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성과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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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지성의 상징 요동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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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요동 지역 산성의 상징 백암성[2]
파일:아차산성.jpg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서 확인된 고구려의 산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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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요동 지역과 한반도 일대에 300여 개 이상으로,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고구려에 의해 축성되거나, 혹은 고구려가 점령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개축 혹은 개량한 요새들이다.

고구려의 성과 요새들은 크게 두 가지의 용도를 가지고 있는 시설들이었는데, 요동 지역의 성곽들은 주로 중국몽골 등의 대륙 세력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고, 한반도 지역의 성곽들은 주로 백제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이 때문에 한반도 지역에는 큰 요새보다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과 같은 대대급 소규모 기지들이 많이 발굴되며, 요동 지역에는 백암성, 비사성과 같은 어마어마한 거성들이 주로 확인되는 편이다.

고구려의 을 축조하는 기술, 즉 축성술은 당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편이었다. 중국의 거대한 요새와 비교하면 작아 보인다며 얕보는 의견도 있지만, 중국의 요새는 벽돌을 쌓아 만든 전성(塼城)이고 고구려의 성들은 대부분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지은 석성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은 투석기는 물론 충차에도 손상을 입기 때문에[4]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두껍고 높은 성벽을 쌓아야 했으나, 고구려의 요새들은 대부분 산 위에 축성하고 내부에 흙으로 판축한 후 돌로 포장해 짓기 때문에 대량의 공성병기가 접근하기도 힘들뿐더러 공격을 가해도 충격요법으로는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고구려의 요새를 공격하는 군대는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성벽을 넘어가는 고전적인 공성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고구려는 장대하고 높은 성벽보다는 적을 더 용이하게 방어할 수 있는 적정한 높이의 바리케이트를 선호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높은 성을 못 지어서 안 지은 것은 아니었다. 비사성의 유적을 보면 토나오게 높게 쌓았다. 절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절벽을 따라서 계속해서 성벽을 축조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고구려의 성벽은 중국에서도 악명 높았고 다수의 중국왕조는 고구려의 요새를 공격하기 두려워했다. 고구려군은 강력하고 험준한 성벽을 축조하는 것은 물론, 성벽이 무너지면 곧바로 목책과 돌으로 메워버리고 저항하는 것에도 능했다. 때문에 정말 어지간히 강력한 공성병기를 가져와도 성벽을 제대로 무너뜨리기 극도로 어려웠다.

다만, 상술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요동 지역의 성들에 국한된 이야기이며 한반도의 성들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방어자였던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임진강변에 늘어선 고구려의 요새들 가운데 상술한 요동의 어마어마한 요새 같은 위용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신 이곳의 산성들은 고구려에게 있어 일종의 임시 거처로, 계속해서 남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만큼 빠르게 쌓고 빠르게 지키기에 용이하게 만들어졌다. 때문에 장기적인 주둔을 감안하고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모산성, 월평산성 등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다만 전략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견고한 성들도 백제와 신라에게 수시로 빼앗겼다.


2. 기본적인 양식[편집]


주의할 점으로, 고구려의 성은 크게 요동 지역의 성과 한반도 지역의 성으로 니뉜다. 두 부류의 성은 건축 방식이나 규모, 그 용도까지도 상당 부분 달랐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하의 서술은 요동 지역의 성과 한반도 지역의 성 건축 양식을 분리하지 않고 기술하고 있으나, 실제로 양식들 중 일부는 요동 지역의 성에, 일부는 한반도의 성에 주로 도입되었기에 모든 양식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2.1. 이중성 체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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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도시, 특히 수도의 성에 있어 이중성 체제를 도입했다. 산과 강을 끼고 도시를 건설하여 평상시에는 산 아래의 평지에서 농사를 짓고 수운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도시를 치우고 백성들과 군인들을 산성으로 올려보내 항전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이 방식 덕분에 어차피 전쟁이 나면 버리고 떠날 도시에 거대한 성벽을 짓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었고, 동시에 방어에 유리한 지역에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첫째로 전쟁이 일단 일어나면 도시 지역은 초토화되는 것이 확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시 지역의 청야전술에 실패할 경우 적군이 도시에 있는 물자를 사용하여 공성전을 펼치기 유리해지는 점 또한 단점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두 개의 성을 유지하는 체제였으므로 유지 비용과 인력이 두 배로 소모된다는 것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장안성을 건설하면서 이중성 체제를 버리고 성 안에 도시를 두는 체제로 돌아선다.


2.2. 해자(垓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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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해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잘 사용했지만, 요동에 있는 고구려의 거대한 요새들 가운데 실제로 인공 해자가 확인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대부분 하천을 끼고 성을 지어 그 하천을 해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별로 크지 않은 임진강변의 보루들은 임진강이라는 거대한 강을 여러 개의 성이 해자로 공유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도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가 지정학적으로 처한 위치가 특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고구려는 북쪽이나 서쪽에 있는 군소규모 유목민족들은 그냥 선제공격하여 힘으로 밟아서 제압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전면적인 수성전을 치러야 하는 상대는 중국뿐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주된 진격 방향인 산해관을 통과하여 요하를 건너는 경로 외에 다른 방향으로는 굳이 해자가 필요없었다. 이 구도에서 고구려는 요하라는 거대한 천연 해자를 끼고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았으므로, 굳이 성들에 거대한 해자를 더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요동이라는 지역에 수많은 성을 둘러쳐 거대한 성과 같이 만들고, 발해만과 한국만, 요하 그 자체를 전략적 해자로 사용한 것이었다.


