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스 1세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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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1세 암살 사건
Regicídio de 190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27attentat_de_Lisbonne.jpg
사건을 묘사한 그림.[인물설명][1]
일시
1908년 2월 1일
장소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
사망자
카를루스 1세(국왕)
루이스 필리프(알가르브 공[2])
알프레두 코스타(가해자)
마누엘 부이사(가해자)
주앙 사비노 다코스타(시민)[3]
원인
군주제에 대한 반발
결과
카를루스 1세 국왕 사망
알가르브 공 루이스 왕세자 사망
마누엘 2세가 국왕이 됨
영향
포르투갈의 군주제 폐지[4]

1. 개요
2. 배경
3. 암살자
4. 경과
5. 이후



1. 개요[편집]




1908년 2월 1일,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와 왕세자 루이스 필리프가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공화파 암살자 2명에게 암살된 사건.


2. 배경[편집]


1139년 아폰수 1세가 건국한 이래 700여년간 이어진 포르투갈 왕국은 19세기에 이르러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1807년 나폴레옹 1세의 부하인 장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포르투갈로 쳐들어오자, 당시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1세를 대신해 섭정하던 주앙 6세는 강대한 프랑스군에 맞서봐야 승산이 없다고 보고 왕실 가족과 귀족들을 데리고 영국 함선 12척에 몸을 싣고 브라질로 망명했다. 왕실에게 사실상 버림받은 포르투갈 국민들은 프랑스의 억압에 고통받았고, 뒤이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휘말리면서 전체 인구의 1/6이 전쟁, 기근, 질병, 실종 등의 요인으로 희생되었다.

1814년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면서 전쟁이 종식된 후, 포르투갈인들은 주앙 6세에게 조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불안정하고 스페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포르투갈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브라질에서 그대로 통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창설하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주앙 6세는 1816년에 왕이 되었다. 국왕이 포르투갈에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포르투갈인들은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왕을 압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의회를 포르투갈에도 도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급기야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에서 시작된 반란이 여러 도시들에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했다. 반란을 주동한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 혁명"을 일으켰다고 자축하며 포르투갈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왕실이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야 하며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선거를 실시해 변호사, 교수 출신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가 리스본에서 소집된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여기에 1821년 2월 26일 포르투갈 병사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 내각을 임명하고 포르투갈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주앙 6세는 결국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1821년 4월 26일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페드루는 브라질을 식민지로 되돌려놓으려는 포르투갈 정부의 방침에 격분한 브라질인들의 추대를 받아 브라질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로 등극했다. 많은 대신들은 포르투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라질의 반란을 진압할 원정군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지만,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이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거부하고 협상을 택했다. 1825년 8월 29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영국의 중재 하에 양자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브라질 황제였던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를 겸하게 되었지만, 브라질 정부는 포르투갈의 군주인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포르투갈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황제를 칭한 그를 군주로 섬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페드루는 5월 2일 포르투갈 왕위에서 퇴위하고 딸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마리아 2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페드루의 누이인 이자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벨 마리아의 섭정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절대군주제 옹호자들간의 불화가 정부를 지배했고, 시의회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었으며, 리스본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페드루는 미겔에게 포르투갈의 섭정을 제안하는 동시에 마리아 2세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미겔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뒤 포르투갈에 복귀했다. 그러나 1828년 3월 13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코르테스를 해산했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 몇몇 사회 인사들은 미겔에게 이참에 헌법을 페지하고 국왕으로 통치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 4월 25일 코임브라 대학 총회는 미겔에게 왕위를 차지할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겔은 형과 완전히 갈라서는 것을 주저했지만, 어머니 카를로타가 적극적으로 권하자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1828년 7월 7일 정식으로 국왕에 취임하고 마리아 2세를 브라질로 추방했다.

