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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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전쟁
영어: Germanic wars
시기
기원전 12년~ 서기 16년
장소
게르마니아
원인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복속시키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야망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cherusci_mon_256.png 체루스키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Suebi_flag.png 수에비
파일:faction_emblem_marcomanni_256.png 마르코만니
수캄브리
우스페테스
텐크테리
채티족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우구스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베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게르마니쿠스
파일:cherusci_mon_256.png 아르미니우스
파일:cherusci_mon_256.png 세기메루스
파일:faction_emblem_marcomanni_256.png 마로보두스
병력
11개 군단
불명
피해
3개 군단 궤멸
불명
결과
로마 제국게르마니아 정복 실패.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드루수스의 원정
3.2. 티베리우스의 원정과 아우구스투스의 후속조치
3.3.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로마령 게르마니아의 붕괴
3.4. 이후의 게르마니아 전쟁
4.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12년 ~ 서기 16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게르마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필생의 숙원으로 삼고 강력하게 추진한 전쟁이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30년 최대의 경쟁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7세악티움 해전에서 꺾고,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에 비견될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고, 로마 제국을 지상 최강의 국가로 우뚝 세우려는 야망에 불탔다. 그는 로마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게르마니아였다.

게르마니아에 거주하는 게르만족은 로마인과 오래도록 충돌했다. 기원전 100년대에 일어난 킴브리 전쟁은 지중해 세계 최강의 전투민족을 자처하던 로마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겼고,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할 때는 게르만족과 종종 충돌했으며, 이후에도 로마의 영역을 종종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기원전 38~37년, 갈리아인들의 반 로마 봉기를 진압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반란을 지원한 게르만족을 토벌하기 위해 카이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건넜으며, 라인 강 좌안에 오피둠 우비오룸(oppidum Ubiorum)을 건설했다.[1] 기원전 29년 가이우스 카리나는 갈리아 봉기를 지지한 수에비족을 토벌하고자 라인 강을 재차 건넜으며, 기원전 25년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는 로마 상인들을 약탈한 게르만족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기원전 27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모든 평시 및 전시 권력을 움켜쥔 직후 다시 게르마니아에 눈을 돌렸다. 이 시기, 갈리아 일대에서 반 로마 운동이 재차 벌어졌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보냈다. 이 봉기는 손쉽게 진압되었는데, 아그리파는 반란 배후의 세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갈리아 내 반 로마 세력이 사용한 무기가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들에게서 밀수한 것을 파악했다. 이에 아그리파는 군대를 이끌고 도하하여, 보복 성격 차원에서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벌였다. 허나 이 군사작전은 당시 라인란트 일대에 주둔한 로마군의 숫자가 적고, 로마의 갈리아 편입 절차 역시 완벽하지 않아 대대적인 정복전으로 확전되지는 못했다.

같은 해인 기원전 27년, 로마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직접 갈리아의 전초기지를 방문했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간 이유는 아그리파 밑에서 두 소년이 군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목적보다 핵심이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갈리아 및 게르마니아 일대를 시찰하고 자신이 후계 구도에 염두에 둔 두 소년을 현지의 로마군에게 공개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배경하에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가 아그리파로부터 직접 군사경험과 군무교육을 받은 직후, 로마로 귀환하자마자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 대 율리아와 결혼시켰고, 티베리우스와 연애 중인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결혼을 사실상 허락했다.