2.3. 치(齒)[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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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요동 지역 성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치가 발견된다. 다만, 이 치를 고구려의 특별한 수성 기술처럼 언급하는 일부 학습만화나 역사 프로그램들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치를 축조하는 것은 동시기 백제와 신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보이고, 서양 중세 성곽에서도 많이 보이는 축성술이다.

고구려의 치가 특별한 것은 이것을 산성에 지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산성은 산 자체가 요새의 일부이기에 치와 같은 방어시설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은 지형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산 위에 성벽을 감을 경우 치를 두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고구려의 요새들에서는 특이하게도 산의 봉우리 부분을 평탄화시켜서라도 치를 축조하는 양상이 보인다. 그것도 성문 주변뿐 아니라 성벽에 주기적으로 치를 도입했다.

물론 이 역시 재차 강조하지만, 고구려만의 유별난 축성술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산성에 치를 만드는 경우는 드물긴 해도 없지는 않으며 특히 인도의 요새들이나 일본의 전국시대 성들은 그 정점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이것을 거의 제식배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대량 배치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성이 산성인 고구려의 특성상 희한할 정도로 그 빈도가 많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2.4. 육합쌓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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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눈을 넣는 축성 방식으로 역시 세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축성기술이다. 이것도 치와 같이 고구려만의 특별한 축조 방식은 아닌 셈. 고구려 육합쌓기의 특징은 벽돌을 굽지 않고 돌을 깎아서 쌓아올린다는 점이며, 해당 돌의 크기가 신라 등에 비해 상당히 크다는 점 정도이다. 그리고 하술할 맞물려 쌓기 기술과 함께 사용된다는 점 정도가 특징이다.


2.5. 맞물려 쌓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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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벽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축조 방식은 사실 이 맞물려 쌓기이다. 고구려 성벽은 토성으로 된 내부 구조에 뾰족한 북꼴형 암돌을 맞물려 씌우고, 그 앞에 뒤쪽만 뾰족하고 앞쪽은 벽돌처럼 생긴 쐐기형 수톨을 끼워 맞물려서 포장하는 방식으로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5]

이와 같은 구조는 투석기를 비롯한 성벽 파괴형 공성병기들에 대단히 강했다. 포석을 맞아도 잘 무너지지 않고 충격을 흡수할 뿐 아니라, 무너져도 한 겹만 무너져 내리고 북꼴형 암돌은 버텨낸다. 이 구조는 단순한 충격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풍화에도 강해, 엄청난 수의 성을 유지보수해야 하는 고구려의 군비를 크게 줄이는 것에 일조했을 것이다[6].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고구려의 성벽들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2.6. 들여쌓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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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중심을 안쪽으로 끌어들여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성벽을 갈수록 좁아지게 하는 것. 사실 공학적 원리 자체는 피라미드와 유사하며, 이 역시 다른 국가의 성벽에서 자주 보이는 축성술이다. 특히 센고쿠 시대 일본의 성들에서 많이 보이는 축성 양식과도 비슷하다.

다시 반복하는 내용이지만 이 양식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이것을 산성에서 써먹었다는 게 엄청난 것이다. 본래 산성은 상술했듯이 산 자체를 끼고 싸우는 요새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그렇게 했고, 때문에 고구려의 성들은 중국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2.7. 성 기울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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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지역 성의 특징 중 하나인데 성문 쪽은 밑으로 기울이고 산을 끼고 있는 지역을 높게 축조하는 것이다.

임용한 교수는 이 성의 장점을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가 내려다보여 지휘관제가 용이하고 어디가 공격받는지 파악하기 쉽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남한산성처럼 성 위에 두른 성보다는 훨씬 성벽 간에 서로를 보는 것이 쉬운 것이 사실이다.


3. 고구려의 성 및 군사시설 목록[편집]


현재까지 300개 이상의 고구려 요새 및 보루가 발굴되었다. 대부분이 만주, 요동, 그리고 북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 방문 및 연구하기 대단히 어렵다. 이하에서는 고구려의 수도 및 행정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단위의 성과 방어선을 형성하는 성들을 기술한다.

3.1. 졸본 수도권[편집]


고구려의 첫 수도이자 천혜의 요새이다. 졸본성을 중심으로 다수의 고루와 소성들이 포진해 있다.

고구려가 졸본부여에서 막 넘어와 한창 고대 연맹왕국으로 급박하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수도이기에 이 지역은 요새의 밀집도가 높고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가 국가로서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하던 시기에 고구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반대로 고구려가 나름대로 국가로서의 내실을 다지게 되는 시점에 지어진 국내성은 상대적으로 주변을 둘러싼 성의 수가 적다.

