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용의 출현/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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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2. 1달 전, 사천 해전
3. 현재, 조선 수군 진영
4. 조선과 일본, 양측의 혼돈
5.1. 웅치 전투
6. 1년 후
7. 미공개 영상
8. 리덕스판에서 추가된 장면


1. 프롤로그[편집]


저 와키자카 문안컨대 수적 열세 속에 조선 남쪽지역 군사들을 격퇴해

북진 중인 들의 걱정을 덜고 한양을 온전히 지켜냈습니다.

다만 적의 수군으로 보이는 자들이 남쪽 해안에서 출몰한다 하니

소장이 그들을 소탕하러 가옵니다.

-텐쇼(天正) 20년[1]

와키자카 나카츠카사노쇼 후지와라노 야스하루[2]

[4]


인트로부터 어두운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5] 와키자카 야스하루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붉은색 글씨로 된 편지[6]를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1592년 음력 7월 낮 부산포 일본군 진영.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부하들을 대동한 채 등장한다. 그 주위로는 조선인 포로들이 물건을 나르고 있었고 그곳에 잠입해 있던 임준영이 와키자카가 지나가는 앞에서 물건을 쏟는다. 이를 본 사헤에가 그 즉시 임준영을 베려 들지만 이를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저지하고 와키자카는 임준영을 지나 패잔병들이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있던 막사에 다다른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기색이 만연한 패장에게 패전 당시의 상황을 보고받는데, 장수로부터 거북선에 대한 내용을 듣는다. 패장이 거북선을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라고 표현하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두려움은 전염병이라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뜨고 와키자카 사헤에마나베 사마노조는 칼을 뽑아 패잔병들을 살인멸구한다.[7] 이후 와키자카는 와타나베와 함께 항구에 만신창이로 끌려온 안택선으로 향한다. 안택선 우현(우측 측면)은 사람보다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충파인가..' 라며 중얼거리는 와키자카에게 와타나베는 사천 바다에서 표류 하고 있던 걸 끌고 왔던 것이라고 말해준다. 와키자카는 고개를 돌려 구멍이 뚫리면서 토막 난 나무 기둥에 박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뽑아 낸다. 그것은 손바닥 만한 송곳니 였고 와키자카는 이번엔 우현에 구멍 정면을 향한 좌현에 난 사람 몸통 만한 또 다른 2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와키자카는 다시 우현에 거대한 구멍을 바라 보고 점차 바다를 가르는 함선의 소리가 커지면서 그 난전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가 안택선의 우현을 부숴버리며 등장한다.


2. 1달 전, 사천 해전[편집]


안택선 격실을 뚫고 들어 온 거북선의 용머리는 송곳니에 끼어 버린 나무 기둥을 빼려고 굉음을 일으키고 있었고 일본 병사들은 '복카이센' 이라며 충격과 공포에 빠진다. 때는 1달 전 사천 해전의 현장. 거북선이 적 안택선에 충파를 시도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충파를 했으니 이제 후진을 해야 하는데 함선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 돌격장 이언량은 창문을 열어 용머리가 낀 참사가 발생 한 것을 확인하고는

"뒤로 저어라!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급히 격군들에게 후진을 명령하고 급히 3층으로 뛰어 올라 간다. 그가 3층에 올라가 만난 이는 유격장 나대용.

"용두와 선수 쪽 화포들을 일제히 퍼붓는다! 어서 준비 하라!"


나대용은 창문을 열어 꼼짝 않는 용머리를 보고 용머리 화포와 선수 화포 2문을 사격하라 지시 한다. 그러는 도중에 왜선들은 접근해오고 있었고, 나대용의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 용머리의 화포가 폭음을 일으키며 발사한다. 근거리에서 화염과 포탄에 노출된 왜 병사들은 기절초풍 하며 도망가려 애를 쓴다.[8] 나대용은 다시 명령을 내리고 용머리는 다시 한 번 화염을 일으키지만 송곳니에 박힌 나무 기둥은 양 쪽 송곳니에 그대로 걸쳐져 있었고 포탄은 그대로 외벽을 뚫고 지나가버린다. 좌현에 구멍 2개가 이때 생긴 것이었다.

탈출 시도는 허사로 돌아가고 왜선들은 접근해 조총을 사격한다. 다행히 거북선은 실내가 완벽하게 밀폐된 덕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왜군은 대형 조총을 가져와 사격하자 거북선 외벽에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뚫리며 내부에 승조원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다. 이를 노린 한 왜선이 조총을 사격하려던 찰나 왜선이 폭발하며 왜군 병사들은 쓰러진다. 그 뒤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 수군의 판옥선 함대. 판옥선들은 위기에 처한 거북선들을 지키고자 지원 사격을 하며 전장에 재돌입하고 공격당한 구멍을 통해 나대용의 눈에 좌선을 지휘하는 좌수사 장군이 들어온다.

나대용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혼란에 빠진 복도를 지나며 도끼를 빼들고 천장에 놓인 방패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야외로 나오기 무섭게 나대용에게 총알이 쏟아지고 나대용을 향해 사격하던 왜선이 폭발한다. 나대용이 놀라 돌아보자 좌선이 근처까지 와서 포격하고 있었다. 급해진 나대용은 즉시 일어나 머리가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안택선을 향해 달려간다. 안택선의 병사들의 총알을 막아내며 거북선 지붕 끝에 거의 다다르나 어느 왜군 장수의 총에 다리를 맞아 쓰러진다.[9] 그 순간 이순신의 화살이 왜군 병사를 맞히고 이순신은 서둘러 화살을 재장전한다. 그러자 나대용을 맞춘 왜군 장수 또한 즉시 조총을 잡아들고 이순신을 향해 조준한다. 이윽고 두 장수의 화살과 총탄이 발사되고 이순신의 왼쪽 어깨에 총탄이 명중해 이순신이 쓰러지며 화면은 페이드 아웃 된다.


3. 현재, 조선 수군 진영[편집]


늦은 밤 여수전라좌수영 근처 이순신의 자택. 이순신은 자신의 방에서 사천에서 입은 왼쪽 어깨를 뻐근해 하며 거북선의 설계도를 바라보며 '구선...' 이란 고민 섞인 말을 흘린다. 이윽고 밖에서 이순신의 부장 송희립이 이순신을 부르며 경상우수영의 경상우수사 원균전라좌수영에 도착하였다 보고하고 이순신은 다시 나갈 채비를 한다.

전라좌수영의 회의장에 조선 수군의 모든 수군절도사들과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으며 경상우수사 원균은 정운의 부산포 공성 발언에 미쳤냐며 화를 낸다. 정운은 연안에 있는 적들을 부숴 봤자 적들은 건재할 것이며, 승전을 이어가는 상황을 이어 본진인 부산포를 공격하자고 주장한다.[10] 그러자 원균은 어이없어하며 시덥잖은 승전 몇 번으로[11] 치기가 넘치는 거냐며 왜군 수괴가 얼마 전 있던 용인 싸움을 왜의 승리로 이끈 자라고 말한다. 덧붙여 기습이 장기인 적들을 상대로 이광이 광교산에서 함부로 움직였다가 기습당해 크게 패했다며 대역죄인으로 의금부로 압송될지도 모르는 판국[12]이라며 호통친다.[13] 이후 전라좌수영에는 조정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하는데, 바로 평양으로 몽진했던[14] 선조가 (차라리 지키기 쉬운 함경도로 가자는 김명원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고)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로 갔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을 비롯해 수많은 장수들의 어이가 탈출하고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게 아니냐며[15] 기가 막힌 반응까지 보인다.

결국 병사들의 사기까지 떨어지면서 이순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치를 해전에서 승리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부산포 일본군 진영에 머물고 있는 와키자카와 바다 위에서 싸울 것임을 다른 장수들에게 선포한다. 그러나 와키자카가 용인에서 2,000명도 안 되는 군사로 50,000명이나 되는 근왕군을 광교산에서 사냥처럼 기습해 대승을 거둔 소식[16]을 이미 접한 터라 장수들은 오히려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고, 이순신 또한 이기기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다.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조선 수군 진영에서는 다음에 치를 해전 준비를 위해 하나 둘 재정비를 한다.

