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 전투

최근 편집일시 :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제갈량의 북벌

1. 개요
2. 기록
2.3. 『한진춘추』
2.5. 『수경주』
2.6. 『개원점경』
2.7. 『원화군현도지』
3. 기록 분석
3.1. 배경
3.2. 상규 대치
3.3. 기산 전투
3.3.1. 노성 전투
3.4. 촉한군 철수
3.5. 결말
4. 사료 비판
5. 평가
5.1. 제갈량에 대한 평가
6. 여담
6.1. 곽충오사
6.2. 위연의 승진?


1. 개요[편집]


노성 전투는 231년(위나라 태화 5년, 촉한 건흥 9년) 제갈량의 4차 북벌 중에 벌어진 전투이다.

영문위키의 경우 Battle of Mount Qi, 즉 기산(祁山) 전투라 나온다.

본 문서에서는 이 전투를 전후로 농우(隴右) 지방에서 진행된 제갈량의 4차 북벌 전역(戰役) 전체의 전개 과정을 다룬다.


2. 기록[편집]



2.1. 『삼국지』[편집]


서진진수(233~297)가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용문은 150여년 후 유송배송지(372~451)가 덧붙인 주석이다.

3월, 대사마 조진이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이 천수(天水)로 침공하였으므로 대장군 사마선왕(사마의)에게 조칙을 내려 막도록 했다. 지난해 겨울 10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9일에 비를 기원하는 성대한 행사를 거행했다.

여름 4월, 선비(鮮卑) 부의왕(附義王: 이민족 수장에게 수여하는 특수 작위 솔중왕의 일종) 가비능(軻比能)은 그들의 부족 사람과 정령(丁零) 대인(大人: 부족의 실력자) 아선(兒禪)을 인솔하여 유주에 도착하여 좋은 말을 바쳤다. 다시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 남흉노 등 병주 일대 이민족을 징병하는 책임관)을 설치했다.

가을 7월, 6일에 제갈량이 퇴각하여 도주하자,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다.

처음에 제갈량(亮)이 출정했을 때, 대부분 제갈량의 군대에는 짐이 없고 군량미도 제공받을 수 없으니, 그를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므로 군사들을 수고롭게 출동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상규(上邽) 부근의 보리를 베어 버려 제갈량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명제(조예)는 모두 듣지 않았다. 다만 앞뒤로 군대를 파견하여 선왕(사마의)의 군대를 증원하고 칙령을 내려 보리를 감시하도록 하며, 이 보리에 의지하여 군대의 식량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위서』

권3 「명제기」 태화 5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제장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해 약양(略陽: 광위군 약양도)에 도착했다.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해 목문(木門)에 이르렀는데, 제갈량군과 교전하다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죽었다.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사마의)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軍法: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위략』

권17 「장합전」


견초는 촉로(蜀虜: 촉한)의 제갈량(諸葛亮)이 수차례 출병하였고 가비능이 교활(狡猾)하므로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으니 표문을 올려 이를 방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의논하는 자들은 제갈량과 가비능이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때마침 제갈량이 당시 기산(祁山)에 있었는데 과연 사자를 보내 가비능과 연결하였다.

가비능이 옛 북지(北地)의 석성(石城)에 도착해 서로 호응했다. 그러자 황제가 견초에게 조서를 내려 편의(便宜)에 따라 그를 치도록 하였다. 당시 가비능은 이미 사막 남쪽으로 돌아간 뒤였으니 병주자사 필궤(畢軌)와 함께 의논하며 말했다.

권26 「견초전」


5년(231) 촉나라가 노성(鹵城)을 공격하러 나갔다. 이때 농우(隴右)에는 식량이 없었으므로, 관중(關中)에서 대량 수송해 오도록 상의했다. 곽회는 위임과 은혜로써 강(羌)과 호(胡) 사람을 어루만지며, 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고, 공평하게 수송 노역을 할당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식량은 충분했다.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전임되었다.

권26 「곽회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魏)의 사마의와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가을 8월, 도호(都護) 이평(李平: 이엄이 개명한 이름)이 자동군(梓潼郡)으로 폐사(廢徙: 관직을 폐하여 유배함)되었다.

권33 「후주전」 건흥 9년(231)


건흥 9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권35 「제갈량전」


9년(231) 봄에 제갈량의 군대는 기산(祁山)에 주둔하였고, 이평(이엄)이 수송 업무를 재촉하며 감독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으므로, 이평은 참군(參軍) 호충(狐忠)과 독군(督軍) 성번(成藩)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량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였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퇴군을 하였다. 이평은 군대가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놀란체 하며 말했다.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

이평은 이렇게 하여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고 제갈량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이에[於是] 유선에게 표문을 올려 말했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평이 앞뒤로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했으므로, 이평의 잘못은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평은 힘껏 변명하다 죄를 자백하고 사죄했다.

권40 「이엄전」


건흥 9년(231),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南圍]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사마의)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권43 「왕평전」



2.2. 『화양국지』[편집]


동진상거(291~361)가 영화 연간(345~356)에 저술한 익주 지방의 지리서이다.

건흥 9년(231) 봄, 승상 제갈량은 다시 출병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를 이용해 수송하였다.

참군 왕평에게 남쪽을 포위하고[南圍] 지키게 하였다.

사마선왕(사마의)이 제갈량을 막고, 장합이 왕평을 막았다.

제갈량, 병량의 운반이 원활치 못함을 걱정하고 세 가지 책략을 세워 도호 이평(이엄)에게 알려 말하기를,

"상책은 적의 퇴로를 끊는 것이다. 중책은 적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이다. 하책은 귀환하여 황토(黃土: 익주를 지칭하는 듯)에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사마선왕 등 위군의 병량도 역시 다하였다.

한여름(5월), 비가 내렸다. 이평은 조운이 막히는 것을 (이로써 병량 수송이 곤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어 밝히기를 군을 정비해서 귀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6월, 제갈량은 이평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퇴하였다. 장합은 청봉(靑封)까지 진군하여 교전하다가 제갈량에게 죽었다.

8월, 제갈량이 한중에 귀환했다. 이평은 제갈량에게 병량 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책망당할까 두려워하여, 독운령인 잠술을 죽이려 하였다.

(또한 이평은) 두려워하며 제갈량에게 왜 돌아가는지 물었다. 또한 후주(유선)에게 표문을 올려, 제갈량이 일부러 퇴각했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노하였고, 이에 상표하여 이평을 폐하여 서민으로 삼아 자동으로 유배 보냈고, 이평의 자식 이풍의 병사를 빼앗고 종사중랑으로 삼아, 장사인 장완과 더불어 거부(居府: 승상부)의 일을 맡게 하였다.

권7 「유후주지」



2.3. 『한진춘추』[편집]


동진습착치(?~384?)가 쓴 역사서로, 아래의 기사는 배송지(372~451)가 『삼국지』 「제갈량전」에 인용한 대목이다.

해석 1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北地) 석성(石城)에 이르러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이때 위(魏) 대사마 조진(曹眞)이 병이 들어, 사마선왕(사마의)이 형주에서 돌아와 입조했다. 위(魏) 명제(明帝: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張郃), 비요(費曜), 대릉(戴陵), 곽회(郭淮) 등을 이끌게 했다.

선왕은 비요와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상규(上邽: 천수군 상규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祁山)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雍: 부풍군 옹현)·미(郿: 부풍군 미현)에 주둔시키려 하자 선왕이 말했다.