7년이 지난 기원전 20년,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오간 아그리파의 주도 아래 갈리아 일대의 속주화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다. 로마는 갈리아 일대에 도로를 깔고, 대대적인 인프라 개선 작업을 하면서 각 도시의 병참 물자 수송 작업을 원할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1년 뒤인 기원전 19년부터 기존 주둔지에서 동진하여 라인 강 서쪽 변경으로 이동했다. 이후 로마군은 2년 동안 해당 주둔지에 군사요새를 건설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군사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로마의 평화와 갈리아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게르마니아를 손에 넣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기원전 18년 또는 17년, 수캄브리족, 우스페테스족, 텐크테리족의 연합군이 갈리아로 쳐들어와 국경 지역을 약탈했다. 이를 막으러 출정한 갈리아 총독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게르만 연합군에게 격파당했고 5군단의 독수리 깃발을 빼앗겼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외교를 통해 수캄브리족을 회유하여 로마의 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이때부터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대대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총 3년이 걸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오늘날 프랑스리옹인 루그두눔에 전쟁 자금을 위한 조폐국을 신설했다. 루그두눔은 이탈리아와 알페스(오늘날의 알프스 산맥)를 지나면 나오는 갈리아 남동부의 전진 군사 기지이자 새로운 도시로서 기능해야 되었기에 조폐국 신설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직접 진행되었다. 이 조폐국을 통해 로마는 병사들의 월급과 전쟁비용에 들어갈 자금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일대에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단행하여, 인구에 따른 세금체계를 마련하고 갈리아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최전선 기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15년, 양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떠나 갈리아로 향했다. 드루수스는 갈리아 총독 대행 겸 갈리아 전역 권한 대행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아우구스투스, 아그리파의 청사진 아래에 계획된 대로 루그두눔에 총독 관저를 세웠다. 사실 이 역할은 아그리파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드루수스가 대신 임무를 맡았다. 이후 드루수스는 세금 징수체계 점검, 물자 관리, 조폐국 운용현황 등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이름으로 갈리아 일대 부족장, 지역유지들을 불러 모아 화합을 다지고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제단을 만든다. 이는 로마가 곧 게르마니아 정복을 시작할 만반의 준비를 마무리했음을 뜻했다.

기원전 13년, 드루수스가 정식으로 갈리아 전역을 총책임지는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총독 자격으로 갈리아의 행정, 방어체계, 세금 징수 체계 등을 정비했다. 그는 라인 강과 갈리아 변경 시찰 후, 라인 강변에 병영기지 3곳(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독일 마인츠와 크산텐)을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내 친로마 세력 포섭을 진행했다. 이윽고 기원전 12년,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드루수스는 최전선에 주둔한 로마군을 이끌고 게르마니아로 출진했다. 이와 함께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의 처형 대 안토니아의 남편인 아헤노바르부스 등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참전한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편집]



3.1. 드루수스의 원정[편집]


기원전 12년, 드루수스는 갈리아 코마타 국경지대에서 갈리아를 재차 침략하려던 시캄브리족, 텐크테리족, 우스페테스족을 격파했다. 뒤이어 바타비 섬을 통과하여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로 쳐들어가 우스페테스족과 시캄브리족의 영역을 황폐화시키고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했다. 이후 라인강을 건너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서 쉬게 하고 로마로 돌아가 전황 보고를 한 뒤, 이듬해 봄에 갈리아로 돌아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항거하기 시작한 우스페테스족을 제압했다. 그 후 베저 강을 건너 북독일 일대의 게르만족을 복속시킨 뒤, 라인 강과 플레본 호수를 연결시키는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하고, 이 일대에 숙영기지와 퇴역병 정착촌 등을 건설했다.

그 후 함대를 타고 라인 강 하류로 이동하다가 북해로 나왔다. 해안에 살던 프리지아인들은 그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로마 선박들을 육로로 끌고 가는 데 동참해야 했다. 드루수스는 뒤이어 호크족의 땅을 공격했지만 북해의 조수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 선원들이 배를 좌초시키자 이들을 구하느라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겨울이 다가오자 함대를 거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드루수스가 항해를 계속하여 유틀란트 반도를 우회하여 발트해에 도달했다고 본다. 아우구스투스는 안시라 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 함대는 라인강 입구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킴브리 지역까지 항해했다. 이 지역은 이때까지 어떤 로마인도 육지나 바다로 도달하지 못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바다의 동쪽에 있다고 추정되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유틀란트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킴브리 전쟁의 복수를 할까 두려워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발트해까지의 항해를 마치고 복귀한 드루수스는 기원전 12/11년 겨울을 로마에서 보낸 뒤 기원전 11년 봄에 다시 라인강을 건너 우스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완전히 정복한 뒤 루피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한 후 수캄브리족의 땅을 침략했다. 당시 수캄브리족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기 거부한 하티안 족을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드루수스는 이들을 격파하고 베저 강에 이르렀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철수했다. 그런데 도중에 게르만인들이 매복 공격을 가해 피해를 입히고, 로마군을 좁고 깊은 협곡으로 유인한 뒤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거의 섬멸할 뻔했다. 그러나 드루수스가 침착하게 지휘하고, 로마군의 탁월한 조직력과 전투력이 빛을 발하면서, 무질서하게 공격한 게르만족은 모조리 격파되어 패주했다. 드루수스는 오베라덴(Oberaden) 인근과 채티 땅의 라인강 유역에 요새를 하나씩 건설했고, 처음으로 라인강 너머에서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10년, 로마의 게르마니아 침투에 위협을 느낀 체루스키족, 수에비족, 수캄브리족은 힘을 합쳐 갈리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아우구스투스는 친히 루그두눔에 도착한 뒤 장병들을 격려하는 한편, 판노니아에서 티베리우스를 소환하여 적을 격파하고 갈리아인들의 봉기를 방지하게 했다. 공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드루수스가 먼저 공세에 나섰다. 그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 한복판으로 진군해 카티족과 1년 내내 격전을 치른 끝에 끝내 굴복시키고 지정된 곳으로 이주하게 했다. 드루수스의 보고를 접한 아우구스투스는 뛸듯이 기뻐했고, 원로원야누스 신전 문을 닫아 게르마니아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며 그 전공을 기렸으며, 드루수스의 개선식을 허가했다.

