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대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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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화인민공화국의 완전 승리
3.1. 중화민국 생존 성공시
3.2. 중화민국 생존 실패시
4. 대만공화국 건국 / 미국령 대만 성립
5. 중화민국의 하이난 섬 유지
6. 중국판 남북분단
7. 1947년 만주에서의 휴전으로 국경선 고착
8. 중화민국의 완전 승리


1. 개요[편집]


국공내전대체역사를 논하는 문서.


2. 중화인민공화국의 완전 승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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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양안통일(적화통일)된다면 타이완성은 고스란히 중공에 접수된다. 자유진영 방어선 중 하나인 대만이 사라져서[1] 대한민국,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실제 역사 이상으로 커졌을 것이다. 중국은 해양진출에 거리낌이 없어져 동남아시아까지 공산화 위협에 맞닥뜨렸을 것이다. 베트남, 라오스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태국까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3. 중화민국쓰촨성으로 천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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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의 위치

국민당은 처음에는 타이베이로 가지 않고 청두에 눌러 앉으려고 했다. 즉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을 기반으로 대륙에 잔류하며 중원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치하는 천하이분지계인 것이다. 촉한? 하지만 이 경우 중화민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다. 타이완 섬은 바다 너머 있었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쓰촨성은 남쪽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 북쪽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있어 고립당한다.


3.1. 중화민국 생존 성공시[편집]


타이완 섬 대신 쓰촨성이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며 수도는 청두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지금과 같이 중국 본토인과 구별되는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은 옅었을 것이다. 물론 섬 지역의 특성상 내륙인들과는 좀 다른 지역색이 강했을 테지만 적어도 "나는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중화민국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 서남부 지역은 대만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화민국이 중국 서남부+대만으로 구성된다면 중화민국 본토와 대만 사이의 단절 현상이 심각해졌을 것이므로 대만 지역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오히려 현실의 중화민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대만에서 중국 서남부로 가려면 적대관계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공을 지나야 하므로 항공을 통한 교류도 인도-동남아를 거쳐 빙빙 돌아가야 겨우 가능할 정도가 되어 대만 지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홍콩, 마카오와 유사하게 높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형태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2]

또한 대륙의 분단이 지속되면, 중국 서남부 지역의 중국인들이 '사천인'이나 '서남인'으로서 지금의 대만인들과 비슷하게 중원의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중국 국민당미국, 영국, 포르투갈, 티베트, 위구르 등의 지원을 얻어가며 중공과 맞서서 북쪽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고 동쪽으로는 중국 중남부 내륙을 엿보며 동남으로는 중국 동남부 연해지대를 노려 제2의 북벌과 반공 대륙을 시도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부르는 국호의 경우 서남부 지역만 차지한만큼 남중국-북중국으로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고 서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지역인 쓰촨으로 불릴 가능성이 높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남부를 제외한 중국 영토와 인구의 80% 가량을 차지하는만큼 중국으로 불릴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중국-쓰촨(사천)으로 대응되어 불릴 것이다. 다만 양안관계라는 단어는 사용이 불가능한만큼 양국의 관계는 '양중관계'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에서는 주로 사천으로 불렸을 것이다.

중국 서남부의 인구/영토를 고려하면 대만만 차지한 작은 섬나라인 현실의 중화민국보다는 국력이 훨씬 강해지므로[3] 국제적으로도 중화민국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UN상임이사국 자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더라도 UN가입국 지위나 다른 국가들과의 수교 정도는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중국 분단의 정세는 남북으로 이념대립 중이었던 한반도에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중화민국과의 대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주저할 것이므로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남침을 강행할 경우 중공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북한이 와해될 수도 있다.

티베트, 위구르의 경우 아래의 중국의 남북분단 시나리오와 유사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과의 대립으로 미처 흡수하지 못해서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서남부를 제외하면 상당수 국력을 보존하게 되므로 아래의 중국의 남북분단 시나리오 때보다는 독립 가능성이 낮다. 또한 중화민국(사천)의 국력이 티베트, 위구르의 흡수를 도모할 정도는 되지 못하는만큼 중화민국(사천)이 티베트, 위구르와 연합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는 형태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3.2. 중화민국 생존 실패시[편집]


윈난 성과 쓰촨 성에 국민당군이 상당수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밀린 끝에 버마와 태국 국경선을 넘어서 피난가게 되므로 이들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피난 과정에서 와해되거나 지배 영토가 하나도 없는 망명 정부 수립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내륙 깊숙이 있어서 유사시 미국이 항공모함 등으로 도와주러 오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쓰촨 지역으로의 피난이 위험요소가 많았던 걸 고려하면, 국민당의 대만 이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1930년대 중국공산당이 장강 이남 지역에 건설했던 해방구 중화 소비에트 정권이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홍군 주력부대가 서쪽으로 도피하는 와중에 중국공산당 내에서 최종목적지를 두고 마오쩌둥은 산시성, 장궈타오는 쓰촨성을 주장하면서 내분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때 쓰촨성으로 들어간 장궈타오의 제1방면군은 불과 1년만에 국민당군한테 탈탈 털려서 극소수의 간부들만 거지꼴로 마오쩌둥이 자리잡은 옌안으로 도주한 사례가 있다. 물론 이 때는 군벌이 더 강한 시기긴 했지만 어쨌건 쓰촨성으로 도망간 장궈터오를 털었던 것이 다름아닌 중국 국민당이었다. 스스로 이미 쓰촨으로 도망간 세력을 털어본 경험이 있던 것이다.

