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답돈 (문단 편집) === [[조조]]에 대항 === 이토록 세력이 강하고 원소에게 후대를 받았기 때문에, 원소 사후 그의 아들인 [[원상]]과 [[원희]]는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답돈에게 의탁하게 된다.(205년) 답돈은 원상을 받아들임은 물론 원상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의 망명 이후 [[기주]] 출신을 중심으로 무려 10만 호의 백성들이 오환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에 원상은 상곡군에 주둔하면서 오환의 기병들을 이끌고 유주를 여러차례 침입해 유주 [[자사(관직)|자사]]를 살해하고 유주 백성 10만 호를 끌고 가는 등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인데, [[후한서]]에 언급된 10만 호 망명과 동일한 사건을 범엽과 [[진수(서진)|진수]]의 시각 차이로 다르게 적은 것일 가능성도 있고, 후한서 쪽의 10만호가 대체로 기주인 중심인 반면 이쪽은 유주인들이라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침내 207년 8월, 조조는 직접 원정에 나서 답돈의 근거지였던 유성을 [[유성 원정|공략]]하게 된다. 여기서 유성은 요서군 유성현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으나 만리장성 밖에 있었다. 본래 조조는 5월에 무종현을 거쳐 진군했지만 장마로 인해 큰 길이 진창이 되고 여러 샛길은 오환군이 먼저 선점하여 단단하게 지키고 있어서 7월까지 유성으로 진군하지도 못한 채 손해를 보며 시간을 끌고 있었으나, 마침 오환을 토벌한다는 소식에 조조에게로 합류한 [[전주(삼국지)|전주]]가 20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잊혀져 있던 노룡새의 샛길을 소개하자 이에 따랐고, 군사를 돌려 노룡구로 진입하는 한편 오환군과 대치하던 무종에는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글을 남겨 퇴각하는 척 기만전술을 폈다. 몇 차례의 척후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찾을 수 없자 답돈은 ~~낚여서~~ 정말로 조조가 퇴각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달에 유성에서 불과 2백 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발견되자 그는 경악하여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답돈은 수만 기를 이끌고 원상, 원희, 누반, [[능신저지]] 등과 함께 범성에서 조조를 맞아 싸웠는데, 마침 인근에 있던 백랑산에 올라갔다가 우연히도 조조와 직접 마주쳤다. 이때 조조가 이끌던 군대는 본대와 떨어진 소수 병력으로 오환군에 비해 확연히 적어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장료]]는 기백을 떨치며 맞서 싸울 것을 권했다. 저지대에 있던 답돈군이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본 조조는 장료를 선봉에 세워 답돈군을 격파했고, 답돈 본인은 [[조순(후한)|조순]] 휘하의 [[기병]]들과 싸우다가 붙잡여 참수되었다. 우연히, 혹은 갑작스럽게 [[오랑캐]]들과 조우했다는 무제기와 장료전의 표현이나 조조가 고지에서 살펴보니 [[오랑캐]]들은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오환전의 표현을 보면 조조에게는 물론 답돈에게도 예상치 못한 조우전이었던 것 같으며 양군 수장들이 한판 싸움에 앞서 현장을 시찰하다가 벌어진 일로 여겨진다. [[영웅기]]에 의하면, [[야 신난다|조조는 여기서 답돈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수장이 살해되자 범성의 오환군 또한 대혼란에 빠져 붕괴되었다. 그들은 이어진 조조군의 공격에 의하려 말살되었고 들판이 시체로 뒤덮였다고 한다. 이에 원상은 누반 등 삼군오환의 선우들을 이끌고 달아나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망명했으나 곧 공손강에 의하여 살해당하여 조조에게 수급이 보내졌다. 조조는 오환족을 재차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주시켜 기병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조조의 북방 정벌이 흔히 삼국지연의에서의 비중으로 원소 토벌전에 부속된 잔당 사냥쯤으로 치부되나 사가들은 조조의 오환 토벌이 후한말 북방민족의 세를 크게 꺾어논 업적이라 평하며 '''조조의 [[오환족]] 토벌이 없었더라면 [[오호십육국시대]]가 1세기 더 빨리 도래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답돈은 오환족을 통일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삼국시대(중국)|시대 또한 그한테 영 좋지 않았으며]] 또 충분한 능력이 없어 [[오호]]([[흉노족]], [[선비족]], [[갈족]], [[강족]], [[저족]])들이 그의 뒤를 이어 [[영가의 난]]을 일으켜 [[위진남북조시대]]의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를 펼쳐나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