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포르투갈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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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포르투갈 혁명
시기
1910년 10월 3일 ~ 10월 5일
장소
포르투갈
원인
포르투갈의 사회적 혼란
영국과의 관계 악화
교전 세력
포르투갈의 공화주의 세력
포르투갈 제16보병연대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갈 제2보병연대
포르투갈 제2기병연대
지휘관
테오필루 브라가
마샤두 산투스
마누엘 2세 국왕
안토니우 토익세이라 디 소사 총리
병력
약 2천명
약 7천명
결과
포르투갈 왕국 멸망
포르투갈의 군주제 폐지
포르투갈 제1공화국 수립


1. 개요
2. 배경
3. 발발
4. 혁명 이후




1. 개요[편집]


1910년 10월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포르투갈의 군주제가 폐지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 배경[편집]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더불어 해상 강국으로서 중남부 아메리카 식민지를 스페인과 양분할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나 미국 독립 혁명의 여파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포르투갈 본토 역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포르투갈에도 혁명 여론이 생겨나 내우외환을 겪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 왕세자였던 페드루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페드루 1세"라고 선언하여 포르투갈은 본토의 영토의 100배에 가까운 브라질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이는 포르투갈인들의 사기를 저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브라질이 브라질 제국이던 시절에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 페드루 2세가 포르투갈 국왕 마리아 2세, 페드루 5세, 루이스 1세와 같은 한가족이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타격이 비교적 적었으나 브라질의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1889년 쿠데타를 일으켜 페드루 2세가 폐위되고 브라질 제국이 공화국이 되어서 포르투갈과 브라질 간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렸다.

결정적으로 1890년 포르투갈이 그나마 남아있는 아프리카 식민지 앙골라, 모잠비크 사이를 육로로 연결하기 위해 현재의 짐바브웨, 잠비아로디지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서 서쪽부터 앙골라-로디지아-모잠비크 라인, 일명 "핑크 라인"을 연결하려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로디지아를 탐내던 영국이 로디지아 지역을 포기하라고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고, 마침 새로 즉위한 카를루스 1세는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국력 차이가 도저히 싸워볼 수 있을 만한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군말없이 로디지아 지역을 영국에 넘겼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결정이지만, 영국에 대항 한번 못 하고 바로 영국의 요구에 순응했다는 점에서 포르투갈의 수많은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깊은 실망감과 치욕감을 느꼈다. 하필이면 카를루스 1세의 친할아버지인 페르난두 2세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사촌인 데다 앨버트 공의 친사촌으로 같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기에 반영감정에 빠진 포르투갈인들은 자국인 포르투갈 국왕을 영국 국왕과 동일시하며 적대시하였다.

카를루스 1세의 할머니 마리아 2세가 할아버지 페르난두 2세와 결혼할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손자인 카를루스 1세 대에 이르러서는 영국과의 외교 문제로 인해 카를루스 1세와 포르투갈 왕가에 큰 약점이 되어버렸다. 카를루스 1세와 포르투갈 왕가는 이 시점인 1890년을 기점으로 자국 혁명가들의 테러와 암살 시도에 시달려야 했으며, 1908년 1월 28일 도서관 엘리베이터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한 대 위기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결국 나흘 후인 2월 1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를루스 1세가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위해 거리 퍼레이드를 진행하며 귀가했는데 이 때를 틈타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카를루스 1세 본인과 장남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당하고 만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와 형을 잃고 즉위한 차남 마누엘 2세는 국민들의 동정을 받았으나, 혁명가들 입장에서는 마누엘 2세 역시 제거해야 할 인물일 뿐이었다. 마누엘 2세는 굉장히 유능하고 현명하며[1]인품도 좋았으나, 사회주의가 득세하는 당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1890년 영국과의 외교전으로 인한 왕가 전체의 이미지 실추 등으로 인해 늘어나는 공화주의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 발발[편집]


1910년 10월 3일, 공화당 당수 마샤두 산투스는 마누엘 2세가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를 위한 연회를 풀고 있을 때 제16보병연대를 통해 공화정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제16보병연대나 공화제를 수립하려고 했었던 다른 부대에서도 움직이지 않거나 군주제에 우호적인 이들이 있었기에 사령관과 대위만 죽이고 실패했다. 혁명은 이대로 진압되나 싶었으나 순양함 상하파엘 호가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정부군은 사기를 잃어갔다. 왕궁과 마누엘 2세가 있던 별장에서 그를 경호해야 했던 군인들 상당수가 사기를 잃고 흩어지는 바람에 원래 국왕 주변에 800여명 가량 있어야 하는 호위부대가 100명 가량만 남게 되었다.