3.1.1. 졸본성[편집]


홀승골, 홀본성이라고도 불렸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이며,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졸본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2. 하고성자토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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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족자치현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평지성. 졸본성으로부터 남쪽으로 10km 위치에 있으며 북쪽 1.8km 위치에는 고구려 고분군이 있다.

성벽 길이는 성벽 전체가 남아 있는 서벽의 길이는 260m 정도로 추산되며, 일부가 유실된 남벽과 북벽의 현재 길이는 212m와 237m 정도이다. 완전히 허물어진 동벽은 230m 정도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성의 형태는 정방형이며 축성 자체는 토성으로 판축되었으나, 요나라, 금나라 시기를 거치면서 곳곳에 석성이 추가되어 보루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 60cm에서 80cm 깊이에서는 여진족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때문에 처음 발굴되었을 때에는 여진족 내지 금나라의 유적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발굴이 진척되고 지하 150cm 지점부터는 고구려의 기와와 환두도, 화살촉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유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설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이중성 체제에 따라 하고성자토성이 졸본의 오녀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3.1.3. 나합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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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가장 가능성 높게 비정되는 장소는 있다. 문제는 그 장소가 하필이면 혼 강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바람에 연구조사가 불가능한 성이라는 점이다. 하고성자토성과 함께 오녀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으로 주장되는 성 중 하나이다.

수량이 적거나 가뭄이 들면 석성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연구조사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천하의 고구려 성벽이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물에 의해 풍화되어 앞으로 50~100년 안에는 그 형태를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될 가능성이 높게 여겨진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한국 연구진의 연구조사조차 어려운 상황이니 안타까울 따름.


3.1.4. 패왕조산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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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 퉁화시 재원향 패왕조촌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남서향 28km 지점에는 오녀산성이 있다. 고구려 첫 수도를 방위하는 방어선 중 하나로 추정된다. 성벽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 허물어졌으나, 남아 있는 성채는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5미터에 달하는 석벽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둘레는 1167m~1293m 사이로 여겨지며, 남문과 북문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성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각 성탑에는 성각이 있었을 것이다. 북문에는 반원형의 치가 옹성을 이루고 있었다. 성 안에는 작은 개울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이것이 식수원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성 안에서 별도의 우물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물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화살촉, 칼 등이 출토되었으며, 성벽에 난 구멍과 거치대 등을 통해 를 곳곳에 비치하고 방어무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게 평가된다.


3.1.5. 성정산산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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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자산성이라고도 한다. 흙으로 축조한 정방형의 산성이고, 오녀산성 남쪽으로 38km에 있다. 둘레는 1,470미터를 넘으며, 성벽 일부는 무너졌지만 일부는 흙으로 축조된 곳이 남아 있고, 일부에서는 석재로 된 벽도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양식이 영락없는 고구려의 성이라 고구려의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부분 요나라와 금나라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일러도 발해 시절에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축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3.1.6. 성장립자산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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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족자치현에서 확인된 고구려의 산성. 오녀산성의 남향에 있다. 동, 서, 북향의 삼향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으로 아무도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성벽 유적은 남동쪽의 비어 있는 곳으로 집중되어 있고 그 길이는 대략 100미터 정도 된다. 가로세로 370미터 정도의 산성이며 석축 돈대와 성문이 확인된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적이며 상술한 들여쌓기, 치, 맞물려 쌓기 등의 양식이 모두 확인되는 고도로 발달한 요새이다. 시기적으로는 아마도 패왕조산성보다 먼저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내부에서는 우물이 확인되어 식수원이 있었음이 알려졌으며, 정황상 고구려가 졸본부여에서 점진적으로 남하해 가던 과정에서 군사 거점의 필요성을 느끼고 축조한 요새가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오녀산성과 국내성의 가운데 위치에 있어 국내성 지역에 포함되는 성으로도 비정된다.


3.2. 국내성 수도권[편집]



3.2.1. 국내성 [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내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2. 환도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환도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3. 관마산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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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통화시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324년 모용황의 침입 당시 연군을 막은 곳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남북으로는 600m에 이르는 광대한 성이지만 동서로는 70미터에 불과하여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성북쪽의 벽 바깥으로 해자로 여겨지는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이 해자인지 아닌지는 논쟁거리이다. 길이는 53미터, 너비 4미터, 깊이 80센티미터로 해자라기에는 너무 얕지만, 퇴적물이 누적되어 얕아진 것인지도 모르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는 도로를 가로막는 지형이라는 이유로 가운데가 헐렸고 곳곳의 훼멸이 매우 심하다. 공사 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 중국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도로 통행량이 늘어나고 계속 확장되어 끊임없이 훼손되고 있다.