이 경우 대만 섬은 국민당군의 주력이 중국 서남부에 몰리므로 섬을 지킬 병력이 매우 부족해서 생각보다 일찍 중공군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 독립파들은 국민당 정권이 옮겨오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자국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티베트 등을 생각한다면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안 들어올 리가 없다. 중화민국이 21세기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인민해방군이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못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난 섬의 경우 타이완섬에 필적하는 크기를 가지지만 불과 20 킬로미터 정도의 충저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때문에 결국 중국에 넘어갔지만, 타이완 해협은 충저우 해협보다 6배 이상 폭이 넓다. 그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도 힘든 피난길이 되었다.


4. 대만공화국 건국 / 미국령 대만 성립[편집]


국공내전 말기에 미국이 대만공화국 대만민국을 세우려고 했으나, 장개석이 국부천대로 선수를 쳐서 무산되었다. 대만공화국이 먼저 세워졌다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대만)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대만공화국(혹은 미국령 대만)의 대치 상태가 된다.

미국의 주도 하에 대만공화국 수립에 성공했거나 아예 미국령이 되었을 경우에도 국민당이 망명하긴 하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민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명실상부한 독자적인 대만의 국가가 성립되고 말았으니 타이완 민주국의 재래로써 신생 대만인이나 난민(...)으로 대우 받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당 망명인 출신인 외성인보다 대만 현지인인 본성인이 더 빨리 득세하여 외성인 우위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건물 하나라도 얻어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긴 하겠지만 대만공화국이 됨으로써 본토 수복이란 명분이 상실되고 또 괜히 대륙을 자극했다간 대만국 혹은 미국령 대만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별 행동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껏해야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일종의 관광사업을 하는 정도. 그리고 이때의 중국은 국민당 정부로서의 대만이 아닌 미국 보호하의 대만국, 특히 미국령 대만과 대치한다면 진먼 포격전 같은 무력도발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대신 중국 측에서 간첩 등을 파견해서 미국령 대만인들을 선동하는 게릴라 작전을 펼칠 수도 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중국으로 남았기에 중화민국의 계승 국가로 인정받아 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손쉽게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생 대만국은 중화민국의 영향에서 더욱 완전히 벗어나 대만의 독자적 국가로써 대만, 대만인으로써의 정체성이 더 빨리 발양 확립되기에 여전히 남아있는 외성인(국민당)을 비롯해 대만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 현재의 중국-대만과의 양안관계대만 독립운동이 미국까지 끼어들은 문제로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지금의 "대륙 VS 국민당/민진당"이였던 것이 "중공 VS 대만공화국 or 미국령 대만 VS 대만 독립운동세력 or 국민당 망명정부"으로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단, 국민당의 경우 2.28 사건을 일으킨지라 대만에 정착할 경우 오히려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만인들의 테러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영토 그런 거 없이 등지로 망명해서 건물 하나를 얻어 망명 정부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중공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만이 미국의 괴뢰국이라거나 홍콩과 마카오처럼 식민지로 점령당했다는 주장을 했을 것이고 미국과 수교할 시기에 대만 반환 약속을 협상 조건으로 걸어 미국령 대만을 똑같이 특별행정구로 돌려받아 완전한 중국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범록연맹 같은 독립파가 존재하겠지만 홍콩의 우산 혁명에서 보듯 큰 위세를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만공화국이거나 미국이 대만을 독립시킬 경우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국이 현재처럼 미승인국으로 대치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홍콩이 영국물을, 마카오가 포르투갈물을 먹었듯 대만도 한국, 서독이나 하와이, 괌, 오키나와처럼 대만 고유문화와 미국 문화가 혼합되고 더 나아가 대만인 역시 미국인들과 혼혈된 지역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넘긴다는 것도 웃긴 것이 국교수립할 시점에서 중국은 핵보유국이고,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키나와의 미군시설이 여기로 다 몰리고, 홍콩의 기능도 빼앗아 경제적으로 부유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놔두는 것도 미국의 능력을 우습게 보는 셈이다.


