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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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민족
3. 신분 제도
4. 형법
5. 언어
6. 교육
7. 경제
8. 인구
8.1. 소수설
8.2. 통설
8.3. 대규모설




1. 개요[편집]


고구려 사회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민족[편집]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에서


"동쪽 오랑캐 신라 매금이 늦게 돌아와(東夷寐錦遝還來)"

충주 고구려비』 비문 중에서

주요 민족은 고구려인 뿐만 아니라 부여인도 해당하는 예맥인이었다. 예는 부여계, 맥은 고구려계라는 게 일단은 통론.

흥미로운 점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을 굳이 따로 구분하여 언급하는 걸로 보아 아예 같은 계통인 예인 조차도 한반도 남부의 한(韓)인과 함께 이민족 처럼 여겼던 듯하다. 또는 지금의 남북한처럼 민족은 같더라도 국가는 다른 외국인 처럼 여겼거나.[1] 더 나아가 충주 고구려비에선 신라를 아예 동쪽 오랑캐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2]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맥인'인 광개토대왕이 당시의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따로 골라 언급한 점을 보았을 때,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덤 관리는 대부분 가까운 사람에게 맡긴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3] "예, 맥, 한을 고구려 천하관으로 포함시키고 장차 포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 사례가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당시의 중원 천하관과 관련있는 나라들만 통일 대상으로 삼고 이와 관련 없는 이민족 나라인 고조선은 제외한 것 처럼 말이다. 일종의 삼한일통 프로토타입을 광개토대왕이 보여준 셈. 시대가 흐르면서 고구려인 스스로도 자기 묘비명에다 삼한인, 조선인이라고 자칭하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던 것을 보면 점점 예맥한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동화되어가고 있었던 듯 하다. 다만 광개토대왕은 처벌[4]로써 묘지기가 되게 하였으며 고구려인들이 묘지기처럼 천한 일[5]을 하는 당시 사회를 염려하여 한인과 예인에게 묘지기를 맡긴 것이다.

현대에 연구를 더 진행하여 알아낸 결과 이들의 실제 민족 기원을 따지면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고조선계 예맥, 신라는 고조선계 예맥에 해당한다. 결국 셋 다 예맥계인건 맞는 셈. 고조선이 멸망한 뒤 유민들 다수가 부여로 유입되었고 나머지 다수는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여 마한, 변한, 진한에서 살았다. 자세한 사항은 예맥, 삼한,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항목을 같이 참고해 보길 추천한다.

고구려는 정복한 지역의 지역민들이나 이민족을 집단예민(集團隷民)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위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평민과 천민의 사이에 끼어있거나 천민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만주원류고에서도 고구려에 대해서 조사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지 만주족은 전과는 다르게 고조선과 고구려를 자신들의 조상 후보에서 제외해버렸다.[6] 그러니까 만선사관같은 유사역사학 들먹이지 마라

동시에 고구려는 이민족을 복속할 때의 말갈, 거란 등에 대한 고구려의 복속지배 형태가 사료로 남아있다. 이러한 지배형태는 피정복지의 반발을 줄이고, 복속지로부터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은 취하되 복속지에 대한 지배력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고 점진적으로 고구려로 흡수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6세기 중반경엔 이미 상당히 동화된 속말말갈의 경우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운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는 데 기여했다.

여러 종족이 교차하는 만주지역의 특성상 거란, 선비, 말갈, 돌궐다양한 북방 민족들을 휘하로 복속시켰다. 특히 선비족 같은 경우 초기 유리명왕 대에 그 일부를 복속한 기록이 보이고 먼 훗날 5세기에도 선비계가 주류인 북연의 인구를 흡수했다. 또한 몽골유연족 역시 멸망 후 일부가 고구려로 망명했다. 거란의 경우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6세기 말부터 7세기에 점차 중국이나 돌궐에게 붙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사실 거란은 완전한 동화를 하지는 못했으며 장기간의 복속으로 동화상태에 갔던 말갈족 등과는 다르나 거란족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말갈족의 경우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하여 동화되어졌다 여겨진다. 다만 야인말갈이라고도 볼 수 있는 흑수말갈족의 경우 어느 정도 복속시켜 고구려 멸망 때까지 함께 하긴 했으나 고구려 때는 물론이고 말갈족을 더 광범위하게 지배한 발해 때도 이들은 동화되지 읺았고 결국 독자적인 여진족으로 거듭나 타 유목민족과 중원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다. 돌궐족 역시 유연과 마찬가지로 영양왕 때 일부 부족이 복속되었다.