3.2.4. 장천고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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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집안시 장천촌에 있는 고구려의 평지성. 현재는 상당 부분이 허물어져 성채 자체를 찾아보기는 다소 어려우며 바로 옆에 민가와 과수원이 들어서 있다. 압록강에 딱 달라붙어 축조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압록강 지역 수군을 통괄하는 수군 기지가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전체 둘레가 370미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공성전을 치를 수 있는 요새로 기능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수군 병력을 주둔시키고 그 물자를 보관하는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부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발굴되었고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촉도 소수 출토되었다.


3.2.5. 양민고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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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고성의 근방에 있는 고구려의 평지성. 이 성도 상술한 나합성처럼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그 터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댐을 수리하기 위해 물을 방류했을 당시 유적 일부가 드러났고, 이에 따라 약간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구려의 성임이 확실시되었다. 아예 그 위치조차 불분명하고 후보군만 있을 뿐인 나합성보다는 사정이 조금 낫다.

비류수 전투 이후 관구검에 의해 국내성이 초토화되면서 동천왕이 수도를 옮겼다고 하는 평양성이 이 양민고성으로 비정되는 경우도 있다. 이 지역에서 살다가 댐 건설로 추방 내지 이주된 조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히 넓은 평야가 있었고 땅은 비옥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라 풍수적으로 명당이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천혜의 요새까지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는 댐이 수리되고 다시 물이 채워져 수물되면서 연구할 수 없는 상태.


3.3. 평양성 수도권[편집]



3.3.1. 장안성[편집]


가장 유명한 평양성. 양원왕 시기 축조되어 평원왕이 천도하고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까지 수도로 기능했으며, 고려 및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보수하여 사용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평양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2. 대성산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성산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3. 안학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학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3.1. 수정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수정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4. 청암리토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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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 대성구역 서쪽에 합장강을 끼고 지어진 토성.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세워지기 전 고구려 평양의 중심지였던 장소. 고조선의 유적이 일부 발굴되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7] 고구려 미천왕에게 정복당하기 전 낙랑군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동서 길이 1,230미터 이상, 남북으로는 500미터를 초과하여 둘레는 3,500미터에 달해 한반도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성 중 수도가 아닌 성 중에서는 가장 큰 성 중 하나이다. 이름은 토성이지만 실제로는 곳곳에 석축이 남아 있어 석성으로 개량되었다는 정황도 보인다. 합장강을 천연 해자로 삼아 동문을 끼고 건립되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일각에서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아니라 대성산성과 청암리토성이 고구려 평양천도 초기의 이중수도였으리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안학궁이 워낙 거대한 궁궐이고 청암리토성이 전쟁이 나면 버리고 나갈 평지수도라기에는 너무 험준하고 튼튼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낮게 보인다. 다만 안학궁의 건립 연도가 6세기경으로 소급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청암리토성이 평지수도로 쓰였을 수도 있다.

내부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 터가 남아 있으며 당나라의 가람배치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안학궁이나 장안성으로 터를 옮긴 뒤에도 이곳은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도시로 사용된 듯하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세워지기 전 평양의 중심지였으며 근초고왕 시절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이 이곳으로 비정된다.


3.3.5. 고방산성-청호동토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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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남쪽, 청암리토성의 반대쪽으로 대동강을 끼고 지어진 토성들이다.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약간의 유적과 판축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폭 7미터 이상의 나무 다리 잔해가 출토되어 대동강을 도강하기 위한 부교를 놓는 시설이 아니었는가 추정된다. #

대성산성, 청암리토성, 고방산성, 청호동토성은 안학궁을 동서남북으로 빙 두르는데, 정황상 이 4개의 산성이 서로 연계하여 전쟁을 수행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대성 지역에 도읍한 왕이 장수왕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 4개의 산성이 서로 연계해서 싸워야 할 정도로 큰 적이 고구려 본토까지 감히 쳐들어온 적은 없었다.


3.4. 요하 방어선[편집]


고구려의 대(對) 중국 1차 방어선이자, 모든 중국왕조들이 두려워했던 엄청난 요새들이 줄줄이 늘어선 곳이다. 천리장성의 허리이자 메인 컨트롤타워를 담당했다. 현재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리장성에 강제 편입되는 치욕을 겪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밀려 요동을 상실한 이래 한때는 중국의 왕조들이 점령하기도 했으나, 고구려 미천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강력한 군주들이 이곳에 국운을 걸고 대중 전쟁을 치른 이후 고구려의 것이 되어 든든한 고구려의 방어선 노릇을 했다.


3.4.1. 천리장성[편집]


요하 권역 방어선에 고구려가 쌓았다는 장성(長城). 그러나 그 실체가 불명확하다. 이전까지는 고구려가 대규모로 늘어뜨린 장성을 쌓았다는 흔적이 없어 요새 네트워크라는 설이 힘을 얻었으나, 부여성 일대의 천리장성 북부가 발견되고, 이어서 물길의 공격에 대한 방어선으로 보이는 연변장성의 정체 확인으로 고구려가 길게 늘어뜨린 성벽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 정체가 미궁 속으로 빠졌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리장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2. 요동성[편집]


요동방어선의 핵심. 한때는 한나라, 조위, 후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광개토대왕이 후연에게서 빼앗고 사민시켜 고구려의 성으로 만들었다.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상대로 버텨내어 고구려-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곳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동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3. 안시성[편집]


요동방어선에서 요동성의 위성격 되는 산성이며, 요동성이 무너져 전 고구려가 충격에 빠졌던 고구려-당 전쟁 시기 당 태종을 상대로 맞서 싸워 막아낸 성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시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4. 백암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암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5. 현도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현도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6. 개모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개모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7. 신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성(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8. 변우산성[편집]


파일:변우산성.jpg
요녕성 본계시에 있다. 1,141m 둘레의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 1개의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 18km 방향에 개모성이 있고 동북쪽 30km에는 요동성이 있다.