한편 전라좌수영에서 이순신은 일본군 포로들을 고문[17]하며 사천에 집결한 의도와 전주성 공격을에 대한 사항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조선말을 꽤 잘하면서 조선을 비웃는 한 일본군이 있었다. 그는 "전주성이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군대가 부산포에 집결했고, 이 기세로 명나라를 찍고 인도까지 진격할 것이며, 차라리 목숨 구걸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비웃는다.

이순신은 그 말을 듣고 부채에 그려진 동아시아 지도를 슬쩍 보고는 그에게 다가간다.[18] 그는 이순신을 노려보다 이내 벌떡 일어나 들이받고, 당연히 심한 구타를 당한다. 그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온 그 일본군은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일본군들로부터 매우 존경받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고 그의 목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그리고 시점은 다시 준사가 구타당하고 있던 때. 이순신은 그에게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 같다며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지 말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군관들과 포로들이 물러간 뒤 쓰러져있던 그는 간신히 일어나 이순신에게 다가간다.

준사: 간절히 청컨대 대답해 주시오, 대체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이순신: 불의의 싸움이지.

준사: 나라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순신: 그렇다.


이 일본군의 정체는 준사. 준사는 이순신과 독대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이 전쟁은 나라간의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에 이순신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답하자 그는 자신이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의 어깨에 총상을 입혔던 것과 자신의 상관은 혼자서 살기[19] 위해 자신들을 방패막이로 쓴 반면 이순신은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서 앞장서 나서는 것을 보고 감명받았음을 밝힌 뒤, 이순신에게 투항하여 항왜가 된다.[20]

이순신은 간밤에 꿈을 꾸는데 바로 함경도녹둔도에서 만호로 재직하던 시절 두만강을 넘어와 약탈을 저지른 여진족기마 부대를 이끌고 추격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매서운 눈보라에 도주하던 여진족들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어디선가 셀 수 없이 많은 화살들이 날아와 이순신을 제외한 기마 부대를 전멸시킨다. 이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확인해야만 했던 이순신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느 순간 높고 거대한 성이 나타나 이순신의 앞을 가로막고 수많은 화살들이 다시 날아와 맞기 직전 꿈에서 깬다. 간밤의 꿈 이야기를 광양현감 어영담에게 털어놓았는데, 어영담은 와키자카의 용인 전투를 언급하며 한양 도성 밖에 나와서 싸우고도 한양 도성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순신은 다수의 판옥선을 이용해 '바다 위의 성' 을 만들어 왜적들을 토벌하겠다는 작전을 세우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얘기하지만 오히려 실현하기 어렵다는 얘기만 듣게 된다.[21]


4. 조선과 일본, 양측의 혼돈[편집]


와키자카 야스하루 : 속히 이순신의 본진을 바로 쳐야 합니다. 그리고 속히 평양의 고니시 도노를 지원 해야겠지요. 그리하면 조선 정벌은 완료될 것입니다.

구로다 간베에 : 역시 태합 전하 칠본창의 와키자카야!

- 와키자카가 구로다에게 승리가 확실해짐을 말하는 장면

조선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긴 와키자카의 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책사인 군사 구로다 간베에가 나타나고 둘은 전황에 대하여 얘기를 한다. 와키자카는 구로다에게 위의 대사처럼 조선 정벌은 완료될 것이라 하면서 그에 더해 한 가지 부탁을 하고 구로다는 그것이 가토에 대한 것임을 짐작한다.

와타나베 시치에몬 : 조선 수군의 화포 최대 사거리는 약 천 보[22]

정도이나 위력을 가지는 건 5백 보 안쪽, 그나마 정확한 조준은 1백 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와키자카 : 1백 보 안이라...

와타나베 시치에몬 : 2백 보 안이라면 판옥선이 선회해 재장전 시간을 단축한다고 해도, 2백 보부터는 우리 배들이 속도만 가해 준다면, 월선[23]

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와키자카 : 2백 보 안에서 월선이라...

마나베 사마노조 : 도노, 이번에도 선제 공격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출정하시지요.

와키자카 : 하나 그 월선이 만일 막힌다면... 아무래도 찜찜한 것을 들어내야겠다.

와타나베 : 해저 괴물[24]

, 복카이센. 아니, 메쿠라부네 말입니까?

와키자카 : 메쿠라부네라. 복카이센보단 그게 더 어울리는구나!


그 시각 와키자카가 자신의 부하들과 거북선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는 자리. 와키자카는 거북선이 왜군들을 벌벌 떨게 하는 위용을 떨쳤음에도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받게 된다. 이후 와키자카는 논의 끝에 사헤에로 하여금 적진에 잠입하여 거북선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이순신에 대한 정보를 캐올 것을 지시한다. 이후 사헤에와 그 부하들은 삭발하고 승려로 변장하여 피난민들이 모이는 여수 흥국사에 잠입하는데[25] 그 곳에서 일전에 봤던 임준영을 발견하고는 흥미로워한다. 사헤에는 이순신이 학익진을 모의로 연출해보는 모습[26]을 절벽 위에서 지켜보며 학익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밤에 조선 수군의 진에 부하들과 잠입하여 진 한 쪽과 거북선에 불을 질러서 이목을 끌고는[27] 그 틈을 타 감옥에서 준사를 비롯한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준 후 나대용의 연구실에서 거북선의 도면을 입수한 뒤 빠져나가려 한다. 그런 사헤에 앞을 녹도 만호 정운이 가로막으며 '웬 땡중이 살기가 가득한가 했더니 역시 첩자였다'면서[28] 막아서고 둘은 난투극을 벌인다. 정운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사헤에를 몰아붙이지만[29] 준사가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막지 못하고 사헤에와 준사는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거북선에는 불이 붙었지만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시 일본군 본진으로 돌아온 사헤에와 준사는 와키자카와 대면[30]하고 준사는 조선 측의 세작으로 의심을 받아 죽을 위기[31]에 처하지만 와키자카의 질문에 현명하게 답변[32]하여 생존한다.

와키자카는 일전에 협력을 요청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부터의 전령을 맞이하나 전령은 코바야카와가 와키자카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전달한다. 이에 와키자카는 코바야카와가 도와준다면 확실하게 이순신의 좌수영을 무력화하고 전라도를 장악할 수 있다며, 그로 하여금 히데요시를 기쁘게 해드리자고 고바야카와가 재고해줄 것을 희망하는 뜻을 전하며 거기에 더해 도움의 대가로 전라도를 모두 주겠다는 선언까지 한다.[33] 그 후 바다 쪽에서 함대[34]를 이끌고 가토 요시아키구키 요시타카가 도착한다.

새로 도착한 이들을 환영하는 연회 자리. 가운데 구키를 중심으로 우측에 가토, 좌측에 와키자카가 앉아있고 그 앞으로 각각의 부하들이 죽 늘어앉아 기생들로부터 술을 따라 받으며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가토 요시아키 : 그 이순신이라는 자는 어떤 자인가?

와키자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자다.

가토 : 조선에는 쓸 만한 장수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연회의 흥이 무르익을 무렵 고바야카와의 전령이 찾아온다.

전령 : 고바야카와 님께서 전라좌수영으로의 육로 공격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와키자카 :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더냐?

전령 : 오히려 도노께 때를 묻고 그 때를 받아오라 했습니다.

와키자카 : 그럼 오늘 밤 자정이다.

가토 : 무슨 개소리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오늘 밤이라니!

와키자카 : 태풍이 오기 전에 쳐야 하오. 이해해주길 바라오.

가토 : 이 새끼가! (칼을 뽑고 와키자카의 목에 칼을 겨누며) 이래서 천박한 너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정이 장난이냐? 와키자카!

와키자카 :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가토. 앉아라.

구키 요시타카 : 왜 이러나? 가토. 어서 칼을 집어넣게.

가토 : 대답해 봐라, 너는 나와 함께 할 생각이 있었더냐?

와키자카 : 하하하... 나도 네가 싫다. 그렇지만 태합 전하의 명이니 어쩔 수 있겠느냐? 칼을 치운다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전령은 고바야카와가 와키자카의 제안을 수락했으며 언제 출정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고 전한다. 이에 와키자카는 자정이라고 답하자 그것을 들은 가토는 격분하며,[35]

"이래서 나는 천박한 너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와키자카에게 칼을 겨눈다. 각각의 부하들도 칼을 뽑아들고 대치하고 있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와키자카는 가토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면서[36] 지금이라도 칼을 거둔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자신의 뜻인 것뿐만이 아니라 태합 전하의 뜻이라며 침착하게 대응하고 구키까지 가토를 만류하자 가토는 결국 칼을 거두고 나가버린다.

