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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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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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嚴
? ~ 234년
1. 개요
2. 생애
2.1. 4차 북벌과 탄핵, 이후의 삶
2.2. 이엄의 처벌
3. 평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다. 형주 남양군 출신으로 자는 정방(正方)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일관되게 이엄이라 이름을 쓰고 있지만 제갈량의 북벌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평(李平)으로 개명했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사 삼국지에서 등장하는 이엄과 이평을 서로 다른 인물로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1]


2. 생애[편집]


원래 유표 밑에 있었던 나름대로 실력 있고 신임을 받던 인물로 기록상으로는 중앙의 행정직보다는 지방관으로 일한 경력이 많다. 그러다가 유표 사후에 형주조조의 손에 넘어가자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던 이엄은 익주의 유장에게로 귀순하였다.[2] 유장 역시 이엄의 능력을 인정하여 성도의 현령 등 여러 지방관의 직위를 부여하며 중용하였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비가 유장을 돕기 위해 익주로 들어왔다가 서로 관계가 악화되어 대립하던 시기에는 병사를 주어 면죽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유장의 기대와는 달리, 이엄은 유비와 싸우는 대신 그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연의에서는 황충과 호각으로 겨루다가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항복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판본에 따라서는 후자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익주에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인 만큼 유비 역시 익주를 평정한 후에 이엄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하면서 중용하였다. 이후 조조와 한중을 놓고 대립하고 있던 유비를 대신하여 익주 내에서 도적이 준동하거나, 이민족과 결탁한 지방 반란이 있을 때 진압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대신에 전선에 출전한 경력은 적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에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에서 활약하는 장억 등의 명장들도 초기에는 이민족의 반란 진압 등의 일들을 많이 맡았다. 법률인 촉과 제정에는 그의 역할도 있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이엄은 천성이 자존심이 강해 호군 보광(輔匡)과 나이와 지위가 서로 비슷했지만, 이엄은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오로지 형주 강하군 맹현 출신인 비관만이 이엄과 마치 동년배인 양 친밀하게 왕래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어지간히 사교성이 없었던 듯 하다. 매체에서 익주파의 중심인물로 나오는 것에 비해 실제로는 그런거 없다 인 셈. 이엄은 본디 형주 사람이고 적벽대전을 계기로 익주에 들어선 것이라 정확하게 무슨 파벌로 구분 짓기도 애매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다는 비관은 형주사람으로 유장의 친인척으로 익주에 들어 온 거라서 익주 토박이도 아니었다. 애당초 촉한의 지역감정, 갈등 운운은 사서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통치 체제가 미비하던 유장 시절까지 익주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유비와 제갈량이 국가를 정비한 이후 반란은 있었을지언정 신하들이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어쨌거나 한중전 당시 도적 마진, 고승 등이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을 넘어 성도로 진격하려했는데,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따라서 모든 정규군들이 한중으로 가 있었다. 정규군을 징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엄이 지키던 군의 병사 5천명 만으로 반란군 수 만명을 정벌했다. 정벌한 도적과 반란군들이 흩어졌는데, 이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흩어져 다시 모여 세력이 거대해진 도적들을 다시 정벌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월수 만족이 병사를 일으켜 신도현을 포위, 공격했는데 마진을 토벌함과 동시에 기병들을 직접 인솔해서 모두 정벌하고 성을 구원했다.