기원전 9년, 드루수스는 체루스키족과 수에비족을 상대로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이 상당한 손실을 봤지만 끝내 승리를 거뒀고, 체루스키족은 로마에 복종하고 싶지 않아 동쪽으로 도망쳤다. 드루수스는 이들을 추격해 베저 강을 건너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약탈하였으며, 뒤이어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엘베 강을 건넜다.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이민족 여자 유령이 나타나 그를 향해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디 가느냐, 만족할 줄 모르는 드루수스여! 당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물러가라. 네 수고의 끝이 다가왔고 네 생명의 끝이 가까웠느니라."


드루수스는 엘베 강 유역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라인강에 도착하기 전에 낙마했다. 일설에 따르면 도하 작전 중 사고가 벌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낙마 사고로 다리 혹은 허벅지를 심하게 다쳤고, 9월 14일 괴저로 사망했다. 드루수스가 죽은 기지는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까지도 저주받은 숙영지로 불렸는데 로마군은 젊은 자신들의 총사령관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게르마니아 땅에 잠들기 바랬다. 그렇지만 동생이 자기 품 안에서 유언을 남기며 죽는 것을 직접 본 티베리우스는 부하들의 간곡한 청을 완강히 거절했다. 이는 보고를 받은 아우구스투스도 비슷했는데, 노황제는 전령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아들은 로마 땅에 잠들어야 한다며 유해 운구를 명했다.

그동안 양아들이 세운 거대한 공적에 무척 기뻐하며 진심으로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품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보낸 전령을 접견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드루수스가 낙마 사고를 당했고, 부상으로 요절했다는 보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드루수스가 아내 뱃속에 있던 시절부터 그를 자기 친아들로 여겼고, 아그리파 사후 조카사위인 양자를 후계자로 삼고자 일련의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더욱이 드루수스는 매년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에서 붙어 다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친부자 이상으로 사이가 좋고, 현직 집정관인데다 대미를 장식할 개선식 예정인 몸이었다. 이런 이유로 보고를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원망을 퍼붓고, 아버지로서 아들을 잃은 분노를 신에게 내뱉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주변의 시종, 부하들도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다가 "어찌해서 내 아들 드루수스를 빼앗아 가는 겁니까"라고 대성통곡했다.

이후 그는 겨우 기운을 차려 게르마니아에서, 갈리아의 루그두눔을 거쳐 이탈리아로 오고 있는 죽은 드루수스의 운구행렬을 보고자 움직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잘 타지 않는 말을 급히 몰고 전속력으로 달려, 국경 근처에서 며칠을 대기했고, 초췌한 몰골로 드루수스 유해를 맞이했다. 이때 그는 한참을 울면서 양자의 관을 쓰다듬다가 동생의 관 옆에서 걸어서 온 티베리우스의 위로 아래 겨우 기운을 차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죽음을 보고, 유언을 들은 드루수스의 형이자 자신의 또 다른 양자 티베리우스를 위로한 뒤, 게르마니아 전쟁 후속책에 관해 독대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말에 올라 급히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 국가 지도자 자격으로 드루수스 관과 함께 로마로 귀환. 고인의 아버지로서 모든 장례를 총지휘하고 드루수스 유골함을 손수 자신과 가족들이 묻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요절한 드루수스의 빈자리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멘토이자 상담역을 겸한, 이집트 출신의 스토아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는 아우구스투스 부부에게 심리치료 차원에서 죽은 드루수스의 전신상, 흉상들을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매일 이야기 해볼 것을 제안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아내의 집무실, 부부의 침실 등에 양자의 전신상, 흉상, 부조 등을 만들어 비치하고 매일 이야기하며 그 빈자리를 극복했다.