한밤 중 다시 연회 자리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 정보름[37]은 병풍 뒤에 숨은 임준영에게 나오라고 말한다. 그와 접선하던 찰나 정보름이 들어온 문에서는 사헤에와 그 부하들이 나타나서는 임준영이 어디까지 다른 첩자들과 연결되어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창문 쪽에서는 와키자카가 나타나 퇴로인 창문을 닫으면서 정보름에게 그녀가 마음에 들어 나중에 일본에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첩자였다니 유감이라고 말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정보름은 임준영이라도 무사히 도망치게 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으로 늘 착용하고 있던 '용머리 장식'이 달린 비녀를 빼들어 와키자카의 왼쪽 어깨를 찌르면서[38] 임준영에게 도망치라고 외치고 임준영은 그 틈을 타 창문을 통해 도주하는 데 성공한다. 와키자카는 어깨에 꽂힌 비녀를 빼낸 뒤 정보름에게 아는 것을 다 불라고, 다 말할 때까지는 못 죽는다고 협박하지만 정보름은 혀를 깨물어[39] 자살을 시도하고 와키자카는 이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결국 정보름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죽을 죄를 지었다며 사죄하는 부하들에게 와키자카는 정보름을 살려놓으라고 명령한다. 창문으로 도망친 임준영은 해변에서 미리 준비된 작은 배를 타고 도망치려 하지만 그를 쫓아온 마나베 사마노조와 그 부하들이 조총과 불화살을 쏘아대 같이 있던 조력자 2명은 모두 죽고 배마저 못 쓰게 되어 물로 뛰어들어 겨우 도망친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후 와키자카는 세작을 색출해내라고 명령, 조선인 남성 포로들을 참수하는 것을[40]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왕 하는 김에 어떤 일 하나도 마저 처리하자고 말한다. 그 직후 일본 군영에서 일본군들이 서로를 베는 모습이 나오고 이내 와키자카가 가토와 구키의 막사를 습격한 것임이 드러난다. 싸움 끝에 와키자카의 부하들에게 포위당한 가토는 그에게 이것이[41] 네놈의 속셈이었냐 외치며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이냐고 묻는다. 이에 와키자카는 자기가 견원지간인 가토와 같이 싸울 줄 알았냐면서 이대로 배를 두고 떠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답한다. 이때 가토와 같이 끌려나와 있던 구키 역시 분노하여 그럼 자기가 가져온 배는 상관 없냐는 말을 외치며 가토와 함께 떠난다.

한편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으로 충파를 시도하면 움직임이 더 둔탁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 수군 진영에서는 거북선을 개조하기로 한다. 나대용은 이순신에게 거북선의 용머리를 아예 없앨 것을 제안하고, 이순신은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인지 묻는다. 그리곤 '머리없는 구선이라....' 라고 탐탁치 않아한다. 이후 사헤에가 거북선의 설계도를 훔쳐 달아난 뒤 이순신은 비밀리에 순천에서 새로운 거북선을 건조 중인 나대용을 찾아가 설계도가 도난당한 사실을 말하며, 거북선의 정보가 새어나갔으니 이번 싸움에선 거북선을 쓰지 않을 것임을 그에게 알린다.[42]


5. 7월 8일, 결전의 날[편집]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정을 기해 출정하고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오사카성으로 돌아간 구로다 간베에가 보낸 서신을 읽는다. 서신에는 히데요시가 와키자카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와키자카로 하여금 명나라의 '톈진'으로 상륙하여 명을 칠 것을 명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 신뢰의 증거로서 조선과 명나라의 지도가 그려진 황금 부채를 하사받는다. 와키자카는 기뻐하며 자신들이 1군의 고니시와 2군의 기요마사[43]보다 먼저 명나라에 달할 것이라고 말하고 휘하 부하들로부터 축하를 받는다. 그 후 이순신의 배가 당포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는 일본 함대를 견내량에 매복시킨다.

사헤에: 도노, 이순신이 출정해 우리의 바로 지척인 당포에 이미 와 있다 합니다.

와키자카: 과연... 만만치 않은 자다. 봐라. 이순신과 우리 사이 좁은 길목인 여기 견내량 말이다. 즉시 견내량으로 들어가 매복하자. 이순신이 어찌 나오나 두고 보자. 가라.


원균 : 학익진을 펼치겠다, 그게 바로 그대가 말한 바다 위의 성을 쌓겠다는 말인가? 허... 자네는 날 바보천치로 아나. 7척의 우수군 배로 들이치라니 그건 그냥 자살행위 아닌가? 그리고 그 협판안치 또한 바보천치인가, 누가 순순히 따라나온단 말인가? 난 이 무모한 작전에서 빠지겠네!

이순신 : 원 수사, 적들이 바로 눈앞에 있소!

원균 : 바다 위의 성이라니, 가당치도 않네! 차라리 난 전주성에 힘을 보태겠네.

어영담 : 향도[44]

가 한번 유인해 보지요. 견내량 물길은 향도가 소상히 잘 알고 있으니, 제가 유인해 보겠습니다.


같은 시각 경상우수사 원균이순신을 만나 적들을 찾았냐고 묻고, 이순신이 곧 찾아낼 것이라 답하기가 무섭게 견내량에 왜군이 매복중이라는 정보가 도착한다. 이순신은 견내량은 폭이 좁고 물살이 강하기 때문에 적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싸워야 한다는 방책을 이야기한다.

이에 원균은 학익진을 거기서 쓰자는 것은 안 될 행위이며, 차라리 견내량에 매복해 있는 적들을 돌격해 기습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이순신은 그것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답하며 그를 막아세운다. 이순신이 그에게 일본 함대를 끌어내 유인해주지 않겠냐 묻지만 위의 장면처럼 당연히 원균은 자기보고 죽으라는 거냐면서 이를 거절한다. 이에 물길을 잘 알던 광양현감 어영담이 이 일에 자원한다. 그러자 경상우수군 진영의 이운룡이영남 두 장수가 경상도의 물길을 전라 좌수영에게만 맡기는 것은 경상 우수영에도 큰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며 어영담과 합류하겠다고 원균에게 허락을 요청한다.[45]

그날 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의 각 장수들의 포지션을 편성하느라 고심한 끝에[46] 학익진도를 완성하고,[47] 나대용에게 따로 편지를 부친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전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출정시킨다.

안개가 자욱한 견내량, 와키자카는 중앙 본진에서 이순신의 함대를 기다리고, 좌우에 와타나베 시치에몬마나베 사마노조의 함대를 각각 매복시켜 둔다.

이순신의 함대는 첨자진을 펼치며 한산 앞바다에 주둔하고, 어영담이 이끄는 판옥선 3척을 견내량 내부로 투입[48]하여 적진을 도발한다. 어영담은 "우리의 목적은 적 함대를 한산 앞바다로 끌어내리는 것"임을 주지시키며 함포로 응전하되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 지시한다. 안개로 인해 와키자카 측에서는 함선 숫자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조총으로 응전만 한다. 그렇게 계속된 대치 속, 적들이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이순신은 예비해둔 판옥선 몇 척의 추가 투입을 지시한다.

한창 교전중이던 견내량 내 어영담은 슬슬 탄환과 화약이 떨어지고, 어느새 안개마저 걷혀 함선이 노출된다. 이에 매복하던 시치에몬과 사헤에 함대가 기습을 가하고 어영담은 결국 후퇴를 지시한다. 이를 추격하는 마나베 사마노조에게 와키자카는 추격 금지 신호를 보내 명하지만 마나베는 견내량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며 자의로 추격을 지속하고, 결국 크기는 작지만 빠르고 수적으로 우세한 세키부네에 판옥선이 포위당하며 양측은 단병접전(백병전)까지 불사하며 치열하게 맞붙는다. 심지어 와키자카가 탑승한 대장선의 함포 공격까지 받는 절체절명의 순간,[49] 마침내 도착한 이운룡의 판옥선의 포격에 어영담은 위기에서 벗어나고 전투를 지속하며 견내량 밖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한편, 여전히 와키자카 본대가 움직이지 않자 이순신은 함대를 한산 앞바다 중앙에서 견내량 입구까지 이동시킨다. 이제 조류마저 아군에게 불리하게 바뀐다는 휘하 장수의 말에도, 바로 그것이 자신이 노리는 바[50]라며 명령을 유지한다. 그렇게 조선의 함대와 일본의 함대는 서로 맨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거리에서 대치하게 된다.

