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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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작과의 차이점
2. 역사와 다른 점
3. 기존 사극과 비교점
4. 실제 역사와 다른 점
4.1. 김류를 폄훼했다?
4.2. 척화론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1. 원작과의 차이점[편집]


  • 나루가 뱃사공의 딸에서 손녀로 바뀌었다. 부모는 이미 사공 일을 하다가 재해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설정. 나루의 나이도 다른데 영화에서는 아직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지만 소설에서는 열살로 나온다.

  • 서날쇠의 설정도 바뀌었다. 원작에서 서날쇠는 이미 피난을 보냈을 뿐 아내도 있고 두 아들도 있는 가장이지만, 영화에서는 아내와 갓난 딸을 정묘호란 때 잃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온 인물로 바뀌었다. 대신 칠복이라는 동생(의동생) 캐릭터가 새로 설정되었다. 원작은 날쇠가 나루를 거두고 그녀가 초경이 온 것을 알고 곧 크면 자신의 아들과 혼례를 시킬 계획을 세우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 서날쇠는 원작에선 가장 여유가 있는 인물이다. 쓸만한 견본이 없어 만들어 보지 못했던 조총을 제외한 화약과 농기구, 무기 등을 두루 잘 만드는 장인이라 남한산성 주변 고을에 서날쇠의 이름이 붙은 기구들이 팔리며 풀무장이, 숯장이들 여럿 부리고, 먹고 살만한 땅도 충분했으며 아내와 두 아들 모두 멀쩡한 가장이다. 기술자 우대로 포위된 성안에서 제법 대우를 받고 천성이 대범한 편이라 윗분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긴 하지만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 최명길과 용골대와의 접선에서 용골대가 다소 하대하고 비웃는 태도였지만 영화처럼 초반에 대뜸 화살비를 퍼붓는다던가, 코앞에 쇠뇌를 겨누는 고압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 서날쇠가 나루를 맡는 시점이 다르다. 원작에서는 나루가 산성에 들어온 직후 김상헌이 나루를 날쇠에게 맡기지만 영화에서는 출성이 결정된 후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날쇠에게 맡겨진다. 덕분에 나루가 김상헌에 대해 느끼는 친근감이 한층 강해졌다 원작에서는 나루가 성에 들어온 직후 김상헌이 날쇠에게 나루를 맡겼고, 날쇠가 김상헌의 부탁으로 성을 비울때를 제외하면 줄곧 날쇠와 함께 하고, 전란이 끝난 다음에도 함께 하기에 이 쪽이 아빠 역이라는 기믹이 더 강하다. 애초에 원작은 인조, 김류, 김상헌, 최명길, 서날쇠는 물론 홍타이지, 용골대, 정명수에게까지 고루고루 포커스가 가 있어서 나루의 비중이 크지 않다.

  • 러닝타임상 표현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이 잘렸다. 날쇠가 두꺼운 무명천을 꿰맬 대나무 바늘을 만드는 장면, 칸의 소재에 대하여 대소신료와 백성들이 온갖 풍문을 퍼뜨리고 주워담으며 혼란에 빠지는 장면, 김류·김상헌·최명길이 온조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 칸에게 보낼 항복 문서 작성을 명 받은 당하관 셋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명을 피하는 장면 등. 원작의 내용이 출성이냐 항전이냐 이상으로 그러한 주장들을 떠들어 대는 신료들의 말[言]들이 얽히고 부서지는 모습, 명분론의 말로 성을 쌓는 김상헌과 현실론의 말로 길을 내는 최명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영화는 이야기의 주제를 보다 현실의 문제로 좁히고 압축하여 전개하였다.

  • 영의정 김류가 원작 이상으로 찌질하게 묘사되었다. 원작의 김류는 일견 답답해 보이지만 죽거나 나갈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킬건 지키면서 나가고자 하는, 김상헌과 최명길과 동등한 비중을 가진 절대 마냉 비난할 수 없는 인물이자 나름 복잡한 속내를 가진 노회한 관료인데 영화에서는 그냥 밉상으로 표현된다. 말고깃국을 두고서 군병들이 김류를 조롱하는 장면에서, 원작은 옆의 비장만 성을 냈을 뿐 김류는 자신의 부덕이니 그냥 두라며 흘려넘겼지만 영화에서는 비장에게 직접 그 군병의 입을 찢어버리라고 지시하다가 이시백, 김상헌, 최명길의 만류와 주변 군병들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고 취소한다. 심지어 선공을 하려다 개박살나는 장면에선 옆의 장수가 바람이 불리하게 불어 화약 장전도 못할 거라고 지적하자 무당이 말한 길일이 오늘이라는 드립까지 치는데, 흡사 길일에 싸우면 금나라 병사들을 이길 수 있다며 육갑신병을 모으다 털린 곽경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마침 두 침략군 모두 여진족이었고. 이는 김상헌을 최대한 충신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적 원작 각색으로 보인다. 김류가 찌질하게 나온 덕에 매번 그를 막아서는 김상헌이 충신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감독 등이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중 김류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음울한 영화의 분위기를 일시적으로 살짝 풀어주는 개그 담당이기도 하다. 헛소리 하다가 옆에서 태클을 당하는 장면이 여럿 있는데 그때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가령 인조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역적 최명길의 목을 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라고 나섰더니 그 인조가 내놓은 "영상의 목을 치라는 상소도 있었다." 한 마디에 그대로 놀라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를 않나, "최명길이 오랑캐의 힘을 너무 과장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의 주장을 인조 앞에서 하다가 역시나 바로 그 인조한테서 "그럼 그대가 명길과 함께 사신으로 가서 그 동태를 살피도록 하라." 는 말이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죽을상을 하면서 청군 진영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된다거나 하는 등.

  • 영화에서는 김류의 책임 뒤집어씌우기에 인조가 이시백에게 곤장형을 내리지만, 원작에서는 김류가 독단적으로 형을 집행하고 나서 보고하고,[1] 인조는 당상관에게 매를 쳤다는 보고를 듣고 놀란다.

  •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김류를 대신해서 제찰사가 되지만, 원작에서 체찰사는 끝까지 김류다. 문제는 상술했듯 김상헌을 체찰사로 임명하는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체찰사라는 사람이 성이 전면공격을 받는 와중에 군사지휘도 포기하고 아이를 보호하러 달려가는 어이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만 것.

