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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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전후 일본 최초의 자국산 전술 수송기.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개발했다.
C-130H과 함께 후계기인 가와사키 C-2로 전량 교체 예정이다.
2. 제원[편집]
Kawasaki C-1
3. 개발 과정[편집]
태평양 전쟁 이후 창설된 항공자위대는 미군에서 퇴역한 잉여 물품인 C-46 코만도를 인수받아 운용했었다. 이 비행기는 덥고 습하거나 산악지형에서 비행성능이 좋았지만 2차 세계대전 기종이었기에 1960년대에 심각한 노후화로 일본 내에서도 애물단지 신세가 되었다. 이에 일본 방위성은 코만도를 차기 수송기로 교체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도입 후보로 미국 록히드 마틴의 C-130이 거론되었지만 국외 구매를 철회하고 자국 기술로 자체 개발하는 노선으로 변경했다. 사업명은 C-X 사업
당시 일본은 최초의 자국산 민항기인 YS-11을 개발해내고 F-86, F-104 전투기를 면허생산하는 등 항공 관련 업계에도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이에 힘입어 1966년에 기본 설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67년 상세설계에 들어갔다. 개발주관업체로 일본항공기제조(NAMC)가 선정되었으며 그 외 후지중공업, 신메이와, 일본비행기, 소화비행기공업 등의 기업이 개발에 참여했다. 양산은 미쓰비시 중공업이 맡을 예정이었지만 당시 이 미쓰비시는 항공자위대용 초음속 제트 훈련기인 미쓰비시 T-2를 개발중이었던지라 양산은 가와사키 중공업으로 넘어가게 된다. 대신 엔진은 미쓰비시에서 라이센스 생산하기로 한다.
그렇게 시제1호기가 기후현에 위치한 가와사키 중공업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졌으며 1970년 8월 출고식이 거행된다. 시제1호의 첫 비행은 동년 11월 12일에 이루어졌다.
여담으로 NAMC에서 YS-11처럼 이 수송기도 민간형도 고려했지만 당시 일본에선 좌익운동이 절정에 달해 국회에서 민간항공기 제조사가 군용기를 만드는 건 위헌이라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민간용 버전 제작은 좌절되고만다.
그렇게 시제기 2대를 제외한 나머지 기체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도맡게되었다.
4. 배치 및 운용[편집]
1971년 2월 14일 시제1호기를 인수받은 항공자위대는 기후 기지에서 각종 테스트를 진행했다. 1973년 6월 30일 방위청의 승인으로 드디어 C-1이라는 제식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같은해 시제 1호기~3호기가 이루마 기지에 배치된 항공자위대 제 402비행대에 배치되어 운용 시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75년 4월 1일 기지 간 운행을 실시, 1976년 1월 1일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작전 운용에 투입했다. T자형 꼬리날개에 강력한 엔진 추력으로 600m 남짓한 활주로에서도 단거리이착륙이 가능했고 고공에서의 성능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중형 수송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행 중 90도로 급선회하는 등 수송기답지 않은 놀라운 기동성능을 보여줬다.
시제기 포함 총 31대가 제작되었다. 승무원을 제외하고 병력을 60명 가량 탑승시킬수 있으며 완전 무장 공수부대원 기준 탑승 인원은 45명이다. 군용 지프차 3대, 혹은 8톤 가량의 화물 탑재가 가능했던 C-1의 항속거리는 약 1,500km~2,150km에 달한다. 남북으로 길쭉한 일본 열도의 작전 환경을 고려해 설계됐지만 C-1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기후 기지에서 오키나와까지 비행하는대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증가연료탱크를 별도로 장착해야 했는데 이러면 화물과 수송 인원에 제약이 가해지는게 흠이었다. 이로인해 C-1의 도입 사업은 원래 계획이었던 50대에서 31대로 축약되었고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잦아지면서 C-130을 구매하면서 1981년 10월에 최종호기가 인도되면서 도입이 완료되고 C-1은 생산을 중단하고 만다.
현재는 기령이 오래된 기체인 만큼 퇴역이 예정되어있다.
5. 파생형[편집]
5.1. EC-1[편집]
전자전기 버전 파생형.
6. 등장 매체[편집]
최초의 일본산 수송기라 그런지 후계기인 C-2에 비해 미디어에서의 출현이 많은 편이다.
7. 둘러보기[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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