어영담 함대와 그를 추격하는 마나베의 함대는 견내량의 가장 좁은 해협까지 도달하고, 평저선에다 물길에 밝은 판옥선들은 유유히 해협을 빠져나가지만, 첨저선이고 물길도 잘 모르는 세키부네는 암초에 걸려 줄줄이 좌초되는 모습을 보인다.[51] 심지어 그의 안택선마저 암초에 걸려 휘말리고, 이를 목격한 어영담은 판옥선 특유의 선회력을 살려 노출된 암초까지 유유히 우회하며 함대를 일본 함선들의 측면에 정렬한다. 이윽고 판옥선 측면의 모든 포가 장전과 조준을 완료하고 판옥선 함대가 최대 화력을 발휘한 일제사에 마나베 함대는 그대로 포탄에 휩쓸려 개박살이 나버린다.[52]

걸레짝이 된 마나베의 함대를 뒤로 하고 해협을 빠져나가는 조선 함대. 해를 보고 좌수영을 노리는 수륙 병진작전의 육상병력의 지휘관인 코바야카와가 웅치를 돌파했을 것이라 생각한 와키자카는 한산 앞바다를 향해 본대의 진격을 명령하고, 이에 이순신은 거짓 후퇴와 함께 학익진을 지시하는 신호연을 띄운다. 같은 시각 신호연을 목격한 어영담은 서둘러 진형에 복귀하려 하지만, 마나베의 복수를 노리는 시치에몬 함대의 추격을 받는다.

한편 본대에서 한참 뒤처진 원균의 함선을 와키자카가 목격하는데, 비슷한 시각에 시치에몬의 안택선이 원균을 향해 돌격하면서 와키자카에게 추격 의사를 전달하고, 와키자카가 흔쾌히 추격을 허락한다. 이에 겁먹은 원균은 발포 명령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멋대로 함포를 쏴댄다.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신겐도쿠가와의 학익진을 돌파할 때, 조총이나 칼로 이긴 게 아니다.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지! 가라, 와타나베. 나와 함께 앞뒤에서 치는 거다. 저 용인 땅의 광교산처럼!"

- 이순신의 학익진을 본 와키자카.[53]


이전 전국시대 때 경험했던 학익진[54]을 상대로 승리한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학익진을 기병대의 측면 급습으로 궤멸시킨 것을 회상한 와키자카는,[55] 당시 신겐이 이에야스에 맞서 펼쳤던 것과 같은 어린진(魚鱗陣)을 치고, 학이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시치에몬의 돌격에 잡아먹히게 생겼다며 좋아라 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과 그 파훼법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속, 튼튼하지만 느린 판옥선에 재빠른 세키부네와, 진형이 다 펴지기도 전에 월선(적 선박으로 넘어감)이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온 시치에몬의 함대에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원균.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포격이 시치에몬의 기함에 적중하는데...

파일:거북선3.png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구선(거북선)이 아군 함대 뒷편에서 출전해 시치에몬을 위협해오기 시작한다.[56]

왜선이 포격당하고 적막속에서 천천히 고조되는 BGM 천행과 함께 등장한 3층 거북선 두 척은 시치에몬의 안택선을 향해 집중적으로 충각을 가한다. 첫번째 거북선의 충각으로 선수 일부와 왼쪽 노를 모조리 파괴당해 움직일 수 없게 된 시치에몬의 안택선을 향해 2번째 거북선이 부서진 선수 쪽으로 충각을 가하여 확실하게 침몰시켜버리고 그 과정에서 거북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던 시치에몬도 전사한다.[57][58]이후 2척의 거북선은 거침없이 돌격하며 포격과 충각으로 추격하는 선발대 왜선을 모조리 파괴한다. 침몰하는 안택선에서 최후의 발악으로 대조총으로 거북선의 측면을 공격하려는 그 순간 함포가 적중되고 음악이 잠시 끊긴 후 나대용이 지휘하는 신형 2층 거북선이 잔해를 부수고 등장하면서 3척의 거북선이 웅장한 배경 음악과 용이 울부짖는 듯한 울림소리와 함께 돌격하며 충각 전법으로 닥치는 대로 부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거북선 3척은 무시무시한 떡장갑으로 포격과 충각을 걸어 일본 함선들을 줄줄이 개발살내 버리고 있었지만[59], 이미 왜군은 빼돌린 설계도로 거북선의 측면이 포격에 취약하다는 약점과 메쿠라부네(장님 배)라는 이름처럼 움직임이 둔하고 충각 이후 용머리가 걸려 움직임이 봉쇄되는 결함을 알고 있었다. 왜군은 사전에 준비한 화포로 거북선의 측면에 집중 포격을 가했고 3층 거북선 두 척은 큰 피해를 입는다.[60] 이를 본 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외카자카는 이순신이 준비한 거북선은 되려 약점이 될 거라고 비웃는다.

파일:거북선 머리2.png
사헤에의 안택선을 향해 돌격하는 거북선.

파일:거북선 화포1.png
거북선의 사방 일제 사격

그 순간 신형 거북선이 포격을 가해오며 돌격해온다. 이 거북선은 기존의 거북선과 달리 전고가 낮아서 왜군이 준비한 화포는 제대로 명중시킬 수 없었다.[61] 거북선은 이내 사헤에의 안택선으로 돌격하고 사헤에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신형 거북선마저 충각하면 머리가 끼어버릴 것이라 예측하고는 월선 준비를 하나 거북선은 예상과 달리 용머리를 선체 내부로 숨기고 그 자리를 두꺼운 문으로 걸어잠근다. 마치 위험에 처하면 재빠르게 머리를 등딱지 속으로 숨기는 거북과도 같은 모습에[62] 놀라 벙찌는 사헤에. 이윽고 거북선의 매서운 충각이 사헤에의 안택선을 덮친다. 충각을 가하고 걸릴 부분도 없는 거북선이 안택선에서 벗어나자[63] 방금전까지 거북선을 메구라부네라고 부르며 깔보던 사헤에는 초반 미치유키의 패잔병들이 그랬듯이 절로 '복카이센'을 중얼거리며 두려움에 전율한다.[64] 이윽고 사방에서 왜군 함선들이 거북선을 포위하기 시작하나,[65] 거북선은 용머리와 전 함포를 꺼내 예고편에서 등장했던 장면대로 사방으로 함포를 일제사하며 적선들을 격파한다.[66] 사헤에 역시 죽음을 직감한듯 주군인 와키자카를 부르다 화포의 포격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전사한다.

주위의 왜 함선들을 격파한 거북선은 침몰하는 함선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빠져나오고 그 모습에 경악한 와키자카는 그제서야 신형 거북선이 이순신이 숨겨둔 비장의 패였음을 직감한다. 본래 이순신은 애초에 사천 해전에서 발견된 결함이 있는 거북선을 투입할 생각이 없었지만, 새로 설계하고 만들어진 거북선은 돌격선 그 이상의 활약을 보일 것이라는 나대용의 설득에 히든카드로 기존 거북선 2척과 신형 거북선 1척을 매복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거북선의 활약으로 위협이 사라진 조선 함대는 모두 제 자리를 찾아 학익진을 완성해 간다. 남은 것은 와키자카의 본대. 와키자카는 일점돌파를 하려는지 어린진을 갖추고 진형 한중간으로 돌진한다. 200보, 100보가 지나며 점차 줄어드는 거리. 원균은 이순신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분통을 터뜨리기 바빴고, 나대용의 2층 거북선도 사헤에의 안택선을 부수느라 미처 와키자카 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조선 수군에서도 "구선이 어찌 빠져 나오지 않고......?"라며 우려한다. 나대용은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전투 아닙니까. 그냥 쏘십시오."라고 말하며 포격 개시를 바라고 있었다.

