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남(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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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규남(정치인).jpg

金圭南
1929년 7월 15일 ~ 1972년 7월 13일 (향년 42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광산(光山)[1], 호는 춘산(春山).

2. 생애[편집]


1929년 7월 15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아버지 김선찬(金善贊, 1893. 6. 10 ~ 1955. 11. 8)과 어머니 함안 조씨 조소례(趙소례, 1896. 2. 1 ~ 1975. 2. 29)[2] 사이의 3남 6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정치학 및 극동 정책을 연구하고, 덴마크 국제대학에서 복지사회 및 농업정책, 농업행정을 연구했다.

귀국 후 전남일보사 도쿄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한국외국어대학교·국방대학교 대학원·중앙공무원교육원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부소장 및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였다. 국제법학회 간사, 국제정치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보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정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을 지내다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 5월 14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유럽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당일 구속되었고, 민주공화당에서 의원직이 제명되었다.[3]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1월 4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 혐의로 사형선고받았다.

1970년 7월 4일 대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고, 결국 1972년 7월 1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해당 사건 자체가 일어난 배경을 보면 김종필이 1971년 대선에서 차기 대권을 노리던 상황이라 굳이 3선 개헌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는데 이에 중앙정보부에서 3선 개헌의 성사를 위해 김종필계 의원들을 협박을 하기 위해 김규남 의원이 장기말로 지목시켰는데 목표가 달성된 후로도 번복하기에는 걸끄럽다는 이유로 억울함을 풀지도 못하고 목숨을 내줘야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만만하다는 이유로 여당의원이었음에도 기구한 최후를 맞은 셈이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김규남의 간첩 혐의가 조작된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유가족들은 곧바로 재심을 신청했고, 2015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져 복권되었다.#

후손으로는 아들 김동국(金東國), 김동복(金東福), 딸 김연수(金蓮秀), 친손자 김세환(金世煥), 친손녀 김민아(金玟我), 김수연(金洙延), 외손녀 이하림(李河林)이 있다.[4]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 보성군)

[[무소속|
무소속
]]

6,054표 (9.86%)
낙선 (4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5,494,922 (50.6%)
당선 (20번)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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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공후-문민공파 41세 순(淳) 항렬. 족보명은 김규순(金圭淳).[2] 조용기(趙龍器)의 딸이다.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선찬 족보 1.png파일:김선찬 족보 2.png[3] 당시 후보 29번이었던 김용채가 의원직을 승계했다.[4]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규남 일가 족보 2.png파일:김규남 일가 족보 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