“전군(前軍: 선봉)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기원전 196년에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초(楚: 초왕 유교)의 3군이 경포(黥布: 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공세를 멈추고[留攻], 자신이 상규에서 선왕에 맞서려[逆]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선왕과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사마의가)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선왕이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鹵城)에 도착했다. (당초)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멀리 와서 우리에 맞서서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보아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기산에서는 대군이 가까이 도착했음을 알고 민심이 자연 안정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병(奇兵: 유격대)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선왕이 이에 따르지 않았기에[宣王不從], 제갈량을 뒤쫓은 것이다[故尋亮]. (노성에)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賈栩), 위평(魏平)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선왕은 이를 괴롭게 여겼다[宣王病之].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南圍] 무당감(無當監) 하평(何平: 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中道)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병사의 수급[甲首] 3천, 철갑옷[玄鎧] 5천 벌[領], 각노(角弩) 3,100장(張)을 노획했다. 선왕은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해석 2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을 부르자, 가비능 등은 제갈량에게 호응해[應] 옛 북지군(北地)의 석성(石城)에 이르렀다.

이때 위(魏) 대사마 조진(曹眞)이 병이 들어, 사마선왕(사마의)이 형주로부터 입조했다. 위(魏) 명제(明帝: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소.”

이에 (사마의를) 서쪽으로 보내 장안에 주둔하며 장합(張郃), 비요(費曜), 대릉(戴陵), 곽회(郭淮) 등을 독하게[督] 했다.

선왕은 비요와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상규(上邽: 천수군 상규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祁山)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雍: 부풍군 옹현)·미(郿: 부풍군 미현)에 주둔시키려 하자 선왕이 말했다.

“전군(前軍: 선봉)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기원전 196년에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초(楚: 형왕(荊王)[1]

유고(劉賈))의 3군이 경포(黥布)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한서·형왕고전]

그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기산에) 남아서 공격하게 하고[留攻], 직접 상규에서 선왕과 맞서려[逆]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제갈량을) 요격하였는데, 제갈량은 이를 격파하고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선왕과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사마의가)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선왕은 제갈량의 뒤를 쫓아[尋] 노성(鹵城)에 도착하였는데,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멀리 와서 우리에 맞서서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보아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기산에서는 대군이 가까이 도착했음을 알고 민심이 자연 안정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병(奇兵: 유격대)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선왕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일부러[故][통감음주1]

(제갈량의) 뒤를 쫓았다[尋].[통감음주2] (뒤를 쫓다가 기산에) 도착하여[既至]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賈栩), 위평(魏平)은 여러 차례 전투를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선왕은 이를 괴로워하였다[病之].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자, 5월 신사일, 장합에게 포위망 남쪽 둔영[南圍][통감음주3]

의 무당감(無當監) 하평(何平: 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中道)를 따라[按]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병사의 수급[甲首] 3천, 철갑옷[玄鎧] 5천 벌[領], 각노[角弩] 3,100장[張]을 노획했다. 선왕은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원문

漢晉春秋曰:亮圍祁山,招鮮卑軻比能,比能等至故北地石城以應亮。於是魏大司馬曹真有疾,司馬宣王自荊州入朝,魏明帝曰:「西方事重,非君莫可付者。」乃使西屯長安,督張郃、費曜、戴陵、郭淮等。宣王使曜、陵留精兵四千守上邽,餘眾悉出,西救祁山。郃欲分兵駐雍、郿,宣王曰:「料前軍能獨當之者,將軍言是也;若不能當而分為前後,此楚之三軍所以為黥布禽也。」遂進。亮分兵留攻,自逆宣王于上邽。郭淮、費曜等徼亮,亮破之,因大芟刈其麥,與宣王遇于上邽之東,斂兵依險,軍不得交,亮引而還。宣王尋亮至于鹵城。張郃曰:「彼遠來逆我,請戰不得,謂我利在不戰,欲以長計制之也。且祁山知大軍以在近,人情自固,可止屯於此,分為奇兵,示出其後,不宜進前而不敢偪,坐失民望也。今亮縣軍食少,亦行去矣。」宣王不從,故尋亮。既至,又登山掘營,不肯戰。賈栩、魏平數請戰,因曰:「公畏蜀如虎,奈天下笑何!」宣王病之。諸將咸請戰。五月辛巳,乃使張郃攻無當監何平於南圍,自案中道向亮。亮使魏延、高翔、吳班赴拒,大破之,獲甲首三千級,玄鎧五千領,角弩三千一百張,宣王還保營。



2.4. 『진서』[편집]


646년 당태종의 명령으로 방현령 등이 편찬해 648년에 완성한 역사서로, 편찬 당시 남제의 장영서(臧榮緖)가 편찬한 『진서』를 저본으로 하였다.

이듬해(231년), 제갈량이 천수(天水)를 침범하고 기산에서 장군 가사(賈嗣), 위평(魏平)을 포위했다. 천자가 말했다, “서쪽에 일이 생기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만한 자가 없소.”

그리고는 선제(宣帝: 사마의)를 서쪽으로 가서 장안에 주둔케 하고 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2]

로 임명했다.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 정촉호군 대릉, 옹주자사 곽회 등을 거느리고 제갈량을 공격했다.

장합이 선제에게 권하길 군대를 나누어 옹(雍: 부풍군 옹현)·미(郿: 부풍군 미현)에 주둔시켜 후진(後鎭)으로 삼자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전군(前軍: 선봉)이 단독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고 헤아린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군을 앞뒤로 나눈다면 이는 바로 초(楚: 초왕 유교)의 삼군(三軍)이 경포(영포)에게 격파당한 원인이었소.”

그리고는 유미(隃麋: 부풍군 유미현)로 진군했다.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兼] 행군[行]하면 충분하오.”

그러고는 갑옷을 벗고[卷]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

선제가 공격하여 그 포위한 것을 무너뜨리니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거나 참수한 것이 만을 헤아렸다[俘斬萬計].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封邑)을 늘려주었다.

권1 「선제기」



2.5. 『수경주』[편집]


祁山在嶓之西七十許里,山上有城,極為巖固。昔諸葛亮攻祁山,即斯城也。漢水逕其南,城南四里有亮故壘,壘之左右猶豐茂宿草,蓋亮所植也,在上邽西南二百四十里。

기산은 파총산 서쪽 70여 리에 있다. 산 위에는 성이 있는데 매우 엄고(巖固)하다. 과거 제갈량이 공격한 기산은 즉 이 성(기산 위에 있는 성)이다. 한수(漢水)는 기산성 남쪽을 지나는데, 성 남쪽 4리에는 제갈량의 고루(故壘)가 있다.

20권 양수(漾水)



2.6. 『개원점경』[편집]


당나라 개원 연간(713~741)에 고대 천문 관측과 점술 기록 등을 모아 편찬한 역서(曆書)이다.

(태화) 5년 3월, 촉 유승(유선)이 승상 제갈량에게 5만 명을 이끌고 천수를 침입하게 하여, 장군 가씨와 위씨를 공격했다. 부거기장군(副車騎將軍) 서(舒) 등 3만여 명이 이를 토벌해, 3만여 명을 참수하였고 1만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詩曰月離於畢俾滂沱矣謂大雨也

春秋緯考異郵曰月失行離於畢則雨

蔡氏月令章句曰月離者所歴也

班固天文志曰月入畢則多兩

郗萌曰月入畢其國君大憂又曰兵起期一年先起兵者有破亡又曰與兩股齊近期二十日逺期六十日有將死

劉向洪範傳曰月入畢中將若相有一家事坐罪者近期百二十日逺期十月一曰國有反臣

郗萌占曰月犯畢兵革起一曰有女喪一曰女主當之

按魏太和四年二月丁未月加午在畢大星四寸
其五年十二月丁未月犯畢赤星
占曰下犯上貴人諸侯當之又曰有大赦
其五年三月蜀劉升為丞相諸葛亮將五萬人入天水攻將軍賈魏副車騎人將軍舒等三萬餘人討之斬首三萬餘人投降者萬餘
七月乙酉大赦
六年正月甲戌皇女泰薨上及羣臣皆為之服
五月甲戌皇太子殿下薨
十一月壬寅吳越賊將周賀於東莱牟平之內恣殺掠與青州刺史程喜戰射殺周賀斬首四千餘級又生擒八千餘人
青龍元年八月己未大赦
二年三月庚寅故漢帝山陽公崩以天子禮葬之諡曰獻帝
積三年六月應也

13권 月犯畢五



2.7. 『원화군현도지』[편집]


上邽縣,上。郭下。本邽戎地,秦伐邽戎而置縣焉。漢屬隴西郡,晉屬天水郡。後魏以避道武帝諱,改曰上封,廢縣為鎮。隋大業元年複為上邽縣,屬天水郡。武德二年屬秦州。

司馬宣王壘,俗名上募,在縣東二里。魏明帝太和五年,諸葛亮寇天水,詔大將軍拒之,此其壘也。

諸葛亮壘,俗名下募城,在縣東二里。初,亮出,議者或欲自芟上邽左右麥以奪賊食,帝不從,又勒令護麥。及宣王與亮相持,賴此麥以為軍糧。

상규현(上邽縣) ...