10월 4일 새벽, 호툰다와 호시우의 양 포병대가 서로를 향해 발포를 가했을 때는 정부군에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양측 수뇌부가 외국인들을 전투 현장에서 대피해야 한다는 독일 대사관의 뜻을 받아들여 잠시 휴전을 선언했을 때 민중들이 혁명군이 승리했다고 판단해 "공화국 만세"를 외치게 되었고(...) 그때 이후로 상황이 급변하여 정부군은 사기를 더 잃게 되었고 리스본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파인 주제 헬바스가 공화국을 선포하자 마누엘 2세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판단해 포르투로 향하던 요트를 돌려 지브롤터로 향해 친척이 왕가인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여러모로 빌헬름 2세 퇴위 선언 이후 공화제로 할지 황태자나 바이에른 국왕 등 다른 사람을 군주로 추대하는 입헌군주제로 할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필리프 샤이데만이 독단적으로 공화정을 선포한 독일의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4. 혁명 이후[편집]


반영감정과 민족주의, 내셔널리즘 등의 동기로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이 된 포르투갈은 오히려 혁명 전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마누엘 2세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의견만 같았을 뿐 이들 중에서 문민 민주정부, 사회주의 정부, 군사정부를 수립하자는 이들 사이의 갈등은 훨씬 더 심해져만 갔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 국왕을 몰아낸 후에 오히려 전 국왕 마누엘 2세에 대한 지지도가 혁명 이전보다 더 늘어났다. 그러나 군주제 폐지 이후에도 한동안 군주제 복권 기회가 있었던 프랑스[2], 독일[3], 오스트리아[4] 등과는 달리 포르투갈에서는 복권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군주제 폐지 이후 더 심해진 사회 혼란으로 인해 반대급부로 포르투갈 왕가와 마누엘 2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던 찰나 복벽파 상당수가 1차대전 때 독일에 붙는 바람에 1차대전 때 독일이 패전하면서 복벽파의 세가 어느정도 꺾인 데다가 제1공화국의 혼란상을 이유로 제1공화국을 종식시킨 군사정권 이후 제2공화국을 수립하고 집권한 살라자르는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일가가 포르투갈로 망명 오는 것을 허가할 정도로 입헌군주제에 우호적인 인물이긴 했으나 복권을 시도했다가 자신의 지지도마저 깎일 까봐 현행을 유지하기로 했다. 살라자르 사후 카네이션 혁명으로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왕정복고를 이룬 옆나라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마누엘 2세 사후 직계가 끊긴데다 마누엘 2세의 후계자인 두아르트 누누는 그동안 어떠한 발언권도 없었고 영향력도 없었기에 복고가 이뤄지지 못했다. 군주제 폐지 이후 30여년밖에 안 되었던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당시 기준으로도 군주제가 폐지된 지 60여년이 넘어서 군주정 시절을 기억하는 이조차 매우 적었다.

다른 군주제 폐지 국가들과는 달리 포르투갈 왕가는 눈에 띄는 큰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혁명파들에게 살해당하고 군주제까지 폐지되어 국외로 추방된 것이 걸려서인지, 민주화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구 왕가에 대한 비공식적인 명목상의 예우는 해 주고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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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아버지의 국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으니 앞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에 따라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회 문제"라는 한 가지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2] 프랑스 혁명 이후 수차례의 복권 시도 끝에 몇 번 성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거듭해서 쫓겨나고 쫓겨난 탓에 제3공화국 이후로는 복권 가능성이 0에 달해서 그렇지.[3] 1차대전 패전 이후 좌파를 제외한 중도나 우파 중에서는 군주제 폐지를 연합군의 강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고 히틀러 집권 초반기까지는 복권 가능성이 점쳐졌다. 2차대전 패전 직후에도 잠시나마 복권 시도가 있었다. [4] 제1공화국 시절과 2차대전 직후에 기회가 있었다. [5] 튀르키예와 러시아는 군주제 폐지 이후에 구왕가 후손들이 정부 측의 박해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매우 힘겹게 살아갔던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예우는 좀 해주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