이후 페드루와 마리아 2세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미겔 1세를 옹호하는 절대군주정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6년간 이어진 끝에 1834년 5월 26일 영국의 지원을 받은 마리아 2세 지지자들의 공세에 밀린 미겔 1세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받는 대신 포르투갈을 떠나기로 한 에보라몬테 협약이 체결되면서 마리아 2세 측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이후 페드루가 마리아 2세의 섭정을 맡았다가 1834년 9월 24일에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마리아 2세가 명실상부한 포르투갈 군주가 되었다.

마리아 2세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자상하게 대하고 불우한 고아와 청년들을 위한 구휼 기관 및 교육 기관을 설치하고 기부 활동을 열심히 전개하는 등 인자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정치 방면에서는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미겔 1세가 몰락한 후에도 절대왕정을 여전히 추종했으며, 자유주의자들로 둘러싸인 여왕을 탐탁치 않게 바라봤고, 언론을 장악한 자유주의자들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장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정권을 뒤엎고자 했다. 이리하여 마리아 2세의 치세 내내 쿠데타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민중 봉기는 수도 없이 일어났으며, 왕실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마리아 2세 치세 말기인 1851년에 입헌군주제와 점진적인 자유주의를 표방한 진보당이 최종적으로 집권하면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포르투갈 정계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진보당 정권은 17년간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 성장을 일궈냈기에, 포르투갈 역사학계는 이 시기를 "재생(Regeneração)"이라고 지칭한다. 1868년 진보당의 소비세 인상 정책에 반발한 주민들이 리스본, 포르투, 브라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단행한 것에 두려움을 느낀 국왕 루이스 1세가 내각을 해산시키고 만년 야당이던 개혁당에게 정권을 맡기면서 재생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포르투갈 정치는 왕의 존재를 용인하고 자유주의를 따르면서도 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정도에서 차이를 보인 진보당과 개혁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는 방식으로 이어졌고,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는 비로소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고 공화정을 실시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프랑스를 동경하는 포르투갈 지식인들은 프랑스를 본받아 공화정을 세워야 한다고 봤다. 여기에 유럽 대륙에 횡행하던 사회주의의 바람이 포르투갈에 미치면서, 계급 사회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지도 계층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포르투갈 왕실과 정부는 검열 정책을 단행해 불온서적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지만, 왕국이 파국에 이르게 할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1890년, 영국이 포르투갈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육로로 연결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국왕 카를루스 1세는 최강국인 영국에 맞서는 건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현지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을 철수시키고 영국의 요구 조건을 들어줬다. 자국이 오랫동안 열망했던 식민 진출을 포기하고 영국에게 굴복했다는 소식에 국민적 감정이 격앙되었다. 공화파는 이 때를 틈타 국민들을 선동해 왕실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1891년 1월 31일 포르투에서 공화파들이 주동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공화주의가 왕국에 위험할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후 포르투갈 사회당과 노동당, 그리고 공화당이 잇따라 창설되어 기존 체제를 뒤엎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거세졌다.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 정부를 지탱하던 진보당과 개혁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1901년 주앙 프랑코가 이끄는 다수의 개혁당 의원들이 개혁당을 탈퇴하고 '자유 개혁당'을 결성했다. 1905년에는 주제 마리아 알포임이 진보당에서 탈퇴한 뒤 '진보적 반체제당'을 창설했다. 1901년 개혁당이 분열되었을 때 진보당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1905년에는 개혁당이 진보적 반체제당과 동맹을 맺고 진보당을 꺾고 정권을 잡았다. 이에 분노한 진보당 당수 주앙 프랑코 페레이라 핀투는 개혁당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다.

1906년 4월 29일, 개혁당 당수이자 총리인 에르네스토 힌체 리베이로가 경찰 탄압에 의지하여 시위를 억압하는 것에 유권자들이 반감을 품는 바람에 선거에서 참패했다. 여기에 1906년 5월 4일 공화당 지도자 바르나르디노 마차도가 로시우 역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카를루스 1세는 총리를 질타했고, 의회 개회를 연기해달라는 총리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힌체 리베이로는 사임했고, 그 해 5월 19일 주앙 프랑코가 새 총리에 선임되었다.