5. 중화민국의 하이난 섬 유지[편집]


파일:하이난타이완.jpg

대륙에서 국공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는 1950년까지도 하이난 섬은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대만 섬도 그렇지만 당시 인민해방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1950년 5월 1일에 민간어선 수백척을 동원하여 하이난 섬에 상륙하여 공세를 벌이고 결국 중화민국군은 철수했다. 이곳을 접수한 다음 최종 목표가 바로 대만 섬 점령이었는데 미국이 대만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 진공을 무기한 보류했다. 하이난이 몇 개월만 더 버텼다면 지금 와선 대만과 같이 공산화를 피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하이난섬을 가르는 충저우 해협은 폭이 약 30km 정도로 타이완 해협에 비해 크게 좁아서, 해군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인민해방군도 민간 어선을 징발해 건너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난보다 훨씬 작은 진먼 섬을 지켜낸 진먼 전투처럼 국민당군이 분전해서 하이난 섬을 지켜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이난 섬은 섬이긴 하지만 대만 섬보다 훨씬 대륙과 가깝기에 중공의 공격으로 인한 분쟁 충돌로 지속적인 하이난 포격전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은 섬인 진먼과 달리 하이난 섬은 중화민국 영토의 절반에 가까우므로 하이난 섬을 공격하는건 사실상 중화민국(+ 미국)과의 전면전 또는 국공내전의 재개를 뜻하므로 진먼만큼 쉽게 공격하진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평화로웠을 수도 있다.

하이난 섬이 중화민국 휘하에 남았다면 대만과 함께 중화민국의 양대 중추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중화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장 중화민국의 실질 강역만 해도 배로 커진다. 한편 하이난 섬은 당시 광둥성에 속해 있다가 중공 치하에서 1988년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으로 승격되었지만 만약 중화민국 휘하에 남았다면 대만 섬과 함께 양대 중추지가 되므로 1950년대 쯤에 하이난성으로 좀더 일찍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중화민국 치하에서 하이난은 광둥에서 분리되어 특별행정구로 있었다. 또한 중국의 경우 화동, 화남 연해 해안가 및 남중국해가 대만-해남의 중화민국에 봉쇄까지는 아니지만[4] 중화민국군과 미군이 하이난 섬 일대에서도 활동하게 되므로 해양 진출이나 중화민국, 미국과의 대치에서 중국이 현재보다는 약간 더 불리해졌을 것이다. 다만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하이난 섬은 지키기 까다로운 지역이 되는데 대만섬보다 훨씬 중국과 가까운데다가 진먼과는 달리 인구도 대만섬의 절반 정도로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유사시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이난 섬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인해 중화민국, 특히 하이난 섬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오히려 커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만인이라는 의식은 더 엷었을 것이며 중화민국의 정체성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현실의 중화민국에서는 대만 이외의 중화민국 실질 영토는 매우 작아서 그 지역들이 거꾸로 대만에 동화되고 있는데[5], 비대만 영역이 상당히 커진다는 의미이니. 한편 거의 비슷한 크기의 멀리 떨어진 두 섬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하는만큼 하이난과 타이완 사이의 지역감정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는 어려우므로 대만과 하이난의 연방공화국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있다. 수도의 경우 인구가 2배 가량 더 많고 면적도 약간이나마 더 넓은데다 중국과 거리가 있어 안보적으로 유리한 대만 지역에 있겠지만 현실의 중화민국과는 달리 타이완-하이난 간 교류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대만섬 북부의 타이베이가 아닌 하이난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타이난이나 가오슝으로 정해질 수도 있다.

하이난의 경우 지리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운데다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귀속된 시기가 대만보다 훨씬 길며 대만처럼 50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지내며 중국대륙과 별개의 역사를 가진 시기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현실에서의 대만의 푸젠성과 유사하게 중국과의 교류를 지지하고 독립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했을 것이다. 즉, 범람연맹의 텃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운동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화 정체성을 부정하는 강경파는 대만-하이난 연방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주장하는 파와 개별적인 대만 공화국, 하이난 공화국으로 분할 독립을 주장하는 파로 세분화되었을 듯하다. 독립성향은 하이난보다는 대만이 더 강했을 것이다.

하이난 섬을 유지함으로써 중화민국의 영토는 2배, 인구는 1.5배 가량이 되므로 국력이 대만만 차지했을때보다는 더 나았겠지만 결국 중국보다는 훨씬 약한건 매한가지이므로 UN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하이난의 존재감이 진먼, 마쭈보다 훨씬 크기에 국제적으로 '타이완'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낮고 유력한 이름은 '타이완-하이난'이다. 한국에서는 '대만-해남'으로 불렸을 것이며 어감 문제로 '타이완-하이난'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6. 중국판 남북분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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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분단을 가정한 지도

중국이 중국국민당(여당)과 중국공산당(야당)이 공존하는 양당제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제스마오쩌둥은 서로를 말살해야 하는 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국공합작이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 남중과 외교를 맺은 나라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정체자로 배우게 된다.[6]