이릉전 이후 유비가 백제성에 머무르던 시절 이엄을 불러 상서령으로 임명하였고, 유비가 숨을 거두던 시기에는 제갈량을 도와 함께 어린 유선을 잘 보좌하라는 탁고를 주었다. 이엄은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내외가 동시에 들어갔으니 이 경우는 유비 사후를 대비해서 영안으로 집결된 내군과 외군 모두를 통솔케 했다라고 봐야한다고 한다. 이엄은 유비에게 항복한 세력의 상징적 존재였고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제갈량을 보좌할 수 있었으며 행정능력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제갈량을 보좌하는 탁고대신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촉한 세력의 2인자로서의 권위를 가졌고, 226년에는 가절, 광록훈으로서 직함을 받았다. 거기에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는데, 전장군은 다름아닌 그 '관우'가 가졌던 직함이다. 그 중호군 조운마저도 사망 전까지 사방장군이 절대 되지 못했을 정도였기에 이엄이 전장군이 된 것은 촉한에서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이엄은 계속 영안에서 머무르면서 오나라 방면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북벌을 앞두고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서 후방을 맡기기 위해 강주로 이동시켰을 정도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강주는 동쪽으로 영안, 북쪽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를수 있는 중요 지점이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조운이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엄이 중호군/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강주에 남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걸 의미한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위해,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배했고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또 북벌할때 제갈량은 조운을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로 옮기고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조운이 이동하고 이엄에게 중요한 요충지인 강주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엄의 경우엔 제갈량과 같이 탁고를 받았고 그 권한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제갈량과 동등한 탁고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제갈량을 보조하여 유선을 보필하라는 탁고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제갈량도 불순한 행동을 하는 이엄을 함부로 쳐내긴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이엄이 감히 제갈량의 용인없이 그의 권한을 침범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탁고대신이라도 격에서 이미 제갈량이 한참 앞서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4차북벌에서 자신의 부를 이엄에게 맡긴적이 있었을때 제갈량 휘하 관료들이 반발한것도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맹달을 회유할 때도 제갈량과 같이 참여했는데 이엄이 "나는 공명(제갈량)과 함께 선제 유비의 부탁을 받아 걱정이 깊고 책임도 막중합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라고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자 제갈량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 흐르듯 하며,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결정할 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이엄의 자)의 성격입니다." 라고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제갈량은 이엄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위나라의 조진이 공세를 펼쳤을 때는, 한중으로 이동하여 이를 격퇴하는 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230년, 대장군과 동급인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여 황제 유선과 승상 제갈량을 제외하면 촉한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고, 아들 이풍은 강주 도독이 되어 강주의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평[3]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하였고, 동시에 북벌 부대에 물자를 보급해주는 임무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사이에 이평은 몇 차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엄은 강주에서 아들 이풍과 함께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진이 한중을 침공할 당시 제갈량이 2만 병력을 이끌고 증원군으로 오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밍기적거리다가, 제갈량이 경험없고 미숙한 이풍을 강주도독으로 임명하자 그때서야 한중으로 진발, 한중에 도착할 당시 조진은 이미 퇴각한 상태였다. 또한 파, 파동, 파서, 탕거, 부릉, 다섯개 군을 따로 떼어 파주라는 이름의 주를 창설하고 [4] 자신을 그 자사로 삼아달라는 요구를 하거나[5]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왕(王)이 되라는 권유 즉, 찬탈을 권하는가 하면[6][7] 제갈량이 이엄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기려하자 (자신과 같은 표기장군이었던)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하며 은근슬쩍 부(府)의 설치를 요구하는 등, 계속 자신의 검은 잇속을 채우려고 했다. 이는 같은 고명대신이지만 점차 권위와 권력에서 차이가 벌어지는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8] 어쨌거나 그럼에도 제갈량은 이엄의 요구를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들어주면서 그를 다독였다.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견제 못할 권신이었으면 이엄은 제갈량이 진작에 처리했겠지만 이엄이 이런 소리를 하는데도 제갈량이 참고 다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엄의 권위나 권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제갈량이 이엄을 처리하는 것도 이엄의 중대한 실책+그로 인한 전 조정의 신하들을 다 동원해야만 가능했다.


2.1. 4차 북벌과 탄핵, 이후의 삶[편집]


231년 4차 북벌의 노성전투에서 사마의를 격파하고 후방을 기습한 장합까지 물리친 제갈량은 높아진 기세를 이용해 위군을 무찌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평이 자연재해로 물자수급 및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이유로 물자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고, 적진에서 물자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 제갈량은 부대를 물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으며 퇴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마의는 퇴각하는 촉군의 뒤를 치려다 장합을 잃게 된다.

제갈량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평은 거짓으로 놀라며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라며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감추려고 했다. 또한 은폐를 위해 부하 잠술을 처형하려 했으며 유선에게는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표를 올렸다.