중국한족 인구도 상당수 있었다. 우선 낙랑군을 병합하면서 낙랑군에 대대로 살고 있던 중국계 및 한화된 고조선계가 대거 고구려에 유입됐다. 고구려도 이 사람들의 중국식 문화를 억지로 지우려고 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구려 영토 안에서 중국식과 고구려식이 혼합된 무덤이 조성돼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그 예시가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다. 그리고 낙랑군 외에도 고구려 시기 상당기간 동안 중원이 혼란했던지라 중원에서도 상당한 인구의 한(漢)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복속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삼국지가 열렸을 때 고구려로 도망온 한인들이 있다.

전체적으로 고구려라는 나라는 이처럼 대륙에서 피난 온 여러 종족들을 흡수하며 국력을 키워 온 나라라고 할 수 있다.


3. 신분 제도[편집]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신분제 사회). 귀족층은 상호(上戶), 평민층은 하호(下戶)라 불렸다고도 한다. 상호는 일을 하지 않아서 앉아서 먹는 자라는 뜻인 좌식자로 불렸다. 좌식자들은 평소에도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고구려의 정치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태왕가출신인 계루부 고씨, 절노부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이였다.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왕정[전제군주정]이었다. 주요 가문으로는 고구려 초중기 명림답부[7] 이후의 명림씨 가문, 을파소로 유명한 을씨 가문, 창조리[8] 가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 말기에 등장하는 연씨 가문이다[9] 관직은 할아버지 연태조가 고구려 군사지휘권자인 막리지, 오늘날로 합동참모의장격의 관직이있고, 아버지 연태조는 오늘날 국방부 장관급[10] 관직인 대대로의 관직에 올랐다. 이후 연개소문은 자신의 아들들을 막리지의 자리에 올리고 스스로는 대막리지[11]에 올랐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뭐 이건 딱히 고구려만 그랬던 건 아니고, 타국 지배층들도 전쟁에 지면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가 모조리 사라질 확률이 높으니 여간해서는 무장하고 싸웠던 경우로 보면 된다. 이들은 각기 방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귀족 휘하의 관리들은 왕이 거느리고 있는 관리들보다 급이 떨어져서 관직명이나 지위가 같아도 함께 서있거나 할 때에는 같은 줄에 있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는 국민[12]들을 조선시대의 호칭인 백성이 아닌 백정이라 불렀는데[13], 일반 국민은 농경사회인 조선과 달리 무역을 중심으로 농경, 상업, 군사,유목에 종사하였고, 병역납세의 의무를 지며,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또 집단예민(集團隷民)이 존재했는데 평민과 천민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바로 고구려의 영토나 영향력(간접지배 포함)하에서 정복된 집단으로 점차적으로 고구려화를 하면서 평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집단예민(集團隷民) 때에는 고구려가 요구하는 병력차출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납을 바쳤다.[14]

고구려의 천민계층으로 노비(奴婢)가 있었다. 노비는 포로, 죄인, 채무자, 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신분 계급에 따라서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던 편이다. 따라서 고구려 역시 골품제와 유사한 신분제도일 가능성도 있으나 고구려에서는 평민이 신분상승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았고[15] 그것이 정치세력화 되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던 점을 볼 때 신분제의 유동성이 고대 삼국시대 신라나 백제에 비하여 훨씬 유동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신분에 따른 의관(衣冠)문화는 바로 그들이 착용하던 모자가 대표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백라관(白羅冠)-청라관(靑羅冠)-자라관(紫羅冠)- 조미관(鳥尾冠)-비라관(緋羅冠)-조우관(鳥羽冠)등이 대표적이다.