  • 남중국은 일본타이완에 남겨둔 기술을 활용하여 경제 발전을 크게 이룰 가능성이 있다. 특히 위 사진처럼 분단이 이루어질 경우 해양 진출로의 거의 전부를 남중이 독차지하므로 해양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이 훨씬 가속화되었을 것이며, 중화민국이 초강국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 중국 동해안을 초토화시켰다지만 중화민국은 중국 전통의 곡창지대인 강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우위에 있는데다 공산주의 포위 명목으로 통일한국, 일본과 같이 미국이 지원을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 중화민국은 장강 이남의 거대한 경제력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 뛰어난 입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되며, 1980~90년대 일본처럼 자본주의 진영 맹주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대국 2위 자리를 차지했을 수 있다. 특히 중화민국이 일본 수준의 1인당 GDP까지 챙겨가는(실제로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그 정도는 어렵겠지만.) 경제성장이 이뤄질 경우 훨씬 대놓고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국력에 도달했을 수 있어서 중소분쟁이 아닌 중미분쟁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 특성상 중소분쟁 같은 군사적 충돌보다는 미중 무역전쟁 같은 돈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소련에게 지원을 많이 받아서 발전을 어느정도 하고 소련 견제를 위해 미국과 데탕트가 일어날 가능성은 높았기에 개혁개방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현대 중국처럼 급격히 성장을 할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애당초 강남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내주고 시작한데다, 양쯔강 이북인 경우는 중국판 비무장지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북중은 안전하게 쓸 수 있는 해로가 사실상 극동 지역만 남게 되므로 해양 진출이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따라서 육로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으며 공산권 무역을 위해 소련 영토를 지나는 루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소련 의존도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물론 남중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서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하므로 이중으로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은 데탕트를 거치면서 서구의 기술과 자본을 지원받아 개혁개방을 성공시킨 덕분인데, 중화민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소련에 묶여 개혁개방을 시도할 수도 없고, 한다해도 서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7] 결국 현재보다 훨씬 폐쇄적인 국가가 되었을 것이며, 그런 폐쇄성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처럼 군대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양쯔강변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매우 격해졌을 수 있다.

  • 중공이 경제성장도 실패하고 부유한 남중과 체제경쟁을 벌이다보니 공산권 맹주 소련의 중공 지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중국 대륙이 통째로 공산권에 포함되어 있는 안보적 메리트를 상실하므로 대미 군사적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즉, 소련에 가해지는 압박이 더욱 커지며, 동구권 붕괴가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다.

  • 하나의 중국 개념이 시기가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어 상호 충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혹은 1개만 존재하였다가 2개 이상의 정권으로 바뀐 한국처럼 2개의 정부로 쪼개지듯이 두 개의 중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클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2개의 중국이 공존하는 양상이 나오게 되고 하나의 중국을 위시한 무력 충돌, 갈등 따위의 걱정은 없을 수 있다.

  • 냉전기에는 남중(홍콩, 마카오 포함)+한국+남월+미국+일본 VS 북중+북한+북월+소련+몽골로 치열한 대립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다만 만주랑 가까운 북한은 몰라도 북베트남의 경우 중국국민당이 대륙을 통일했어도 비슷하겠지만 중국 남부를 중화민국이 지배했다면 중공이나 소련의 지원을 못받게 되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에 의해 재식민지화되었거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했어도 중화민국이나 미국에 의해 공산화가 저지되었을 것이다. 이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마찬가지.