하지만 제갈량이 이평과 주고받은 모든 편지가 공개되자, 이평이 자신의 책임을 감추기 위하여 거짓 보고를 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유선 앞에서 엎드려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촉한의 신하들은 전부 이평의 막장짓에 분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제갈량 주도하에 촉한의 신하들 대부분이 지위고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단체로 군부의 실력자이기도 한 이평을 연명으로 탄핵하게 된다. 이에 결국 후주 유선은 이엄을 폐서인하고 재동에 유폐하며 그는 모든 관직과 명예를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재동군에 연금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 때 제갈량이 유선에게 올린 표문을 보면, 제갈량이 이평에게 느낀 배신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제갈량이 올린 상소문을 쉽게 풀이하자면, "한중지키라고 하니까 군 떼서 파주자사를 시켜달라고 떼쓰지 않나, 전쟁나니까 사마의처럼 개부시켜 달라고 하질 않나, 기회타서 지 잇속 챙기려는 거 내가 부하들한테 불만 들으면서도 감싸주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한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뒤로 (표기장군) 이평은 자기 집안만 생각하며 작은 은혜를 베풀기를 즐겨했고 자신의 명예와 안일만을 추구하였으며 나라의 일은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북벌할때 그의 군사가 한중을 지켜주기를 바랐건만 그는 온갖 어려움을 들어 한중으로 오지 않고 외려 다섯개 군을 차지하는 파주자사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정할 때 이평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게 했으나 이평은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평은 천성이 비열하여 신이 출정할 때마다 신을 다그쳐 이득을 보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이평의 아들 풍이 강주를 주관하도록 천거했고 그를 후하게 대우하여 군무를 완수토록 했습니다. 이평이 한중에 온 날에 신이 모든 사무를 그에게 위임하자 상하 군신들이 모두 이평을 너무 우대한다고 질책했습니다.

바야흐로 큰 일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 않았고, 한실이 쇠미해진 형편에서 이평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를 칭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같이 신은 이평의 속셈이 다만 명예와 이득을 추구할 따름인 줄로 여겼사온데, 이평이 이처럼 본말을 전도할 줄은 진정 생각 밖이었습니다. 만약 이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화를 빚어낼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불민한 탓이오니 더 말씀을 올린다면 신의 잘못만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평은 대신이 되어 과분한 총애를 받으면서도 충성을 다하여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근거도 없는 낭설을 지어내고 방자하게 굴었으며 본인에게 불리한 일은 하지 않고 상하를 미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재판을 함에 있어 법조를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사한 일을 하도록 이끌었으며 감정은 저열하고 뜻은 광망해 마치 천지가 없는 듯 했습니다. 스스로가 계획했던 간사한 일이 드러나자 의심이 마침내 생겨 대군이 장차 올것이라는 것을 듣고서 병을 핑계대고 저현과 장현으로 돌아갔으며 군대가 다시 저현에 당도하니 돌연 강양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평의 참군인 호충이 간언하자 마침내 그만 두었습니다. 지금 찬탈한 도적들이 소멸되지 않았고 사직에 어려움이 많은데 국가의 대사는 오직 모두가 화합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포용하여 국가의 대사를 망쳐서는 안됩니다.(중략)...등과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막바로 이평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節傳,한조 관리의 신분증), 인수, 부책(符策, 군주의 관리 임명 조서)을 없애며 작위와 봉지를 박탈해야 합니다."


이때 제갈량이 이엄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 인수, 부책 등을 없애 작위, 봉지 등을 박탈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상서대에 올린 공문에 적힌 이엄 탄핵에 참여한 인물들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대략적인 당시 촉한군 내 서열 순위를 알 수 있다. 이엄전 주석에 언급된 관직 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휘하에 별개 군을 통솔하는 XX장군(+XX중랑장)들만이 각종 군직(감군 이하 군직)을 行(대행,임시)의 형식으로 겸하고 그 이상(전군사, 사방장군)등의 각종 군직이나 관직에는 행직을 붙이지 않으며[9] 행(行)자가 붙는 관직과 같은 서열의 기본관직인 승상부 속관은 이를테면 위연이 북벌 초기에 받았던 승상사마-같은 범주라 원칙적으로 양자는 병렬 불가능-같이 다른 관직과 겸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겸직을 표시하는 영(領)직의 형식으로 겸했음을 알 수 있다.(영 장사 수군장군 양의, 영 종사중랑 무략중랑장 번기) 참고로 오의가 맡았던 관중도독이나 위연이 맡았던 한중독 등의 한 지방을 도독하는 도독직은 적히지 않았다.