  • 산성 밖의 조선 근왕병들이 청군의 집중공격을 당하기도 싫고 어명을 거스른 뒷감당을 하기도 두려워 격서를 태우고 그를 가져온 서날쇠를 죽이려는 장면은 영화만의 창작이다. 원작에서 서날쇠는 남쪽으로 내려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지방관에서 격서를 전달했고, 그가 다시 인근 지방군에 격서를 돌렸다. 영화 내에서 실명은 안 나왔지만 이 근왕병의 도원수는 다름아닌 김자점. 실제 역사에서 김자점은 미원에 주둔하고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에서 도원수와 그 휘하장수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 청나라 칸(홍타이지)이 인조에게 보내는 문서의 내용이 원작 소설의 원문에 비해서 꽤 압축되었다. 원문의 글이 대사로 읊기에는 지나치게 길기는 하다. 그러나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저음 목소리, 음악과 어울려서 위압과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꽤나 인상적이다. 소설 원문에서의 문구는 아래와 같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난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나의 선대 황제 이래로 너희 군신이 준절하고 고매한 말로 나를 능멸하고 방자한 침월로 나를 적대함이 자심하였다. 이제 내가 군사를 이끌고 너의 담 밑에 당도하였는데, 네가 돌 구멍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 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명을 아비로 섬겨, 나의 화포 앞에서 너의 아비에게 보이는 춤을 추더구나. 네가 지금 거꾸로 매달린 위난을 당해도 너의 아비가 너의 춤을 어여삐 여기지 않고 너를 구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 김상헌이 항복이 결정된 후 자결한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원작은 (그리고 역사에서도) 목을 매어 자진하려고 하나 승지에게 저지당한 뒤, 청이 척화신들을 찾는다는 말에 아직 자신의 목숨을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겠다며 살아남기로 한다. 이시백과 함께 배에 올랐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형 김상용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길이 갈라지면서 등장이 종료. 영화에서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방에서 칼로 배를 찔러 목숨을 끊는다. 이 때 사용한 칼은 초반에 뱃사공을 베었던 칼이며, 그가 죽을 때의 모습도 뱃사공이 죽어 쓰러진 모습과 비슷하게 연출된다. 일종의 수미상관적 연출. 실제 역사에서 할복을 시도한 인물은 이조참판 정온으로 이쪽도 미수에 그쳤다.

실제 역사에서 김상헌은 목을 매 자결하려다 실패한다. 당시 정황을 설명하자면 숙소에서 가족들에게 자결할 결심이니 절대로 들어오지도 말라 엄명을 내리고 목을 맸다. 가족들이 어쩔 줄 몰라 바깥에서 곡을 하고 있자 마침 지나가던 관량사 나만갑이(군량을 담당한 관리로 농성때 쓴 '병자록'의 저자)이를 보고 놀라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상헌을 구해냈다. 할복한 정온 역시 죽기 전에 발견되어 치료받고 생존한다.

  • 원작의 김상헌은 역사적으로도 나오는 명분론의 입장을 완고히 고수하는 캐릭터지만,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출성하면 조정에 나가 임금과 백성을 위한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하는 최명길에게 김상헌은 백성들이 나아갈 새 길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이 모두 부서져야 한다. 나도, 최명길도, 우리가 세운 임금마저도 부서져야 새 길이 열린다 고 대답한 뒤 끝끝내 남한산성을 떠나지 않고 죽는다. 그것이 자신이 성 안에서 깨달은 것이라고.


2. 역사와 다른 점[편집]



▲ 제작기 영상
  •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북쪽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실제 김자점은 12월 25일 토산에서 도르곤의 기습을 받고 패전한 뒤 12월 30일에는 남한산성에서 멀지 않은 미원(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평안도 근왕병을 수습하고 경기+황해+함경+강원 4도의 근왕병을 집결시켜 1만 7천에 달하는 병력을 모아두고 있었다.# 따라서 '도원수 김자점이 남한산성 근처까지 병력을 끌고 왔다'는 내용 자체를 오류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후 한 달 동안(그러니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원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아, 이듬해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맞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2][3]

  • 본 작품이 아직 제작 중이던 2016년 10월 3일 청나라 군대는 갑옷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가 떠서 초호화 캐스팅과 CJ의 막강한 예산에 기대하고 있던 역덕들의 발작 버튼을 제대로 누르며 피말리게 하였다.[4] 이유인고 하니 청과 후금은 다르니 청나라 갑옷을 입힐 수 없으며 조선까지 그 먼 길에 갑옷을 어떻게 입고 오겠냐는 것이다. 이에 역덕들은 만주에서 대포도 끌고 왔는데 춥다고 기본 장구류인 갑옷을 입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면서 뇌피셜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가해지는 가운데 10월 11일 의상 디자이너란 사람이 나타나서 해명을 했다. 자신도 그 기사를 보고 뜨악했다면서 아직까지도 의상은 샘플링 중이고, 두정갑을 비롯한 다양한 갑옷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명이 있고나서 일단 논란은 진정되었다.

  • 논란이 지나간 후 스틸컷이 공개되었다. 스틸컷에 나타난 조선군의 재현은 우려와 달리 상당한 수준이었다. 목책 뒤에서 조총을 발사하는 조선군 모습은 기존의 사극에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특히 환도의 올바른 패용법이 묘사되었으며 날쇠가 조총을 수리하는 장면에서 쇠구슬을 주조하는 등 중간중간 지나치기 쉬운 장면에서도 재현을 철저하게 했다. 첨주형 투구와 얇은 갑옷을 걸친 조선군의 모습에서 보듯이 의상에서도 굉장히 뛰어나게 재현을 해 오류에 대한 우려는 단번에 불식되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역덕들에게도 영화가 굉장히 기대된다는 등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청나라의 초기 변발이나 소매가 비정상적으로 넓은 한복의 재현 등 기존 사극에서는 볼 수 없던 색다른 재현들이 많아 재현 면에서는 대다수 역덕후들의 칭찬을 받는다.[5]
하지만 모든 재현이 완전한 건 아니다. 조선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장면의 스틸컷을 보면 조선군 재현은 최상급이나 청군의 복장이 최종병기 활 등에 나온 팔기군 갑주가 아니라 명장(영화) 등에 나오는 청나라 말기 녹영병 복장에 가까워보여 청군 갑옷 운운한 최초 기사와 맞물려 역덕후들의 우려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팔기군의 갑주도 제대로 등장하기는 하나, 제작비의 문제인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인물들만 팔기군 두정갑을 입고 등장한다. 물론 실제 역사 속에서 청나라 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큰 제국에서도 전쟁에 참여한 인원 모두가 갑주를 제대로 착용하고 싸운 사례는 극히 드물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본작 속 팔기군의 갑주 착용인원은 너무 부족한 편이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와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장면만 보더라도 단상에 있는 극소수의 인원만 팔기군의 갑주를 착용하였고 그 밖에는 갑주를 착용하지 않은 청군만 보인다. 한편으로는 타타라 잉굴다이가 정백기 출신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정백기가 입던 백색 갑주를 착용하고 나오는데, 오히려 중국에서는 청나라 사극에서 팔기군 캐릭터를 묘사할 때 도르곤(정백기), 도도(양백기) 같은 일부 네임드급 인물을 제외하면 캐릭터 구분을 위해 갑옷 색깔을 실제 신분은 두루뭉술하게만 묘사한 채 일부러 역사와 어긋나게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보니[6]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점이라 할 수 있다.