진형마저 풀고 각개전투에 돌입하며 월선을 준비하고 사실상 맞닿은 50보 거리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이순신은 선회를 지시한다 그리고 와키자카는 함대의 대형을 풀도록 허락한다.[67]

선회를 시작하는 조선 함대를 보며 와키자카는 이순신에게 늦었다고 엄포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것은 왜군이었다. 완성된 학익진은 마치 판옥선으로 성벽을 쌓은 듯했고, 이순신은 발포를 명한다.

"발포하라!"

- 이순신, 와키자카의 함대가 도달한 순간을 노리며


포격에 특화한 판옥선 함대가 발사한 교차사격의 가공할 화력에 일본 함선들은 피할 틈도 없이 모조리 격침되고 인명 살상에 특화된 조란탄에 병사들까지 쓸려나간다[* 묘사를 보면 지워버렸다라는 말이 더 맞을 정도로 단 한 번의 공격에 전 함대가 전멸하다시피 한다. 이 단 한번의 사격으로 함대가 순식간에 전멸하다시피 한 원인으론 마지막에 와키자카가 함대의 대형을 풀어 함대 전체가 골고루 학익진에 밀착하여 피탄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진 이유도 있다.]. 일점 돌파를 시도한들 세키부네와 판옥선의 극명한 체급차이로 인해 일본 함대의 돌격은 이미 벽을 세워버린 학익진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며,[68] 조선 함대를 얕본 와키자카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이때 앞서 바다 위의 성이라니 가당치도 않다던 원균마저 "바다 위의 성...!" 이라 하며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한편 왜선 무리에 같이 있었던 나대용의 2층 거북선에도 실제로 포탄이 몇 발 명중한다. 나대용이 거북선 선수의 창으로 내다보는 장면에서 잘 보면 거북선도 포격을 맞고 내부 이곳저곳에 작은 불이 나는 등 피해를 입어 격군들이 진화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게 보이지만 거북선 특유의 떡장갑으로 버텨냈다(한 발은 거북선의 장갑에 맞고 튕겨나갔고, 하나는 돛을 부쉈다. 넷플릭스에서는 선수 좌측을 맞아 무관이 피격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파일:거북선1.png
파일:거북선2.png
와키자카의 기함을 충각 전술로 공격하는 거북선.

그나마 철갑으로 선체를 도배하여 포격에서 살아남은 와키자카의 기함 텟코센은 함수를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돌진하여 들이받으려 하지만, 측면에서 나대용의 신형 거북선이 기습하여 충파를 당해 거북선에게 붙잡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69] 워낙에 급박한 상황이라 사헤에의 안택선을 급습할 때와는 달리 용머리도 못 넣고 충각을 벌여 용머리가 끼었지만, 초반부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의 용머리가 안택선에 껴서 움직이지 못하던 때와는 상황이 반대로 텟코센이 용머리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와키자카는 병사의 조총을 빼앗아 저격을 시도하지만, 이순신의 기함은 반대쪽 함포를 끌고와 텟코센을 조준, 이윽고 양익의 판옥선들도 일제히 선회해 측면 모든 함포를 텟코센에 조준한다.

함대를 전멸시킨 화력이 이제 텟코센 한 척만을 집중 포격하게 된 상황. 판옥선들로 둘러쳐진 벽을 바라보며 와키자카는 성을 떠올리고, 도주를 결심하여 배 밖으로 몸을 던지나 이순신이 쏜 화살이 등에 적중한다.[70] 이렇게 다시 한 번 이어진 일제사격에 결전병기와도 같던 텟코센은 그대로 벌집이 되어 한산 앞바다에 수장된다. 전투 직후 연기가 가득찬 거북선에서 나대용이 나와 이언량과 함께 등갑판 위에 앉아서 승전한 함대를 뿌듯하게 바라본다.

송희립 : 장군, 실로 완벽한 승리입니다.

이순신 : 아니다. 더 나아가자. 지금 우리에겐,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


이순신은 완벽한 승리였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으나, 위의 대사처럼 지금 전세에선 압도적인 승리[71]가 필요하다며, 출정을 거듭한다. 이어지는 해전에서 승리하고 최후엔 부산포 해전에서 판옥선 포격[72]이 일본군 본영을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영화는 한산도 대첩이 마무리된다고 설명한다.[73]


5.1. 웅치 전투[편집]


한편, 정보름을 탈출시킨 뒤 그녀에게 서신을 주고 숲 속에 숨어 코바야카와의 행렬을 보고 있던 준사는 의병들에게 납치되고, 웅치 전선에 있는 나무에 묶인다. 의병장 황박[74]을 비롯한 의병들에게 자신이 항왜라는 사실과 왜군의 진군을 알린다. 의병들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정찰 나갔다 돌아온 의병의 보고를 받고 준사의 정보가 진짜임을 알게 되어 준사를 풀어준다.[75] 이후 일본군의 진격을 확인하고 돌아갈 때 황박은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술 한잔 거하게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한 의병이 준사에게 피아식별을 위해 그의 촌마게를 가리라며 초록색 두건을 주는데, 황박은 그런 거 필요 없고 '의(義)'를 향한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만류한다. 그 대신에 갑옷이나 더 덧대어 입으라고 말은 해준다.[76] 이후 와키자카가 어림짐작한 시간대에 웅치 고개에서 의병들과 왜군은 전투를 벌이고, 얼마 못 가서 제1방어선이 붕괴된다. 곧이어 제2방어선도 무너질 위기에 처하여 제3방어선까지 물러서야 한다고 황박과 같이 움직이던 의병이 요청하지만 황박은 여기가 뚫리면 전라도 전체가 끝장이라며 싸울 것을 독려한다.

결국 다수 의병들이 전사하고 황박까지 준사를 구하기 위해 대신 창에 찔려 죽기 직전까지 가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77] 황진의 지원군[78]이 도착한 것을 본 준사는 부축하고 있던 황박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자 그루터기에 눕히고는 피로 물든 조선군의 기를 들고 함께 돌격한다. 그 기에는 의병을 뜻하는 의()자가 쓰였는데,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이순신의 말을 나타내는 장치였다.[79]

모든 전투가 끝난 후, 임준영은 정보름과 만나 함대가 복귀중인 한산 앞바다를 지켜본다.[80]


6. 1년 후[편집]


1년 지난 1593년. 이억기와 함께 한산도의 해변을 거닐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거제도가 바로 앞이라며 한산()이란 이름이 참 괜찮지 않냐고 묻는다. 이에 이억기는 한산이란 '큰 뫼(산)'를 의미한다고 답변하고 이순신은 작은 승리에 이어 적에게 큰 타격을 줄 결정적인 승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 이억기와 이순신이 새로 한산도에 건조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이동하고 통제영에서 거북선이 정박을 위해 도착한 것을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81]


7. 미공개 영상[편집]



어느 날 이순신은 집에서 먹방 찍듯이 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이러다 자기가 집의 식량을 축내는 거 아니냐고 우려[82]하지만, 어머니는 자고 일어나면 식자재가 들어온다며 마당에 쌓아놓은 것을 보게 한다.[83] 식자재 중에는 고증에 맞게 이순신이 즐겨 먹었던 미역도 있다.



한산도 전투 패배 후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가 왜선을 만나 구출되는 와키자카. 아쉽게도 미역을 먹는 모습은 부하들만 나온다. 시청한 이들은 "통영 자연산 돌미역 웰빙"이라던가 "초장을 갖다주고 싶다."는 등 재밌는 반응이다.




8. 리덕스판에서 추가된 장면[편집]


원래 극장판에서는 와키자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서찰이 편지의 글씨를 붉은색으로 보여주는 데서 끝났으나, 리덕스판에서는 편지 글씨 대신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용인 광교산의 쑥대밭이 된 조선 삼도근왕군 진영에서 군사들을 동원해 살아남은 조선군 패잔병들을 색출해 처분하는 현장을 와키자카의 편지 내용과 같이 내보냈다.