  • 행중군사 거기장군 도향후 신 유염
  • 사지절 전군사 정서대장군 령양주자사 남정후 신 위연[10]
  • 전장군 도정후 신 원침
  • 좌장군 령형주자사 고양향후 신 오의
  • 독전부 우장군 현향후 신 고상
  • 독후부 후장군 안락정후 신 오반
  • 령장사 수군장군 신 양의
  • 독좌부 행중감군 양무장군 신 등지
  • 행전감군 정남장군 신 유파
  • 행중호군 편장군 신 비의
  • 행전호군 편장군 한성정후 신 허윤
  • 행좌호군 독신중랑장 신 정함
  • 행우호군 편장군 신 유민
  • 행(후)호군 정남장군(정서장군) 당양정후 신 강유
  • 행중전군 토로장군 신 상관옹
  • 행중참군 소무중랑장 신 호제
  • 행참군 건의장군 신 염안
  • 행참군 편장군 신 찬습
  • 행참군 비장군 신 두의
  • 행참군 무략중랑장 신 두기
  • 행참군 수융도위 신 성발
  • 령종사중랑 무략중랑장 신 번기

실제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장마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 이평은 그 이전에 일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모습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지연의에서 더 극대화되어 이평의 수하인 구안이란 인물이 물자수송에 태만했다가 제갈량에게 곤장맞고 위나라로 귀순해서 제갈량을 모함하는 가상의 장면의 빌미가 되었다.

이 당시 제갈량은 드물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때 이루어진 4차 북벌은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 노성에서 사마의와 장합을 격파하는 등, 전술적으로 촉군의 연전연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근으로 고생하던 옹주 현지의 인심이 크게 뒤흔들리는 등 촉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기에, 어이없는 이유로 퇴각한 데 대한 분노가 그만큼 컸던 것이리라.

여기에, 제갈량이 북벌하기에 앞서 이엄으로 하여금 군량 수송임무를 맡기자, 한중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사실상 제갈량이 한중에 있던 자신의 부를 이엄에게 양도한다는 뜻과 같았다. 이것은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까지 포기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어서, 당시 제갈량 휘하의 막료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엄에게 너무 후하게 대한다며 이를 반대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굳이 이엄에게 후방을 맡겼다. 자신과 함께 선제 유비의 탁고유신이었으니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터. 이엄은 그러나 세상의 도리마저도 그렇게 어그러뜨려 버린다.

이때 제갈량이 받은 충격은 꽤 컸던 듯 하다. 촉은 전통적으로 인화(人和)를 가장 중시하는 나라였거늘, 군량과 병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선전하여 성취의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바로 그 '인화'가 붕괴된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는 가장 아끼는 막료들인 승상장사 장완과 시중 동윤에게 편지를 써서 이러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인다.

진효기가 이전에 오나라로 갔을 때, 나에게 정방(이엄)은 뱃속에 비늘 갑옷이 있어 마을 사람들 모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비늘 갑옷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에 부딪치지 않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았음에도 다시 소진과 장의처럼 궤변을 늘어놓는 일이 또 돌연 뜻하지 않게 나타났으니, 효기에게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본시, 요립과 이평은 제갈량이 폐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이는 제갈량이 복권시켜줄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11] 본인도 잘못했다고 느낀 게 있었는지 이후 이평은 반성하면서 제갈량이 다시 자신을 쓸 날을 기다렸지만, 제갈량은 이평을 다시 부르기 전에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평은 결국 분노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엄의 후사는 그의 아들 이풍이 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엄이 잘리고 그의 아들 이풍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그 역할을 계속하게 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실제 기록으로 보면 이풍은 강주도독으로 있다가 병권을 박탈당하고 종사중랑으로 임명되었다. 어쨌든 그 동안 부여되었던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긴 쪽에 가깝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


2.2. 이엄의 처벌[편집]


제갈량 안티 및 음모론자들은 제갈량이 조정을 완벽히 장악하려고 이엄을 숙청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걸러듣자. 이엄은 선제로부터 황제의 보좌를 부탁받은 중신이다. 위에서 사마의조상 죽이고, 오에서 손준제갈각 죽이는 걸 보고, 아, 탁고대신끼리는 서로 죽여야 되는구나 싶은건지, 유비가 미쳤다고 너네 둘이 싸워서 이기는 놈이 권력 잡으라고 제갈량과 이엄 지명했을까?