흰색 비단의 백라관은 왕만이 쓸 수 있었으며 최고위 귀족들만이 쓴 청색 비단의 청라관(靑羅冠) 그 다음이 붉은 색 비단의 비라관(緋羅冠) 그리고 마지막이 자주색 비단의 자라관(紫羅冠)은 관등의 차이를 나타내며 신분의 입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고구려의 관모이다. 물론 이것은 관등의 차이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관모 말고도 지배층의 다른 모자로는 새의 깃털을 세 개 또는 네 개 정도를 꽂은 조우관(鳥羽冠)이 존재하며 평민들은 새의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을 쓰는 등 대표적으로 이런 차이들이 있었다. 언급된 의관 말고도 다른 중국 쪽에서 유행했던 남북조시기에 유행하였던 위모관(委貌冠)이나 통천관(通天冠)등도 나타나는 등 계급에 맞는 각각의 의관이나 헤어스타일을 통하여 계급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헤어스타일이 짧을수록 신분이 낮은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4. 형법[편집]


반란을 음모한 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서로 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 몸이 진무른 뒤에 참수하고, 가족들(家屬)은 적몰(籍沒)한다.

성(城)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12배를 물어 주게 한다. 소(牛)와 말(馬)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준엄하게 적용하므로 범하는 자가 적으며, 심지어는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16]

고구려는 원래 부여에서 기원을 둔 만큼 부여의 형법을 적용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인 데다 북방 국가와 자주 전투를 해야하다 보니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 베고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고 하며,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도 살인자를 죽이고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굉장히 호전적이고 상무적인 면이 있어서 적에게 항복한 사람이나 전쟁에서 패한 사람 역시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17]

절도죄를 저지른 도둑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는 일명 '1책 12법'으로 고조선대에 만들어졌다는 팔조법이나 부여의 법에서도 비슷한 법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제도가 1책 12법인지는 명확하진 않다. 여러 기록들 중에서 《구당서》에서만 1책12법을 언급할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오히려 10배의 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북사》, 《수서》, 《신당서》) 그 외에 《주서》에서 10여 배로 갚는다는 내용이 있다. 종합하자면 고구려는 1책 10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다.

또한 남의 가축을 죽인 사람을 노비로 삼거나, 남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을 경우는 제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제가회의를 통해 처벌하였다. 이토록 고구려에서는 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고 전한다.


5. 언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교육[편집]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18]

장수왕 때 전국의 지방에 경당(扃堂)을 설치하여 평민층을 대상으로 경전, 기마, 궁술을 교육했고 현대의 국립대학쯤 되는 태학(太學)도 존재했다.

태학은 전진(前秦)의 사례를 참고하여 소수림왕 시기 설립하여 기록상 한국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태학 외에도 국자학(國子學)이라는 학교도 존재했다. 이 곳의 교육자는 박사라 하여 태학박사, 국자박사라 불렀다. 태학과 국자학 모두 주 입학 대상이 귀족 자제였던 것을 보아 관료양성기관으로 여겨진다.

경당은 지방의 큰길에 세워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정 규모 이상의 지방에 설치된 사립교육기관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미혼의 자제들이 교육받았다는 것을 통해 청소년 교육 기관이라 여겨진다. 또한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나 구석진 마을 출신도 교육받았다고 하고 그런 이들도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수도에 있는 태학 외에 귀족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던 것을 보아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7. 경제[편집]