  • 6.25 전쟁이 터졌다면 북한은 100% 멸망했을 것이다., 북한이 살아남은 건 중국의 지원이 제일 큰데, 이런 대치 상황에선 국력을 온전히 6.25 전쟁에 올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이 6.25 전쟁에 병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중화민국을 쫒아내는 데 성공하고, 티베트와 위구르도 점령한데다 남부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 2차 국공내전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중국에서의 거대한 대치 상황 때문에 중공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김일성도 한국 침공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8월 종파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현재의 북한이 김씨 일가 독재체제가 된 것은 휴전 이후 김일성이 적화통일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숙청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누굴 숙청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나 명분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초기 북한의 집단지도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훨씬 정상국가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쩌면 동구권 붕괴 때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한국과 평화통일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 인도차이나 반도에 널리 퍼진 공산화 위기감이 한층 낮아졌을 것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선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북베트남이 이렇게 영향력이 커진 것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게 상당했고, 미국이 북진금지를 한 것도 바로 중국과 또 다른 분쟁이 터질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만약 양쯔강에서 국민당이 방어에 성공했다면 베트남은 현재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남베트남의 후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시기에 공산화가 된 라오스캄보디아 등 역시 마찬가지로 공산화에서 벗어나거나 최소 지금과는 다른 사건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은 북중에서만 일어났을 것이고 남중에서는 문화대혁명과는 관계없이 문화재들이 대부분 보존되었을 것이다. 다만 내분을 틈탄 침공을 우려해서 문화대혁명까지 이르게 되는 뻘짓을 서로 자중해서 일어나지 않거나, 문화대혁명 발생 초기, 중기쯤에 점령당해서 파멸적 결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 홍콩영국의 식민지로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고, 마카오 역시 포르투갈의 보호령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8] 다만 조약대로 기간이 지난 후에 도로 중국(중화민국)에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홍콩 섬 자체는 영국에 할양하였으니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만 섬 단독으로 경제를 꾸려가는 것이 힘든 만큼 무리를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돌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90년대 말에서야 홍콩마카오가 반환된 이유부터가 그 이전까지는 죽의 장막으로 유명한 폐쇄적인 나라였던 중국이 서방 국가와의 대화창구로 써먹을 겸, 이 두 도시를 인질삼아서 이런저런 외교 분쟁에서 서방 측에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고의로 반환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랬던 것이 냉전이 끝나서 더 이상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진 중국 측에서 그제서야 홍콩마카오에 대한 반환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중화민국이 중국을 통일했으면, 같은 친미, 친서방 국가인 만큼 이 두 도시에 대한 반환 협상이 좀더 일찍 성사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카오는 당시의 종주국인 포르투갈의 독재자인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해외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머리 굴리던 것을 생각하면 바로 반환받기는 어려웠을테지만, 역시 본국에서 너무 멀고 포르투갈중화민국한테 군사적으로 밀린다는 점에서 인도가 역시 포르투갈령이던 고아를 무력으로 되찾은 것처럼, 중화민국군이 무력으로 마카오를 점령했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광저우만 처럼 90년대 이전에 중화민국에 반환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카네이션 혁명 이후 중국에 마카오를 지속적으로 반환하려 하였지만 중국이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마카오를 외교 창구로서 두고 싶어 하였기에 90년대 이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 티베트, 위구르는 몽골처럼 독립국이 될 것이다. 다만 이 둘은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 둘다 중국 영토로 여겨지고 있었고 세계에서도 미승인국이었기에 남북중국이 계속해서 종주권을 행사하여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려 들었을 것이다. 다만, 남중북중 간에 내전과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먼 곳까지 관할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티베트위구르소련과 북중 및 남중, 그리고 인도 간의 분쟁을 막기위한 완충국 정도의 지위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 위구르는 위치 상의 이유로 북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공산화가 되거나, 최소한 그 정도는 아녀도 친소친중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완충국 역할을 하는데 실패했다면, 위구르의 일부 또는 전체가 소련의 구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 미국-중국 패권 경쟁도 현재처럼 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심해진 건 제1위,제2위인 것도 있지만, 둘 사이의 정치성향이 너무 다른 것도 있다. 만약 분단이 되었다면 현재의 미국-러시아 관계처럼 패권경쟁은 있겠지만 격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공산당이 재건에 성공하여 중국이 분단했다는 가정을 적용한 경우가 복거일비명을 찾아서이다. 여기서는 1935년 옌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를 포함한 마지막 공산당 잔당이 모두 국민혁명군에게 사살됨에 따라 제1차 국공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정과 굴욕 외교 덕택에 유리한 재기 조건을 갖춘 뒤, 류사오치펑더화이1950년 11월 신장에서 '신장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간쑤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953년 4월에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국민당은 개털려서 베이핑과 톈진을 잃었고, 1956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둥성의 교주만과 관동주, 만주국을 영유하고 있던 일본 제국이 "황허 남쪽에서도 전쟁하면 우리도 참전함!"이라고 위협(소위 '도조 선언')하자 결국 공산당이 협상에 응하면서 마침내 그 해 7월 6일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허를 경계로 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소설의 배경인 1987년 현재 중국 대륙은 황허 남쪽의 중화민국, 황하 북쪽의 중화 인민 공화국, 랴오허 동쪽의 만주국, 이렇게 3국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중화 인민 공화국의 통일 정책 및 만주국과 중화민국에서 전개되는 학생 운동권의 통일 운동이 지속되면서 대륙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지고 있다.

한편 라이트 노벨 풀메탈 패닉에서는 대체역사 배경으로 남중국과 북중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7. 1947년 만주에서의 휴전으로 국경선 고착[편집]


파일:국공내전대체역사.jpg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이 중국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1947년 중화민국이 만주 지역으로 치고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휴전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시나리오이다. 이런 경우라면 명말청초처럼 만리장성산해관이 최전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화민국의 수도는 그대로 난징이었을 것이고, 중공의 수도는 만주국의 수도였던 창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청관계와는 달리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이 훨씬 더 우세하고 중공은 만주국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써 냉전 이후 망하여 양안통일이 되거나 중견 국가로 잔존하여 만주에 할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도들을 포함한 전통적인 중국 본토는 중화민국이 차지하였고, 만주는 원래 변방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정통성과 하드웨어[9] 모두 불리하여 오늘날 대만이 그런것처럼 중화민국은 'China', 중공은 'Manchuria (PRC)'로 불리며 미승인국 취급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북한은 조기에 망하거나 아니면 현 베트남, 쿠바처럼 집단지도체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통일했다면 만주를 차지한 중공와의 관계는 한국-만주 관계로 불렸을 것이며 냉전기까지는 서로 대치했겠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북한처럼 분단국가로서 대치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한중관계, 한러관계 정도의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만 수교의 경우 현재의 대만처럼 본토를 차지한 중화민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 전쟁에선 남베트남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8. 중화민국의 완전 승리[편집]