물론 이엄은 제갈량에게 황권을 모욕할 것을 권했고, 비상시국에 권력을 나눠달라며 태업을 했고, 북벌로 바쁜 제갈량의 승상부 사무를 제갈량으로부터 가져가고, 국가사업인 북벌을 망치면서 제갈량을 음해하려고 했다. 이는 분명히 유비의 기대를 저버린 행동이고, 국가의 중신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이엄은 황제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고, 죄가 있다 해도 죄와 벌에 대한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선제의 유지를 받든 몸에 따르는 특별 대우는 여전하다.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이 늘 고생하는 게 선대 황제가 신변보증한 자들이 죄 저질렀을 때 그거 재판하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엄 사건의 경우, 현대식으로 풀어볼 때, 이엄이 저지른 그 동안의 죄는 심증/증인(제갈량)은 있지만, 그 증인의 성격상, 그것을 증거로 할 경우 오해를 받기 쉽고, 물증은 없었다. 물증이 드러난 게 231년 북벌의 일이고 그리고 그 증거가 다 밝혀지고 탄핵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제갈량이 이엄의 그간 행각에 대한 증언을 한다. 현대 재판으로 봐도 이건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재판이다.

하물며 안 그래도 국력도 약한 촉이 이런 식의 정치싸움을 하면 뭐가 될까. 양의와 위연이 이런 짓을 했다. 그나마 장완이 없었다면 수습도 미지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장완도 양의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난세에서 법과 원칙을 세워간 촉이 더 대단한 것 아닐까. 삼국의 정쟁에서 정적이 살해당하지 않고 유배로 그친 나라는 촉이 유일하고, 권력다툼이 게재되지 않은 나라도 촉이 유일하다. 이건 촉이라는 나라의 특수성과 제갈량-장완의 품성이 결합된 운 좋은 예지만, 이엄의 아들 이풍이 계속 관리로 임용된 것도 다른 나라에서 볼 땐 경악할 노릇. 제갈량은 이런 식으로 나라의 힘이 소모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제갈량은 이엄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아들 이풍에게 제갈량은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그대 부자가 마음을 합쳐 협력하여 한실을 보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뿐만 아니라 하늘도 다 알고 있는 일이네.

나는 표문을 올려 도호[12]

가 한중을 주관하게 하고 동관(강주)를 자네에게 맡겼었네. 이것은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한 일이요, 진심은 사람을 감동시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확보할 수 있다 하는데, 누가 이리도 중도에서 어그러질 줄 알았겠는가!

지난날 초나라 영윤[13]

은 수차례나 파면되었으나 복직될 수 있었다 하는데, 여기서 올바른 도를 생각하면 복을 받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바라건데 도호를 잘 위로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게 하시게. 지금 비록 관직에서 해임되어 직무와 권세와 가업이 원래보다 못하다 하나 노복들과 빈객들이 1백여 명이나 있고 자네가 중랑장 참군으로 승상부에서 일하고 있으니 동류들과 비기면 그래도 처지가 나은 셈이 아닌가.

만약 도호가 죄과를 반성하고, 한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며, 자네가 공염(장완)과 서로 믿고 같이 일한다면 막혔던 길은 다시 트일 수 있고 잃었던 것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네. 이상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제 다 쓴 서신을 앞에 놓고 긴 한숨을 지으며 눈물만 흘릴 뿐이네.