성벽은 대부분 판축된 토성으로 이루어졌고, 돌은 두껍게 입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동벽 안쪽에는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병사들이 거주하는 반지하식 숙소였다는 주장과 마구간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발굴 과정에서도 이 구덩이에서는 아무 유물이 안 나왔기 때문에 결론은 나지 않을 듯.


3.4.9. 향마산성[편집]


파일:향마산성.jpg
요녕성 요양시에 있는 산성이다. 110미터 둘레의 성곽을 두른 소규모 요새로 보루에 가깝다. 이 외에도 요동 지역에는 23개 이상의 향마산성 정도 크기의 보루가 존재했다.

동북공정이 이루어지고 고구려 유적을 지우는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녹화사업을 명분으로 산성을 모조리 숲으로 덮어버렸다. 현재 유물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3.5. 요동 반도[편집]


요동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의 해상 요새 및 요동 반도의 방어 시설들이다. 천리장성의 남쪽을 담당하는 지역이다. 고구려의 대중 해상 무역 체계 역시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삼국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수군이 본진을 두었던 곳이다.


3.5.1. 건안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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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비사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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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득리사산성[편집]


파일:득리사산성.jpg
요녕성 와방점시에 위치한 산성. 비사성과 건안성을 연결하여 요하 방어선과 요동 수군기지들을 연계하는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300m에 이르는 둘레와 이중 산성 성벽이 확인된다. 내부에는 용담이라고 불리는 샘[8]이 존재하여 식수원으로 사용된 듯하다.

상술한 용담이라는 샘이 존재하기 때문에 용담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밑에 있는 부여성으로 추정되는 용담산성(龍潭山城)과 한자까지 똑같기 때문에 사료를 볼 때 주의해야 한다.


3.5.4. 목양성[편집]


파일:목양성.jpg
대련시 여순구 해안가에 딱 붙여 자리잡고 있는 평지성. 판축양식으로 축조된 정방형의 토성인데 기단부를 통짜 암석으로 채운 특이한 양식을 띠고 있다. 아마도 바다에 딱 달라붙은 위치상 파도에 흙이 쓸려가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특이한 양식 때문에 고구려가 축조한 것이 아니라거나, 혹은 당나라가 요동을 점령한 후 고구려인들을 동원해 축조한 성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비사성이 현대 한국의 진해에 대응된다면, 목양성은 거제 혹은 통영에 대응되는 글자 그대로 해안에 딱 붙은 항만요새다. 고구려의 요새가 맞다면 위의 장천고성처럼 사용되는 수군의 임시 거처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3.5.5. 고장산성[편집]


파일:고장산성.png
요양성 잉커우시에 있는 대규모 산성. 북마권자산성(北馬圈子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요하 최하류에 자리잡고 있어 요하에서 나가는 수로를 틀어쥐고 있는 요새이다. 사료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고 미디어에서도 주목받지 못해 인지도가 낮으나, 군사학적인 맥락에서는 요하로 드나드는 선박을 관리하고 요동 지역의 성들과 요하 방어선을 연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고구려의 요동 지역 성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요충이며, 전략적 관점에서 요동성이나 안시성에 필적하는 중요도를 가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둘레는 2,580m 이상으로 추산되는 거대한 성이며 내성, 외성을 두어 요동에서 가장 큰 산성 중 하나다. 성 전체가 하얀 석회암으로 축조되었고 내부에서 붉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의 요새임이 확인되었다. 건재하던 시기에는 성벽 전체가 하얀 석회암으로 빛나는 것은 물론 산의 암반까지도 석회암이기 때문에 마치 거대한 빙산과 같은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장산성 주변으로는 엄청난 평야갸 펼쳐져 있고 현재는 중국의 공업단지와 비닐하우스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할 시기에 이 지역을 곡창지대로 삼고 지배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고장산성을 쌓은 주체가 광개토대왕이라고 비정하는 추세다.