초기의 고구려는 위도가 높고 산지가 대부분인 국토의 여건상 농업이나 목축 등을 행하는데 있어서 비옥하고 너른 평지를 가진 부여에 비해 불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초창기에는 식량과 자원의 확보를 위해 한군현과 주변지역에 대해 약탈이나 전쟁 등을 벌이는 군사활동을 벌이며 농업과 약탈을 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집집마다 약탈한 재물을 저장하는 부경(桴京)이라는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유목 민족이라는 오해는 하면 안 된다. 흔히 교과서에서 고구려가 초기 약탈 경제의 형태를 취했고 말을 잘 탔다는 말 때문에 몽골과 같이 유목민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구려는 명백히 농경을 했다. 부여에서 권력에서 밀린 세력이 압록강 인근으로 내려와 나라를 지었는데 이미 나라를 지었다는 것부터 유목 민족처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주한다는 의미이며 더더욱 강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고구려가 넓힌 요동, 송화강, 대동강, 한강 유역 전부 평야이자 강변이며 농사 짓기 수월한 곳이다.

4세기 때 낙랑군을 정벌한 이후에는 남쪽의 너른 평지를 가진 농경국가로서의 면모가 더 강해지고 5세기에 들어서는 요하, 송화강, 목단강, 한강 등의 거대한 평원지대를 석권함으로써 농경과 목축, 교역 등을 발전시킬 제반 여건이 완성되었다.

만주에는 한반도보다 더 큰 평야가 있고 북쪽에는 농사 짓는 데에 좋은 흑토로 구성되어있어 고대에도 어느정도 비옥함을 인정받았는데 지리, 기후 여건상 밭농사가 주였으나, 요동에서 대방(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부분적으로 논농사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했을 것으로 보이는 게 645년 고구려-당 전쟁에서 개모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10만 석, 요동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50만 석이나 되는 점으로 보아 비축해둔 곡식의 양도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지방에는 현대에도 알아주는 대규모 철광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철은 북만주의 실위에 수출되기도 했었다. 도로망이 잘 발달되고 수레가 잘 활용되어 각종 천연자원을 원활히 수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양에는 수레가 대량으로 다닐 수 있는 고구려시기 다리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내몽골, 흥안령, 송눈평원 일대에도 세력을 뻗치면서 이 지역의 목축 및 교역의 폭도 넓어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교역규모를 정확히 묘사하는 기록은 없으나, 2차 고수전쟁 개전 초기에 수나라돌궐기병 2만 명을 앞세워서 거란을 기습했다는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해 볼 여지가 있다. 그때 수나라 군대는 돌궐기병을 고구려로 가는 상단으로 위장해서 거란을 쳤는데, 거란 측은 쳐들어오는 돌궐기병이 상단이라 믿고 있다가 크게 당하여 성공한 바 있다. 이는 고구려로 들고 나는 상단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2만 기병의 10%만 선봉대로 돌진한다고 쳐도 말이 2천 필인데, 이를 상단으로 착각했다면 경계근무하다가 졸았거나 이 정도 규모의 사람들이 상단으로 납득 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상단이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내몽골을 정벌하여 가축들을 많이 취한 기록이 남아있고 일본에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휘하에 있던 내몽골의 거란족에게서 거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낙타는 쌍봉낙타로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해 있었다. 혹이 큰 단봉낙타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분포해있던 종이다.

현재 고구려를 북한에 비교하며 신라보다 가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심지어 북한 지역이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만 해도 남쪽보다 잘 살아 풍류를 즐긴다고 남남북녀 같은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가장 극단주의적이며 교활한 성격을 가진 김일성이 집권하는 큰 불운을 맞이하여 저렇게 경제가 파탄난 것이다.

8. 인구[편집]


사서에서 고구려의 인구에 대해 기재되어 있는 것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3세기)고구려: 3만 호
  • 《구당서》 동이전 고려(7세기): 5부 176성 69만 7천 호
  •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시기 불명): 21만 508호