  • 조선의 조총 재현은 한국 사극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활의 비중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북산엔딩 영화상에서 활은 무관들만 쓰는 정도로 묘사된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활을 들고 있는 군사가 살짝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에서 활이 사실상 퇴출된 시기는 영정조 시기쯤이며 공식적인 퇴출은 고종 시기다. 이때까지는 활은 조총의 긴 장전시간을 보조하는 역할로 중요하게 쓰였다. 더불어서 천자총통 같은 조선군의 대포도 화면상엔 등장하지 않고 대사로만 언급된다. 다만 인조시대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활의 운용이 조총 도래 이후 화포같은 화약무기를 숭상하여 병장기 정비와 수련을 게을리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을 정도[7]로 지리멸렬 해졌다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 이는 조선이 조총을 임진왜란의 전훈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과 똑같은 문제가 불거진 병과 불균형의 방증이기도 했다.

  • 띠돈 등 조선군의 환도의 패용 재현은 완벽하다. 기존 한국의 사극들은 재현이 잘된 경우를 다섯 손가락으로 세도 남을 정도였으나 남한산성에서는 장수나 무관 모두 올바른 환도 패용법으로 칼을 차고 있다.

  • 홍이포를 '서양'에서 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이 명칭은 틀린 것이 아니며 '서양'이란 용어가 관객에게 훨씬 친숙한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선택이다. 다만 더 옛스런 느낌을 원한다면 양이(洋夷), 색목인(色目人), 홍모인(紅毛人)에게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이건 어디까지나 느낌적인 문제일 뿐 재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당장 병자호란과 멀지 않은 시기에 벌어진 1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이었던 변급이 원정 후 돌아와 효종에게 보고할 때 남겨진 실록을 보면 교전한 노서아군을 '서양에서 온 세력'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불어 조선은 명나라처럼 홍이포를 네덜란드계 세력으로부터 직도입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국을 통해 도입했기 때문에 서양이나 홍모인에게 얻었다는 표현 대신 천자국으로부터 얻었다고 표현해도 문제없다.

  • 영화에서 청나라 군대가 쓰는 언어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만주어이다. 만주어를 전공하고 있는 교수의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8] 대부분의 대사는 자막이 제공되거나 정명수가 통역을 해주지만, 용골대와 최명길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용골대가 하는 "Ya goro? Sini banjimbe cihanggai alibure?(야 고로? 시니 반짐버 치항가이 알리부러? → 어느 정도까지인가? 네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느냐?)"는 정명수가 통역하지 않은 채로 자막 없이 진행된다.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한 장치인 듯하다. 최명길은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한다

  • 정명수가 통역 중 잉굴다이를 부르는 호칭이 '용 장긴(yong janggin)'으로 나오는데, 당시 잉굴다이의 직책이 '장긴'이었던 것은 맞지만, '용골대'는 조선 측 호칭이었을 뿐 만주 사람들은 그를 '잉굴다이'라고 불렀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류이다. 같은 용골대가 등장하는 tvN의 드라마 삼총사에서는 그를 '잉굴다이 장긴'으로 호칭한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9]

  • 만주어 대사는 먼저 전문가가 작성한 뒤 몽골인에게 발음시킨 음성을 녹음해서, 배우들에게 제공해 연기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17세기 만주어와는 음소가 군데군데 다르게 들린다.[10] 또한 문법적으로도 오류가 적지 않다고 한다.[11]

  • 이시백이 곤장을 맞는 장면에서 초관이 참수를 당하는데, 실제 조선에서 죄인을 참수할 때는 귀에 화살을 꽂아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고 완전히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형을 집행한다. 다만 이것은 아직까지 어느 영상매체에서도 구현이 안 된 부분이라... 만화 《칼부림》에는 이를 제대로 그려냈다.[12]

  • 후반부 인조가 숭덕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할 때 이마에 흙만 묻는 정도로 약하게 절을 한다. 삼궤구고두례문서에 나오듯이 '이마에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했다'는 인식과 달리 과격하지 않게 1번 절하면 3번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으로 3회 반복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에 맞게 1번 절을 하고 3번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단, 구령까지 세세하게 재현하지는 않았다. 삼궤구고두례 시 구령은 이러하다. '파이다(faida, 정렬하라)'라는 명령에 자리를 잡고 선다. '냐쿼라(niyakvra, 꿇어앉아라, 跪)'라는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헝킬러(henkile, 조아려라, 叩頭)'라는 명령에 양손을 바닥에 두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린다. '일리(ili, 일어나라, 起)'라는 명령에 무릎을 펴고 일어난다. 여기까지가 한 세트. 이것을 3번 반복한다. 구령을 넣는 것도 원래는 시독학사(侍讀學士)가 해야 하나, 영화에서는 잉굴다이가 구령을 넣는다.

  • 전시상황이라 문무백관은 물론 국왕인 인조 역시 융복(철릭)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융복이 아닌 곤룡포, 익선관에 관복(단령) 차림을 하고 있다. 이괄의 난 때부터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는 시점까지 왕족은 물론 문무조신들은 융복을 착용하는 세월이 많았다.

  • 안타깝게도 조선 장수들의 두정갑에 투구 드림부분이 여전히 펄럭인다. 또한 드림이 지나치게 크다. 투구에 달린 드림은 안면부,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드림에 달린 끈으로 펄럭이지 않게 묶어서 고정시키는데 이 점이 기존 사극처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작중 두정갑을 입고 나오는 청군들은 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호항'을 전투 상황에서는 묶어놓고 비전투 상황에서는 편하게 풀어놓아 재현이 잘되었다.

  • 작중 등장하는 두정갑을 입은 장수들의 투구 드림 내부를 잘 보면 갑찰이 없다. 두정갑 외부에 박혀있는 둥근 못(두정)들은 내부에 있는 갑찰을 고정하기 위한 것들인데 두정은 있지만 막상 갑찰이 없는 기이한 형태다. 갑찰이 없으면 단순히 광목과 비단으로 짜서 만든 외피만 두르고 있는 셈이므로 방호력은 없는 것이다. 착용 편의성과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과감히 빼버린 것으로 보인다.

  • 청나라 병사들의 갑옷이 청나라 말기 한족 출신 녹영 병사들의 흉갑이다.

  • 청나라 초기의 변발 금전서미는 머리 뒤통수에 위치해야 하는데 정수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류가 있다.

  • 명나라를 일컬어 대명제국이란 표현을 쓰는데 동양권 국가에서 제국이란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료상의 기록에서도 제국이란 표현은 19세기 말 근대화 시기에서나 등장하는 서양식 표현이고 이전 동양권 국가에서 중국을 표현하는 이색적인 단어는 천조(天朝), 上國(상국), 천자국(天子國) 등이었다. 즉, 대명제국이라는 정체불명의 호칭보다는 명나라, 대명, 천조, 상국 등으로 불렀어야 알맞은 표기인 것이다. 심플하게 황제, 대국, 명(明)이란 말을 썼으면 아무 문제도 안 됐을 텐데 괜히 있어보이려다가 재현을 못한 것으로 보인다.