3.5.6. 오고성[편집]


파일:오고성.jpg
요령성 보란점시 벽류하 지류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 성벽 둘레가 무려 5,000m에 이르고 성벽 높이는 10미터에 이르러, 평지성이어도 공포스러운 체급을 산 위에 올려 놓은 듯한 거대한 성이다. 압록강변에 있는 오골성과는 다른 성이므로 주의. 이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아님에도[9] 둘레로는 요동성을 넘어서는 거대한 성을 축조한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하술할 적산산성까지 고려한다면, 어쩌면 문헌에 남지 않은 고구려와 중국 세력 간의 요동 남부 각축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동의 성 중 석재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고구려의 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95년 발간된 일본 학자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의 문헌연구에 의하면 서쪽의 문은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오고성의 유적을 가 보면 서문이 물로 통하지 않는다. 배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가 이 성을 쌓은 시기에는 그곳이 하천이나 해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한동안 잊혀져 방치되었는지 요나라나 금나라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명나라 시기에 발견되어, 종종 위패산성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3.5.7. 적산산성[편집]


파일:적산산성.jpg
요양성 잉커우시 나둔진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 성벽 둘레가 3,500m에 이르러 역시 상당히 크다. 산성 북쪽은 5개의 봉우리와 하천으로 휘감아쳐 절대 못 건너오는 방어선이기 때문에 성벽도 축조되지 않았다. 대신 성벽은 대부분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상술한 오고성과 마찬가지로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3,500m에 이르는 거대한 성을 축조한 까닭은 의문이다. 2008년 중국 학자 왕우량의 『고구려발해고성탕현구희변』에 의하면, 적산산성은 건안성이 요동성으로부터 150km 떨어져 있어 300리가 떨어져 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과 일치하며, 병사가 적지만 험준함에 의지할 것이라는 당 태종의 발언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적산산성이 건안성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동 방면의 컨트롤타워이자 군량 창고 노릇을 해야 하니 큰 것도 설명이 된다. 다만 이는 해당 학자 개인의 주장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3.6. 부여성 지역[편집]


본래 부여가 지배하던 지역이다. 문자명왕 대에 물길의 침입으로 멸망한 부여를 생으로 꿀떡한 고구려는 이 지역에 적극적인 사민정책과 동화정책을 펼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북방 방어선이자 대중국 방어선뿐 아니라 대몽골, 대유연 방어선으로 기능한 지역이다. 천리장성의 북부를 담당한다.


3.6.1. 부여성[편집]


부여성으로 비정되는 성은 크게 두 가지로 각각 농안고성과 용담산성이다. 서로 위치도 가깝고, 부여의 이전 수도인 예성과 서로 대치관계라서 어느 하나를 부여성으로 규정할 경우 나머지 하나는 예성이 되는 매우 황당한 입지에 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부여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1.1. 농안고성[편집]

파일:external/www.cha.go.kr/1626409.jpg

부여성으로 가능성 높게 비정되는 후보 중 하나다.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에 있으며 둘레는 3840m이다. 만주 북부는 추워서 농사가 어려운데 농안 지역은 유독 온화하고 땅이 비옥하여 예로부터 농경지역이었다. 주변에서는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이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부여의 구 수도로서 가능성 높게 비정되는 장소 중 하나이며, 만약 이곳이 부여의 수도였다면 하술할 용담산성이 부여의 예성이었을 것이다. 현 학계에서는 이후 발해의 시대에 부여성으로 언급되는 성을 이 농안고성으로 비정함에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3.6.1.2. 용담산성[편집]

파일:downloadItemFile_do.jpg

역시 부여성으로 가능성 높게 비정되는 후보다. 지린성 지린시에 자리잡고 있으며 둘레는 2,680m에 조금 못 미쳐 농안고성보다는 작다. 자세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의 가운데에는 용담이라고 불리는 저수지가 있는데 이 때문에 용담산성이라 부른다. 위에서 언급한 득리사성과 한자까지 동일하고 심지어 이름의 유래까지 비슷하기 때문에 학자들도 자주 혼동한다. 하술할 용수산성과도 종종 혼동된다.


3.6.2. 용수산성[편집]


파일:용수산성.jpg
길림성 요원시 용수산에 위치하는 산성. 둘레는 1,006미터이며 주변 대부분이 평야라서 마치 광야 한가운데에 섬처럼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벽은 한쪽이 툭 튀어나온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귀퉁이에 4개의 각루가 세워져 있다.

성벽 안에서는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가 아니라 발해의 양식에 가까워, 고구려의 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붉은 기왓장과 고구려 특유의 판축공법과 맞물려 쌓기가 확인되어 고구려 시절부터 쓰였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상술한 용담산성들(...)과 이름이 유사하며 용수산성의 수(首)를 수(水)로 혼동하여 용담(龍潭)의 담(潭. 연못)과 헷갈려서 잘못 기술하는 실수도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3.6.3. 공농산성[편집]


파일:공농산성.jpg
용수산성 동남쪽으로 고작 1.6km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산성이며 둘레가 1,431미터에 이르러 용수산성보다 크다. 사이가 다 평야라서 공농산성에서 북서쪽으로 고개를 뻗으면 용수산성이 보일 정도다. 때문에 2중성 구조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장소라서 아마도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요충지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후금, 청 시기의 유물까지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만주의 중심지 중 하나로 기능한 듯하다.

상술했듯이 용수산성과 함께 광역적인 평야에 둥둥 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곳에서 농사와 유목을 해서 거둔 식산을 쌓아 두고 보관하던 요새들로 추정된다.