이풍은 좌천되었으나 재산을 몰수당하지는 않았고, 제갈량 직속으로 승상부에서 근무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 엄한 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때 제갈량이 이풍을 성도나 강주가 아니라 승상부에 둔 것은, 당시 제갈량이 한중에 사실상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풍이 한중에 비교적 가까운 재동에 있는 아비 이엄을 모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엄은 끝내 복직되지 못하고, 제갈량이 숨진 이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제갈량이 숨진 사실을 알고 제갈량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헤아렸기 때문에 격분하여 결국 병들어 죽은 것이다. 이런 반응은 아마 이런 제갈량의 마음씀의 우회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3. 평가[편집]


유비 사후의 촉한의 명백한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상당히 오랜기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했지만, 말년이 좋지 않았던 인물. 이는 본인의 잘못이 크다. 능력도 있었고 정치적 영향력도 컸지만 신하로서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갈량에게 했던 제의들을 본다면, 도저히 촉한의 신하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평도 탁고대신이었던 만큼 제갈량도 이평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평은 형식상으로는 제갈량과 동급의 권위까지는 아니지만 유비가 직접 제갈량의 보좌로서 지명했기에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이 촉한의 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단독으로 이평을 파직시키거나,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만큼 제갈량은 이평을 탄핵할 때 당시 종군했던 거의 모든 무장, 문관들을 모아서 연명 상소를 냈다. 물론 그 중심이 된 것이 제갈량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제갈량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연명하여 탄핵해서 물러나게 했으니 이평을 탄핵한 조치의 의의는 그만큼 컸던 것.

그리고 이 조치를 되물릴 수 있는 정치력도 제갈량만이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 비의는 여러 모로 제갈량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정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제갈량이 생전에 직접 주도한 탄핵 조치를 되돌릴 수 있는 정치력은 가지고 있지않았다. 어느 정도 정책을 조정할 수는 있어도 제갈량은 촉한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평은 제갈량도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위험분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뛰어난 인재였고 후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였으니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으면 좋았겠지만, 강유가 북벌을 할 때면 이평의 나이를 알 수 없지만 활동 연대를 봤을 때 이평은 잘 해봐야 할아버지다. 어쨌든 실제로는 제갈량 사후 바로 죽는데다가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 어쨌든 이평은 제갈량의 4차북벌까지 오나라 방면 방어나 후방 군량수송과 같은 중요 요직을 책임졌던인물인만큼, 능력은 상당했던 인재로 보아야 한다.

계한보신찬의 평가는 냉담하다. 이엄은 선주에게 유명을 받아 후세의 기강 정립에 참여했는데, 의견을 서술하지도 않았고, 협조하지도 않았다. 이단을 만들어 그 시대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므로 임무나 공적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평에 대해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삼국지연의에서도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하는지, 황충과 50합이나 대등하게 싸우는가 하면[14] 제갈량이 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유선과 다른 신하들이 손권의 뒷치기를 걱정하자 "육손을 막아낼 수 있다."란 평을 하였고[15], 맹달을 달래어 5로 군사 중 하나를 물리치기도 했다. 삼국지 연의에서 탁고대신으로서의 중요성은 부각되지 않지만...