사마선왕루(司馬宣王壘). 속명(俗名)은 상모성(上募城)으로, 현(상규현) 동쪽 2리에 있다. 위 명제(조예) 태화(太和) 5년, 제갈량(諸葛亮)이 천수를 침공하자, 대장군[3]

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막게 한 곳이 이 루이다.

제갈량루(諸葛亮壘). 속명은 하모성(下募城)으로 현 동쪽 2리에 있다. 당초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군하자, 의논하는 자(즉 위나라 조정)들 중에서 혹자는 상규 좌우의 보리를 베어 도적(賊)들의 식량을 없애려 하였으나, 황제는 (그 의견을) 좇지 않고 보리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사마선왕과 제갈량이 대치할 때, 이 보리에 의지해 군량으로 삼았다.

29권 진주(秦州)



3. 기록 분석[편집]


파일:노성전투.png
[1] 荊과 楚는 뜻이 통한다. 춘추전국시대의 楚를 荊이라고도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한서·형왕고전] (형왕으로 재위한 지) 6년이 되었는데,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의 형국(荊)을 공격했다. 유고는 경포와 전투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부릉(富陵)으로 달아났다가 경포군에게 살해당했다.(立六年而淮南王黥布反,東擊荊。賈與戰,弗勝,走富陵,為布軍所殺。)[통감음주1] 일부러(有意)를 故라 한다.(有意為之曰故。)[통감음주2] 尋은 따라가며 뒤를 밟는다는 뜻이다.(尋者,隨而躡其後。)[통감음주3] 남위는 촉 병사들이 기산을 포위한 남쪽 둔영을 말한다.(南圍,蜀兵圍祁山之南屯。)[2] 원문은 '都督雍梁二州諸軍事'로 표기하였는데, 양주(梁州)는 촉한 멸망 이후인 263년 12월에 등장하였기에 오기(誤記)이다. 전임자인 조진과 후임자인 조엄 모두 옹량(雍涼) 2주로 쓰인 점을 감안하면 '雍涼'으로 정정하는 것이 옳다.[3] 당시 대장군은 사마의, 즉 사마선왕이었다.

231년에 진행된 제갈량의 북벌 사건에 관한 여러 기록을 통해 주요 전개 과정을 나열하자면, 초기에 제갈량은 천수군 상규현에 주둔하며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다가 사마의의 본대와 조우하자 퇴각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노성 인근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제갈량은 6월에 철수를 결정했다. 따라서 231년의 전역은 아래와 같이 실질적으로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진행되었던 것으로 정리된다.
  • 2월: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고 가비능이 이에 호응함.[4]
  • 3월: 촉한군이 천수군에 진입하였고, 위에서는 사마의를 장안으로 보냄. 가비능은 전선에서 이탈함.
  • 4월: 가비능이 유주에서 위나라에게 말을 조공함.
  • 5월: 기산 인근에서 사마의와 장합이 각각 제갈량과 왕평을 공격함.[5]
  • 6월: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함. 추격대를 이끌던 장합이 목문(청봉)에서 전사함.
  • 7월: 제갈량이 농우(농서) 지방에서 철수하여 위나라에서 논공행상이 치러짐.
  • 8월: 제갈량이 한중에 도착. 이엄이 탄핵당하여 처벌받음.

231년 전역의 전개를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화양국지』 및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인데, 『화양국지』에서는 이평(이엄)의 군량 수송 문제 위주로 기술되어 있고, 『한진춘추』와 『진서』가 서로 충돌하는 점이 많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그 외의 기록들은 내용적으로 위 세 기록보다 명확한 정보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정확한 시점을 기록하지 않고 있으므로 세 기록을 통해 정확한 인과관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준으로 아래의 하위 문단에선 231년 전역의 배경, 상규 대치, 노성 전투, 촉한군 철수, 결말 순으로 각 사료들의 내용을 분석한다.


3.1. 배경[편집]


230년 여름, 위나라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의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추진된 한중공략전은 때마침 내린 큰비로 인해 보급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후퇴하면서 무산된다. 한편 정확한 날짜는 불명이나 제갈량은 230년 모월, 위연오의를 강중에서 진군시켜, 위연은 양계에서 옹주자사 곽회를, 오의는 남안에서 후장군 비요를 대파하고 돌아왔다. 이 작전이 무슨 목적으로 진행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시기상으로 보아 조진의 정촉 이후 아직 후퇴하지 않은 곽회군을 쫓아내려는 목적이거나, 이후에 있을 4차 북벌을 위해 해당 농서지역에서 위나라의 세력을 어느 정도 꺾어보려는 목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공로로 위연은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가절(假節)로 승진하고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으며 오의는 정후(亭侯)가 되었다.

231년 2월, 제갈량은 다시 한번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여 농우 지방을 공략하고 목우(木牛)로 군량을 수송했다. 기산은 228년 첫 북벌 당시에 제갈량이 본진으로 사용했던 곳이며, 2차 및 3차 북벌은 진창성을 공격하면서 거의 동시에 무도군과 음평군을 점령한 행동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이때의 북벌은 228년 가정 전투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본격적인 북벌 작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8년 당시에는 천수군·남안군·농서군·안정군 등의 주민들이 촉한군에 적극 호응했었으나, 231년에는 관련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특히 위나라에서 228년에 4군을 수복한 이후 관련 주민들을 처벌하고 새로 광위군을 편성하는 등의 대응조치를 이미 펼쳤기에, 주민들의 호응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228년과 달라진 점은 당시엔 무인지대였던 무도군·음평군이 촉한의 영역이 되었기에 익주에서 기산까지의 보급로가 확보되었다는 점과, 이번에는 선비(鮮卑)의 가비능을 포섭하여 위나라의 대응을 분산시키려 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실제로 가비능은 촉한에 호응하여 옹주 안정군에 인접한 옛 북지군의 석성에 주둔했다.


3.2. 상규 대치[편집]


제갈량이 천수에 진출하자, 위나라에서는 사마의를 도독옹량주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로 임명해 옹주와 양주(涼州)에 주둔한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고, 이에 따라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 정촉호군 대릉, 옹주자사 곽회 등이 사마의의 직할로 편성되었다. 장합은 촉한군의 후방 기습을 염려하여 사마의에게 관중 부풍군 일대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킬 것을 제안했으나 사마의는 전력 분산을 우려하며 이를 거부했고, 228년 당시엔 조운의 별동대를 보냈던 촉한군 또한 이번에는 관중 방면으로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6] 사마의가 장안을 통과하여 농우 지방으로 진군하는 동안, 제갈량은 천수군 상규현으로 이동했다. 『한진춘추』와 『진서』는 이 시점부터 충돌하고 있다.

『한진춘추』에서는 사마의가 먼저 비요와 대릉에게 병력 4천 명을 맡겨 상규현으로 보내고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는 기산으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상규에서 사마의를 상대하고자 공세를 멈추고 군대를 나눴다. 이후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 등을 격파하고 보리를 수확했다. 이에 사마의가 직접 상규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상규에서 사마의가 교전을 회피하자, 제갈량은 상규에서 물러나 노성 일대의 분대와 합류했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제갈량을 직접 추격하지 말고 별동대를 통해 기산을 위협하는 선에서 대처하는 지구전을 제안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부하고 제갈량을 추격했다. 가허(賈栩)와 위평(魏平)은 노성 전투 대목에서 등장한다.