주앙 프랑코는 총리에 오른 직후 진보당 위주의 내각을 결성하고 공공 회계, 장관의 책임, 언론의 자유 제한, 무정부주의자 탄압에 관한 법률을 의회에 제출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법안은 통과되었고, 프랑코는 1906년 11월 20일 아폰수 코스타, 알레산드레 브라가를 포함한 많은 공화당 의원들을 "국왕에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라는 이유로 의회에서 추방했다.[5] 1907년 코임브라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정권의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시위를 전개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면서 사회 불안이 커지자, 의회는 진보당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많은 장관들은 사임했다.

여론은 카를루스 1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총리를 사임시키고 개혁당 당수에게 새 내각을 조직하라고 지시할 거라 예상했지만, 왕은 뜻밖에도 주앙 프랑코를 굳건히 신임했고, 그가 요청한 대로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 선거는 주앙 프랑코가 "적절하다고 판단한 시기"에 시행하기로 했다. 총리가 잇따라 교체되며 정치 혼란이 장기화되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주앙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줘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주앙 프랑코는 반체제 인사로 간주된 이들을 탄압하고 모든 시위를 불법화했다.

이에 공화당과 반체제 인사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기로 결의하고 카르보나리우(Carbonário)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조직을 결성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08년 1월 28일 왕립 도서관에 잠입한 아폰수 코스타, 히베이라 프라바, 프란시스쿠 코레이라 데 헤레디아 등 공화당 인사들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왕이 머물고 있는 층을 습격하려 했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일로 공화당은 강제 해산되고 카르보나리우 지도자 안토니우 주제 데 알메이다루즈 알메이다, 언론인 주앙 차가스 등 93명이 공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이 곧 해외나 식민지로 추방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2명의 공화파 인사는 자신들의 손으로 국왕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3. 암살자[편집]


파일:알프레도 루이스 다 코스타.webp

  • 알프레도 루이스 다 코스타(Alfredo Luís da Costa, 1883.11.24 ~ 1908.2.1): 아렌테호의 작은 농장에서 농부로 일하다가 리스본으로 이주한 뒤 노동자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노동 신문사에서 재직하면서 공화주의에 감화되었고, 1903년 에스트레모즈 시에서 작은 서점 '소셜 에디토라(A Social Editora)'를 설립하고 집집마다 왕실을 비난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 1908년 1월 28일 아폰수 코스타 등의 왕립 도서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경찰이 엘리베이터를 급습했을 때 다른 곳에 있었기에 곧바로 체포되지 않았다. 이후 올리비아스의 '퀸타 두 쎼쎄(Quinta do Xexé)"에서 카르보나리우로 활동하던 마누엘 부이사와 함께 국왕을 살해하기로 결의했다.

파일:마누엘 부이사.jpg

  • 마누엘 부이사(Manuel Buíça, 1875.12.31 ~ 1908.2.1): 빈하이스 교구 사제의 아들로, 일찍이 육군에 입대하여 브라간사의 기병 연대에서 중사로 진급했으며 병사들의 사격술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마스타 앳 암즈 훈련 과정에 등록해 1급 명사수 메달을 획득했다. 다만 군법을 여러 차례 위반해 3차례 징계를 받았다. 전역 후 리스본 왕립 대학의 음악과 프랑스어 수업에 참여하다가 공화파가 배포한 팜플렛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왕립 도서관 쿠데타 당시 당국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다가 첼로 카페의 뒷방에서 알프레도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만난 뒤 왕을 암살하자는 그의 제안에 따랐다.


4. 경과[편집]


1908년 1월 30일, 포르투갈 정부는 공공 질서를 위반하여 체포된 이들을 재판없이 식민지로 추방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카를루스 1세에게 제출했다. 카를루스 1세는 이에 서명한 뒤 아내 아멜리 도를레앙, 장남 루이스 필리프, 차남 마누엘과 함께 겨울 사냥을 하러 빌라 비소사로 떠났다. 2월 1일 사냥을 마친 이들은 빌라 비소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기차는 도중에 카사 브랑카 철도 교차점 옆에서 약간의 탈선을 겪었고, 이로 인해 거의 한 시간이 지연되었다. 오후 5시경 리스본 역에 도착한 왕실 일행은 측근들로부터 민심의 동향이 심상치 않으니 비밀리에 왕궁으로 이동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백성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왕실의 지지를 끌어올리기로 하고 육군 군복을 입고 뚜껑이 덮히지 않은 마차를 탄 채 왕궁으로 향했다.