《신·구당서》 및 《삼국사기》에는 멸망 당시 집계된 인구가 70만 호로 기재되고 《구당서》의 가구수 기록은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를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가구당 인구 숫자를 계산할 때 표본을 (3543명/763호)[19]로 잡으면 3~4백만 명이고 (20여만 명/28200호~20여만 명/38200호)[20]를 기준으로 잡으면 6백만 이상까지 가능하다. 중국 남조가 50~90만 호 사이이고 위나라가 66만 호라는 것을 감안하면 많은 편이라 여겨질 수 있으나 사실 위진남북조의 호구수는 황건적의 난 이후 계속된 전란과 국경후퇴로 5천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던 후한 시절의 1/1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이다. 정부 호구에 집계되는 인구의 몇배가 유민과 도적으로 전락해 실제 인구와는 차이가 크다. 140년 기준 후한의 일개 군(郡)인 남양군의 인구가 240만, 익주의 인구가 720만을 넘었으므로 고구려의 인구를 70만호, 350만명으로 계산해도 오히려 인구밀도는 낮은 편에 해당한다. 실제 인구와 차이가 극심한 남북조의 호구수를 감안해 고구려의 인구를 내림잡으면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기원 2년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 요동, 요서 3군의 인구만 더해도 100만이 넘는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의 인구를 전성시에 21만 508호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야사인 동사보유에도 인용되어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당서》의 70만 호 기록이 틀리고 《삼국유사》대로 고구려의 전체 인구일 가능성[21], 《삼국유사》나 《구당서》 둘 다 다른 특정 시기 고구려의 전체 인구일 가능성[22], 고구려 특정 지역의 인구일 가능성[23][24], 전체 70만 호 인구 가운데 순수 고구려인 인구일 가능성[25], 21만 호에서 미등록 호구 집계 및 호구 편제 변화로 70만 호가 되었을 가능성[26][27]등이 제기되며 《한서》, 《후한서》 지리지와 《삼국지》 동이전에서 중국이 인식한 국가들의 인구규모 등이 참고된다.

이에 따라 고구려 인구 추정치에는 중국 사학계 및 이옥, 윤종주 등이 제기한 100만 이하설, 《삼국유사》나 1~3세기 중국 기록을 참조하여 이를 비판 혹은 수정한 100만 설, 손영종, 채희국 등의 북한 사학자나 김용만 등의 일부 국내 학자들이 제기한 500만 이상 혹은 혹은 700만 이상설까지 최댓값과 최솟값의 간극이 큰 편이다.

다만 《구당서》 및 《삼국사기》에 기록된 70만 호에 가구당 인구수 4~6을 곱한 300~400만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무난하게 보는 수치에 해당한다.[28] 1세기 이 지역의 인구가 이미 100만을 훌쩍 넘었음을 감안하면 70만 호라는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가장 설득력 있다.

역사인구학에서는 도시나 유적의 규모, 토지의 생산성, 경제활동 등을 단서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매니아들 사이에서 정황증거 정도로나 활용될 뿐 아직 삼국시대에 대해서 학술자료로서 엄밀한 검토를 통해 다뤄지지는 않고 있다. 훨씬 더 자료가 많은 조선조차도 추정할 단서는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한국 인구사 연구의 깊이 자체는 시론적인 수준 정도에서 머물고 있다.

8.1. 소수설[편집]


한 호가 보통 5인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위의 사료[29]

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15만에서 300만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된다. 어떤 사가는 백제에는 76만호, 즉 380만 명[30], 신라에는 수도인 경주에만 17만8936호 즉 약 90만 명[31]이 살았다고들 한다. 이 숫자들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며, 여기서 호는 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한 문헌[32]에는 고구려에는 21만508호, 다시 말해서 약 100만가량의 주민이, 그리고 백제에는 15만2300호, 약 76만 1500명 정도가 살았다고 쓰여있는데 바로 이 주민들의 수가 《구당서》에 나타난 호의 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11세기 중엽에 한반도에는 총 21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17세기에도 500만 명이 약간 넘는 인구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에 총 800만이 넘었던 인구수가 7세기에서 11세기에 약 500만이 되었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고구려 말기에는 69만 7000호가 살았던 것이 아니라 69만 7000명이 살았음이 명백해 진다.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 이옥, 1984>

한국의 고구려 인구 100만 이하설은 위와 같다. 대체적으로 중국 사학계에서 보고 있는 고구려 인구이기도 하며 한국에서는 이옥, 윤종주[33] 등이 내놓은 주장이다.