『진서』에서는 제갈량이 기산에서 가사(賈嗣)와 위평(魏平)을 포위하고 있다가 사마의가 부풍군 유미현(隃麋縣)으로 향하는 동안 상규로 이동해 보리를 수확한 것으로 나오며, 제갈량이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를 격파한 사실은 없다. 오히려 사마의는 제갈량은 결단력이 부족하므로 급히 행군하면 보리 수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갑옷을 벗은 채 경무장으로 상규에 진입했고 이를 본 제갈량은 퇴각했으며, 이후 한양(漢陽)에 주둔하면서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을 시도했으나 교전이 시작되자 제갈량은 기산으로 퇴각했다고 나온다.

두 기록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231년 전역 초기에 제갈량이 상규현에 주둔하며 보리를 수확했다는 사실과, 이에 사마의가 직접 상규현 인근까지 와서 대치했으나 제갈량은 사마의와 직접적인 충돌 없이 회군했다는 사실이다. 그 외의 내용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한편 옛 북지군의 석성에 주둔한 선비의 가비능에 대응하고자, 조예는 병주의 안문태수 견초에게 필요에 따라 가비능을 공격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견초가 지시를 받았을 땐 이미 가비능이 전선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가비능은 당초부터 위나라를 협격하려는 의도까지는 없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4월에는 위나라에 조공한 점에서 상규 일대에서 대치가 진행되는 동안 위나라와 화해하고 전쟁에서 완전히 철수했음이 분명해진다.


3.3. 기산 전투[편집]


상규에서 보리를 수확한 촉한군은 사마의의 본대가 상규현 인근에 도착한 뒤에 교전없이 기산으로 퇴각하였다. 이를 추격한 사마의는 노성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진서』와 『한진춘추』의 기록이 다르다.

또한 『삼국지』 왕평전에 나오는 왕평이 장합의 공격을 방어한 사건은 사마의가 촉한군과 교전한 시점에 해당하므로, 앞의 두 기록에서 모두 장합이 당시에 사마의를 따라 종군했던 것으로 기술한 점을 감안하면 기산 전투 무렵에 있던 일로 해석된다.

『한진춘추』에서는 노성에 도착한 사마의에게 장합이 기병(奇兵)으로 후방을 위협하라 건의하나, 사마의는 장합의 조언을 듣지 않고 계속하여 제갈량의 뒤를 쫓는다. 제갈량을 뒤이어 기산에 도착한 사마의는 인근의 산에 영채를 세워서 촉한군과의 대치를 이어갔으나, 가허(賈栩)와 위평(魏平) 등에게 비판을 받고 이윽고 모든 장수가 교전을 청하자, 5월 10일에 공세에 나섰다. 사마의는 장합을 보내 기산 포위망의 남쪽을 지키던 왕평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큰길[中道]을 따라 제갈량에게 향했다. 그러자 제갈량은 위연·고상·오반 등을 보내 사마의를 격파했고,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고 나온다.

특히 해당 대목이 『삼국지』 왕평전의 기록과 겹치는 점에서 왕평이 장합을 격파한 사건도 기산 전투 당시로 이해되는데, 이는 『화양국지』에서도 사마의와 장합의 교전을 동시의 사건으로 기재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3.3.1. 노성 전투[편집]


『진서』에서는 사마의가 한양으로부터 퇴각하던 제갈량을 추격하여 기산에 도달하였는데, 제갈량은 노성에 주둔하면서 남·북의 산을 점거하여 물을 끊고 중위(為重圍)했으나[7], 사마의가 위(圍)를 공격해 점령하자 제갈량은 달아났고, 이에 촉한군을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병력이 만(萬)에 헤아렸다고 나온다.

4차 북벌 관련해서 가장 미스터리한 기록이다. 기산에서의 교전이 왕평전, 화양국지, 한진춘추에서 교차검증되는 반면, 노성에서 제갈량을 격파한 사마의에 대한 기록은 사서는 물론이고 지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진서』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을 추격해 기산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정작 노성은 기산 동북쪽, 즉 상규에서 기산으로 오는 길에 있다.

『진서』와 『한진춘추』의 기록이 가장 크게 갈리는 부분이 이곳인데, 『한진춘추』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뒤를 쫓다가 노성에 도착하였고, 그 이후 다시 제갈량의 뒤를 쫓아 기산에 도착했다고 나오나, 『진서』에서는 제갈량이 노성에 주둔하자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해 격파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진서』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기산 인근에서의 대치가 늦어도 5월부터 6월까지, 적어도 1달 이상 벌어졌음을 고려하면 굉장히 정성없이 기록한 것이다.


3.4. 촉한군 철수[편집]


『화양국지』에 따르면 익주 지방에서 5월부터 큰비가 내렸기에, 한중에 주둔하며 군량 수송을 총괄하던 이평(이엄)이 제갈량에게 철수를 권유했고, 6월에 제갈량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지』 후주전이나 이엄전 등과 모순되지 않는다. 『화양국지』에는 같은 시기 위군의 군량도 다했다고 전하나, 『삼국지』 곽회전에 따르면 그 문제를 곽회가 해결했다고 하므로 당시 위군은 군량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명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위서』에 의하면 사마의가 제갈량과 대치할 당시 상규의 보리를 군량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하여 기산으로 물러나자,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위략』에서는 추격을 반대하는 장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장합을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장합 부대가 목문(木門)에 이르렀을 때 교전이 발생하여 장합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그 부상으로 전사했다.[8]

한편 제갈량이 철수하는 동안 이엄은 군량 운송이 원활하지 않았던 일로 책임을 지게될 것을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권유를 받아들인 제갈량에겐 돌연히 군량미가 아직 충분하다고 입장을 바꾸고, 황제인 유선에겐 제갈량이 유인책을 구사하고자 퇴각하는 것이라 허위보고를 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군량 수송 담당인 독운령 잠술을 책임자로 몰아 죽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대목에 일부 각색이 들어가, 이엄이 군량을 마련하지 못했기에 제갈량이 회군하도록 만들고자 제갈량에겐 오나라가 위나라와 화친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는 허위보고를 올리는 대목이 추가되었다. 이엄이 허위보고를 한 원인이 군량을 마련하지 못했다거나 직무 태만에 의한 것에 있다는 것은 후대에 창작된 매체에서 등장하는 설정으로 역사 기록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3.5. 결말[편집]


제갈량의 철수가 확인되자, 7월 6일에 위나라에서는 논공행상을 벌여 공을 세운 자들의 작위를 높여주고, 봉읍을 늘려주었다.

8월 제갈량이 한중에 도착하였고, 그동안 이엄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공개하였기에 이엄이 허위보고를 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제갈량이 이엄을 탄핵하여, 이엄은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자동군으로 유배되었다.

3년 뒤인 234년에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기존처럼 기산을 통해 농우 지방을 공략했던 것이 아니라, 잔도가 놓인 포야도(襃斜道)를 통해 부풍군 무공현(武功縣) 일대로 진입하여 관중 지방을 공략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오장원 전투 문서 참조.


