 유폐된 청하왕 사마담을 죽이고 회제의 친족과 측근들을 숙청하면서 인망을 잃었다. 유연의 아들인 유총이 침공해오자 동해왕 사마월은 허창에 주둔하여 군대를 불러모았는데 회제는 이를 기회라고 판단[2], 대장군 구희에게 밀서를 보내 동해왕 사마월을 주살하려고 했다.

정작 밀서를 전달하는 자가 사마월에게 체포되어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사마월은 온 힘을 다해 국가의 혼란을 수습한 자신을 살해하려 든 회제의 처사에 격노하다가 분사(憤死)해버렸고[3], 구심점을 잃은 서진 왕조의 중앙 정부는 빠르게 붕괴되었다. 결국 사마월 사망 직후인 311년 4월,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 왕연(王衍)이 동해왕의 영구를 장지로 운반한다는 것을 구실로 황족, 귀족, 정예병사를 포함해 무려 약 10만 명을 이끌고 사실상 낙양에서 도망쳐버렸다.

이 도망 행렬은 고현 영평성에서 경무장 기병을 이끌고 온 석륵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격파되었고 왕연과 서진 왕조의 친왕을 포함한 48명의 고위직들이 모조리 포로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모두 살해당했다.

문제는 석륵에게 격파당한 부대는 낙양과 주변 지역을 방위할 주력군이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낙양이 포위당하고 사태가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제 사마치는 각 지방의 지원군으로 낙양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전국으로 파견된 사신 상당수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히거나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어도 각지를 장악한 황족이나 호족들은 팔왕의 난과 동해왕 사마월의 분사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사라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지원군을 보낼 처지가 못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결국 단 1명의 지원군도 낙양으로 보내지 않았다.


4. 절정[편집]


서진 시기 북방 이민족 분포도


민족
흉노
갈족
선비족[4]
저족
강족[5]
노수호
오환족
파인
고구려인[6]

파일:서진시기북방객족분포도.png
311년의 상황. 낙양(▣)이 이민족에게 완전 포위된 상태.[7][8]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석륵(石勒)과 유요(劉曜), 왕미(王彌)의 군대를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유총은 과거 낙양을 한번 공략했다가 실패한 바 있어 이미 310년 10월부터 낙양 주변의 교통망을 철저하게 차단시켜 낙양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회제 사마치는 이 시점에서야 탈출을 결심했으나 육로는 차단당하고, 수로는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당해 남은 배도 유총에 의해 모두 불타버려 빠져나갈 방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311년 5월, 결국 낙양성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서진군은 유총을 비롯한 전조의 주요 인물들이

12번의 전투를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란 언급을 할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으나, 이미 뒤집힌 전세를 어쩌지 못한 채 불과 1개월도 못 된 6월경에 낙양성이 함락되었다.

황태자이며 회제의 조카인 사마전을 포함한 30,000명이 살육되었고, 후한말 동탁의 낙양대겁탈 이래 다시 재건되었던 낙양은 약탈과 방화로 또다시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이때 궁전이 있는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왕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낙양을 깨끗이 태워버렸다.[9]

회제는 체포되어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10]으로 연행되었다. 312년 유총은 회제를 회계공에 봉했는데 그를 연회에 초대했다. 사실 유총과 회제는 회제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총은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는데 313년 황실의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노예 복장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들고 관리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왕준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고 말았다. 이것이 폭군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하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주군이었던 사마치에게도 옮겨붙어 결국 313년 봄에 회제는 독살당했다. 그리고 유총이 사마치에게 하사했던 첩은 도로 회수.(...) 줬다 뺏기 여기까지가 좁은 의미의 영가의 난이다.


5. 결말[편집]


장안은 유총이 점령했지만 잠시 흉노의 내분을 이용해 312년 가필, 국윤, 삭침(索綝)이 탈환했기 때문에 사마업은 그 곳에 본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312년 가을 염정과 가필은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313년 여름에 장안에서 진민제(閔帝) 사마업(司馬鄴 혹은 司馬業)이 옹립되었으나, 서진은 이미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으로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전란으로 장안은 총 가구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고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넉 대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민제의 통치 범위는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하여 사실상 지방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업은 이미 죽은 동해왕 사마월의 조카인 사마보[11]진주(秦州)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남양왕에 봉했으며, 사마의의 5남 사마주의 손자인 사마예가 장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낭야왕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314년경 관동을 차지한 전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나마 양주자사였으며 나중에 세워진 전량의 태조로 추증된 인물인 장궤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와주어서 수비가 가능했다. 315년 사마보는 사마업을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삭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12]

결국 최후의 발버둥을 쳤지만 멸망은 피할 길이 없었으며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의 침공을 개시했다. 대도독 국윤이 항전했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면서 빙익군, 북지군을 차례로 빼앗겼고, 위수 이북의 성채들도 모두 유요군에게 점령당했다. 화집이 이끄는 관서 7군의 구원군이 도착했지만 막상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고, 유요는 장안의 외성을 점령했다.

국윤 등은 장안의 소성으로 들어가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시키니, 기근이 더욱 심해져 쌀 한 말이 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내성도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누룩죽으로 연명하던 민제 사마업은 항복을 결심해 윗도리를 벗고, 전국옥새를 차며, 입에는 벽옥 구슬을 물고,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 고대 중국의 항복 의식을 수행하면서 투항했다. 그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유총은 사마업을 맞이해 광록대부로 삼고, 회안후(懷安侯)에 봉했다. 그리고 사마업을 위해 통곡하다가 옥에서 자결한 국윤을 추증하고, 항복한 색침은 오히려 불충하다며 저잣거리에서 참하였다.