참고로 고구려 인구 70만 중에 30만이 중국에 끌려가고 10만씩 각각 신라와 발해로 들어갔으며 나머지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죽거나 이민족 지역으로 흘러들어 갔으니 한국사와 접점이 적다는 요지로 중국 사학계에서도 위와 비슷한 수치를 주장하고 있다.[34]

이옥이나 윤종주의 경우 후대의 고려와 조선 중기[35]의 추정 인구를 각각 200만, 500만으로 보기 때문에 고구려 인구 70만 호는 너무 많다 여겨 인구 증가율을 역산, 고구려의 인구를 70~100만 명 정도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후 이옥은 한사군의 호적 조사,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수치 등을 합산한 수치가 대략 100만 가량이고 《삼국유사》의 '고구려 전성시 인구 21만 호'라는 기록을 감안하여 고구려 인구를 90~135만가량에 휘하 말갈 인구가 더 붙을 수도 있다고 주장을 수정한다.[36]

8.2. 통설[편집]


일반적으로는 70만 가구라는 기록을 별 다른 의심 없이 인정하고 여기서 가구당 인구 숫자를 곱하는 것이 통설이다.[37]

한서》 등에 기록된 한사군의 인구 숫자, 3세기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인구 등을 보면 이미 100만을 넘어가며 이마저도 완전한 전수조사라 보기 어렵다는 점, 삼국시대와 후대의 영토 크기가 확연히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계산식을 집어넣을 수 없다는 점, 고려와 조선시대 인구 숫자 추정치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 고구려의 전쟁 동원능력 등을 고려하여 소수설을 비판하고 고구려의 인구를 추정하는 등의 고찰이 곁들여지기도 한다.[38]

조상현은 위와 같은 검토와 함께 고구려인의 25% 이상이 군인이며, 그 인원이 640년에서 670년까지 단 한 번의 교대도 없이 복무했으며, 당나라가 전사 및 포획시킨 인원이 고구려 군인 전체 숫자라고 가정을 해도 고구려의 인구는 160만을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70만 호 이상의 인구는 조선시대에도 검토를 거친 수치인 만큼[39][40] 고구려 인구는 300만은 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41]

여기에 대해서도 세세한 구분이 있는데 70만 가구는 당나라가 집계한 인구가 아니라 고수, 고당대전 이전의 멀쩡한 시절 내지는 전성기 고구려의 인구라는 견해,[42][43][44] 고구려인 70만 가량에 나머지는 이민족이라는 견해,[45] 멸망 당시 집계된 인구로 고구려 인구 전체가 아닌 일부의 집계라는 설 등이 있는데 일부는 다수설에서 후술한다.

어쨌든 대개 가구당 인구수 4~6을 곱하여 고구려 특정 시기 내지는 말기 인구를 300~400만가량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8.3. 대규모설[편집]


고구려의 인구는 멸망 시 67만 호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를 점령한 당의 추산일 뿐 실제 고구려의 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중략)...다만 순수한 고구려인의 숫자는 500만 명을 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중

앞서 살핀 통설에서는 고구려의 병력 동원 능력을 고찰하여 인구 숫자 300만 이상 설을 소개했지만 350만 인구 가운데 병력 자원을 100만 이상으로 상정하고[46] 군 병력 교대 주기도 여전히 긴 등 여전히 계산은 소극적으로 소수론의 선학들의 눈치를 보고 매우 조심하는 티가 팍팍 난다(...).[47] 전통적으로 정주국가에서 병력 30만 정도를 동원하려면 병력자원이 100만, 그리고 100만 가구 정도는 나와야 정상이다.[48]

일반적으로 군대의 실제 동원 비율이 인구의 5% 정도만 되어도 한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49] 백제사의 경우 병력 동원 능력을 5% 정도로 잡고 전체 인구를 추정하기도 한다.[50] 또한 당시 당나라가 점령한 영토는 고구려의 서부 일부에 한정되며 여수, 여당 전쟁 정도면 인구 수의 격감도 당연히 고려해야하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70만 가구 집계는 고구려 인구의 하한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인구가 70만 호라는 것은 과호, 즉 국가의 조세, 군역 등의 부과단위로서의 호 수이고 실지 자연호는 약 150만 호(인구 약 700~800만) 정도 되었겠다고 본다.