4. 사료 비판[편집]


역사 연구는 객관적인 연구 방법론을 형성하기 어려워 이를 표준화할 수도 없어서, 연구자 개인의 주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여 논리적인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 연구자들은 여러 형태의 자료를 수집하고 각각의 정보 가치를 평가하는데, 이를 사료 비판이라고 한다. 사료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연구자 개인의 주관에 따른 자료의 취사선택으로 발생하는 해석의 내적 모순을 방지하는 것에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기록물을 '사료'로 부르기도 하기에 사료 비판이 '서적'을 기준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전근대 왕조들이 공인하거나 직접 편찬한 24사는 이미 국가적 공인을 받은 정사(正史)이기에 그 내용적 신빙성이 보장된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일례로 『사기』에 기록된 상나라 군주의 계보가 실제 발굴된 갑골문 자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여 사기의 기록을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호평은 그저 전한 시대에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년도 넘는 과거의 일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사기』에선 진나라가 통일 이후 36군(郡)을 편성했다고 기록하였으나 현재 발굴된 간독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통일 시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진나라의 군은 36개를 상회한다는 점이 밝혀졌기에, 근래 연구자들은 『사기』의 해당 기록이 잘못된 정보라 판단하지 간독 자료를 분석한 결과가 오류라고 정정하지는 않는다.

즉, 정사로 공인된 사서라고 하여 그 정보들을 무작정 신봉하는 것이 아니며, 해당 사서의 정확성이 입증된 사례가 발굴되었다고 하여 그 사서의 모든 내용이 정확하다고 여겨지지도 않는 것이다.

정사로 공인된 서적들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는 역대 왕조들에서 직접 관리를 받아온 서적들이라는 점에서 그 서지학적 연원이 분명하고, 다른 여러 문헌과 달리 내용이 유실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학자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왔기에 표준적인 교감(校勘)까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특히 24사가 오늘날까지 많은 동양사 연구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용하는 문헌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여러 사건이 해당 인물별로 시기순으로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거나 주제별로 요약된 정보를 제공하는 기전체 사서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내용이 정확하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삼국지』 후주전·제갈량전·이엄전과 『화양국지』는 모두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나오고, 『한진춘추』에는 기산 전투에서 촉한군이 사마의를 패퇴시킨 것으로 나와 있으며, 『진서』 선제기는 단순히 사마의가 노성에 주둔하던 제갈량을 격파하여 촉한군이 패퇴한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한진춘추』와 『진서』가 충돌하는 부분이 매우 두드러지며, 두 기록 중 어느 기록을 채택하냐에 따라 이 사건에 연관된 다른 기록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자치통감』을 비롯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보통 『한진춘추』의 기록을 선택해 왔고,[9] 현대 역사학자들도 앞서 『한진춘추』가 『진서』에 비해 시기적으로 이른 기록임을 참작하여 『한진춘추』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11][12] 한편 한·중·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활동하는 일부 아마추어 연구자들은 『진서』가 정사(正史)에 포함되는 점에 중점을 두어 이를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충돌하고 있는 정보들을 사료 비판 과정을 통하여 그 신빙성을 냉정히 평가하기보다는, 이른바 '부참만계(俘斬萬計)' 전과를 긍정하려는 목적으로 『진서』에 관한 종래의 비평을 비판하면서, 『진서』에서 미비한 점은 필요에 따라 『한진춘추』를 인용해 이를 토대로 다른 기록들과 교차점을 찾는 편의적 취사선택 경향이 돋보인다.

본 문서에서 쟁점이 되는 노성 전투에서 『진서』와 『한진춘추』가 충돌하고 있는 대목들에 관한 사료 비판의 목적은 서로 충돌되는 정보들 가운데에 어느 정보를 허위로 판정하여 버릴 것인지를 가리는 것에 있지, 단순히 해당 사서에 대한 종래의 비평을 검토한다거나 어떠한 서술 방식에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서에 유사한 사례가 있으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두둔하는 것을 사료 비판이라 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러한 모호한 태도로 각각의 정보를 일부만 긍정하고 일부만 부정하는 방식으로 전반적인 해석을 재구성하는 것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통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정보를 조합한 이상 그 내재적 모순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이런 편의적인 선택으로 구성된 해석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그 결론을 토대로 다시 원래의 개별 기록에 그 해석을 적용하면 반드시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진춘추』는 231년을 기준으로 대략 100년 뒤쯤 동진습착치가 편찬한 서적으로 현전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시기에 배송지가 『삼국지』 본문에서 생략된 정황들을 다른 기록을 통해 보충하기 위해 선택하여 인용한 부분 등이 남게 되어 그 일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면 당태종 때 편찬된 『진서』는 사마진 시절부터 남북조시대 동안 편찬된 18가 진사를 비롯한 사서를 참고하여 편찬되긴 하였으나, 진서 자체의 편찬시기는 『한진춘추』보다 시기적으로 약 300년 뒤이다. 『진서』에서 『한진춘추』와 충돌하고 있는 대목들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진서』가 상대적으로 나중의 정보인 점에서, 근원적으로 이러한 정보가 습착치나 배송지 등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더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당나라 『진서』의 모본이 된 장영서(415~488)의 『진서』가 『한진춘추』와 100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나, 당나라의 『진서』와 장영서의 『진서』가 해당 대목에서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으며, 애초에 이는 회의론자들의 근원적 의혹을 해명하는 논점도 아니다.

『진서』의 해당 대목을 검토해 보면, 제시된 지명을 통해 의혹이 발견된다. 우선 한양(漢陽)에서 제갈량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기산까지 제갈량을 추격했다고 하였으나, 그 직후 제갈량은 갑자기 기산과 상규 사이에 위치한 노성(鹵城)에 주둔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또한 원화군현도지에 의하면 제갈량의 영루와 사마의의 영루는 상규현 동쪽에 위치했는데, 진서에 나오는 지명인 한양은 천수군의 후한 때 이름인 한양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231년 당시에는 쓰이지 않던 지명이다.[13]

또한 231년 당시의 기록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진서』 선제기에는 230년에 위나라가 한중을 공격할 당시 사마의가 위흥군 서성현(西城縣)에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현(朐䏰縣)에 도달해 신풍현(新豊縣)을 함락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구인현은 파동군 소속이고 신풍현은 파동군 한풍현(漢豊縣)의 오기로 보인다. 파동군 지역은 위흥군 서성현에서 한수를 따라가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지역이기에, 이를 사실로 본다면 사마의는 본래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남정에서 조진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긴 것이 된다.

이러한 점은 『진서』가 편찬 당시에 참고한 여러 자료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행 순서를 혼동하였거나 동일한 사건임에도 지명을 서로 달리 표현한 기록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오인해 기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진서』 선제기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검토한 것이 미흡했음을 드러낸다.

『한진춘추』와 『진서』가 충돌하는 부분들을 대조해 보면, 『진서』의 독자적인 정보가 다른 기존의 사서와도 충돌하는 점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위서』에는 당초 위나라에선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관측하는 여론이 대세였던 것으로 나오고, 『화양국지』에는 제갈량이 지구전에 빠지는 상황을 중책으로 평가하는 발언이 나오나 하책은 철수라고 한 점에서 사실상 지구전을 꺼린 발언으로 해석되는데, 제갈량이 일방적으로 교전을 회피하다가 노성에서 패퇴했다는 『진서』의 전개보다는 제갈량이 교전에 적극적이고 사마의가 소극적으로 나오는 『한진춘추』의 전개가 이런 정황들에 부합한다.

특히 『진서』의 결과대로 제갈량이 노성에서 큰 피해를 보고 패주하고 있다면, 철수 결정 소식을 들은 이엄이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고자 제갈량에게 책임을 전가할 이유가 없어지는 점에서, 해당 정황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서』의 4차 북벌 기사는 그 자체적인 내용으로도 의혹점이 발견되고 있으며 『한진춘추』의 기사에 비하면 외적으로 다른 기록들과도 자연스럽게 합치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비관적인 사료 비판론을 오류 없이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사의 내용적 의혹을 해소하고, 『한진춘추』를 배제하면서 이전 시기의 다른 기록들과 모순되지 않는 해석이 가능한 논거를 발굴해, 상대적으로 나중에 형성된 정보라는 한계점을 제대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전의 본 문서를 포함해 혹자들은 『개원점경(開元占經)』이 신빙성이 높은 천문 기록이라 평가하면서도, 해당 기록은 '부거기장군 서(舒)'라는 인물이 촉한군 5만 명 가운데 3만을 죽이고 1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임에도, 해당 전과는 사마의가 세웠고 『진서』가 전공을 축소해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마의의 '부참만계' 전과를 긍정하기 위한 목적의 편의적인 해석을 하는 점도 드러난다. 이러한 해석 행태로도 알 수 있듯 『개원점경』의 해당 기사는 근본적으로 『진서』 선제기의 서술과 합치되지 않기에, 해당 기사를 보충적으로 활용하고자 그 내용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해석의 전거가 되는 『진서』의 독자적 정보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개원점경에서는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고 그 사례를 적어놓았으나, 해당 기사가 수록된 13권에서는 어떤 기록을 참고하였는지 기록되지 않고 단순히 '살펴보았다'고만 적어놓고 있다.