파일:1409pxRepublic_of_China.png

대체 역사 가정 에세이집 만약에(what if?) 1권의 마지막 챕터는 미국의 요청대로 장제스가 만주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1947년 국공내전 휴전에 동의했을 때를 가정한다. 크게는 낙관적인 예측과 비관적인 예측이 가능하고, 그렇게 메이저한 소재는 아니지만 관련 역덕들에게는 영원한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우파를 비롯한 국민당 옹호 측에서는 공산당의 "건국신화"가 서방의 우호적인 좌파 역사가들에 의해 멋대로 대중에 유포되어 버렸다는 시각을, 공산당 옹호 측에서는 무능한 장제스를 이념적으로 복구하려는 소수의 무리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거리는 과거 베트남 전쟁68운동 이후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까지 옹호했던 좌파 역사가들의 전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으로 국내에선 1970~80년대 일련의 저작에서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던 리영희가 있다.[10]

주류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대격변을 겪게 되면서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활약이나 장제스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과거의 시각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장제스의 난징 정부 기간(1927년 ~ 1937년)을 황금의 10년이란 표현으로 칭송하는 주장까지 나오는 수준이다. 이 기간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장제스 비판론자의 대표격인 로이드 이스트만까지 인정하는 편이다.

즉, 낙관적인 예측은 장제스의 과거 유능한 면(+ 대만에서의 행적)을 두고 볼 때,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중화민국)은 원 역사의 한국처럼 마오쩌둥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이란 잃어버린 10년(어쩌면 20년)의 삽질 없이, 또 덩샤오핑의 개방 같은것 필요 없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 경우 마오쩌둥의 잘못된 정책에 의한 수 천만의 희생을 피할 수 있게 되는 셈인데, 중국으로써는 그야말로 최선의 대체역사라고 볼 수 있다.

해당 가정에서는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 자체가 세계사에 미쳤을 영향, 특히 바로 옆의 한국사에 미쳤을 영향도 어마어마했겠지만, 그 파급력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 된다. 중화민국의 승리와 공산권의 축소 자체로도 1950년대 이후의 세계사 전반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적어도 수 억명의 인구가 1950년대부터 온전하게 제 1세계 경제 및 국제무역 체제에 편입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어떤 스노우볼이 굴러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인데, 소련은 한반도도 38선 이북만 가지게 되고 일본의 공산화도 실패했는데 중국마저 실패하면 몽골 정도만 가지고 아시아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 군사적으로도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은 수 억명의 인구를 가진 중국을 극동에서 상대해야 한다. 당연히 소련의 군사적 전략 자체를 다시 짜야하며 유럽과 극동의 양면전선을 강요받는다. 거기다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아 대륙이 수 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소프트파워를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이런 경우 동양권 문화에 중화민국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11]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렇듯 중화민국의 통일로 인하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하여 가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반대로 중국 국민당의 실정, 전후 중국의 상황 등등을 고려할 때 장제스가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는 예상 또한 존재한다. 장제스는 중소결렬 이후 대약진 운동 등 대삽질을 거듭하던 1950년대 이후의 마오쩌둥[12]과 비교하니 유능해 보일 뿐, 그다지 뛰어난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시각이다.[13]

따라서 비관적인 예측은 통일 중화민국도 현실의 중공이나 인도, 러시아처럼 잠재력보다 훨씬 늦게 빛을 봤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국민당이고 뭐고 이당시의 중국은 수십년에 걸친 혼란과 중일전쟁의 피해로 인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게다가 장제스의 난징 정부 시기에 대해서 좋은 평가가 존재하긴 하나 그것은 '나라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던 지옥도를 그나마 나라꼴 하게 만들어 놨다' 는 것에 가깝지, 무슨 한강의 기적을 여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지역 군벌에 대해서는 통제력이 부족했고, 때문에 난징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국민당 집권 유무와 관계없이 생활수준은 처참했다. 오죽하면 '황금 10년' 이라는 기간 동안 시골에서는 연쇄적인 기근으로 백만 단위 사망자가 심심찮게 튀어나왔고,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더 심각해져서 지방에서는 수년의 전쟁에 지친 중국인들이 항일 투쟁과 더불어 국민당 정부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국부천대 이전 중국 국민당 의 엄청난 부정부패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장제스가 부패 척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국부천대였기 때문에, 중국 대륙을 그대로 유지한 대체역사에서는 부패했음에도 이겼기에 오히려 대만의 부패 청산과 같은 일이 현실보다 더 늦게 일어나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설사 부패한 인간군상들을 몰아내고 대개혁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대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인구가 많고, 상술한 대로 8년간의 중일전쟁 탓에 그나마 이루어놓은 개혁이 전부 리셋된 전후 중국에서는 얼마나 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럽다[14]. 게다가 남의사를 비롯한 국민당 세력은 정치적 폭력을 활용하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던 탓에 문화대혁명같은 초대형 병크가 안 터질거라는 보장도 없다.

