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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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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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도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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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 ~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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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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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평양도읍기
장수왕 ~ 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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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 청암리 토성[3\]
대성산성
장안성

별궁
전설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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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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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 랴오닝성 환런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5]
지정번호
1135

오녀산성(五女山城) / 흘승골성(紇升骨城)[6][사진출처]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짝인 평지성은 어디?
6. 사실은 위나암성?
7. 대중매체에서의 오녀산성


1. 개요[편집]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本溪市)가 관할하는 환런 만(주)족 자치현(桓仁 滿族 自治縣)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졸본성에 위치하는 산성으로 메사 지형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졸본이라는 수도 자체에 피난성으로서 오녀산성이 존재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의 일상적인 도성이었던 평지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보로는 하고성자토성, 나합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


2. 이름[편집]


현재 오녀산성의 원래 명칭으로는 흘승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흘승골성이라는 명칭이 지칭하는 대상이 오녀산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에 가까울 뿐 완전히 맞는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은 오녀산성이라고 부른다. 다만 오녀산성이라는 이름답게 중국 현지에서는 오녀산성에 <오녀(五女) 설화>와 관련된 석조물을 설치한 바 있다.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 흘승골성(紇升骨城): 《위서》 <열전> 제88 -고구려조-에서의 명칭.
: 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다. 오녀산성이 졸본성이 맞다면, '골'이라는 말은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 오녀산성(五女山城): 현재는 이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 오로산성(五老山城)
  • 우라산성(于羅山城)

한편 오녀산성이 소재하고 있는 환인현 일대가 졸본으로 비정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사실에 수렴하므로 이 일대를 졸본이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서에 등장하는 "졸본성"의 실물로서 오녀산성이 거론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오녀산성 말고도 하고성자토성이라는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졸본성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3. 역사[편집]


삼국유사》에 따르면 맨 처음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37년, 동명성왕고구려를 건국할 때 수도로 삼은 졸본성(卒本城)[7]이 바로 이곳이라고 추정한다. 40여 년 후 제2대 유리명왕 대에 이곳에서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위치한 국내성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훗날 고려시대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 불리게 된다. 안정복이나 정약용 등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이 우라산성의 이름에서 유추해서 우라산성이 고구려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

공민왕제1차 요동정벌요동성을 공략하기 이전의 선발작업으로 이성계가 병력 1만 5천 명(기병 5천, 보병 1만)을 이끌고 이 성을 공략하여 함락하고는 요동정벌의 중간기지로 활용했다.

그 외에도 세종 시대에 4군 6진을 개척할 당시 "윤관동북 9성 중에서 최북단에 있는 공험진까지 우리의 영토"라고 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라고 한 기록도 있지만 세종 대에도 공험진 위치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을 만큼 위치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렇게 세종 대에 압록강 유역으로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여진족의 소굴이었던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고, 이어서 평안도 도절제사가 된 이천(李蕆)이 다시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며, 오녀산성 인근까지 진출하여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최윤덕, 이천이 4군을 개척했다. 두만강 유역으로는 김종서, 이징옥, 황보인이 여진족을 정벌하며 6진을 개척했다.


4. 구조[편집]


오녀산성은 탁자 모양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에 남북 1.5 km, 동서 0.3 km, 전체 약 8 km의 규모에 주변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과 동가강이 흐르고, 200 m 높이 절벽 위에 산성이 있어서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오녀산성 안에는 천지(天池)란 연못이 있어서 비상시에 성의 식수로 활용할 수 있다.


5. 짝인 평지성은 어디?[편집]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오늘날의 지린성 지안시에는 국내성(통구성)과 환도산성, 2곳이 있다. 이는 평상시 군주가 거주하며 사용하는 성과 유사시 사용되는 방어용 성이라는 이성체제를 잘 보여준다. 세 번째 수도인 평양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이성체제는 백제, 신라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가 위치했던 환인 지역에서는 오녀산성은 인정되지만 평상시 왕이 기거하는 평지성은 논쟁이 있다. 오녀산성 인근에 위치했을 테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후보로 언급되는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하고성자토성이 있다. 하고성자토성은 상고성자고분군 인근에 위치한 성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하지만 졸본성(오녀산성)과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릉비에 언급된 것과 정반대라는 점 때문에 아니라고 보는 입장도 많은 편.

두번째로는 고력묘자 고분군이 분포하는 곳에 평지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고력묘자 고분군은 상고성자 고분군과 함께 환인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군이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를 경우 이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는 것. 하지만 고력묘자 고분군 일대에 대한 조사에서 성으로 볼 수 있을 만한 유적이 보고된 바 없다.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벽을 만든' 형태의 성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는 고분군이 환인댐에 의해 수몰되어 확인이 아예 불가능하다.

세번째로 언급되는 곳은 혼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력묘자 고분군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나합성이다. 그러나 나합성 역시 제대로 된 조사 없이 혼강댐에 의해 수몰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6. 사실은 위나암성?[편집]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조 中. 출처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기록된 을두지가 언급한 위나암성의 지형묘사가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고구려의 집안으로의 천도는 제10대 산상왕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서기 209년(산상왕 13년)에 이루어졌으며, 오녀산성은 졸본성이 아니라 국내 위나암성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서는 졸본성이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나합성으로 비정된다.[8]


7. 대중매체에서의 오녀산성[편집]


MMORPG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 지역으로 등장하며 졸본성과 오녀산성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 중 오녀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녀산성(바람의 나라) 항목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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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위서》 <열전> 제88 -고구려조-에서의 명칭.[사진출처] http://blog.hani.co.kr/bonbon/39339[7]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성(忽本城)으로 기록됨.[8]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