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당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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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당포 해전
第二次 唐浦 海戰

날짜
1604년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일본
지휘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
경상우후 신여량
불명
병력
판옥선 25~30척
흑색대선(黑色大船) 10여 척
피해 규모
불명
포로 49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일본크메르 왕국 간의 통상관계 방해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여담



1. 개요[편집]


일본 에도 막부가 성립되고 난 뒤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이후 최대 규모 해전으로 비변사등록이나 선조실록 등의 기록들에는 실려있지 않으나 일본 측 기록인 외번통서(外蕃通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크메르 왕국에 보낸 국서가 기록되어 있고 조선 측 기록에선 사대문궤(事大文軌)에서 명의 자국민 송환에 대한 포상에 관한 내용과 등록유초(謄錄類抄)의 기사에서 포로들을 심문해서 나온 정보를 기재한 기사가 있어 보통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본다.[1]

2. 배경[편집]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되던 1604년, 조선과 일본 간에는 강화를 서두르고 있었지만 아직은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므로 조선은 강력한 해상 방위 태세를 갖추고 일본과 기유조약(己酉條約)이 체결되기까지 해상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 상단 구에몬(久右門)이 이끄는 일·중 국제무역선단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를 크메르 왕국에 전달하고 돌아오던 중에 풍랑을 만나 조선 측 해역에 표류하게 되고 이에 조선 수군은 신원 미상의 선박들이 경상남도 통영의 당포(唐浦) 인근 해역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하게 된다.

3. 전개[편집]


1604년 (선조 37년) 6월 14일 낮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 "추도(楸島)에서 당포(唐浦) 해역으로 국적 불명의 흑색대선(黑色大船) 쌍 돛배 10여 척이 진입하고 있다.”라는 긴급상황의 급보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해안 수비를 담당하는 첨방(添防) 부대에 전투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제6대 통제영(統制營)의 지휘관인 이경준(李慶濬)은 경상우후(慶尙虞侯) 신여량(申汝梁)을 주력함으로 하고 이곳에 2월 첨방(添防)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왔었다. 이 같은 적침을 예상하고 통제영을 현재의 충무시로 옮겨 세병관(洗兵館)을 짓고 수군 기지를 축성하고 있었다.

1604년 (선조 37년) 6월 14일 오후에 조선 수군과의 저항하는 일본 군단들과 교전하였고 밤이 되어서야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수군들의 총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령부(三道水軍統制司令部)는 경상우도 고성현 두룡포 현재 충무시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당시 통제영에는 일본군 선단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첨방(添防)이라는 수군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2월에서 7월까지 6개월간에 해상을 지키기 위한 기동대(機動隊) 형태의 수군 연합부대를 조직하였다. 부대의 구성은 전라우수영에서 15척의 판옥선, 전라 좌수영에서 5척의 판옥선, 충청수영에서 10척의 판옥선을 합한 30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며, 좌목(座目)의 지휘관은 본영에서 10명, 전라좌수영에서 6명, 전라우수영에서 5명 충청수영에서 7명으로 모두 28명의 지휘관으로 구성되었다. 지휘선에 함께 승선한 우후(虞侯) 신여량(申汝梁)과 첨방(添防) 부대 지휘관들 대다수가 호남 출신이었는데 첨방(添防) 부대 지휘관들은 임진왜란 때 이치 전투행주산성 육전(陸戰)에 참여한 바 있으며, 이에 일본에 관한 응징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604년 (선조 37년) 6월 15일 하오 현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삼덕리 당포(唐浦) 앞 바다로 빠져나가는 일본 무장선단과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조선 수군의 25척의 함선이 맹렬한 화공을 퍼붓게 되고 일본 선단의 좌현에 2척, 선수에 2척, 우현에 1척, 총 5척의 판옥선이 근접전으로 활을 쏘며 맹공격을 퍼붓게 된다. 쌍범대선(雙帆大船)은 그들의 운명처럼 긴 붉은 깃발이 꺾어지면서 바다에 떨어지는 모습이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그려져 있다. 일본선단에는 특유의 일본식 머리를 하고 창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며, 조선 수군 판옥선(板屋船) 사이에는 연락용 소형 하후선(何候船)이 해상을 누비고 있다. 이는 통제영과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나타난 그림상의 수군은 신여량(申汝梁)의 승첩지도에서는 233명이며, 일본인 선단의 저항하는 사람은 21명이다. 조선 수군의 군선 25척이며 만호 노홍의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나타난 군선(軍船)은 23척 승선 인원은 130명 하후선(何候船)은 15척이었다. 일본 선단의 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지금의 캄보디아 왕국과 통상관계를 맺기 위하여 파견한 사절단으로 이 배는 프놈펜 항구에서 1604년 4월 17일 출발하여 장기(長技)로 가던 중 6월 12일, 13일에 강한 폭풍으로 서쪽으로 항로가 이탈하면서 통제영 권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 해역을 규슈(九州)의 오도(五島)로 생각한 것이었다.[2]

4. 결과[편집]


1604년 선조(宣祖)는 이 해전의 전승(戰勝)을 기념하여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참전 장군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고, 명나라에서는 이경준(李慶濬), 신여량(申汝梁), 최초의 발견자인 이섬(李暹) 장군에게 별도로 포상하였다.

남만인(南蠻人) 공칭(供稱): 이름은 지완면제수(之緩面弟愁, 조앙 멘드스)이며 나이는 34세이다. 사는 나라는 보동가류(寶東家流, 포르투갈)인데 곧 남만(南蠻)의 여러 나라 중 하나이다. 그 나라에는 옥백(玉帛)이 많이 나고 금은(金銀)은 적다. 본래 행상(行商)을 업으로 삼았는데 본국을 떠난 지 거의 15년이 되었고 지난해에 감문(甘門)에서 가보자(可普者)로 가 지금 잡혀온 중국인, 왜인 등과 함께 상선을 같이 타고 장차 일본으로 무역하기 위하여 가려다가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에 표도하여 잡히었다. 감하(甘河)는 곧 중국 지방인데 그 태어난 나라와의 거리가 거의 18만리나 되며 순풍을 만나면 뱃길로 팔구월 정도가 걸려 올 수가 있다. 가보자는 감하와의 거리가 육천리이니 곧 섬라(暹羅, 태국)와 안남(安南, 베트남)의 두 나라 사이에 있으나 섬라 소속이다. 중국인이 말한 동포채(同浦寨)가 바로 이곳이다. 거느리고 온 한 명은 곧 흑인(黑人)이니 소위 해귀(海鬼)인데 팔려서 노예가 되어 따라왔다.

《등록유초》 8책 선조 37년 6월 22일(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의 기록에 따르면 1604년 6월 22일 비변사에서는 전쟁 포로 포르투갈(寶東家流) 상인 조앙 멘드스(Joao Mendes,之褑面弟愁) 1명, 남만인 흑인 1명, 일본인 31명(여자 1명), 중국 국적이 16명 총 49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심문하였고 이를 통해 여러 정보들을 얻어내었다. 이들은 당시 4개월간 포로로 체류한 후에 명나라 북경으로 송환 조치 되었다.


5. 여담[편집]


정식 명칭은 당포 해전(唐浦海戰)인데 임진왜란 때 일어난 당포 해전과 명칭이 같기 때문에 문화재청의 당포승첩지도(唐浦勝捷之圖) 유물 소개란에 두 사건을 혼동하여 생긴 착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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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윤홍, 2005, 「조선후기 비변사의 국외정보 파악 양상」[2] 노기욱, 2004,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 노홍(魯鴻) 구국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