  • 인조가 자신을 짐(朕)이라고 자칭하는 부분이 있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소 거칠게 묘사된 부분으로, 짐(朕)은 기본적으로 황제가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인 탓이다. 조선은 중화의 제후국을 자처하였으므로 조선 왕이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은 '과인'(寡人), 또는 현대국어처럼 단순히 '나'(予/余/我)라고 하였다.[13] 실록에서 짐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 맥락을 보았을 때, 드문드문 왕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데 사용하기도 하여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짐'은 왕이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있거나 외국과의 외교문서등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시절부터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

  • 정명수가 상투를 틀고 나온다. 이미 청나라로 오래 전에 끌려가 청나라 사람이 된 터이니 변발을 해야 하는 것이 옳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선 정명수가 변발로 나왔다. 이 오류로 정명수가 청으로 귀순한 조선인이라는 점이 잘 강조되긴 했다.

  • 대장장이 날쇠가 김상헌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게 가마니를 내어달라 청하는데, 가마니는 1900년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가마스(かます; 叺)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시기엔 존재하지 않는 어휘다. 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괜찮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한 가마니도 가마니보다는 거적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가마니는 쌀을 담는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쌀이 세지 않도록 짚을 촘촘하게 엮어야 되는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가마니는 짚을 가로로 쭉 늘어놓고 세로로는 달랑 지푸라기 다섯 줄로 대충 엮어 만들어진 형태다.

  • 영화 정중반부에, 인조가 새해를 맞아 산성 안에서나마 명 황제에게 국궁사배(鞠窮四拜)를 올리는 장면이 있다. 이 일은 사실이나, 집사(제례에서 멘트를 하는 사람)가 문하는 방식이 틀렸다. "국궁사배"를 외친 뒤 헌관(인조)이 엎드리면, "배(拜, 절을 하시오)", "흥(興, 고개를 드시오)" 순으로 4세트 반복한 이후에나 "흥, 평신(平身, 몸을 일으키시오)"외쳐야 맞다. 영화 속에서는 시작하자마자 "국궁사배 흥 평신~"이라고 외친 뒤 인조가 알아서(?) 사배를 시작하니, 오류다. 또한, 정축년 당시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본래 이와 같은 일로 아악을 연주하는 일은 없는 편.


3. 기존 사극과 비교점[편집]


  • 기존의 호란과 관련됐던 사극(광해, 왕이 된 남자, 최종병기 활 등)에서 문제가 되던 지나친 중립 외교 찬양, 만물 친명원인설이 배제됐다.[14] 광해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광해군이 친명이 아닌 것도 아니며 외교 실력이 탁월했던 것이지 중립외교론자는 아니었다.

  • 보통의 사극에서 척화파라고 하면 민생과 동떨어진 세력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남한산성은 그렇지 않다. 최명길과 김상헌 두 사람 모두 충신이라는 걸 확실히 하고서 척화와 주화의 대립이 펼쳐진다. 도리어 척화파 김상헌은 백성들과 만나는 장면을 많이 넣어 민생을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주고 있는 반면에, 주화파 최명길은 백성들과 접점이 없고 인조와의 장면이 대다수다. 김상헌을 평면적인 고리타분한 꼰대로 묘사하지 않으려고 애쓴 듯한 전개다. 척화와 주화의 표면적인 모습만으로는 아무래도 주화의 현실주의적인 모습이 현대 관객들에게 더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척화파 역시 나름대로 백성을 위하며 노력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그 균형을 맞출 수 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대신 다른 관료들이 꼰대마냥 표현되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영화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은 인조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격하게 언쟁하지만 사적으로는 서로 예의를 지키며 다른 부분에서는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꽤 있는 것으로 나온다.

  • 인조가 기본적인 인품, 위엄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었다. 전형적인 암군으로 묘사되어 온 여타 매체에서의 인조 모습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점이다.[15] 하지만 극한 상황에서 혼란스러워 하거나 패닉에 빠지기도 하는 등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전쟁의 암울한 상황에서 왕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감정을 중립적으로 그려내었다. 원작자인 김훈 작가와 황동혁 감독 모두 시사회 기자 회견에서 공통적인 인조를 "위대한 임금은 아니지만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통 받은 한 명의 나약한 개인."이라고 평가했다. 두 원작자가 인조를 바라보는 온정적인 시각이 영화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기존 사극과 비교해서 조총병과 궁병에 대한 재현이 극단적이다. 기존 사극이 조총병을 과도하게 무시했다면 이 영화는 궁병에 대한 재현을 극단적으로 무시하고 조총병을 강조한다.


4. 실제 역사와 다른 점[편집]


  • 전체적으로 남한산성 공성전 진행과 조선과 청나라와의 교섭 등이 매우 단순화되고 중요한 디테일도 대거 생략되었다. 예컨대 후금에 인질로 갔던 박난영이 가짜 왕제[16]와 대신들을 데리고 청나라 진영을 방문했다가 마부대에게 참수된 과 같은 임팩트 있는 일화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 김상헌이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자결을 시도하다 제지를 받아 죽지 않고 척화파를 압송하라는 청의 요구에 따라 심양에 갔다가 소헌세자가 귀국할 때 돌아온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칼로 배를 찌르는데, 기록을 보면 김상헌은 목을 매었고 칼로 배를 찌른 것은 이조참판 정온이다. 이 사람도 앞에서 얘기했듯 미수에 그쳤다. 한편 농성 도중 의견차로 마찰을 빚은 최명길은 당시 김상헌의 자결이 보여주기식 쇼라고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가 조선에 대해 강경하고 고압적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약간이지만 조선에 호의적이었다. 오히려 타타라 잉굴다이를 조선에 대해 관대한 것으로 묘사하고 숭덕제를 조선에 대해 강경한 것으로 묘사하는 게 올바른 묘사다. 아마 박씨전 등 숭덕제를 대범한 군주로 묘사하고 타타라 잉굴다이를 매우 강경한 인물로 묘사하는 한국 고전소설들[17]의 영향인 듯하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조공관계가 끝나기 전까지 조선에서는 외교적 문제 때문에 숭덕제를 대놓고 비판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김상헌 역의 김윤석이 김류 역의 송영창보다 젊게 나온다. 실제로는 김상헌이 김류보다 1살이 많다. 이건 우리나라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1980년대에 방영된 <조선왕조 500년>의 남한산성편 에서는 그나마 김상헌이 김류보다 나이 들게 나오는데 그나마 최근에 방영된 JTBC 꽃들의 전쟁 궁중 잔혹사를 보면 김류가 ~~하시게 체로 김상헌을 하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뭐. 김상헌이 효종때가 되어서 좌의정이 된 지라 영의정을 여러번 지낸 김류가 하대할 수 있겠지만 하대는 둘째 치더라도 분장이 심하다. 김류는 나이에 맞게 6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김상헌은 좋게 봐야 50대 언저리다.