중국이 전후에 순순히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올라탔을지도 의문이다. 미합중국 일본주 소리를 듣는 일본도 언제나 미국 말에 yes 해주는게 아닌데, 그보다 인구가 몇 배로 많고 일단은 승전국인 중화민국이 언제까지나 미국의 부하 노릇을 할 리가 없다. 당분간은 무척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겠으나 원 역사에서도 장제스와 스틸웰 장군 간의 알력 다툼으로 중미 관계가 크게 악화된 예시가 있었고, 애초에 2차 국공내전 패전 이전까지는 소련-중화민국 관계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중소결렬처럼 제1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갈라서는 '미중결렬'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중소결렬 이후 미국은 소련의 중국 핵폭격 계획을 무산시킬 정도로[15] 중국과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 시기 중국 대륙에 엄청난 투자가 몰리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천안문 사태로 실질적인 미중결렬이 터지고 급격히 식어버리긴 했지만. 애초에 장제스 자체가 반공주의자긴 했지만 여전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국민혁명을 추구하는 일종의 '혁명가' 였지, 무슨 영미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우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당의 초창기 경제계획은 소련의 그것과 굉장히 유사한 계획 경제 체제였고, 장제스는 본토 통치기에 상하이의 기업가들을 열심히 때려잡은 전적이 있다. 즉, 건국 직후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듯 보이지만,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점차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 마치 중남미나 동남아 국가들이 연상되는 통일 중화민국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소리.

어찌 되었든 간에 한국에게는 그다지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선 경제 성장이 매우 어려워진다. 미국은 중국이 통째로 공산화된 이후에도 한국을 그닥 중요한 지역으로 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까지 가서야 한국 정부를 본격적으로 신뢰해줬을 정도. 만약 중국이 공산화를 피한다면 미국에게 있어 한반도의 중요성은 수직하락할 것이고, 그만큼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16]. 무엇보다 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최대물주였던만큼 한국에게 있어 중국 전체를 통일한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매우 컸을 것이다. 미국을 제치고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이승만 대신 친중화민국 성향이 강했고 장제스와도 친분이 깊었던 김구가 초대 대통령으로 집권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면 모르겠으나, 장제스를 위시한 국민당 지도층은 한반도를 회복해야 하는 고토 수준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17] 통일 중화민국은 한국과 무슨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려 들거나 한반도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꽤나 있는 편인데[18], 이렇게 된다면 광복 직후의 한국 입장에서는 진정한 대한의 자주 독립을 이룬 게 아니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다시 체결되고 지금의 북한처럼 중국의 전략적 속국이 되는 구한말 회귀에 불과하니 현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반중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쳤을 것이고, 한중 분쟁이 터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불가능이 아니다.

게다가 화교의 경우 한국의 화교는 중화민국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국외의 화교는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화교는 낙오상태가 되었고 박정희 정권때 화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칠수 있었지만 중화민국이 승리했다면 화교에 대한 적극 투자를 했으면 했지 화교를 탄압할 경우 장제스의 내정간섭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 십수위의 경제대국인 현실의 대한민국과는 달리 화교를 전혀 견제하지 못한 채 화교자본에게 경제를 장악당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19]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보자면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이 아주 낮아지고, 덕분에 원역사에 비해서 남북통일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 정도다.

일본에게는 껄끄럽겠지만 나름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과 같은 시나리오다. 일본 열도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요한 자리인데, 일본이 공산화되기라도 하면 소련 해군의 손에 태평양 자유이용권이 공짜로 떨어지는 것이고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에 제 2차 미드웨이 해전을 걱정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되는 터라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도와줄 수 밖에 없었겠지만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아 미국의 철수가 지연되어 경제 재건이 완료되는 시기가 늦춰졌을 것이고, 중국이 안정적인 경제성장 노선에 올라탈 경우 일본의 입장에서는 큰 경쟁자 하나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경제성장 속도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중국에 큰일이 나지 않는 이상 중국의 인구에 밀려 일본이 아시아 1위의 경제규모를 차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중화민국이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복구하기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으며 반일 감정을 불태우며 일본을 어떻게든 엿먹이려고 했을 중화민국은 현실 역사의 중공이 대약진 운동 시기에 동남아시아 시장에 섬유류 등의 경공업 제품을 주력 수출품으로 밀고 있던 일본의 수출시장을 빼앗아서 경제 성장과 국민 생활수준을 저하시키고 정치 불안정까지 가속화시켜 중공에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처럼[20] 일본을 수출시장에서 밀어내고 일본 경제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실패로 끝나서 오히려 일본 경제가 위기를 넘기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거의 견제하지 못하는 것에 더해 일본이 동남아 지역의 영향력까지 확대해 나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중화민국은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소련에 붙거나 아예 제3세계의 맹주가 되겠다며 미국과 거리를 둘 수도 있으니[21] (중화민국이 그런 식으로 나갔다면) 미국은 당연히 중화민국보다 일본 편을 들게 되어 80년대 일본 버블경제플라자 합의를 피했을 가능성도 나름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나리오를 다룬 대체역사물은 스탈린의 편지 정도이다.