손영종, <고구려사의 제문제>

대규모설 중에서도 인구수 100만설의 대척점에 해당하는 설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법정호 이외의 자연호는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고 또 정부에서도 이를 인식한 것도 사실이기에[51] 학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을 시사하는 면은 어느정도 존재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소개한 견해 둘 다 고구려 군사 동원 능력이 당나라군의 전공 포장을 위해 과장됐을 가능성, 과연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고대국가가 이 정도의 인구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반론 등이 제기된다.[52]

특히 두 번째 견해의 경우 수치가 다른 학설과 동떨어지고 북한의 연구라서 객관성을 의심받아 국내에서는 소개 이상의 인용은 드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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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한국군을 포로로 잡아다 이용했다고 민족이 달라지는건 아니듯이 말이다.[2] 삼국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인적교류도 빈번하게 있었고 복식이나 언어의 유사성도 강했기 때문에 세 나라는 주변국들에게는 비슷한 집단들로 여겨졌다. 지금에서야 고고학과 역사학이 발달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그 당시 세 나라는 각각 마한, 변한, 진한을 뿌리로 하여 발전했다고 여겨졌으며 당나라에서 죽은 고구려인의 묘비에서도 종족이 '삼한인', '조선인'이라고 적혀있다. 이 삼국의 삼한기원설은 조선시대에 실학자들에게 논파되기 전까진 쭉 정설로 여겨졌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이 올림픽도 같이 개최할 만큼 강한 동질성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다 마케도니아에게 망했던 것처럼 동질성이 강하다고 해도 서로 죽일듯이 싸우는 데에 딱히 지장은 없다...[3] 만약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맡긴다면 무덤을 훼손하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불태워 시신까지 몽땅 없애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경우는 그냥 무덤도 아니고 신성한 왕릉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인들이 묘지기를 하지 못 하게 하였으나 결국 고구려인 묘지기들도 일부만 대체된 채 계속 왕릉을 지켰다.[4] 又 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 亦不得檀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5]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教言,祖王先王但教取遠近舊民 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嬴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教如此[6] 고구려군에서 말갈인들을 고기방패처럼 운용하기도 했고 당나라 역시 말갈인들만 골라내서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랬음에도 고구려인들과의 협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즉 당시 유목민족들은 '문명세계'에서 일종의 야만인 취급을 받았던 셈. 말갈인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인들보다 탄압을 더 심하게 받았기에 적극적으로 발해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7] 67년 - 179년 음력 9월 112세로 굉장히 장수한 인물 중 하나,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었으며 이는 고구려 초기 최고의 관직이었다 [8] 294년 등용, 고구려 남부 출신으로 국상 상루가 사망하고 대사자직위에서 국상에 등용되었다[9] 막리지 연자유 - 대대로 연태조 - 대막리지 연개소문 - 연남생, 남건, 남산대의 가문이다[10] 정치인 겸 군 최고지휘자[11] 고구려 말기 최고의 관직, 군사권의 경우 고구려 태왕보다 상위에 있으며 행정역시 총 책임자로서 태왕의 직속 하관이다.[12] 중국은 백성, 로마는 시민[13] 조선시대 천민 계급 중 백정이 아니다. 고려까지도 쭉 이렇게 불린다.[14] 이런 삼국시대의 집단예민들이 고려시대의 향, 부곡, 소 주민들의 전신이 되었다.[15]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합격을 통해서 신분상승이 이루어졌다면, 고구려는 주로 전쟁을 통해서 신분상승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반영한 것이 온달 설화다. 