또한 와키자카와 구로다 칸베에가 출진에 대해 논의 중일 때 극장판에서는 와키자카가 청코자 하는 것이 있다고 하자 칸베에가 "가토 일이겠지?"하면서 장면이 조선 수군에게로 전환되지만 리덕스판에서는 와키자카가 칸베에의 위 대사 후, "가토가 계속해서 대마도(쓰시마 섬)에서 미적거리고 있다."며 명색이 히데요시의 같은 칠본창인데 자신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며 칸베에 군사가 직접 대마도로 가서 가토를 설득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구로다 칸베에가 진짜 대마도로 가서 가토와 그의 부관들을 꾸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역시 칸베에는 "겨우 3만 석 다이묘(와키자카)에게 지휘를 받는 것이 싫어서인가?"라고 가토를 몰아세우며 전라도의 지도를 보여주는데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일화를 말해준다.

800년 전쯤이었지.... 우리 헤이안 시대 때, 그곳에 "해신"이라고 불리던 장수가 있었다. 전라도의 작은 섬청해진이라고 칭하고 그곳 하나로 대륙과 열도를 모두 지배했지. 화려했던 당나라와 찬란했던 우리 헤이안교(교토)를 연결했던 곳... 열도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몇백만 석의 쌀이 나는 곳. 그곳이 바로 전라도다.

"해신"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미 눈치챈 사람들이 있겠지만 칸베에가 말하고 있는 800년 전의 장수는 바로 신라의 명장 장보고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가토는 전라도 지도를 반복해서 바라보며 위의 대사를 떠올리고, 마침내 전라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품고 와키자카와 함께 출전하겠다고 결정한다.

또한 여수 흥국사에 숨어든 사헤에의 모습이 나오는 장면 뒤로 좌수영으로 모이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이를 이순신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가토와 요시타카가 와키자카에게 배신당해 쫒겨난 뒤로 자신들의 배에서 향후 거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가토는 앞으로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안골포로 가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전쟁이군요, 오히려 이순신을 더 응원하게 되는..."

이라고 말한다.

또한 거북선 씬이 원작보다 약간 더 늘었다. 충파 장면과 측면포격 등이 추가되었다.

웅치 전선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과 광주 목사 권율[84]이 추가로 등장하였다. 정담은 준사의 정보와 정찰병의 보고가 일치함을 확인하고 권율에게 웅치 전선의 증원을 요청하여 권율이 승낙한다. 그리고 고바야카와의 대군이 계속해서 들이밀자 전투 막바지에는 실제 역사대로 전사한다.

