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오부

덤프버전 :







계루부
(중부·내부·황부)
소노부
(서부·우부·백부)
절노부
(북부·후부·흑부)
순노부
(동부·좌부·청부)
관노부
(남부·전부·적부)

高句麗五部

1. 개요
2. 오부의 이름
3. 상세


1. 개요[편집]


고구려를 이루던 5개의 부족으로,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가 있었으며, 이들 부족들은 역사서마다 기록된 이름들이 조금씩 다르다. 또한 계루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족들을 나부(那部)라고 하여 이 오부 체제를 나부 체제(那部體制)라고 하기도 한다. 고국천왕 대부터는 내부(內部)·서부(西部)·북부(北部)·동부(東部)·남부(南部)로 이름이 바뀌면서 고구려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하였다.

2. 오부의 이름[편집]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는 정사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나온 이름들이고, 삼국사기에는 계루부를 제외하고 비류나부(沸流那部)·연나부(椽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류나부·연나부·환나부는 각각 소노부·절노부·순노부 중에 어느 부족에 대응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으로 대조하여 볼 때, 연나부는 절노부에 비정된다.

이처럼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명칭에는 '나(那)' 또는 '노(奴)'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고구려어에서 '나'는 강가, 혹은 산간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로, 내(內), 노(奴), 양(壤) 등과 통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는 위의 4부 명칭 외에도 ' 조나(藻那)'·' 주나(朱那)' 등 '-나(那)'로 지칭되는 집단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상류와 그 지류인 혼강(渾江, 훈장) 유역에 '-나'로 지칭되는 여러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설로는 노(奴) 자를 '사람'을 가리키는 흉노식 명사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흉노와 문화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연결이 되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본다. 노(奴) 앞에 붙는 소, 절, 순, 관은 방위를 뜻하는 접두사라고 볼 때, 결국 '소노'는 '서부 사람'이고 '절노'는 '북부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다만 '계루'는 왕성(王城)을 뜻하는 향찰문자로 보인다.

3. 상세[편집]


계루부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으로 대표되는 부여계 유민 집단이었고, 나머지 4부는 압록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었다. 초기 고구려는 여러 세력 집단 내지는 성읍국가들이 연맹을 이루어 형성된 국가였으며, 왕족계루부 아래에 있던 여러 부족들이 각자의 영토를 가지고 그 안에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 부족들은 차차 정복과 통합을 거듭하여 태조대왕 대에는 5개의 큰 부족으로 완전히 정립되었으며, 통합 과정을 거쳐 오부로 복속된 부족들은 오부 휘하의 작은 부족들로 남았다.

오부는 계루부와 함께 고구려의 최상위 지배층으로서 군림하였으며, 계루부에서는 이, 절노부에서는 왕비가, 순노부에서는 대막리지가 배출되었다.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본래 고구려의 왕위는 소노부에서 이어 왔는데, 나중에 계루부가 계승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해씨 고구려설이 있다.

각 부족의 수장인 대가(大加)들은 제가회의를 열어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였는데, 이 제가회의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연맹왕국의 성격을 띄고 있던 부여에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3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제9대 국왕이었던 고국천왕이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왕권 세습 체제를 바꾸고[1], 오부의 이름을 고치는 등,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때 계루부는 내부(內部), 또는 황부(黃部), 소노부는 서부(西部), 또는 우부(右部), 절노부는 북부(北部), 또는 후부(後部), 순노부는 동부(東部), 또는 좌부(左部), 관노부는 남부(南部), 또는 전부(前部)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진통도 상당하였던 모양으로, 고국천왕 대에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켰다든가, 고국천왕 사후에 고국천왕의 아우이자 신대왕의 삼남인 고발기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비류나부가 이에 동조하였다든가 하는 기록들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5부 귀족들은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수도 내에서 이들이 사는 곳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중의 방위명을 붙여 행정구역 단위로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의 건국 세력인 사로육촌이 훗날 서라벌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던 사례가 있다. 이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가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거듭나는 시기에 흔히 일어나는 과정이며, 이렇게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지 못 한 연맹왕국들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부체제론에 따르면 좁은 의미의 고구려인은 바로 이 5부에 속한 사람을 뜻하였다. 고구려에는 예맥계의 5부 집단 외에도 정복 활동을 거쳐 말갈 등의 다른 민족까지 통합해 나갔는데 5부 집단에 속하였다는 것은 본래부터 고구려계였던 사람, 혹은 5부에 속하여 고구려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고구려의 제도권 내로 편입되었다는 의미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5-11 21:55:17에 나무위키 고구려 오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다만 형제 상속제라는 제도의 실체에 대하여서는 의문점이 많다. 원래부터 부자 상속이 원칙이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형제 상속이 빈번히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형제 상속은 있었지만, 부자 상속이 완전히 확립된 것은 고국천왕 때보다 더 이전인 동천왕 대인지에 대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고국천왕 항목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