5. 평가[편집]


『한진춘추』에 따라 231년 5월에 촉한군이 노성 인근에서 사마의를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고 해석하더라도, 노성 전투 이후로 양측의 행보를 기술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기에 해당 전투가 단순한 충돌에 불과한 사건이었는지 농우 지방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대규모 회전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일각에서는 노성 전투의 승리가 제갈량의 북벌 최대 성과라고 칭송하며, 그 결과 농우 지방이나 옹·양 2주에서 위나라의 통치체계가 붕괴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당시 촉한군의 활동은 기산-노성-상규에 국한되는 만큼, 농우 지방에서조차 228년 당시처럼 촉한군에 호응하는 반응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촉한은 무도군을 확보하고 목우를 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초기부터 군량 운송이 원활하지 못했고 5월 무렵부터는 장마로 인해 간혹 보급선이 단절되는 상황도 겪게 되었으며, 본질적으로 이 문제가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었다. 군량 부족 사태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처럼 이엄이 군량 공급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아니었으며, 이엄 또한 직무 태만에 의해 탄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하기 위해 허위보고를 한 점과 그 이전부터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던 정치적 행보가 탄핵의 근거가 되었다. 노성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엄의 직무 태만 때문에 제갈량이 억울하게 철수했다거나, 제갈량이 이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정쟁을 일으켜 노성 전투의 패전 책임을 유야무야 넘겼다는 식의 해석들은 모두 근거를 갖췄다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다.

또한 228년에 조운의 별동대를 잔도로 보내 조진의 본대를 관중 인근에 묶어뒀던 점과 대비하여 231년에는 선비의 가비능을 동원하여 옹·양주 지역의 전력 분산을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위나라에선 촉한과 접경하지 않는 지역인 병주의 병력으로 가비능에 대응했기에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들을 놓고 본다면, 231년 당시 촉한은 위나라보다 열세인 국력 차이를 극복하여 농우 지방을 경략하기 위한 전략적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촉한에서도 이러한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것인지, 이후 234년에 추진된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은 아예 농우 지방을 경략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완전히 포기하여, 관중 지방에서 장기간 주둔하여 직접 농경하며 식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를 주목해 보면 당시 촉한 내부에서 이엄이 실각한 것 외에 어떠한 인사 조치도 치러지지 않았던 점도 해명되는데, 전략적 방향을 수정하기 위해 북벌을 중단하고 나름 성공적인 철수를 이뤄낸 만큼 촉한 내부에선 완전한 실패로 여기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곧바로 이를 만회하기 위한 차기 북벌 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위나라 군대가 장합의 추격 실패와 같은 일부 오점을 남겼으나, 본질적으로 촉한군의 작전 범위를 농우 지방 전체가 아니라 기산과 상규현 사이로 국한하는 데 성공한 점을 감안하면, 231년 농우 전역에선 위나라가 전략적인 완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하다. 해당 전역은 당초 위나라에서 지배적으로 관측하던 대로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마의는 제갈량이 꺼린 지구전을 성공시켰다. 당시 위나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성과를 높게 평가하였는지, 논공행상이 치러져 전공을 세운 사람들의 작위나 관직이 올려졌다.


5.1. 제갈량에 대한 평가[편집]


231년 전역의 결과를 두고, 창작물의 설정에 영향을 받은 '이엄책임론'으로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문제가 없었다고 두둔하거나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부참만계'를 긍정하는 노력이 대립하여 그를 중점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노성 전투의 결과를 어찌 해석하든, 삼국시대 당시부터 제갈량의 전술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던 점이나 팔진도를 창안하여 남북조시대의 전술에 영향을 미친 군사적 업적은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제갈량이 융중대를 기안하고 남중 정벌 등을 성공시킨 점이나 촉한의 국정 전반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점에서 그 전략적인 식견이 있음은 분명 높게 평가할 수는 있으나, 228년 가정 전투 패전으로 인한 실패와 231년 전역의 진행 과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북벌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전략 과제를 선정하고 현실적인 국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기책을 마련하는 데는 명백하게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전술적 평판에 비해 전략 단계에서의 군사적 안목은 부족했다고 평가된다.

전략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전근대에는 단순히 제갈량에게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여겼을 뿐이었으나,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명쾌하게 콕 집어낼 수는 없어도 제갈량에게 어딘가 부족한 점이 느껴지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수가 제갈량에겐 '기모(奇謀)'가 부족했다고 평가한 점은 굉장히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인다.


6. 여담[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을 '육출기산(六出祁山)'으로 일컬었으나,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한 것은 228년과 231년 단 2번이었다.이출기산

231년 전역에서 위나라 측 천수태수나 광위태수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이 촉한군을 요격하는데 동원되지 않고 임지를 지킨 것으로 가정해 보면, 당시 촉한군의 활동이 농우 지방 전역이 아니라 기산-노성-상규에 국한된 점, 제갈량이 교전 없이 상규에서 노성으로 후퇴한 점, 이후 촉한이 두 번 다시 기산 방면의 출병을 하지 않은 점 등의 원인이 파악된다. 과거 조조한중 공방전 직후 유비의 북상을 막고자 단순히 무도군과 음평군을 폐지해 무인지대로 만들었으나, 무도군과 음평군은 결국 촉한의 영역이 되어 멸망할 때까지 위나라의 농우 지방을 위협하는 전진 기지로 활용되어 버린다. 이 사례와 비교하면 조예가정 전투 직후 광위군을 신설한 것은 손해는 적으면서도 촉한의 기산 출병을 저지하는 높은 성과를 거둔 매우 적절한 조치로 평가된다.

한자 '圍'자는 해석이 곤란한 글자 중 하나인데, 해당 글자가 "방어 구조물이 둘린(圍) 일종의 전초기지"를 가리키는 명사로 쓰일 때가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파생되어 '지키다'라는 동사로도 쓰인다. 강유가 258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7개의 위(圍)가 이러한 사례 중 하나로 당시 무도군 경계에 위치한 건위(建威)에도 위가 설치되었다. 『삼국지』 왕평전과 『화양국지』 및 『한진춘추』에 쓰인 '남위(南圍)'도 본 문서에서는 "남쪽을 포위하고"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圍南"일 때 정확한 번역이고, 왕평전의 해당 문장에선 동사로 '지키다(守)'가 쓰인 점으로 보아 이런 시설로 볼 여지가 있다. 『한진춘추』의 전개에 따를 경우 아마도 제갈량의 본대(북군)가 상규현으로 향했을 당시 기산-노성 일대에 남겨둔 분대(남군)의 본영을 가리키던 표현이 아닌가 짐작된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며 '기산을 포위한 촉한군의 남쪽 둔영'으로 해석했다. 다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그 점을 명확하게 밝히긴 어려운 만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인 '포위하다'로 해석한 기존의 서술을 유지한다.


6.1. 곽충오사[편집]


배송지가 『삼국지』 제갈량전에 인용한 『촉기』에는 서진 초기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의 주관으로 제갈량을 평가하는 토론이 있던 중, 금성군 출신 곽충(郭沖)이 5가지 사례를 들어 제갈량에 관한 비판을 잠재웠다는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그중 다섯 번째 사례[郭沖五事]가 231년 전역에 해당하는데 아래와 같다.