4.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엄/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비슷한 사례로는 하평으로 개명한 왕평이 있다. 이엄과 달리 아예 성을 바꿔서 더 혼란을 준다.[2] 이상하게 삼국지 관련 매체에선 이엄을 익주 출신 호족으로 착각하고 일부러 제갈량과 대립시키는 묘사가 많은데, 실제로 정사상 촉한에 이런 대립구도나 파벌이 있지도 않았거니와 이엄은 그 주어진 권한이 결코 작은 게 아님에도 1인자 제갈량에게 항상 권력 좀 더 달라고 땡깡에 읍소하는 권력욕에 찬 2인자 처지다. 이엄은 본디 출신도 익주가 아닌 형주로서, 익주엔 그냥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즉, 근본적으로는 이엄은 그냥 형주 출신에 익주에서도 재간으로 인하여 칭찬받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정도고 이엄 탄핵 때는 형주, 익주 출신 할 거 없이 전부 이엄을 탄핵했다.[3] 이 시점부터 이엄이 이평으로 개명했다.[4] 후에 이는 촉이 망하고 서진 때 촉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졌긴 했다. '양주(梁州)'라는 이름으로.[5] 북벌에 요구되는 군정의 일원화에 어긋나는 처사였기에 제갈량은 이를 거부했다.[6] 이에 제갈량은 '나(吾)와 족하는 서로 안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서로 더는 이해하지 못하단 말이오! 족하는 신하의 길을 고집할 필요 없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은 안된다고 나한테 가르치려 들고 있소. 나(吾)는 본래 동쪽의 낮은 선비로, 선제께서 틀리게 쓰셔서 이미 신하로서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녹을 받고 있음에도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효력이 없어 자신을 알아주심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제, 진(주나라를 도운 제후인 옛 제나라, 진나라)과 같이 귀하고 큰 자리에 앉는 것은 의가 아니오. 위를 토벌하여 조예를 처단해 황제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가시면 더불어 여러분(諸子) 모두가 높아지고(與諸子並升) 비록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데(雖十命可受) 하물며 아홉이랴(況於九邪)!'라고 말했다.[7] 이는 북벌이 성공하면 참여한 제군 모두가 높아진다고 역설함과 동시에 십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고로, 큰 공로로 받는 상에 대한 비유인 것이니 이엄에게 분명히 한실부흥의 의지를 보이고 왕위에 대한 거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량의 논지는 이미 시작할 때 다 나왔다. 어디 칭왕 및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냐는 꾸짖음인 것이다. 십명을 논하는 것도 다른 신하 제군 모두가 더불어 높아져 십명(큰상)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구석에 대한 무시 내지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애당초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유명을 받기까지 했고 그것을 거부하고 고굉지력을 다한 사람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유비로부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한 것을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더러 구석과 왕을 받으라고 논하는것은 교묘한 말로 제갈량을 떠본 것이며, 아마도 제갈량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권모술수 인 것으로 보인다.[8]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탁고하면서 패잔병과 조운이 거느리고 있었던 후방 병력들을 아울러 이엄에게도 군권을 줬지만, 남만정벌 때 같은 공신인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제갈량이 군권을 통수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제갈량 입장에서야 남정북벌은 선제 유비가 그에게 맡긴 국가의 대업이였기에 그가 군권을 통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같은 탁고대신인데 그 군권에서 제갈량에게 밀리게 된 이엄 입장에서는 이런 욕구가 생길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엄이 군량 태클질 하기 전까지는 제갈량이 군 편성 과정에서 이엄에게 허락을 구한다거나, 견제를 받는다거나 하는 대목이 전혀 없기에, 명백한 제갈량 우위에 후방 안정 및 서포트 포지션으로 이엄을 붙여주었는데 이엄이 욕심을 부렸다는 게 타당할 것이다.[9] 예외가 유염인데 유염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10] 여담으로 여기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위연이 제갈량에게 협조적이었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애당초 4차 북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 중 하나가 위연이라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엄이 이렇게 통수를 치지 않았다면 단지 위연이 사지절에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위연 스스로가 잘 알았을 것이다. 위연의 불 같은 성격과 제갈량도 거리낌 없이 욕하는 인격 상 이미 이엄의 정치생명이 끝장난 상황에서 그걸 알고도 위연이 이엄에게 자비를 보여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11] 단순히 자신감 문제만은 아니고 촉의 인재 부족이 심각해서 그 양의조차 재기용할 정도로 인재를 끌어다 쓴 것이 제갈량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엄의 병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 역시 제갈량이고, 그가 촉에서 지닌 권위를 생각해보면 일단 제갈량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복직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서 용서받을 기회는 사라져 버렸고, 제갈량의 후임인 장완, 비의, 동윤 등도 제갈량이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그를 재기용하는 것은 제갈량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12] 이엄을 가리킨다. 중도호를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13] 춘추전국시대 사람 두국우도를 의미, 영윤은 초나라의 재상에 해당하며 두곡우도는 3번 파면되고 복직되었으나 늘 화를 내지 않고 신임 영윤에게 임무 인계를 했다고 한다. 공자가 충성스럽다고 칭찬했다.[14] 게다가 제갈량은 이평이 힘으로 이기지 못할 상대라 판단하고 싸움을 중지시켰다.[15] 단, 이걸로 이엄과 육손이 동급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이 평가는 유리한 위치를 가진, 수비하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인데다, 전통적으로 오나라는 공성전이 약한 편이었다. 손권이 여러 번 합비에서 패배했던 것과 육항이 나헌에게 막혔던 것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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