항복한 사마업은 유총의 장난감으로 전락하였다. 한번은 소무제 유총이 투항한 진나라 신하들의 의중을 시험하고자 술자리에서 사마업으로 하여금 신하들에게 술을 돌리고 술잔을 씻게 하였다. 황제였던 자가 과거의 신하들에게 술을 따르는 이런 수모에 대부분은 눈물을 흘렸고, 그 중 진나라의 상서랑이었던 신빈은 참다 못 해 자리에서 일어나 사마업을 붙들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이를 본 유총이 말했다.

"일전에 유민(庾珉)의 무리를 주살한 것이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했나 보구나!"

그리고 신빈을 끌어내 참수하였고, 사마업 또한 이 일이 있은 후 경계 대상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총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멀리 장강 너머 강남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은 사마예동진을 수립해서 대를 이었다. 한편 영가의 대란으로 한족은 중원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며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6. 한국사[편집]


한국사에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초기 고구려의 영역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이었지만 통일제국 서진이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진 이 영가의 난 시기를 전후해서 미천왕이 313년 서안평, 낙랑군, 314년 대방군 등을 점령했다, 이후 광개토대왕모용선비족의 후연을 정벌하고 요동까지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철을 화폐 대용으로 삼아 낙랑군에서 선진 문물들을 도입해 백제, 신라에도 뒤지지 않았던 가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어 삼국시대의 형세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7. 언어학적 의의[편집]


역사비교언어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영가의 난은 중국어의 역사에 있어서 상고한어중고한어를 가르는 중요한 시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 북부에서 쓰이는 관화가 중국 남부의 중국어 '방언'들과 크게 달라지게 된 첫 계기로 꼽힌다.

일본의 언어학자인 하시모토 만타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광동어민남어, 월어 등의 여러 중국어 방언들은 한자의 독음 방식이 한국식 한자어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이는 영가의 난을 계기로 대거 발생한 한족 이주민들의 영향으로 인해, 발음이나 어휘 면에서 보수적인 경향이 크게 나타난 결과로 추정된다. 문법 면에서도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나는데, 이 역시도 영가의 난으로 인해 남부 지역의 중국어 화자들에게서 상고한어의 흔적이 크게 남은 결과로 보여진다.[13]


8. 기타[편집]


중앙아시아 상인들의 기록에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나온다. 1907년 영국의 스타인은 돈황 부근의 봉수대에서 중국에 파견된 소그드인 상인 나나이 반닥이 사마르칸트의 고용주에게 보낸 서신을 발견했는데, 서신에는 장사에 관한 내용과 별개로 '훈족'의 침입으로 중국의 도읍이 불타고 황제가 피신했다라는 내용이 나왔다. 이 서신이 쓰여진 시기상 이것이 영가의 난일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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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산서성 이석현(離石縣)[2] 지방의 군대를 중앙에 불러들였을 때 이를 정변에 동원하는 것은 예로부터 자주 있었다. 10년 전 팔왕의 난 때도 그랬고 100년 전 십상시제거하려 할 때도 그랬다.[3] 그러나 사마월이야말로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 등 주요 팔왕 당사자들 사이에 권력을 잡으려던 기회주의자로 팔왕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라 당시 서진의 혼란 상당수는 그가 만든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는 사마월의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4] 붉은 글씨 왼쪽부터 독발선비, 걸복선비, 탁발선비, 우문선비, 단선비, 모용선비[5] 붉은 빗금은 토욕혼. 군주가 모용부 선비족이기 때문에 빗금칠되었다.[6] 비류수 전투에서 관구검에게 잡힌 고구려인 포로들이 형양에 모여 생활했다. 그 외에도 285년에 모용부 선비족의 습격으로 포로가 된 부여인도 있었다.[7] 고구려인처럼 세력이 작은 이민족의 경우, 무제 사마염의 이민족 유지 정책에 따라 그곳에 정착해 살게 한 것으로, 정치•군사적 능력은 거의 없었다. 낙양 포위에 큰 의미는 없고, 대륙 북방을 잠식한 선비족의 모습에 주목하면 된다.[8] 고구려가 중국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난 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광범위하게 정복해가며, 한반도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 이민족들을 복속시켜나갈 때였다. 영가의 난 전후만 하더라도 고구려는 다른 이민족들에 비해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9] 그러나 왕미도 잘한 것이 없는 것이 비록 낙양을 태웠지만 나름의 군기를 유지한 흉노족보다 오히려 약탈이 극심한 부대는 흉노에 투항한 그의 한족 군대였다. 이들은 낙양이 폐허가 되기 전 민가를 약탈하고 서진의 역대 황릉들을 철저하게 도굴해 부장품들을 챙기고 파괴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낙양에 있는 서진의 황릉은 어느 것이 사마의의 것인지, 어느 것이 사마염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를 유요가 말릴 정도였으니 극심했을 것이다.[10] 현재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11] 사마보의 아버지 남양왕 사마모는 형제인 사마월을 배신하고 관중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웠으나, 영가 5년(311년)에 살해되었고, 아들인 사마보가 남양왕의 자리를 계승했다.[12] 결국 사마보는 대흥 2년(319년) 4월에 독자적으로 진왕이라 칭했다. 하지만 다음해 3월 사마보는 부장이었던 장춘, 양차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세력은 장궤의 아들 장식유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13] The Phonology of Ancient Chinese (1978, 1979), 2 vols., Institute for the Study of Languages & Cultures of Asia & Af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