드루수스 장례식 당일,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이자 황제로서 먼저 간 아들의 유지를 지키고 그 대업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며 로마인과 하늘의 모든 신에게 다짐했다. 그 후 게르마니아 원정 책임은 공식적으로 티베리우스가 맡았다.


3.2. 티베리우스의 원정과 아우구스투스의 후속조치[편집]


드루수스의 대활약으로 로마의 영향력은 엘베강까지 뻗었지만,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는 로마에 복종하지 않은 부족들이 아직도 많았다.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복속시켜서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영역을 로마의 영토로 귀속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친 로마 세력을 포섭하고 유력자들을 후원하는 등의 온건책을 쓰는 동시에 반항적인 부족을 무력으로 징벌하는 강경책을 병행했다. 또한 40,000명의 게르만인을 라인강 좌안에 재정착시켜 로마군의 관리를 받게 했으며, 함대를 라인강과 엘베강 연안에 수시로 띄워서 게르만족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 시캄브리족이 이에 저항했으나 곧 진압당했고,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의 압도적인 권세에 두려워하며 인질을 앞다퉈 바쳤다. 티베리우스의 부장 출신 역사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때 로마가 게르마니아를 사실상 정복했다고 서술했다.

이제 게르마니아가 평온해지자, 아우구스투스는 슬슬 정복정책에서 관리정책으로 선회하기로 했다. 기원전 3년, 황제는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후계 구도를 구축하게 한 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새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휘하에서 무수한 공적을 세워 군사들의 인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늪지대와 빽빽한 산림 지대를 돌파하고 늪지대에 매복한 적군을 가차없이 격파했다. 또한 라인강과 엠스 강 사이의 습지 위에 폰테스 롱기라는 산책로를 건설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게 했으며, 엘베 강 건너편에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제단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년만에 사실상 경질되어 로마에 조기 소환되었다. 이는 그의 정책이 게르마니아에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외교관 및 행정관으로서 동방에서 활약했고, 이러한 경험을 게르만 부족들을 대할 때 써먹었다. 그러나 동방에서 통하는 외교 정책은 게르마니아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앞서 티베리우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부족들은 이간계를 즐겨 사용하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믿지 못하고 곳곳에서 파열음을 일으켰다. 첼루스키족은 친로마 성향을 보였다가 추방당한 귀족들을 복귀시키라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렇듯 평온해진듯 보이던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불러들이고 노장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를 파견해 게르마니아 속주 작업을 이어가게 했다.

서기 1년, 게르만 부족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는 이들을 상대로 3년간 격전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반란을 결정적으로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4년 은퇴를 선언하고 로도스 섬에 가버렸다가 복귀할 뜻을 내비친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게르마니아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티베리우스와 그의 부관인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의 군대는 라인강과 베저 강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모조리 제압한 후 베저 강을 건너 체루스키 족을 제압했으며, 엘베 강 중부 지방에 살던 랑고바르드족도 물리쳤다. 2년여 간의 작전 수행 끝에 반란은 종식되었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으며, 사투르니누스는 영예를 얻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반란을 수습한 뒤, 티베리우스는 라인강 하류에 사는 마르코만니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주변 부족들을 제압하거나 동맹으로 삼아 보병 7만 명과 기병 4,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로마군 수준으로 훈련시켰다. 마르코만니 족장 마로보두스는 자신이 친로마 인사라며 로마에 대항할 의사가 없음을 여러 번 밝혔지만, 로마는 그가 지나치게 강력해졌다고 여기고 제압하고자 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을 받들어 마로보두스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을 조성했다.

이때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보내기 위해 속주민들을 징발해 대규모 보조병 부대를 창설하여 라인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인 바토와 브레우키인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에게 일리리아를 평정하라고 지시했고, 티베리우스는 마르보두스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8개 군단을 이끌고 일리리아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에는 제17군단, 제18군단, 그리고 제19군단의 3개 군단만 남았다.

이는 자칫 게르만족이 반란을 도모할 빌미를 줄 수 있는 위험한 조치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오히려 게르마니아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유능한 행정가를 보내 게르만족을 다스리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동방에서 난폭한 숙주민들의 진압을 잘 하는 것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새 사령관으로 세웠다.