조예가 친히 촉을 정벌하고자 장안에 행차하고, 사마의를 보내 장합과 제군(諸軍), 옹(雍)·량(涼)의 강병, 정병 30여 만을 이끌고 은밀히 진격해 검각(劍閣)으로 향하게 했다. 제갈량은 이때 기산(祁山)에서 깃발과 날카로운 병기로 험요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10분의 2를 교대해 내려보내려 하고 남은 군사가 8만이었다.

위군(魏軍)이 처음 진을 펼쳤을 때 깃발과 군사가 때마침 교체되자, 참모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여 역량으로 능히 제압하지 못하니 의당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내려보내는 것을 한 달 동안 멈추어 성세(聲勢)를 아울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제갈량이 말했다.

"내가 군을 통수하고 용병한 이래 큰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고, ‘원(原)을 얻고 신의를 잃는 것’(得原失信)[14]

은 옛사람도 꺼렸던 일이오. 떠날 자들이 행장을 꾸리고 기일을 기다리며, 그 처자들은 학수고대하고 날짜만 헤아리는데, 비록 정벌에 임해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의(義)를 폐할 수는 없소."

그러고는 모두 조속히 보내주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떠날 자들은 감격하여 남아서 일전을 치룰 것을 원하고, 남을 자들은 분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들이 서로 말했다.

"제갈공의 은혜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싸우는 날에 이르자 칼을 뽑고 선두에 서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당십(一當十)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사마의를 물리쳤다. 한번 싸움으로 대승을 거두니 이는 제갈량의 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송지는 이 일화를 인용하면서도, 조예가 228년에는 장안에 왔었으나 이 해(231년)에는 오지 않았었고, 제갈량의 대군이 관롱(關隴)에 있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기산에 있는 제갈량을 뛰어넘어 곧바로 검각으로 향할 수 있단 말이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또 제갈량이 전장에 머문 뒤로 본래 오래도록 주둔하는 법은 없었으니 병사를 쉬게 하려고 촉으로 돌려보냈다는 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손성습착치 등의 저술이 당시의 기록 중에 빠뜨린 경우가 적음에도 곽충에 대한 일은 기재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여, 『촉기』의 해당 기록은 잘못된 정보라 판정했다.

참고로 배송지는 곽충삼사(郭沖三事)[15]를 인용하면서, 해당 일화의 배경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곽충이 상급자인 사마준을 상대로 발언하는 상황에 사마준의 아버지인 사마의가 조롱당한 일을 어떻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촉기』가 허황된 일화를 기록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6.2. 위연의 승진?[편집]


230년에 위연은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假節)로 승진하였는데, 231년 노성 전투 이후에 이엄을 탄핵하는 상소문에서는 자신의 직함을 사지절(使持節)로 표기하였다.

남북조시대 이후의 관제에는 사지절이 가절보다 높은 권한을 표현하는 등급 명칭으로 쓰였기에, 이를 두고 위연이 노성 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송서』 백관지에서 사지절-지절-가절이 분화되고 서열 및 권한의 차등을 규정한 것은 진나라 때라고 설명하고 있기에, 그 이전에도 이와 같은 구분이 있던 것으로 소급하긴 어렵다. 아래를 살펴보자.

(선주가 제위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제갈량전」


때는 장무 원년(221년) 5월 신사일, 황제가 말하노라. 태자 유선(劉禪)아, 짐은 한(漢)의 천운이 간난에 처하고 적신(賊臣)이 찬도(簒盜)해 사직에 주인이 없을 때를 만나, 격인군정(格人群正: 천도를 아는 이와 뭇 바른 이들)들이 밝은 천명으로 받들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제 유선을 황태자로 삼으니 종묘를 잇고 사직을 엄숙히 공경하라. 사지절(使持節) 승상(丞相) 제갈량을 시켜 인수를 주게 한다. 사부(師傅)의 말을 경청하고, 한가지 일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모두 얻도록 하라.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후주전」

유비가 제위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한 것이 221년 4월이고, 유선을 태자로 책봉한 것이 같은 해 5월이었다. 이 사이에 제갈량이 승진을 할 만한 어떤 공적을 세웠다거나 승진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한-조위에서는 어떨까?

相國安樂鄕侯臣歆

상국 안락향후 신 흠

太尉都亭侯臣詡

태위 도정후 신 후

御史大夫安陵亭侯臣朗

어사대부 안릉정후 신 랑

使持節行都督督軍車騎將軍□□臣仁

사지절 행도독독군 거기장군□□ 신 인

輔國將軍清苑鄕侯臣若

보국장군 청관향후 신 약

虎牙將軍南昌亭侯臣輔

호아장군 남창정후 신 보

輕車將軍都亭侯臣忠

경거장군 도정후 신 충

冠軍將軍好畤鄕侯臣秋

관군장군 호치향후 신 추

渡遼將軍都亭侯臣柔

도요장군 도정후 신 유

衛將軍國明亭侯臣洪

위장군 국명정후 신 홍

使持節行都督督軍鎮西將軍東鄕侯臣眞

사지절 행도독독군 진서장군 동향후 신 진

使持節行都督督軍領楊州刺史征東將軍安陽鄕侯臣休

사지절 행도독독군 영양주자사 정동장군 안양향후 신 휴

使持節行都督督軍征南將軍平陵亭侯臣尙

사지절 행도독독군 정남장군 평릉정후 신 상

使持節行都督督軍徐州刺史鎮東將軍武安鄕侯臣霸

사지절 행도독독군 서주자사 진동장군 무안향후 신 패

使持節左將軍中鄕侯臣郃

사지절 좌장군 중향후 신 합

使持節右將軍建鄕侯臣晃

사지절 우장군 건향후 신 황

使持節前將軍都鄕侯臣遼

사지절 전장군 도향후 신 료

使持節後將軍華鄕侯臣靈

사지절 후장군 화향후 신 령

「위공경상존호주」 中


復以仁行征南將軍,假節,屯樊,鎮荆州。侯音以宛叛,略傍縣眾數千人,仁率諸軍攻破音,斬其首,還屯樊,卽拜征南將軍。關羽攻樊,時漢水暴溢,于禁等七軍皆沒,禁降羽。仁人馬數千人守城,城不沒者數板。羽乘船临城,圍數重,外內斷絶,糧食欲盡,救兵不至。仁激厲將士,示以必死,將士感之皆無二。徐晃救至,水亦稍减,晃從外擊羽,仁得潰圍出,羽退走。

仁少時不脩行检,及長爲將,嚴整奉法令,常置科於左右,案以從事。鄢陵侯彰北征烏丸,文帝在東宫,爲書戒彰曰:「爲將奉法,不當如征南邪!」及卽王位,拜仁車騎將軍,都督荆、揚、益州諸軍事,進封陳侯,增邑二千,幷前三千五百戶。

「조인전」

조인은 218년 무렵에 절을 받았고 조비가 즉위한 후에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가 되었다.

夏侯惇薨,以休爲鎮南將軍,假節都督諸軍事,車駕臨送,上乃下輿執手而別。孫權遣將屯歷陽,休到,擊破之,又別遣兵渡江,燒賊蕪湖營數千家。遷征東將軍,領揚州刺史,進封安陽鄕侯。帝征孫權,以休爲征東大將軍,假黄鉞,督張遼等及諸州郡二十餘軍,擊權大將呂範等於洞浦,破之。拜揚州牧明帝卽位,進封長平侯。

「조휴전」

조휴는 하후돈이 죽고 진남장군 가절도독제군사가 되었다가 정동장군 영 양주자사로 승진하고 조비의 1차 남정 때에 정동대장군 가황월이 되었다.