한산 대첩이 끝난 후의 전투에 대한 장면도 추가되었는데, 안골포로 향했던 가토와 구기 요시타카가 이순신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실소하고 있는 가토의 옆에서 요시타카가 (자신들을 배신한 와키자카가 패배했으니)"그러게,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라고 위로하다가 가토가 칼을 겨누며 "나에게 베여 죽기 전에 그 입 다무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또한 본편이 끝나고 쿠키영상으로 한산 해전으로부터 6년 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연락책이 순천의 왜교성 전투로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한 일본 장수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 노령의 일본 장수는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요시히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뒷담하면서 왜교성으로 출전을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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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에선 분로쿠(文禄) 연호로 나왔다.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쵸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하지만 사실 한산도 대첩이 벌어지던 시기는 분로쿠(文禄) 연호가 개원 전이라 아직 텐쇼 20년이었다. 참고로 분로쿠(文禄) 연호는 텐쇼 20년 12월 8일(그레고리오력: 1593년 1월 10일)에 개원했다.[2] 영화에선 아와지의 와키자카라고 자막처리 되었고 음성으로는 '아와지노카미, 와키자카'라고 녹음되었다.. 아와지노카미(淡路守)는 종6위하의 아와지국의 태수의 역할을 하는 관직으로 당시 와키자카는 아와지국 스모토 3만석의 영주이기는 했지만 영화와는 달리 종5위하 중무소보(中務少輔, 나카츠카사노쇼)를 역임하고 있었다. 당시 와키자카의 관위는 종5위하로 영화 속에 출연한 유명 왜장들인 감해유차관(勘解由次官)을 역임하고 있던 구로다 간베에 · 우마윤(우마노조, 右馬允), 오스미노카미(大隅守), 궁내소보(宮内少輔)를 역임하고 있던 구키 요시타카 · 좌마조(사마노스케, 左馬助)를 역임하고 있던 가토 요시아키와 같은 관위였다.[3] 원래 히데요시는 타이라를 자칭했다.[4] 후지와라는 와키자카씨의 본성으로 도요토미성을 받기 전의 하시바 히데요시의 성과 같았다.[3]다른점이 있다면 와키자카씨는 본래 혈통이 후지와라지만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기위해서 후지와라의 직계인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자칭한 것에 있다.[5] 롯데 엔터테인먼트의 인트로 역시 컬러가 아닌 흑백 버전이다.[6] 문장 끝을 'です(데스)'나 'ます(마스)' 대신 정중함을 의미하는 조동사 '候[そうろう(소로)\]'로 끝내는 候文[そうろうぶん(소로분)\]으로 쓰인 편지다. 다이쇼 시대까지는 종종 쓰인 예스러운 문어체이다.[7] 살해당한 패잔병들은 도쿠이 미치유키의 병사들이다. 미치유키의 동생이 바로 명량에서 와키자카와 신경전을 벌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인 것을 감안하면 재밌는 부분이었다.[8] 조선군 입장에선 용머리가 끼어서 옴짝달싹 못해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정작 그 몸부림에 왜군은 공포에 질리는 아이러니하고도 긴급한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9] 방패가 몸통만 겨우 가려주는 크기라 하반신은 미처 보호하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 나대용은 총상을 입었으며, 영화에선 총을 쏜 자가 준사로 설정된 것과 나대용이 거북선에 승선했다는 것이 실제와의 차이점이다. 사천 해전 당시 나대용은 대장선에 승선했다.[10] 여러모로 복선인 내용으로, 본 영화에선 부산포 해전이 한산도 대첩과 함께 3차 출정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11]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12] 실제로 전주성 전투 이후 대간에서 용인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했다.[13] 이 말을 한 직후 다른 장수들의 시선이 원균을 향하는데 원균이 나라의 안위보다 개인의 위상과 안전을 중요시한다는 걸 암시하는 부분이었다.[14] 작중엔 다뤄지지 않았지만 거기가 첫 피난지도 아니다. 한양을 버리고 처음엔 개성으로 갔는데 거기서 또 피난했다.[15] 실현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러려고 했었다. 함경도를 마다하고 의주로 갔는데 그곳이 압록강을 건너기 딱 좋은 지점이기 때문이었으며 이후 진짜로 망명을 요청했는데 명나라는 선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후퇴해서 왜랑 짜고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16] 작중에서는 일관되게 "궤멸"이라고 표현했으나, 실상 2,000명 대 50,000명의 전투였던지라 5만이나 되는 근왕군이 전부 학살당하지는 않았다. 지휘계통이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져서 군대 구실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17] 보통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서 왜군들이 붙잡은 조선인들을 학대하는 장면은 많이 나와도 그 반대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이례적인 장면이다.[18] 이때 이순신 옆에는 가메이 고레노리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하사받은 황금 부채가 놓여져 있다. 이후 와키자카 역시 부채를 하사받는 전개에 대한 복선. 실제로 가메이가 가지고 있던 황금 부채는 그가 패퇴하면서 조선 손에 들어갔고, 이후 이순신이 선조에게 바쳐 조선왕조 내내 왕실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멸망 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건축가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일본 황실에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19] 일본인 출신임을 드러내기 위한 연출인지 준사가 '살기'를 말할 때 [사루기\] 비슷하게 발음한다. 다만 한산에서 준사는 일본인이면서 조선말을 상당히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명량에서는 이순신 앞에서도 일본어밖에 하지 않았고 그가 하는 말도 옆에서 조선인 군관이 통역을 해주는 식으로 이순신과 소통했다는 걸 생각하면 한산과 명량의 시점 사이에 뭐 조선어를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의아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작중에서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조선어를 배웠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뭐 배우가 달라져서(...)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20] 실제 역사에서 준사는 한산도 대첩 이후 있었던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군에 귀순했다. 이순신 본인이 난중일기에서 준사를 '안골포 항왜'(안골포에서 항복한 왜인)라고 적었다.[21] 사실 많은 전래동화나 야사에서 장수가 꿈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어 전략을 세우는 모습이 연출되지만,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인지라 해당 장면도 약간의 비판을 받았다.[22] 1보는 약 1.4m이다.[23] 상대 적함에 올라탐을 뜻한다. 보통은 월선보다 도선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24] 일본어 내 발음은 샤치호코.[25] 자막으로 흥국사라는 사찰 이름이 언급된다. 실제로도 흥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원하는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영이었으며, 이 절의 승려인 옥형(玉泂)과 자운(慈雲)은 이순신을 도와 종군했다.[26] 이전의 전투에서 나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키부네 서너 척을 준사에게 지휘하게 하여 대항군으로 두고 시범 훈련을 진행한다. 이 와중에 몇몇 배가 위치를 잘못 잡아 진이 엉켜서 판옥선 두 척이 서로 부딪치기까지 하는데, 원인은 역시나 원균이다.[27] 명량에서 배설의 방화에 허무하게 불타 버리고 용머리까지 화재 때문에 선체에서 분리가 되어 땅에 떨어진 거북선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들을 식겁하게 만든 장면이었으나, 다행히 이번에는 겉만 약간 그을리고 선체는 멀쩡했다. 완성된 배인데다가 바다 위에 있었고, 명량 때와 달리 많은 병력들이 있던 데다가 포로들의 폭동으로 비상상황이라 모든 사람들이 다 깨어있었다.[28] 혹시 일본군이 승려로 변장해서 흥국사라는 승군 본영에 숨어든 것에 대해서 불교 폄하라고 생각할 수도 았겠으나, 일본군이 승려로 변장해서 첩자로 숨어든다는 것은 이미 조선 시대의 계서야담(溪西野譚)에 유성룡의 바보 삼촌에 대한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화소이고, 숭유억불이 만연하던 조선 시대에 유학자들의 승려 폄하에서 나온 얘기라고 해도 성직자가 타국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는 일은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다. 게다가 첩자가 승려로 변장해서 승군 본영이자 피난민 수용소에 숨어든다는 걸 까려면 승군 본영 이상으로 경비가 삼엄해야 할 전라좌수영 본영에까지 이들 일본군이 침투해 일본군 포로 다 풀어주고 거북선 설계도까지 훔쳐 달아난다는 전개까지 까야 할 것이다. 김한민 감독은 전작 명량에서 이순신을 도와 참전한 승군들을 등장시킨 적이 있으니만큼 감독에게 불교 폄하의 의도가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극중에서 일본군의 준비와 작전이 그만큼 철저하며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화소로 해석하는 게 맞다.[29] 마치 마동석처럼 맨손으로 사헤에를 방 저편으로 집어던지는 등 괴력에 가까운 힘을 보여준다. 나중에 이순신이 학익진을 짜면서 장수들의 특징 하나하나를 열거하는데, 정운은 무예가 가장 뛰어난 장수인 것으로 묘사한다.[30] 그런데 같은 일본인끼리면 응당 일본어로 이름을 부를 법한데 와키자카는 준사를 계속 "준사"라고 부른다. 준사의 원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31] 와키자카가 멀찍이서 답하던 준사를 가까이 부르며 질문하는 사이,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나베가 칼의 츠바를 밀어내고 유사 시 발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32] 와키자카는 이순신이 수성을 택하리라는 준사의 발언에 좀 더 명확한 근거를 요구했는데, 임금인 선조마저 의주로 도망친 판국에 수성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답한다. 이에 와키자카는 정세 판단이 나쁘지 않다며 흡족하게 웃는다.[33]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이 있는데, 와키자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일본인 승려로 보이는 인물이 있고 와키자카가 그 승려에게 자신의 말을 편지로 쓰게 하는 장면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도 무장들을 따라 종군한 승려가 상당히 많이 있었으며, 당시 일본의 다이묘들 가운데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에 한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승려들에게 서한 등 문서 관련 업무를 맡기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4] 후에 임준영이 밝힌 첩보에 따르면 대선 20척과 소선 20척으로 총 40척 규모이며 그 중 대장선은 충각에 대비해 철로 표면을 덧칠하여 강화하였고 이에 더해 포까지 장착한 상태였다.[35] 가토로서는 자신들 보고 오자마자 싸우라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을 들은 것이고 이에 와키자카가 애초부터 자신과 함께 싸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36] 웃기게도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이 조선 수군에게 내린 명령 勿令妄動 靜重如山(물령망동 정중여산)과 뜻이 나름 일맥상통한다.