  • 또 김자점 부대 말고는 근왕군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실제 역사를 보면 지방군들은 당연히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 것을 알고 다수가 구원에 나섰으나 청군에게 박살나거나 그밖의 사정으로 남한산성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이 청군에게 패한 대표적인 전투가 쌍령 전투다.[18]

  • 소현세자 역할을 2001년생의 17세 아역배우인 신기준이 맡았다. 따라서 영화 속의 소현세자도 앳된 소년으로만 보이며, 인조는 청나라 볼모 역을 자처하는 소현세자를 "아직 어린 세자를 적국 볼모로 보낼 수 없다"며 제지시킨다. 실제로는 호란 당시 소현세자는 25세의 장성한 청년이었다. 인조 역의 박해일이 동안이라 그 아들 역에 20대 배우를 캐스팅하면 부자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로 느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렇게 한 듯 싶다.

  • 홍이포의 위력이 매우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물론 홍이포는 당시 동양에서는 잘 쓰이지 않던 거대 화포였고, 포의 구경은 당시 조선의 가장 큰 화포인 천자총통보다 작지만 포신의 길이가 훨씬 길고 화약 소모량은 4배가 넘어서 화력은 훨씬 강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쇠뭉치를 날리는 전근대 대포라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폭발은 일으킬 수 없었다. 심지어 서양에서도 1870년 보불전쟁 이후에야 도입되는 주퇴복좌 기능까지 나온다. 실제로 홍이포 정도의 화포는 기껏해야 성벽 위의 엄폐용 담장인 성첩을 무너트리거나 석축 일부를 파손시키는 게 한계다. 수십 문을 동원해서 집중사격을 하면 성벽에 구멍 정도는 낼 수 있긴 한데, 애초에 청군이 동원한 홍이포 자체가 극소수였다. 게다가 한국식 산성은 비탈길을 깎아 만든 절벽에 석축을 덧대는 방식으로 지어져 성벽이 무너져도 내부의 절벽은 그대로 남는다. 추가로 산성 자체가 고지대에 위치하여 공격자는 일단 무장한 상태에서 빡세게 등산을 해야한다. 따라서 산 자체를 때려부수는 게 아니라면 홍이포 따위론 남한산성에게 큰 타격을 못 준다. 기본적으로 자연 지세를 이용한 방어 시설이라 인간이 쬐끔 덧붙인 구조물의 유무가 생각보다 전체적인 방어 능력에 기여하는 게 적다.

  • 다만 당시 사람들이 홍이포 때문에 심리적 위축을 겪은 건 사실이다. 1월 24일 청군은 남한산성에 홍이포로 멀리서 포격을 가하는데 그 결과 성첩이 여러 군데 무너졌으며 포탄이 행궁의 천장까지 뚫어버리고 바닥에 깊이 처박혀서 다들 겁먹었다고. 재수 없으면 산성 자체는 건재해도 국왕 대가리가 먼저 깨질 수 있으니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다.

  • 역사적 사실을 축약하느라, 인조가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성이 함락되면 모두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심' 정도로 단순화시켰다. 실제 역사에서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게 된 주된 원인 중 하나강화도가 함몰되어 왕위계승권자들이 줄줄이 붙잡힌 것이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원손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이 있었다. 청군이 섬을 장악했다는 것은 그들이 전부 포로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남한산성에 그 사실이 전해진 것은 1637년 1월 26일의 일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인조는 그동안 극력거부하고 있던 출성을 약속하는 서신을 청태종에게 보내게 된다. '조선의 왕위 계승 순위 2, 3, 4순위자가 포로가 되었다.'는 부담감이 '난공불락인줄 알았던 강화도가 적에게 넘어갔으면 남한산성도 머지 않았다.'는 공포심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인조가 출성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19][20] 그보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추위, 굶주림,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분노, 무엇보다도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실록은 그다지 성의있게 다루고 있지 않지만 승정원일기연려실기술에는 그러한 사정이 잘 나와 있다. 1월 22일에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변해서 극단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軍情已變, 事將罔極]"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부터 조선 정부는 외부의 적과 맞서는 것보다 군사들을 달래는 데 진력하게 되었다. 1월 23일 남산산성의 수비군 수백 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다.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병조의 하급 관리를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인다.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보여 달라."며 야유를 보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보다 심각하다[今日軍情, 甚於外敵]"고 할 정도였으니,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 이시백이 무신으로 나온다. 이시백은 작중 내내 갑옷을 입고 청군을 상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하며, 심지어 최명길이 그의 앞에서 나도 그대처럼 무과에 응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등 완벽한 무인으로 묘사되었다. 실제 이시백이 수어사로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방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시백의 근본은 문신이었다.

  • 김상헌과 최명길이라는 두 충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당시 남한산성에 같이 있던, 할복으로 굴욕에 항거한 이조참판 정온이나 자진하여 청나라 진영에 압송되는 척화신이 된 삼학사 등의 존재를 생략했다. 원작 소설에선 윤집과 오달제를 등장시키고 인조가 눈물로 이들을 전송하는 장면이 나온것과 차이가 있다.

  • 영화에서는 최명길이 조선에 문장가가 김상헌밖에 없겠냐며 화친을 반대했던 그 이름을 지켜달라고 청하는데, 실제 기록에 따르면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김상헌이 찢어 버리자 최명길이 이를 다시 주워모았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처럼 주워 모으는 자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최명길이 항서를 바치기 직전, 남한산성의 성벽이 무너지고 산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고, 최명길의 항서를 받고 청 태종이 공격을 중지하는데 이는 허구이다. 실제 남한산성 전투 내내 청군이 성벽 장악을 시도할 정도로 병력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현실에서는 농성 초기 무기력했던 조선군이 차츰 몰래 기어나와 청군을 기습하기까지 하자 적극적인 공성전을 줄이고 장기전을 시도한다.


4.1. 김류를 폄훼했다?[편집]


"당시의 김류는 조정 신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골몰하던 보수파적 인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는 병자년 이전부터 도체찰사직을 맡아 수행하면서, 주화론적 입장에 공감하는 동시에 척화파의 말대로 청과의 결전이 이루어질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북변 방어 체제 구축에 상당한 성의로 임하는 등, 합리적인 면모를 보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김상헌을 조선의 충신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김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과하게 깎아내렸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김류가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성 밖의 적군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냈고, 그 후에 아랫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다.

○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 뿐이었다.