文帝卽王位,以眞爲鎮西將軍,假節都督雍、涼州諸軍事。錄前後功,進封東鄕侯。張進等反於酒泉,眞遣费曜討破之,斬進等。黃初三年還京都,以眞爲上軍大將軍,都督中外諸軍事,假節鉞

「조진전」

조진은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진서장군 가절도독옹량제군사가 되었고 222년에 상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가절월이 되었다.

太祖崩於洛陽,尙持節,奉梓宮還鄴。幷錄前功,封平陵亭侯,拜散騎常侍,遷中領軍。文帝踐阼,更封平陵鄕侯,遷征南將軍,領荊州刺史,假節都督南方諸軍事

「하후상전」

하후상은 조조가 죽었을 때 절을 지니고 업으로 돌아왔고, 조비가 황제가 된 후에 정남장군 영 형주자사 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太祖善之,拜揚威將軍,假節。後權乞降,太祖還,留霸與夏侯惇等屯居巢。

文帝卽王位,遷鎮東將軍,進爵武安鄕侯,都督青州諸軍事。及踐阼,進封開陽侯,徙封良成侯。與曹休討吳賊,破呂範於洞浦,徵為執金吾,位特進。

「장패전」

장패는 217년 유수구 전투 당시 절을 받았고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진동장군 도독청주제군사가 되었으며 조비의 1차 남정 이후 집금오가 되었다.

또한 장료는 진란, 매성의 난을 토벌한 직후, 서황과 장합은 한중 공방전 중에 절을 받았다(假節).

정리하자면, 하후상은 조비한테 황제가 되라고 건의할 땐 사지절이라고 하다가 이후에 가절이 되었고, 조인·조휴·조진·장패·장합·서황, 장료는 가절임에도 상소문에는 사지절이라고 나온다. 제갈량도 가절임에도 유선 태자 책봉문에는 사지절로 나온다. 모든 걸 종합해 보면, 한나라 때는 가절·사지절 등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연이 이엄 탄핵문에 사지절로 나오는 것은 가절과 사지절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기록에도 없는 승진의 증거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4] 가비능의 행동 시점은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다. 『삼국지』 견초전에 견초가 가비능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미 가비능은 전선에서 이탈했다고 전한다. 편의상 『삼국지』 제갈량전의 시점에 따라 2월에 호응하여, 『삼국지』 명제기의 시점에 따라 3월에 이탈한 것으로 본다.[5] 『한진춘추』에서 5월 신사일에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며, 당월 신사일은 음력 10일이다.[6] 『삼국지』 위연전에선 230년에 위연이 남정후로 승진한 이후로, 제갈량을 따라 출진할 때마다 번번이 군사 만 명을 청했다고 나오는데, 이후 제갈량의 북벌이 231년과 234년 두 차례에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231년부터 이와 같은 제안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갈량이 그 제안을 거부했으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7] 포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포위했다는 의미로 圍가 쓰일 경우, A圍B(A가 B를 포위하다.), A所圍(A에게 포위당하다.), 圍之(~를 포위하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為圍라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삼국지에 나오는 為圍의 사례로는 공손찬전이 있다. 공손찬이 역경루를 만들 때, 참호를 10겹으로 팠다고 한다(為圍塹十重).[8] 『삼국지』 장합전에선 오른쪽 무릎(右膝)에 화살이 맞은 것으로 기록했고, 『위략』에서는 높은 곳에 있던 복병이 궁노를 난사해 넓적다리(髀)를 맞춘 것으로 기록했다. 『삼국지』 신비전에는 배송지가 『위략』을 인용한 대목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추격 중 화살에 맞아 죽어 조예가 이를 탄식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후주전과 화양국지에서는 장합이 청봉(靑封)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데, 동일한 사건임을 감안하면 이는 촉한에서 쓰인 목문의 이칭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쓰여진 『한표(漢表)』에선 제갈량이 장합의 추격을 예상하여 청봉 목문에 있던 나무에 "장합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적어두고 장합이 이를 확인하자 매복해 있던 천 개의 노를 동시에 발사했다고 나오나, 『삼국지』보다 오랜 시간 이후의 기록임을 감안하면 훗날 민간에 퍼진 소문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는 이야기는 『사기』「손자오기열전」에 나오는 손빈과 방연의 일화와 거의 일치한다.[9]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수집한 자료 중에 고증이 필요했던 부분들을 별도로 정리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를 함께 저술했는데, 아쉽게도 노성 전투와 관련하여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한 이유는 서술되지 않았다. 물론 사마광이 『한진춘추』를 선택한 사실이 곧 『한진춘추』가 진실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자치통감』이 가진 영향력과 해당 선택에 대한 비판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여, 단순히 전통적인 견해를 대표한다는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10]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은 지(志)를 서술하기 전에 죽어, 후한서의 지(志)는 사마표의 속한서(續漢書)의 지(志)를 가져온 것이다.[11] 『한진춘추』가 정사(正史)가 아닌 점을 들어 이러한 경향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역사학자들은 정사라는 이유로 내용의 진위를 판정하지 않는다. 특히 『한진춘추』의 해당 대목은 비록 진수가 작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배송지송문제의 명령을 받아 주석을 단 『삼국지』가 정본(正本)으로 유통되면서 사실상 『삼국지』를 구성하는 일부로 여겨져, 『삼국지』 본문과 동일한 수준으로 오랜 기간 학자들의 검토와 교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들이 『한진춘추』가 정사의 본문이 아니라고 하여 평가를 낮춰 볼 이유가 없다. 애초에 24사 중 현전하는 『사기』는 저소손(褚少孫)이 자의적으로 보충한 판본이고, 『후한서』는 완성되지 못한 서적을 후대에 다른 서적의 일부와 합쳐 구성한 문헌이다.[10] 해당 문헌들에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서지학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12] 다만 자치통감 삼국지 부분을 영어로 번역한 하버드대 교수 Achilles Fang의 경우, 한진춘추의 어떠한 기록이라도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일반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any information from the Chronicles of Han and Jin must be regarded with skepticism and should be considered generally unreliable.)라 평가하였다.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Sima_Yi#cite_ref-81'[13] 흔히 알고있는 한수(漢水)는 당시 상규 남쪽에 흐르지 않았으나, 양수(漾水)라고도 불리는 서한수(西漢水)가 상규 남쪽에서 발원해 기산 남쪽을 지나가며, 계속 흘러가 마침내 장강에 합류한다. 전한 초 무도 인근에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수(漢水) 본류로 흘러갔으나, 지진 이후 수로가 끊기며 한수와 별개의 강이 되었다.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은 한양(漢陽)이라는 명칭이 이 서한수의 북쪽에 위치하여 유래된 것이라 추측했다.[14] 춘추좌씨전 희공 25년(B.C. 635) 조 – 겨울, 진문공이 원성(原城)을 포위하면서 사흘분의 군량만 준비하도록 명했다. (사흘이 지나도) 원성이 항복하지 않자, 퇴각하도록 명했다. 염탐꾼이 돌아와 ‘원성이 장차 항복하려 한다.’고 고했다. 군리들이 말했다, “이를 기다리길 청합니다.” 공이 말했다, “신(信)은 국가의 보배이니, 백성들을 비호하는 바이다. 원성(原城)을 얻어도 신의를 잃는다면(得原失信) 무엇으로 백성들을 비호하겠는가? 그리하면 잃는 것이 더 많다.” 일사(一舍, 30리)를 물러나자, 원성이 항복했다.[15]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제갈량이 1만 병력으로 성을 지키던 중 사마의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제갈량의 허세에 속아 군을 물리자, 제갈량이 박장대소하며 사마의를 겁쟁이라 조롱했다는 내용이다. 배송지는 제갈량전에서 228년에 기산으로 출병하기 직전 대목에 이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정 전투 패전 직후 제갈량이 성문을 열어두고 문루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추격군을 이끄는 사마의를 물러나게 한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94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94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9 20:04:01에 나무위키 노성 전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