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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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20여 년간 경상남도 함안군 성산산성을 발굴했을 때 출토된 6세기 신라시대 목간 245점. 현재 창원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소장하였다.


2. 내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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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탈 -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국제적 위상,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개요

사적 제67호로 지정된 함안 성산산성에서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작업한 목간 309점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묵서가 없는 목간을 뺀 총 245점이 공개하였고, 이후로도 계속 발굴 중이다.

목간문자를 기록할 수 있도록 다듬어진 목제품을 말한다. 나무라는 재료의 특성상, 취득이 용이하고 간단한 작업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종이가 보급된 뒤에도 오랜 기간 서사재료로서 종이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목간들은 가야멸망전이 종료된 직후, 가야를 최종 병합한 신라에서 점령지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6세기 무렵 작성한 것이다.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은 하찰목간이 주종을 이루고, 일부 문서목간(文書木簡)과 부찰목간(附札木簡)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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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산성에서 발견된 색인용 목간. 일본에서는 ‘다이센지쿠(題籤軸, 제섬축)’라고 불리는 것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다이센지쿠보다 한 세기 가량 더 앞선 것이다. 사진 출처1: 신라 진흥왕때 호적 있었다…함안 출토 유물서 '색인용 목간' 확인, 사진 출처2: 동아일보 : 국내 최초 '서표' 신라 목간 발견…성산산성서 '제첨축'출토

목간에 기록된 지명은 대체로 현재 경상북도에 위치한 신라상주(上州) 지역이다. 6세기 중반 신라 지방구조는 행정촌과 자연촌으로 나뉘는데,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있는 행정촌과 그 예하의 작은 촌락들은 자연촌으로 묶여 정비하였다. 성산산성 목간에서 다양하게 기록된 지명들도 행정촌과 자연촌으로 분류할 수 있다. 행정촌이라고 추정하는 지명은 구리벌(仇利伐), 감문(甘文), 고타(古阤), 이진지(伊津支), 추문(鄒文), 구벌(仇伐), 파진혜성(巴珎兮城), 소남혜성(小南兮城), 적벌(赤伐), 가개(呵蓋), 철산(鐵山) 등이 있다. 이들 행정촌명 목간에는 자연촌명이 한 개 이상 나온다. 그 외 행정촌으로 추정되는 지명은 비사벌(比思伐), 물사벌(勿思伐), 수벌(須伐), 이벌지(伊伐支), 급벌성(及伐城), 매곡촌(買谷村), 적성(赤城) 등이 있다.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수 있는 지명은 총 13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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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출처: 신라의 목간(木簡)과 문서행정(文書行政). 이경섭(동국대학교 강사) >

예를 들어 '구리벌'은 남산신성비 제2비에 나오는 仇利城 또는 久利城과 관련지어 경상북도 의성군 또는 안동 일대라고 추정하고, '고타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대이다. '급벌성'은 경덕왕대에 급산군(岌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비정하였다. '구벌'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단촌면, '감문'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이다.

인명은 지명과 함께 함안 성산산성에서 다수 확인되는 명문이다. 성산산성 출토목간에 보이는 묵서의 기재양식은 대체로 [지명+인명+물품명]의 순서를 따르므로, 지명과 물품명 사이에 들어가는 문자를 인명이라고 본다. 또한 일부 목간에서는 '官等명'과 '奴(人)명'을 기록했다. 인명+관등명 또는 인명+奴(人)+인명 형식으로 쓴 듯하다. '奴(人)명'의 경우, 노인의 인명이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연구의 쟁점이다. 우선, 이와 같은 기재양식을 바탕으로 판독되는 인명의 수는 대략 130명이다.아라가야 멸망후 신라 목간 - 거리지(居利支), 파혜지(Ꜳ兮支), 구잉지(仇仍支지), 아나휴지(阿那休智), 아나설지(阿那舌只), 내은지(內恩支), 거조지(居助支), 구례지(仇礼支), 문시지(文尸只) 등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확인되는 신라인 전통 인명의 말음절은 -支 또는 -只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말음절로 끝나는 인명은 47개가 확인되었다. 고타(古阤)지역에서 확인된 인명 가운데 阤〃只, 阤〃支로 나오는 인물은 동일인인 듯하다. 이 지역에서는 -只와 -支를 혼용하여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말 음절이 -利, -伊, -次, -兮 등인 인명도 있었다.

말음절이 -智 또는 -知로 끝나는 인명은 약 20개가 있다. 이들 인명 뒤에는 大舍, 上干(支), 一伐, 一尺, 居伐尺과 같은 관등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신라의 12등 경위에 해당하는 大舍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위이다. 즉 신라인의 인명은 마지막 음절이 -智, -知, -利, -次, -之, -支, -兮, -只 등인데, 그중 -智, -知 는 신라 6부 출신에 경위의 관등에 오른 인물들에게 붙었던 존칭접미사, -次, -之, -支, -兮, -只 는 지방출신에 외위 관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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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중앙(경주) 출신 관리에게 올린 보고서 목간.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 그 잘못을 두려워하며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법 30대(□法卅代)", "60일대(日代)" 등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해 놓은 법률용어로, 이를 통해 당시 신라는 율령을 통한 엄격한 지방 지배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확인한 6세기 신라의 율령체계

주보돈 교수는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촌락 지배 강화와 함께 기존 외위(外位: 지방민에게 주어진 관등) 체계와 성립 과정, 이에 내재한 의미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라가 새롭게 편입한 지역과 주민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연합뉴스: '목간 보물창고'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역사적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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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산산성에서는 목간과 더불어 다양한 신라시대 목제 공예품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6세기 한국의 목제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신라가야 지역을 차지한 직후 작성된 목간들로,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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