3.7. 한강 유역[편집]



3.7.1. 아차산 일대 보루군[편집]


양마산보루군, 구의동보루군, 수락산보루군, 용마산보루군, 아차산보루군, 홍련보루군 등 170여개의 보루와 10여 개의 보루군이 있는데 싸잡아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라고 칭한다. 상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차산 일대 보루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2. 아차산성(?)[편집]


고구려가 장기간 영위한 성이지만 신라나 백제가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가 점령한 뒤 개조했을 수도 있고, 고구려가 세운 성이 무너지고 신라가 새로 세웠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3.7.3. 몽촌토성(?)[편집]


고구려가 남진하는 과정에서 점령한 후 고구려의 성으로 사용되었는데, 개축의 흔적은 거의 없다.




3.7.4. 풍납토성(?)[편집]


몽촌토성과 마찬가지인데 고구려가 도로를 새로 닦고 쟁기들을 모두 고구려의 보습으로 바꾼 흔적이 있다. 다만 역시 개축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든데, 아무래도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극도로 어려운 상태라서 더더욱 그렇다.




3.7.5. 당항성[편집]





3.8. 임진강 유역[편집]


고구려, 백제, 신라 최대의 격전지이자 고구려 보루군의 낙원이다. 고구려가 남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점을 임진강에 확보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임진강이 고구려에게 얼마나 중요한 남방 방어선이었는지도 드러나는 지역이다.


3.8.1. 칠중성(?)[편집]


파일:칠중성.jpg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성으로 둘레 603미터의 작은 성이다. 그러나 그 크기가 무색하게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격전이 벌어진 성 중 하나이며 특히 고구려와 신라는 이곳을 두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가 세운 성이 맞느냐는 의심도 있는데 칠중성에서는 고구려의 축성 양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토기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장기간에 걸쳐 신라가 지속적으로 개축한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성벽이 있었어도 접전 과정에서 무너지고 못쓰게 된 뒤 신라가 점진적으로 자기 양식으로 고쳐가면서 종국에는 고구려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일 수도 있다.

엄청난 격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음에도 이곳에는 1,000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터졌다. 현재는 파주시의 관리를 받고 있으며, 유적 자체는 신라의 유적으로 분류된다.


3.8.2. 호로고루[편집]





3.8.3. 육계토성(?)[편집]


파일:육계토성.jpg
파주 적성면 주월리에 위치하고 있는 성으로, 추산되는 둘레는 1,858미터이지만 성벽 곳곳이 무너져 정확한 값은 달라질 수 있다. 임진강변의 수많은 고루들과 달리 육계토성은 상당히 큰 성인데 이것은 원래 백제가 쌓아서 그렇다.

그러나 백제가 쌓았을 때에는 주로 토성으로 판축해 올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현재 유적에서는 수많은 석축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점령 후 고구려가 자기 식으로 개수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쪽 문은 임진강으로 바로 통하는데 현재는 6.25의 흔적인 대전차 장벽이 세워져 있어 땅으로 나갈 뿐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이 성에서 곧바로 배를 타고 임진강으로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은대리성[편집]


파일:은대리성.jpg
연천에 자리하고 있는 석성으로, 한반도 지역의 큰 성들 중에는 드물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구려의 성 중 하나다. 둘레는 1,069미터인데 296미터 둘레의 내성도 안에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문터 3개와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임진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하던 시절에 고구려가 임진강 컨트롤타워로 사용했던 성으로 추정된다.

2006년에 사적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는 유적지 겸 공원으로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다. #


3.8.5. 덕진산성[편집]


파일:덕진산성.jpg
현재의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서북쪽에 위치한 성으로 둘레는 984m이다. 역시 몇 안 되는 고구려의 성으로 확실시되는 성 중 하나다. 다수의 고구려 토기 조각과 기왓장이 발굴되었으며 2개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임진강 최대의 하중도 중 하나인 초평도가 앞으로 바로 보이는데 다수의 하중도가 그렇듯이 초평도는 백제군의 도하 거점 중 하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백제군을 막아내는 임진강의 1차 방어선 중 하나였을 것이다.


3.8.6. 당포성[편집]


파일:당포산성.jpg
연천군 미산면의 당개나루터 바로 앞에 현무암으로 세운 성이다.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파일명과 달리 평지성이며 형태는 길게 늘어진 장방형이다.

성벽 둘레는 300미터를 조금 넘는데 일부분은 성벽 밑에 단애가 있어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서벽은 호로고루와 축성 양식이 비슷하나, 동벽은 맞물려 쌓기를 무려 4중으로 하여 굉장히 강한 성벽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주로 요동, 그것도 요동의 큰 성들에서만 사용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한반도 고구려 성들은 2중으로만 맞물려 쌓고 판축으로 마무리하는 편인데, 이렇게 작은 성에 4중으로 강벽을 세운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당포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다수 발견되긴 했지만 신라 유물의 비율이 압도적[10]인데, 상술한 성벽의 강화와 연관지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면 신라의 북상 이후 고구려가 다급히 임진강 지역의 성들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신라가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흔적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포성의 동벽 지역은 건립 시기가 6세기 중반보다 오래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11]


3.9. 간도-연해주 유역[편집]


현재까지 발견 및 연구된 사서 기준으로는 고구려가 대규모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곳이라 교과서에서도 잘 표기하지 않는 지역이지만, 고구려 성채 유적을 조사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지역이다.