(중략)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병자록》 《잡기》

연려실기술 제25권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실록만 보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찬 사서인 병자록(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에는 이와 같이 김류의 찌질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김류의 명령으로 장교가 아군을 베어 죽였던 것도 실화였다. 영화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상자를 축소 보고하기까지 했다.

실록이 병자호란의 주요 전투들을 대체로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연려실기술이나 병자록·남한일기류의 각종 사찬 사서는 상세하게 기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병자호란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사찬 사서들도 중요한 1차 사료로서 취급한다. 그것이 그 사료들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뜻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가 김류를 깎아내리기 위해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9일 기해 3번째기사


관련 기록들을 김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실록과 교차 검증되는 부분만 인정한다고 해도, 김류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었음은 사실로 볼 수밖에 없다. 위의 29일자 기사는 누구의 명령으로 출병을 이뤄졌는가를 명시하지 않고 김류가 후퇴를 명령한 사실만 강조하고 있어 패전에 대한 김류의 책임을 상당 부분 면책시키고 있으나, 연려실기술이 기록한 대로 출병을 명령한 주체가 체찰사 김류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2번째기사


이와 같이 바로 이튿날 기사에서, 인조가 병력 구성이 보병 위주임에도 고지의 이로움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간 실책을 김류에게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도 아는 병가의 이치를 야전에서 구르는 직업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으므로, 성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장수들이 출병을 만류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무리한 작전을 누구보다 꺼렸을 것은 당연히 병사들일 것이므로, 산성 수비군이 산에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 그러자 장교를 시켜서 사람들을 베어가며 사지로 몰았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일선 지휘관급만 8명이 전사했고 김류가 임금에게 잘못을 빌 정도의 대패였으므로 사상자가 300명이 넘었다는 기록 역시 허황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이에 대해, 남한산성 포위 초기에 남한산성 수비군이 출성 전투에 적극적이었음을 드러내는 실록 및 승정원일기 등의 기사들을 제시하며 "상기의 병자록 기사는,(김류가 성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병졸들을 억지로 재촉해서 떼로 죽게 만들었다는) 김류와 사이가 나빴던 나만갑이 사실을 왜곡한 내용이다."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적과 싸우기를 자원한 병사들로 이뤄진 '자모군(自募軍)'의 활동 기록을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러한 기록들은 12월 24일까지에 그친다. 그런데 병자록에 나오는 남문 밖(실록에서는 북문 밖) 전투는 12월 29일에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며칠만에 그렇게 돌변할 수 있냐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전쟁 진행 과정에서 태도를 완전히 뒤집은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위의 실제 역사와 다른 점 항목에 나오는 1월 27일 인조의 출성 고지만 살펴 봐도, 인조는 그 불과 며칠 전까지도 본인은커녕 세자의 출성 건의조차 "율로 다스렸던" 상황이었다. 저 포스팅을 참고해도 12월 25일과 29일에 청의 포위 병력이 상당히 증원되었으므로,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출성을 꺼리게 되었다고 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에 문제의 전투가 청 병력이 많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으로 가정한다고 해도, 이는 김류에 대한 진정한 변호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병사들이 출전을 기피했다는 병자록의 기록이 과연 사실이었나 의심할 여지는 커질지 몰라도, 대군도 아닌 적에게 대패한 책임자의 무능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설령 위에 인용된 병자록 기사를 날조로 치부하더라도, 실록의 관련 기록까지 허위로 간주하지 않는 이상 12월 29일 남한산성 수비군이 야전에서 대패했으며 그 책임자가 체찰사 김류였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21]

이 전투 하나만으로도 병자호란의 김류는 까일 만 하다.

12월 14일, 인조는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개성 유수의 장계를 받고 강화도로 파천을 결심했으나, 한성부를 뜨려는 순간에 적군이 양철평,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적지를 바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김류는 기껏 들어온 요새에서 엉뚱하게도 다시 강화도로 옮겨 갈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적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경기도를 크게 가로질러 다른 피난지를 구하자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2차 몽진이 시도되었으나, 눈보라가 몰아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던 까닭에 결국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김류는 그 후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병조판서 이성구와 함께 강화도 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물론 김류가 강화도에 꽂혀 있던 것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섬이라서 방어에 유리했고, 평야를 품고 있으니 군량도 넉넉했을 것이다. 멀리는 몽골 침입 때 가까이는 정묘호란 때도 북방 이민족에게 함락되지 않았던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강도(江都)가 탐스럽게 보여도 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산성에 들어왔으면 거기서 버틸 생각을 하는 게 맞다. 굳이 또 이동을 하겠다면 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을 선택했어야지, 서북에서 내려온 적을 맞아 서북방으로 이동해서 강화도로 들어가자는 것은 어리석은 제안이었다.

12월 17일에는 인조에게 송고종의 고사를 들먹이며 최소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탈출하라는 도박을 제안하기도 했다. 본인도 그러한 계책은 만에 하나의 행운[萬一之幸]을 바라는 요행수임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김류는 전시 재상으로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가 가장 강조한 김류의 부정적인 면모는, 처음에는 무책임하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사세가 불리해지니 살고 싶어서 주화론으로 돌아서는 기회주의적 행태였다. 이것이 현대인의 일방적인 매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당대, 그러니까 병자호란 당시부터 김류는 그러한 인물로 세간에 비춰지고 있었다.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하고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진실로 이 무리들을 베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끝내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 듯싶습니다. 신이 근일에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익숙히 보고 통분스러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한마디 하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국사를 맡고 있어 말해도 무익할 뿐 분란만 초래할까 참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이미 끝장이 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한번 죽을 계획을 결심하고 어리석은 심정을 모두 진달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이 무고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지시거든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간교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송(宋)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죽을지언정 차마 이 무리들과 함께 천지 사이에 서지는 못하겠습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12번째기사


1637년 1월 22일부터 조선 정부는 청나라 측에서 요구한 척화신의 압송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그래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자, 누구를 보내야 하나, 보내서는 안 된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조정이 들끓었는데, 위의 상소는 압송을 반대한 의견 중 하나다. 이 상소에서 글쓴이는 척화신들을 적진에 보내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며, 똑같이 척화를 주장했음에도 중신들은 책임을 면하게 된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러면서 입에 올린 게 바로 김류의 이름이다. 얼마나 꼴 같지 않았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두고 죽여버리자는 극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때 조선 조정에 척화에서 주화로 돌아선 인물이 한둘이었겠냐만은, 상소를 올린 유계가 언급한 실명이 김류 하나였던 걸 보면, 김류가 그런 면에서 뭔가 남달랐긴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김류는 이런 짓거리까지 했다.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3번째기사


일국의 재상으로서 동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청나라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난 날 척화를 입에 올린 사람이라면 누가 강하게 주장했네 약하게 주장했네를 가리지 말고 전부 잡아 보내자."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자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호란 당시에 대간#臺諫들이 사사건건 태클 거는 것에 질렸는지, 내가 오랑캐를 배척하자 주장했으니 나를 묶어 가시오 하며 자수한 사람들과 함께, 특별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의 관리들 전원을 지목하고 있다.

