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강황귀비 타타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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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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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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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광서제의 후궁
단강황귀비 | 端康皇貴妃

파일:단강황귀비.jpg

생몰년도
1873년 1월 15일 ~ 1924년 9월 24일(51세)
시호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지위
근(瑾)빈 ⇒ 근비 ⇒ 근귀인 ⇒ 근비 ⇒ 황고근귀비(皇考瑾貴妃) ⇒ 단강황귀태비(端康皇貴太妃)

타타랍씨
가계
부친 예부시랑 장서(長敍)
동생 각순황귀비
부군
광서제
자녀
슬하 자녀 없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후궁이다.

2. 생애[편집]


그녀는 16세 시절이던 1889년 3년마다 자금성에서 열리는 수녀선발에 동생과 응시해 합격했고, 후궁으로 들어가 근빈이 되었다. 광서 20년(1894년) 서태후의 대수(60세) 제전에서 근비로 진봉되었다. 이후 동생 진비가 서태후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근귀인으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근비로 복귀하였다.

선통제 즉위 후 근귀태비에 존봉되었다. 선통제 퇴위 후 청 황실로부터 단강황귀비의 휘호를 받았다. 융유황태후 사후 친정이 위안스카이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에 4태비 중 주도적 지위에 올라 자금성의 안살림을 관리하였다. 부의(선통제)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 의하면, 소년 시절 부의의 생활에 간섭했기 때문에 어려운 존재였던 것 같다. 부의의 황후 선정에 깊이 관여해 부의의 고집을 꺾었다고 한다[1].

1912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며 청나라가 멸망하자 중화민국 즈리 성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펑톈으로 퇴출 추방되었다가 1917년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에 귀환하였지만 1920년에는 만성 폐렴에 걸려 투병. 4년 후 1924년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징 자금성 영화궁에서 향년 51세로 훙서(薨逝)하였다. 곧이어(같은 해 11월 5일) 펑위샹은 청황실 우대조건을 파기하고 부의와 완용 등을 자금성에서 쫓아냈다. 이후 숭릉비원침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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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의의 대혼을 앞두고 단강태비는 완용을, 동치제의 후궁인 헌철황귀비 혁사리씨는 문수를 황후로 밀었는데, 부의는 문수를 황후로 선택했다. 이에 단강태비는 끈질기게 부의를 설득했고 결국 완용이 황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