이윽고 마차가 코메르시우 광장 서쪽에 이르렀을 때, 마누엘 부이사가 마차 뒤 8~10m로 달려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망토 속에 숨겨두었던 카빈을 꺼내 발포했다. 총탄은 카를루스 1세의 목을 꿰뚫었고,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뒤이어 발사된 두 번째 총탄은 마차의 왼쪽에 등을 대고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왕의 어깨를 관통했다. 알프레두 코스타가 뒤이어 마차로 뛰어올라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해 왕의 등에 두 발을 쐈다. 이에 아멜리 왕비는 손에 쥐고 있던 꽂다발로 그를 향해 휘두르며 "이 악한! 이 악한!"이라고 외쳤다. 알프레두는 왕비 옆에 있던 루이스 필리프를 향해 발포했고, 총탄은 가슴에 맞췄지만 흉골을 관통하지 않았다.

루이스 필리프는 외투 주머니에 숨겨뒀던 리볼버 권총을 꺼내 알프레두 코스타를 향해 네 번 사격했고, 코스타는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뒤이어 마누엘 부이사가 왕자를 향해 발포했고, 총탄은 루이스 필리프의 왼쪽 뺨을 뚫고 머리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총탄이 스쳐 지나가면서 팔에 부상을 입은 마누엘 왕자는 땅에 쓰러진 형을 부축했으나, 루이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마부가 말을 채찍찔하며 현장을 부리나케 탈출하자, 알프레두 코스타는 몸을 일으켜 마차를 향해 사격하려 했다.

이때 현장을 지나가고 있던 기병 장교인 프란시스쿠 피구에라 중위가 말을 몰아 세이버로 코스타를 공격해 등과 얼굴에 부상을 입혔고, 코스타는 현장에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이 현장에 달려와서 코스타를 체포하고 시청 근처의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러던 중 신원 미상의 장교 또는 시 경비대원이 달려들어 코스타를 향해 총을 쐈고, 코스타는 폐에 구멍이 뚫려 사망했다.

한편, 마누엘 부이사는 은신처로 숨으려 시도했지만 현장을 지나가고 있던 보병 제12연대 병사 엔히크 다 실바 발렌테가 달려들면서 무산되었다. 부이사는 엔히크의 다리에 총상을 입혔으나, 뒤이은 엔히크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부이사는 도망치려 했지만 코스타를 제압한 피구에라 중위가 쏜 총탄에 허벅지가 관통되는 바람에 몸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현장에 달려온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되었다. 두 암살자의 시신은 시청 인근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한편, 금세공인이자 국왕 지지자였던 주앙 사비노 다코스타라는 시민이 현장에 출두한 경찰에 의해 공범으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다.


5. 이후[편집]


왕의 행차를 구경하고 있던 리스본 주민들은 난데없는 총격전에 경악해 집에 숨어버렸고, 거리에는 인적이 며칠간 끊겼다. 그들은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라고 여겼지만, 군대는 정부로부터 대기하고 있으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고 막사에 남아 있었다. 한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마누엘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아멜리 왕비는 왕립 해군 무기고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해군의 보호를 받았다. 얼마 후 소식을 접하고 달려온 카를루스 1세의 어머니 마리아 피아가 아멜리를 보고 프랑스어로 비통하게 외쳤다.

"On a tué mon fils!"(그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


아멜리 왕비도 울부짖으며 답했다.

"Et le mien aussi!"(저도 그랬어요!)