인조 시기 전반을 그렸다면 모를까,[22] 남한산성 전투 시기만을 다룬 창작물에서 당시의 조정 대신 하나를 악역으로 삼자면 김류만한 자가 없었던 것이다.


4.2. 척화론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편집]


일각에서는 척화론이 단순한 명분론이 아니라 실리적인 면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척화론의 근거가 선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탓에 관객이 척화론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있다. 척화론자들은 결코 명과의 의리와 같은 명분만을 놓고 척화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여진·거란 등의 유목민족들은 늘 급양 능력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군세를 끌어모은 후 기병의 빠른 발을 이용해 수도를 직격해서 적의 우두머리를 붙잡고 항복을 강요한 뒤 병참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군사를 물리는 속전속결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므로 설사 남한산성의 성첩에 붙어 있는 대신과 왕이 전부 죽는다 하더라도, 항복 조약을 맺지 않고 적의 보급이 한계에 이를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전술적 패배는 있을지라도 전략적으로는 우리의 승리라는 것이 척화론의 근거였던 것이다. 대명 사대라는 명분은 조정의 이러한 주장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였을 뿐이다. 즉 척화론은 지도층이 전부 죽더라도 국가는 살아남아서 자주를 지켜야 한다는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현이었지 비현실적인 교조주의가 아니었다. [요약]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병자호란 발발 전과 진행 과정에서 제기된 척화론은 철저히 교조주의적인 명분론 위주였다는 반박이 있다.

1636년 초까지 인조 정권은 내심 만주 왕조를 경멸하면서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계승했다는 평가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후금의 침략에 무력하게 무너진 전적이 있었으니, 다들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정에 척화론이 득세하고 외부적으로도 반청 기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636년 용골대의 입국 때부터다. 그때, 나중에 삼학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사헌부의 홍익한이 이런 상소를 올린다.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중략)

그들이 맹약을 변경하고 흔단을 연 것은, 우리를 호통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삼았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한 다음 형제의 약속을 배신한 것과 참람하게 천자의 호를 일컫는 것을 책하면서 예의의 중대함을 분명히 말하고 이웃 나라의 도리를 상세히 진술한다면, 우리의 설명이 더욱 펴지고 우리의 형세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만일 신의 말을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1번째기사


결론은 후금 사신을 참수해서 그 머리를 명나라에 바치자는 거다. 척화의 근거는 대명 천자 타령, 소중화 타령, 사대 타령 뿐이지, 중원 왕조와 만주 왕조 사이의 전쟁은 명조의 승리로 끝날 테니 그 때에 대비해서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식의 실리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다.

홍익한만 이랬던 게 아니라 척화론을 주장하는 신료들은 하나같이 현실 감각이 마비된 자들이었다.

"오랑캐의 국서를 태우고 사신을 참해야 하며 그러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후세에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홍문관의 상소

"조선이 일어난 근본이 중국을 섬기는 데 있으니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천심을 거르는 것이요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는 홍문관 교리 조빈의 상소

"정묘년에 지긴 했지만 그 후로 싸운 적이 없으니 실제로 붙으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것"이라는 이조 참판 정온의 차자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척화하겠다는 '정론'이 바뀌었음이 슬퍼서 통곡하고 싶다"는 홍문관 교리 김익희, 부수찬 이상형의 차자

'실리적인 관점의 척화 주장'의 근거로 거론되는 사료는 이런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사(虜使)에게 증여하는 것과 변방에서 교역하는 것을 모두 토산물로써 하고 중국 물건을 파는 것을 일절 금하여서 뒤폐단을 막고 후환을 끊으면, 중국이 우리 나라의 기미책을 듣고 그 부득이한 사세를 알아서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나라가 중국 물건을 가지고 오랑캐와 호시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대노하여 절교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번 모 도독(毛都督)이 무고했던 말과 일치하니, 신은 조정이 무슨 말로 변명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설령 중국이 너그러워서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에서 가져다가 원수인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비춰볼 때 어떠합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흉적은 가까워서 그 세력이 두렵고 중국은 관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부모의 자애를 믿고 공경하기를 태만히 하며, 도적의 침략만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인조실록 17권, 인조 5년 12월 25일 戊午 4번째기사


김상헌이 후금과 교역할 때 우리 나라 물건은 팔아도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치고 있으니 척화론이 단순히 명분론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글은 명나라가 취할 수 있는 보복 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막연히 배척[斥絶]을 우려하는 정도다. 실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김상헌이 중국 물건으로 교역하지 말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대국의 질책' 같은 것이 아니라 '천조(天朝)',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바르게 섬기는 '대의(大義)'였다. 중국이 뭐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당연히 안 하는 게 신하 나라로서의 도리란 거다.

'실리주의적인 척화론' 비스무레한 것은 역설적으로 척화론이 초래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된 다음에 나온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위로는 지존이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래로는 60만이 넘는 백성들이 청의 포로로 끌려가는 되는 참화를 입게 되자, 비난의 화살이 전쟁 불사론을 펼치며 외적을 불러들인 척화파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병조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일찍이 정사하는 자리에서 노하여 문관들을 질책하기를,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라 일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하였고, 참찬 정기업(鄭基業)이 그 말을 찬양하여 자못 기세가 당당하였다. 좌랑 남노성(南老星)이 나가서 처자를 찾다가 붙들려 그날 저녁에 진작 들어오지 못하니, 기광(基廣)이 노성을 끌어내었다. 대개 기광은 오랫동안 사류(士類)들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무장(武將)에게 붙어 거칠고 패려함이 이와 같았다. 구굉(具宏)이 팔뚝을 걷어 붙이고 큰 소리치기를, “윤황(尹煌)이 늘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서라도 쳐서 물리치겠다.’ 하였는데, 여덟 아들이 어디 있는가. 화친을 배척하기를 주창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만일 윤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크고 작은 무인들이 성을 지킨 공은 무장들이 이룬 것이고 오늘 성을 나온 것은 중흥과 같은 것이라 하면서 교만 방자하여 문사들을 노예와 같이 보니 사람들이 모두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연려실기술 제25권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그러니 척화파로서는 싸우자고 하다가 진짜로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서 형편없이 지고 말았지만, 대청 강경책 자체는 할 만했다는 식으로 자기방어 논리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실질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친명-반청 정책을 입안하기는 커녕, 대외 확장 정책을 펴고 있는 이웃 나라에 대해 적대하는 태도를 보인 정권으로서는 필수적인, 철저한 전쟁 준비조차 내팽개친 자들이었다.

사실 조선의 지배층이 실용적인 판단에 입각해서 대외 정책을 펴 나가고 위기에 임박해서는 실질적인 대비책을 세웠으리라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현대인의 시각'이다. 전근대인 특히 조선 중기 집권 사림 세력들의 정부 운영 기조는 그러한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는 그랬다.