이전까지 "요새 네트워크"라고 여겨졌던 천리장성이 정말로 장성일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의심을 가지게 만든 유적인 연변장성이 확인되어 학계를 충격과 미궁에 빠뜨린 지역이기도 하다. 본래 동부여 등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으며, 상당한 기간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영유되었다.


3.9.1. 연변장성[편집]


파일:연변장성.jpg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화룡, 용정 지역에 150km, 혼춘 지역에 25km, 기타 지역에 100여 km가 자리잡고 있어 대략 300km가 안 되는 장성.

현존하는 고구려 지역 유적 중 최대의 논쟁거리 중 하나로, 판축공법으로 축조되었지만 곳곳에 석축이 확인되어 고구려식으로 맞물려 쌓은 석축을 정면에 씌웠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것이 고구려 유적이 맞다면 고구려는 실제로 길게 늘어뜨린 선형의 장성을 사용했던 것이 되며, 천리장성 역시 요새 네트워크가 아닌 만리장성처럼 길게 늘어뜨린 물리적 실체로 받아들일 필요성이 생긴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연변장성의 방향을 북향이 아닌 남향으로 보고, 밑에서 올라오는 세력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아닌 여진이나 금나라가 축조한 성벽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족이 이렇게 긴 선형 방어선을 유지할 이유가 제기되지 못해 역시 논쟁거리이다. 게다가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래 만주의 유목민족들은 공세일변도였지 이와 같은 장성까지 쌓아 가며 누군가(?)의 침입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고구려의 유적이라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있는 것이, 과연 고구려가 무엇을 두려워하여 여기에 이런 요새를 쌓았을까? 고구려가 장성을 축조할 능력을 갖춘 시점에는 이미 이 간도와 연해주 유역에 고구려를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문자명왕 시기의 물길인데, 물길과의 군사적 충돌은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시점 물길이 이동하고 공격하는 방향은 부여가 자리잡은 북만주 지역이다.

그리고 이 유적을 고구려에 의해 세워졌다고 비정한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데,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나라를 상대로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고구려가 장성 개념이 군사적으로 실효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그 말은 고구려의 어딘가에 있는 어떤 장성으로 적을 막아내 보는 경험이 한 번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이 연변장성 외에 고구려의 장성 유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연변장성은 어떤 고구려가 경계하던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전적, 혹은 최소한 그들을 견제한 전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력이 대체 무엇이냐이다.

일각에서는 아예 발상의 전환으로 이 장성을 고구려를 막기 위해 동부여 등의 북방 정주민족들이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출토 결과로는 아무리 둘러봐도 이 성에서 부여의 유물은 나오지 않고 있으며, 동부여가 이 장성을 쌓았다면 아마도 국경지대 내지 분쟁지대에 쌓았을 것인데 장성 너머에서는 동부여의 수도가 될 만한 큰 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미스터리하다.



[1] 축조 자체는 한나라 혹은 그 이전의 세력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구려가 요동성을 손에 넣은 이후 지속적으로 개축하고 확장했을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2] 정확히는 백암성으로 가능성 높게 비정되는 연주성산성. 백암성의 실제 위치는 설이 분분하다.[3]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아차산성과는 다른 유적이다. 아차산성은 신라가 축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비정되는 유적이고,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산성들은 고구려의 유적이 출토된 분명한 고구려의 산성들이다.[4] 중국에서는 사극에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성문에 대고 부딪히는 것으로 유명한 충차를 문이 아니라 벽에 대고 쳐도 벽이 무너지기도 했다.[5] 중국의 성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경우를 찾기 드문 공법이며, 고구려의 성들이 만리장성에 편입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6] 조선의 남한산성 등은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단겹 성벽이라 비만 와도 무너지곤 해서 자주 보수해야 했고, 수십 미터 정도만 보수공사해도 현재 가치로 수억씩 깨졌다.[7] 일단 북한 지역이라는 점이 크다. 그리고 평양은 지난 1,000년간 대도시였기 때문에 유물이 남아나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8] 호수라고도 하고 우물이라고도 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추정이 다르다.[9] 고구려가 오고성을 축조하는 것은 최소한 서안평을 공격한 미천왕, 혹은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는 광개토대왕기를 넘겨서였을 것이다. 오고성은 적어도 현재의 위치상으로는 수군을 쓰는 데 필요한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동 세력과 직접 접경하는 지역도 아니다. 그리고 유물 출토가 극히 적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대도시도 아니었을 것이다.[10] 성벽 잔해의 파편을 제외하면 신라제가 80% 이상이다.[11] 참고로 6세기 중반은 이 양반이 활약하던 시기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