온달 설화에 나오는 온달의 출신 자체는 허구로 보이지만 어쨌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충분히 출세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16] 출처[17] 이 점은 백제도 똑같다. 그러나 백제의 진무는 고구려군에게 패했어도 또 내보냈던 걸 보면 어느정도 융통성은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다 죽이면 지휘권 맡는 걸 꺼리는 현상이 벌어져 군대를 지휘할 인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고구려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18] 출처[19] 666년,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할 때 인구[20] 668년, 당나라가 압송한 고구려 유민 숫자[21] 이옥, 소수설에서 후술.[22] 조상현, 고구려 인구에 관한 시론, 1997[23] 동사강목[24] 손영종, 고구려사(2), 1997 / 채희국, 고구려 역사 연구- 평양 천도와 고구려의 강성[25] 경철화, 손진기, 마대정, 양보륭 등 중국 사학자[26] 간과되는 부분인데 실제로 신라장적, 《삼국유사가락국기, 당평백제비 등 호당 인구수 10명 이상의 케이스가 꽤나 많이 등장한다.[27] 『고구려 중ㆍ후기 지배체제 연구』(이동훈 著, 서경, 2019)[28] 조상현, 『삼국유사』의 삼국 ‘全盛時期 戶口’ 기사 검토[29]구당서[30]구당서[31]삼국유사》의 기록.[32]삼국유사》를 말한다.[33] 우리나라 고대 인구에 관한 소고, 1985[34] 자오푸시앙(趙福香), '고구려 멸족 후 민족유향', 2000년.[35] 조선 숙종 시대 조선 인구를 578만 명으로 잡았다.[36] 이옥, 고구려의 인구 - 하나의 제안, 1997[37] 당서에는 백제 76만호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 고구려의 경우에 비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는 편이다. 삼국시대 내내 고구려와 백제가 보여준 동원력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참고로 멸망 당시 당이 양국을 멸망시킨 후 백제에는 5도독부를 설치 시도하다 중랑장급 선에서 관할하는 1도독부로, 고구려에는 대장군급 이상이 관할하는 1도호부 9도독부가 설치되었다.[38] 간단하게 말해 소수설 말대로라면 중국의 큰 국가들이 100만짜리 소국가 하나 잡자고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내서 70년 동안 싸운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말이다.[39]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40] 여기서 '조선 정도 크기면 장정만 210만 이상 나와야 정상'이라는 주원장의 발언도 함께 인용된다.[41] 조상현, 고구려 인구에 관한 시론, 1997[42] 신형식, 고구려사, 2003[43] 전성기에 350만, 멸망 당시 200만, 순수 고구려인 130만이라는 주장이다.[44] 이동훈, 위의 책[45] 경철화, 손진기, 마대정 등 중국 사학자들[46] 심광주, 2005,「남한지역 고구려 성곽연구」[47] 송서 일본전에 나온 12세기 일본 병력자원의 인구는 88만명, 조선의 경우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통설의 고구려 병력자원 추정보다 적지만 전체 인구에서는 둘 다 더 후하게(600~700만 이상) 추정한다.[48]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 세조 11년 11월 15일[49] 현재 병력 자원을 쥐어짜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이 1.1~1.15%이다. 5%면 북한 수준.[50] 김기섭, 『4세기경 百濟의 人口와 住民構成』, 京畿 史論, 경기대학교사학회, 1997, 17p[51] 법정호만이 의미있고 자연호는 의미가 없다 간주하기도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 초기의 인구 집계는 100만 안쪽이었지만 이를 상회하는 수준의 국력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병자호란 직후, 1639년의 인구 통계도 152만으로 영의정 이원익의 발언에 의하면 전체의 1/6 수준이었는데 1626년에는 필요에 따라서 226만의 장정을 따로 조사하여 관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존재는 법정호에서 병역자원들이 차출된 이후에도 국가의 생산력과 경제가 어느정도 돌아가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52] 현대처럼 화학비료가 없던 때라 무엇보다 이때는 아직 인구부양력의 왕인 논농사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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