카를루스 1세의 유해는 두 대의 마차를 통해 궁전으로 이송된 뒤 왕실 의사인 토마스 데 멜루 브라이너(Thomaz de Mello Breyner)에 의해 방부 처리되었다. 또한 아버지의 왕관을 쓴 마누엘 2세와 아멜리 왕비는 자신들을 향한 추가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파초 다스 니디다데스 궁전에서 엄중한 경비를 받았다. 그러던 중 주앙 프랑쿠가 찾아와서 위로를 전하자, 마누엘 2세는 그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당신 때문에 내 아버지가 죽었소!"


그 후 마누엘 2세는 인기 없는 정책을 추인하게 해놓고 왕실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앙 프랑코 내각의 사임을 종용했다. 1908년 2월 2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국무회의를 주관한 젊은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통치하기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주앙 프랑코가 사임한 뒤 새 총리에 선임된 프란시스쿠 페레이라 두 아마랄은 진보당과 개혁당 인사들을 골고루 포진시킴으로서 행정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의회를 정상으로 되돌렸으며, 정치범들을 해방하고 공화당의 언론 자유의 보장 등 요구 사항을 어느정도 들어줬다.

포르투갈 국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은 전유럽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각국의 군주 및 수장들이 애도를 표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영국 국왕이자 카를루스 1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에드워드 7세는 "그들은 거리에서 가터 훈장을 단 두 신사를 개처럼 살해해놓고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비난했고, 런던의 신문들은 카를루스 1세와 루이스 필리프 왕자의 장례식 때 군중이 별다른 애도를 표하지 않은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영국 주재 포르투갈 대사 소베랄 후작 루이스 마리아 아우구스투 핀투가 포르투갈 내각 임원으로 선임된 후 런던으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7세를 만났을 때, 에드워드 7세는 다음과 같이 빈정거렸다.

"글쎄, 왕과 왕자를 죽이고 제일 먼저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나라가 있는가? 혁명은 승리했구려. 그렇지 않소?"


한편, 국왕과 왕자 암살 사건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암살을 감행한 두 사람 모두 사살되었기 때문에 암살 동기와 배후를 캐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당국은 이 참에 카르보나리오를 소탕하기 위해 두 사람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용의자로 삼았다. 1910년 10월 5일 2년간의 조사가 마무리되었고, 재판은 그해 10월 25일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사가 마무리된 바로 그날, 1910년 10월 5일 포르투갈 공화주의 혁명이 발발해 왕실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재판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재판 기록은 공화 정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아폰수 코스타에게 넘어간 뒤 얼마 안가 '소실'되었다.

암살자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의 유해는 리스본 동부의 알투 드 상 주앙 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란시스쿠 페레이라는 공화파 인사들이 묘지에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했다. 공화국 수립 후, 시민 등록 협회는 성인 1인당 500 레이, 어린이 1인당 200 레이씩 거둬서 무덤 관리비를 지불하고 "조국의 영웅적 해방자"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1926년 쿠데타를 통해 포르투갈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군부 정권은 기념비를 파괴하고 유해를 묘지 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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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설명] 차량의 가장 좌측에 앉아있는 인물: 마누엘 왕자(생존), 마누엘 2세 옆에서 총에 맞아 가슴을 움켜쥐는 인물: 알가르브 공 루이스 필리프(사망), 꽃을 들고 서 있는 여성: 마리아 아멜리아 왕비(생존), 차량의 가장 우측에서 총에 맞고 누워있는 인물: 카를루스 1세 국왕(사망)[1] 실제 가해자는 2명이지만 해당 그림에서는 가해자가 4명으로 묘사되었다.[2] 포르투갈에서 브라질 독립 후 왕의 후계자에게 붙이던 칭호.[3] 경찰에게 공범으로 오인받아 사살되었다.[4] 이 사건으로 곧바로 군주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나 2년 뒤인 1910년 10월 5일 혁명의 크나큰 촉진제가 되었다.[5] 아폰수 코스타는 정부가 의회의 승인없이 임의로 공금을 이전할 수 있게 한 것에 대해 프랑코와 논쟁을 벌이던 중 "루이 16세는 카를루스 왕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적은 범죄로 인해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졌소!"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