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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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興元
(? ~ 681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신라 중대의 장군, 정치인. 삼국통일전쟁의 주요 전쟁공신이지만 이후 신문왕에게 찍혀 김흠돌의 난숙청되는 비운을 맞는다. 여러 기록에서는 성을 제외한 흥원(興元)으로 기록되었지만 신문왕의 반란 토벌 교서에 의하면 김씨.


2. 생애[편집]


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지은 평양성 전투(668년)에 계금당 부대를 이끄는 계금당 총관(罽衿幢摠管)으로서 참전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이세적과 함께 보장왕을 당나라로 압송했다. 이 당시 관등은 아찬.

670년, 당나라나당전쟁이 벌어지자 당나라 휘하 웅진도독부 소속 백제 유민들과 맞붙었으나, 전투가 두려워 군영에서 퇴각했다. 임전무퇴를 지키지 못해 신라 군율상 사형당해야 했지만[1], 문무왕이 용서하고 다만 관직에서만 물러나게 했다.

이후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대충 사면되었는지 관등은 한 단계 올라 대아찬이 되었지만, 면직당한 데 불만이 쌓여있었는지 문무왕 말년에는 역심을 품고 김흠돌, 김군관, 진공 등과 반란을 준비했다. 그러나 문무왕이 붕어한 후 문무왕의 장례 상복을 벗기도 전에 신문왕이 반란 세력의 리더급인 김군관의 관직을 강등하는 선수를 쳤고, 이들은 서둘러 김흠돌의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해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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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군율 때문에 김원술이 전투에서 지고도 무사히 퇴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유신 내외로부터 의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