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양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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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 해전
시기
1622년(광해군 14년)
장소
전라도 흥양(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네덜란드 동인도 회사.png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지휘관
첨사 민정학
알 수 없음
병력
판옥선 2척
병선 2척
사후선 2척#
상선 '드 혼드' 1척
피해
포로 8명
함선 손상
결과
조선의 상선 격침 실패
네덜란드 상선 격퇴

1. 개요
2. 여담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이때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사도진 앞바다에 들어온 것을 첨사 민정학이 편전으로 쏘았다. 적이 우리나라 사람 8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일본에 당도하여 편전을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조선의 작은 화살이 배를 거의 절반이나 뚫고 들어갔으니 활을 잘 쏜다고 할 만하다' 고 하였다. 아마 서양 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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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有一舡, 其大如山。 舡上揷三十餘檣, 猝入蛇渡前洋。 僉使閔廷鶴以片箭射之, 賊擄我人八名以去, 至日本, 以片箭示之曰 朝鮮小箭, 入舡幾半, 可謂善射, 蓋西洋之舡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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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정초본 179권, 광해 14년 7월 19일 계축 1번째 기사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있는 해전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발발한 해전이다. 여러 개의 돛을 단 데다가 조선의 배보다 훨씬 큰 국적 불명의 서양 배가 들어와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교전이 발생했다.

조선 수군은 치열하게 해당 선박과 교전을 벌였지만 조선의 선박보다 훨씬 큰 서양의 함선은 손상을 입은 것을 빼면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도리어 조선인 8명을 포로로 잡은 채로 도주하는데 성공하기 까지 했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드 혼드'란 상선이 바타비아(인도네시아)를 거쳐서 일본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비변사에 전교하기를,"호남(湖南)에 온 적의 배가 어떤 배인지는 모르지만 1척도 잡지 못하였으니 나랏일을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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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傳于備邊司曰 湖南賊舡, 不知何舡, 而一舡不能捕捉, 國事可知。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몇십 년 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후금과의 전면전 가능성이 점차 커지면서 사실상 준전시태세였고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1] 조선을 침범한 네덜란드 상선을 격침시키지 못한 조선 수군은 조정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비변사에 전교하였다."이번에 호남(湖南)에 온 적의 배가 만일 왜적의 배라면 지금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전왜(殿倭)에게 이 일을 상세히 알리라. 그리고 돌아가서 관백(關伯)에게 보고하여 전국에 엄하게 신칙하게 함으로써 흔단을 일으키지 말고 신의가 더욱 돈독해지게 하라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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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于備邊司曰 今此湖南賊船, 若倭賊則出來殿倭處, 詳諭此事, 仍使歸告關伯, 使之嚴飭國中, 勿爲生釁, 益篤信義。


조선 조정은 해당 선박의 국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도 막부를 경계했고 일본 측에 경고를 했다.

선조 시기 지봉유설에서도 영길리 선박이 조선에서 출몰해 조선군과 교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미루어보았을 때 서양 선박들이 17세기에 조선 인근에서 자주 활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여담[편집]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영국 해적과 교전한 사례라고 잘못알려져 있기도 하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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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다가 사르후 전투로 조선군의 정예 병력이 소멸되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