3.3.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로마령 게르마니아의 붕괴[편집]




바루스는 게르마니아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각 부족들에 관료를 파견하여 로마법에 준수하라고 명령하고 부족장들의 정책에 여러 번 간섭했다. 게다가 게르마니아에서 찾기 힘든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해 게르만족의 불만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당시 로마군에 오랫동안 복무했고 바루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로마군을 몰아내고 통합된 게르만인의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되고 싶었던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읽고 반란을 꾀했다.

장인 세게스테스는 아르미니우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지만, 바루스는 이를 무시했다. 아르미니우스가 배신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고,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세게스테스의 증오를 알고 있었으며, 시리아와 유대에서 총독으로 일하면서 모함을 통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행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와 공모자들은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이로부터 로마군을 무찌를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은 곧 로마군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최대한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서기 9년 9월 어느 날, 로마에 복속된 한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로마군의 위용을 보여줘야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조언했다. 바루스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휘하 3개 군단과 6개의 보조군 대대, 3개의 기병대 중대를 총동원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아르미니우스가 매복시킨 게르만 군대에게 습격당해 전멸했고, 일부 기병만이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게르만족은 숙영지와 정착촌에 남아있는 로마 군인과 민간인들을 습격해 모조리 학살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12년 원정을 시작한 이래 20년간 밀어붙였던 게르마니아 원정의 성과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3.4. 이후의 게르마니아 전쟁[편집]




아우구스투스는 3개 군단이 전멸하고 20년간 일궈온 모든 게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밤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바루스! 내 3개 군단을 돌려줘!"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남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투스의 2개 군단을 갈리아로 이동시켜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반 로마 봉기를 방지하게 했다. 여기에 게르마니아 최대의 로마 요새인 앨리스 요새의 총독 루키우스 카이시디우스는 게르만족의 맹공을 겨우 물리친 뒤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에서 아군과 합세했다.

서기 10년, 일리리아 대반란을 평정한 티베리우스가 라인강으로 이동하여 강 연안의 요새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병력을 재배치했다. 이후 라인강을 건너 농작물을 파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보복 전쟁을 벌였지만, 깊숙이 들어갔다가 바루스와 같은 꼴이 될 걸 우려하여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 뒤이어 서기 11년 게르마니쿠스가 후속 병력을 이끌고 티베리우스와 합류했고, 두 사람은 11년과 12년에 2차례 원정을 일으켜 라인강을 도하해 친로마파 게르만족을 로마 점령지에 이주시키고, 저항하는 부족들을 토벌하기 보다는 인구를 분산시켜 그들을 로마 휘하에 편입시키는 데 집중했다.

서기 12년 겨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로마로 귀환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승계를 위해 티베리우스는 남게 하고 게르마니쿠스를 라인강 전선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대대적인 복수전을 벌이고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원정을 개시하기 전인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했다. 타키투스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기 직전에 제국 확장을 종식하라고 부탁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티베리우스가 선제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티베리우스의 황위 승계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을 제압한 게르마니쿠스는 라인 강을 건너 복수전을 개시했다. 그는 해군을 잘 활용하여 원정군의 보급을 책임지게 하고 적의 매복 공격을 모조리 격파했다. 서기 15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잃어버린 3개의 독수리 군단 깃발 중 하나를 탈환했으며, 서기 16년 휘하 부장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인 플라부스 등과 함께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앙그리바리 방벽에서 재차 격돌해,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동맹군을 와해시키고 두번째 독수리 깃발을 되찾았다. 그러나 얼마 후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원정을 지속할 의사를 표명했으나 티베리우스가 강력히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점령한 영토를 친로마 게르만 부족들에게 나눠주고 철군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4. 이후[편집]


로마군이 게르마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로마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던 아르미니우스와 마르코만니 족장 마르보두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마르보두스가 대패하여 로마로 망명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게르만족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21년 자기 부족 내 반대자들에게 피살되었다. 한편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9년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다. 향간에서는 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시리아 총독 피소가 독살했거나 강력한 황위 경쟁자를 두려워한 티베리우스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후 로마와 게르만족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경계로 삼고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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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은 나중에 '아그리피나 콜로니아'로 개명되어 주요 도시가 되었고, 훗날 쾰른의 전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