[1] 현실 역사에서는 중공이 대만 섬까지 접수하고 적화통일을 해버리려던 차에 북한의 김일성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로 파병을 하게 되면서 대만 침공이 미뤄지게 되었다. 다만 실제 침공이 이뤄졌을 경우에도 해군이 전무하던 중공이 대만을 하이난처럼 집어삼킬 수 있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1958년에 대만은 내부 불만을 돌리는 데 써먹어야 한다고 자신의 주치의였던 리즈쑤이한테 털어놨을 정도로 대만 침공을 원하지 않았다.[2] 여기에 하이난까지 차지했다면 하이난 지역도 대만 지역과 유사했을 것이다.[3] 위에서 언급된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을 모두 차지했다고 가정하면 2023년 기준 인구가 1억 6천만명 정도가 되며 대만까지 합치면 1억 8천만명으로 2억명 가까이 된다.[4] 당연하지만 대만과 하이난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영해 상으로 중국이 두 섬 사이를 통과해서 지나가지 못하는건 아니다.[5] 예를 들자면 대만인이나 진먼인들이 진먼을 대만의 일부로 인식한다거나, 물론 자신은 절대 대만인이 아니라는 진먼 사람도 있다.[6] 유럽은 아무래도 중국어 교육이 간체자 중심이지만 미국은 중국과 수교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간체자 일변도의 교육을 하진 않는다. 간체자와 정체자와 공존하는 편이다. 그러니 외교 관계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절대적이진 않다. 대만을 봐도, 미국과 단교 후에 미국식 영어 교육을 폐기하면서 외교 관계가 있는 벨리즈, 마셜제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같은 나라가 쓰는 영어로 교육 방식을 바꾼 것이 절대 아니다. 계속 미국식 영어 교육을 유지한다. 바티칸(중화민국의 수교국) 박물관 역시 중국어 안내에서 간체를 사용한다.[7] 베트남 같은 경우도 서구와 연을 끊은 통일 직후에는 사실상 최빈국이었다. 개혁개방 후 서구 자본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 논리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현재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8] 동아시아 유일의 영국 영토인 홍콩은 실제대로 1997년 중국에 공식 반환되었고 마카오 역시 1999년 말쯤에 반환되었다.[9] 일제가 만주국에 남긴 공업시설의 규모가 매우 크긴 했지만,만주와 대륙의 격차를 좁히기엔 역부족.당장 중일전쟁 이전 아시아 최대의 제철소는 상해에 있었음을 생각해 보자.[10] 리영희는 말년에 자신의 정보부족으로 오판했었다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별 반향은 없었다.[11] 다만 한국, 일본에 버금가는 문화 수출국이 될 수 있었을 지는 다소 의문이다. 멀리 볼 것이 아니라 인도만 해도 한동안 경제적으로 곤란했던 탓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문화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었음에도 한국, 일본은 커녕 한동안 쇄국 상태나 다름없었던 중국보다도 문화 산업이 뒤떨어진다.[12] 실제로 국공내전 시기에는 마오쩌둥이 장제스보다 잘한 면도 존재한다. 일례로 여론전. 자세한 것은 마오쩌둥/평가 항목 참조.[13] 해외 대체역사 커뮤니티에서는 모택동이나 장제스나 자강두병이라는 인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4] 애초에 국민당 자체가 시작부터 그다지 청렴한 조직은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막장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중일전쟁이다.[15] 이건 미국이 공산국가인 중국을 자국의 핵우산으로 보호해줬다는 소리다![16] 다만, 마셜 계획 때도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 뿐만 아니라 덴마크나 아이슬란드 등 몸체가 매우 작은 나라들도 일일이 지원한 걸 보면, 중국에만 몰빵하고 한국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성급한 판단이다.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했다 해도 한국과 중화민국이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반소국가로서 연대하는 걸 유도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더 좋다.[17] 한반도를 중국대륙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놓은 지도를 만들던 것은 물론 지배층만이 아닌 지식인들도 한반도는 일본에게 빼앗긴 중국의 고유영토이니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18] 상술한 대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차이를 고려할 때, 미국 등 서방세력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이를 방관하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19] 한 예시로 필리핀은 화교가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지만 경제의 60%를 장악하고 있으며 경제 사정이 더 좋은 인도네시아도 전체 인구 4%에 불과한 화교가 경제의 80%를 장악하고 있다.#[20]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중공산 제품을 싸게 사는 대신 나중에 갚으라고 차관까지 제공하면서 일본이 중공에게 동남아 시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긴장하게 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작 납기일부터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품질도 개판이라 흐지부지되었으며 일본은 섬유를 넘어 라디오와 TV같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도 수출하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21] 우습게도 현실 역사에서는 닉슨이 갑자기 핑퐁 외교의 일환으로 갑자기 방중을 발표하여 일본에게 통수를 쳤지만 그래도 미국은 일본은 소련 편에는 안 들어갈 거라고 예상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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