인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한명기 교수는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한 척화신의 억설로 마무리한다. 영화가 당시 조정을 '무의미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무능한 자들'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 과연 안타까워 할 일일까?

김수현이 말했다. "낮은 백성들이 도륙을 당할지언정 주상께서 어떻게 성을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壽賢曰, 下民雖爲魚肉, 自上豈可出城?

승정원일기 55책 (탈초본 3책)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16/21 기사

[1] 바지는 벗기지 않고 중곤 20대.[2] 굳이 김자점을 위해 변호를 해보자면, 미원에 모인 병력은 머리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투를 피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당시 조선군의 정예는 중앙군과 관서군이었다. 중앙군은 남한산성의 인조를 지켜야 하니, 김자점의 관서군이 청군을 막아야 했는데, 이 군대가 토산 전투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전력이 없으니, 거느린 병력이 일만이 넘더라도 청군을 상대로 승산이 없고, 그래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토크멘터리 전쟁史 - 184부 동아시아 전쟁사 남한산성 수성전I(21분부터)[3] 앞주석의 영상에서는 '김자점이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가 받은 처분이 정말로 부당한 처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김자점은 관서도원수로, 체찰사 김류와 함께 조선군의 사령탑이었다. 전쟁이 패전으로 끝난 이상, 그 책임을 군의 수장이 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또한 '미원에 오합지졸만 모여있어서 전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는 분석 역시 김자점에게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미원의 전력이 부실했던 것도, 김자점이 토산에서 정예군을 상실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 전장에 대한 지리적 정보에 더 밝은 쪽은 침략한 측이 아니라 방어하는 측이다. 그런데 토산 전투는 그 방어군이 공격군의 기습에 당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비유하자면, 일본 함대가 조선 함대를 울돌목으로 유도하여 일망타진한 격이다. 이런 졸전으로 조선군의 주력을 말아먹었는데, 김자점에 대한 처벌이 마녀사냥이라 하는 것은 온당한 평가라 보기 힘들다.[4] 현재 해당 기사는 문제의 대목이 안보인다. 10월 12일에 수정되었는데 이때 삭제된 듯.[5] 원래 왕은 버선도 붉은색을 신는데 이런 작은 점도 재현하였다. 다른 사극에서는 신을 신으면 나오지 않아서나, 재현에 신경쓰지 않아서 혹은 소품(붉은색 버선) 구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일반 하얀 버선을 신고 나오는 경우도 많다.[6] 청나라 배경 중국 드라마의 중심은 아무래도 강건성세의 황족과 외척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호적상으로 양황기, 정황기인이기 때문에 갑옷 색깔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한 몫 했다.[7] "접때 이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사 기술은 오로지 화포를 숭상하는데, 싸움터에서 갑자기 바람이나 비를 만나면 화포는 필시 쓸데없게 될 것이니, 활쏘는 기예도 함께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효종실록[8] 최종병기 활이 한국 사극 매체에서 청나라 인물들이 만주어를 쓸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덕을 보았다. 최종병기 활 이후 만주어를 재현한 또 다른 작품으론 똑같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이 있다.[9] 심지어 삼총사가 남한산성보다 먼저 나왔다.[10] 예를 들어 h가 마찰성이 과해 k에 가깝게 들린다든지.[11] 예를 들어 삼배구고두례 장면에서 배(拜)를 niyakvrambi(무릎을 꿇어 절하다)가 아닌 mehumbi(선 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12] 지금까지 존재한 한국 사극 중에서 최고의 재현을 자랑한다. 만화는 제작비 신경 안쓰고 그리기만 하면 되잖아!! 남한산성과 칼부림 모두 같은 시대를 다루는 것도 보면 재미있는 요소다.[13] '고'(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긴 한데 문헌상에서 조선 임금이 스스로를 孤라고 지칭한 경우는 없다. 다만 孤자체가 아주 근본없는 어휘는 아니고 중국에서 황제를 모시는 제후들이 스스로를 孤라 칭한 적은 있었다.[14] 다만 대명의 경우 반대로 명나라를 지나치게 선하게 묘사하고 청나라를 지나치게 악하게 묘사해서 문제가 된 바 있다.[15] 실제로도 인조는 무능한 왕이긴 했지만 인성까지 바닥을 치게 된 때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이다. "아비된 도리로 어찌 자식을 사지로 내몰겠는가"라는 논지로 항복하자는 의견을 거부한 것 역시 이 당시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불신은 소현세자 내외가 심양에 체류한 뒤, 정확하게는 섭정왕 도르곤에게 간청해 끌려온 조선인들을 일부 풀어달라 한 뒤 그곳 심양에서 농장을 일구며 청 황실로부터 점차 신임을 얻게 된 이후부터다.[16] 능봉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형 영양군의 증손자로 인조의 8촌 동생.[17] 다만 해당 소설들도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만선사관마냥 대놓고 숭덕제를 찬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다.[18] 영화에서 쌍령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근왕군이 서날쇠를 죽이려다 도리어 청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 모습이 묘사되었다. 실제 쌍령 전투에서 아군 내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듯싶다.[19]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丙寅 4번째기사 참조.[20] 다만 원손은 실제로는 청군에 붙잡히지 않았다. 송국택, 민광훈이 원손을 데리고 교동으로 들어감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남한산성에 뒤늦게 전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전황에 별다른 반전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21] 만약에 29일의 출성 전투가 인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김류는 어디까지나 떠밀려서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었다고 본다면, 30일 인조가 보인 유체이탈 화법은 그야말로 아연한 것이 된다. 김류는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조가 한심한 암군이라는 근거는 오히려 강화되는 것이다.[22] 김류는 정원군 추숭 논의에 반대하다가, 인조의 분노를 사서 관직을 잃고 쫓겨난 전적이 있다. 인조가 강빈 사사를 강행할 적에도, 그는 끝까지 반대했으며, 마침내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나기까지 했다.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 혹은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 때문에 김류를 기회주의자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김류에게는 (앞서 언급한 예시에서처럼)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면도 있었다. 인조 정권 시기 대부분 김류가 상신으로서 국정을 주도했음을 감안하면, 정치적 역량 또한 평균 수준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국력이 저하된 것은 청나라의 과도한 착취가 원인이었고, 김류 실각 이후 집권한 김자점 역시 청에 편승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나라를 거덜냈지만, 그 이전까지의 조선은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 등의 전쟁을 겪고도 (군사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건재했기 때문이다.[요약] 후금(=청)은 기마민족이라 곡식이나 병장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으니, 오랫동안 버티면 자기들이 지쳐 물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조선이 좀 많이 두드려 맞아야 하는데 그냥 두드려 맞으라고 백성들에게 이야기할 순 없다. 그러니 명분으로 명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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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8 23:59:31에 나무위키 남한산성(영화)/탐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