[37] 후에 임준영의 부인이 되는 정씨 부인이며 이 당시에는 와키자카를 전담하는 기생으로서 잠입하여 있었다. 사실상 와키자카와 정씨 부인은 구면인 셈.[38] 하지만 와키자카는 옷 밑에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큰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39] 이것이 본작의 이후 시간대를 다룬 전작 명량에서 정씨 부인이 말을 할 수 없게 된 과거의 사정인 듯하다.[40] 12세 관람가 수준에서는 좀 놀라울 수준으로 참수되는 장면과 머리가 날아간 목, 날아간 머리들이 바다에 빠지는 등의 묘사가 짧게나마 그대로 드러난다.[41] 자신들이 가져온 배만 취한 뒤 자신들은 버리는 것. 그런데 실제로 가토 요시아키의 견원지간은 도도 다카토라였다. 실제 역사상 와키자카가 공명심으로 독단적으로 출정한 것이만 여기서는 와키자카가 최종보스인 만큼 냉혈한으로 보이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저딴 하극상을 저지르다간 히데요시가 격노하여 할복형을 내릴 판이였다,[42] 이후에 나온 회상씬에서, 나대용이 돌아가고 있던 이순신과 송희립에게 가서 정말로 구선 없이도 승리해 돌아올 수 있냐며, 이번 구선은 분명 돌격선 그 이상을 해낼 것이니 출정을 허락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43] 굳이 이름으로 언급한 이유는 먼저 등장한 가토 요시아키를 성씨로 불렀기 때문에 혼돈 방지를 위한 설정이다.[44] 嚮導, 길잡이라는 뜻.[45] 둘 중 이운룡은 설정상 어영담의 제자로 등장한다. 이후 장면이 나오지는 않지만 원균이 이순신의 부하가 다 되었다고 탄식하면서 나간 것으로 보아 마지못해 승낙한 걸로 보인다. 실제로는 두 사람이 합류한 게 아니라 김완이 같이 갔다.[46] 좌선봉과 우선봉에 각각 사도첨사 김완과 순천부사 권준을 배치했는데, 이 둘은 당포 해전에서 도쿠이 미치유키를 상대할 때 권준이 활로 쏘아 부상을 입히고, 바로 김완이 넘어가 백병전을 벌인 끝에 미치유키의 목을 따는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줬을 정도로 매우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수들이다. 녹도만호 정운은 무사로서의 능력과 돌파력을 높이 평가하여 낙안군수 신호와 함께 학익진에서 돌파당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좌선의 호위선으로 배치된다.[47] 특히 원균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구멍이 될 것을 고심하는데, 원균의 자리에 유인 담당 장수들을 붙여 리스크가 생길 여지를 하나로 줄이고 돌아오는 김에 호위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적중하게 된다.[48] 이쯤부터 전투 상황이라 대사가 안 들릴 것을 고려하여 한국어 대사일 때도 자막이 나온다.[49] 이때 어영담이 왜군이 화포를 쏘느냐고 놀라워한다. 실제 왜란 당시 일본 수군도 화포를 썼다. 다만 포격 위주로 교전하는 판옥선과 달리 일본 함선은 빠른 대신 내구도가 약해(판옥선은 소나무판을 짜맞추기 공법으로 만들고 참나무못으로 고정했으나 일본 함선은 삼나무판에 철못을 박았다) 무거운 화포를 여러 문 장착하는 데 부적합했고, 극중에서 나온 것과 같이 안택선도 1~3문 정도의 화포를 장착해서 쓰는 정도에 그쳤다.[50] 와키자카는 신중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함대에게 유리한 조류가 아니라면 절대 바다로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51] 이 때 판옥선이 세키부네를 체급차이로 밀어내면서 해협으로 트는 장면이 나온다.[52] 실제 역사에서 마나베는 전투가 끝나고 한산도로 대피했다가 할복자살했다.[53] 와키자카가 지장인 척하지만 사실은 전술의 해석이 크게 잘못됐고, 이순신에게 완전히 낚여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에서는 학익진을 펼치는 위치가 미카타가하라처럼 육지가 아닌 공해상이었고, 학익진도 첨자진을 유지하며 거짓 후퇴를 하다가 반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후퇴하는 과정에서 보란듯이 만들었기 때문에 미카타가하라의 도쿠가와처럼 대놓고 학익진을 만든 꼴에 불과했다. 그래서 함대에서 뒤처진 원균을 예상대로 잡아낸다면 학익진에 구멍이 생겨 학익진 연습하던 때처럼 그대로 함대를 통과시킬 수도 있었기에 와키자카가 저런 판단을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패인은 신겐이 쿨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눈앞을 지나치는 데 격분한 것이나, 적의 통과를 허락하면 수하들에게 무시당할 것이 두려웠다는 등의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가 꼽히며, 그나마 그렇게 감정적으로 건 싸움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적은 병력으로 평지에서 학익진을 사용해서 질적, 양적으로 우수한 다케다의 종심 깊은 어린진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걸었던 데에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몇 번이나 극도의 절망을 토로하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전략을 짤 때만큼은 늘 이성적이었으며, 한산에서는 측면을 지키기 위해 양쪽이 육지로 가로막힌 지형에 적을 끌어들여 아타케부네보다 구조, 질적으로 우수한 판옥선에 화력을 집중해 포화를 퍼부을 완벽한 전법을 구사했고 명량에서는 물살이 강한 해협으로 적을 유인해서 대군인 적들이 운용이 힘든 아타케부네가 아닌 소형 세키부네로 갈아타게 만들어 질적으로 불리한 함선을 쓸 수밖에 없도록 상황과 조건을 조성해 놓고 싸우려 했다. 결국 같은 학익진이라 해도 이에야스가 아니라 신겐이 구사하는 진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54] 당시는 지상전이었다. 흔히 이순신이 학익진을 고안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뒤집는 장면으로, 본디 학익진은 널리 쓰이던 육상전술이나 이순신이 최초로 해상전에서 구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작이 처음으로 이러한 인식을 뒤집는 장면을 보여준 것은 아니고, 일찍이 불멸의 이순신에서부터 학익진의 존재가 이미 알려져 있음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었다.[55] 흔히들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의 학익진을 어린진으로 정면으로만 들이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다케다 신겐은 다케다 노부토요의 기병대를 필두로 한 별동대를 보내 학익진의 측면(오다의 3천 지원군이 자리잡은 곳)을 급습해서 붕괴시키고서 밀어붙였다. 당시의 포진에 대한 것은 미카타가하라 전투 문서 참고.[56] 포격 이후 적막이 감돌며 가시로 뒤덮인 거북선의 등갑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원균의 함대 뒤에서 3층 거북선 두 척이 모습을 드러내며 포격전을 시작한다. 이때 거북선에선, 전작 명량이나 임진왜란 1592처럼 공룡 울음소리와 비슷한 배의 울림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57] 첫번째 충각 때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선 시치에몬은 두번째 충각 때 돌진해오는 구선을 보고 메구라부네라고만 읊조릴 뿐 그대로 굳어버려 정면 충돌했다.[58] 제일 처음 구선을 장님배 '메구라부네'라고 무시해왔지만 구선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고 겁을 먹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번째 충각 후, 부장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댕그러니 남겨진 투구만 보는 것을 보아 두번째 충각 때 물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59] 특히 대장선인 안택선을 집중적으로 노렸다.[60] 이중 1척은 와키자카의 안택선이 포격하기 어려운 방향에서 접근했으나 와키자카에게 접근하는 사이 사헤에의 안택선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해 피격당한다.[61] 탄피라는 개념이 없없던 시절에는 전장포로 내림각 사격이 불가능했다.[62] 초반부에 거북선 개량에 고심하던 나대용에게 부하 이봉수가 반장난으로 데리고 노시든 몸보신하시든지 하라며 작은 자라를 주었는데, 이후 나대용이 자라가 든 그릇을 내려놓자 자라가 놀라서 머리를 집어넣는 것으로 복선을 암시했다.[63] 초반과 달리 용머리가 아닌 흘수선에 설치된 귀면을 클로즈업한 후, 귀면이 후진하며 안택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나온다.[64] 이 장면은 '복카이센'이 일본군이 거북선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단어임을 보여준 장면이다.[65] 거북선의 약점을 아는 만큼 안택선에 걸리는 순간 다같이 월선하여 부숴버릴 계획으로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머리를 집어넣는 시점에서부터 그걸 보고 멈출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66] 기존의 거북선은 용머리가 충각시 적선에 박히는것도 문제였지만, 3층으로 층고가 높은데 위에 덮개까지 올리고 앞에 무거운 용머리까지 달려있다보니 무게중심의 문제와 무게로 인한 느린 속력이 문제였다. 거기에 포들이 높게있다보니 한쪽으로 전탄사격을 하면 반동으로 인해 배가 측면으로 기울어버릴 수 있었다. 그걸 2층으로 낮추어 무게중심과 과중량을 잡고, 용머리를 수납시켜서 기존의 선체구조 문제를 해결한 신규 거북선은 전방위 전탄사격이 가능했다.[67] 그리고 이는 결국 전 함대의 피탄면적을 늘려 함대가 판옥선 전탄사격 한번에 지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 초반부 훈련 장면에서는 더 먼 거리에서 선회했는데도 선회속도가 느려서 판옥선 사이 틈으로 대항군 세키부네가 다 빠져나갔는데, 고강도 훈련과 실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절박함이 합쳐졌는지 여기서는 마치 격군을 영혼까지 갈아넣은 듯한 정신나간 선회속도를 보여준다. 단순히 격군들의 절박함만이 아니라 전속력으로 전진하던 배를 급정지하면서 발생한 관성을 활용해 선회 속도를 높인 점도 있었다.[68] 교차사격 직후에 판옥선의 함포에 박살났지만 그나마 형태는 유지하고 있던 세키부네 잔해 하나가 돌진하던 관성으로 밀려와 그대로 판옥선에 부딪히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정말로 성벽에 갖다박은 것처럼 판옥선은 뒤로 좀 밀렸을지언정 멀쩡했지만 세키부네는 그대로 박살나 완전히 가라앉는 모습으로 이를 입증한다.[69] 나대용이 이순신에게 이번 구선은 분명 돌격선 그 이상을 해낼 것이라 했는데, 이순신을 구해내서 그 말을 지키게 된다.[70] 이 뒤에 대해선 제대로 묘사가 나오지 않지만 아래 미공개 영상을 참고하면 확실히 생존한 게 맞다. 여기서 와키자카가 죽으면 전작 명량에서 등장한 것은 없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상으로 와키자카는 패전 도중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쾌속선으로 갈아타 도주했으며, 그 화살을 이순신이 쐈다는 것과 화살에 맞으며 바다에 빠진 것은 허구이다.[71] 본작의 광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로 언뜻 보면 한산도 대첩의 대승을 의미하는 듯했지만 사실상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에 더 이어진 몇 차례의 모든 승리까지를 내포하는 것이었다.[72] 동시에 본작의 전작인 명량에서도 등장하는 도도 다카토라가 멀리서 포격을 가하는 판옥선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온다. 갑옷의 색과 디자인은 전작에 나왔던 금색으로 같으나 진바오리 색상이 전작의 금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가만 보면 조선 수군이 공격해 오는 모습을 천수각 안에서 내려다 보면서 앞에 와키자시를 놓고 앉아 있는데, 이제 다 틀렸다는 생각에 자결하려는 건가 싶기도 하다.[73] 이 때 부산포에서 작중에서도 모습을 보였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지만 다뤄지진 않았다. 게다가 부산포 해전은 한산도 대첩이 있던 3차 출정 이후, 4차 출정의 전투인데 마치 3차 출정으로 한산 이후 부산까지 출정한 것으로 묘사됐다. 당연히 역사적 지식이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 지적이 나왔다.[74] 실제 웅치 전투 당시 조선군의 최고 지휘관은 황박이 아닌 김제 군수 정담이었다. 리덕스판에서는 정담이 등장한다.[75] 이때 황박이 나무에 묶인 준사를 벨 듯이 다가오다가 밧줄만을 베어 버리는 장면이 본작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웃음 포인트.[76] 그리고 이 두건은 나중에 명량에서 두르고 다닌다.[77] 실제 역사에서 황박은 다음날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웅치에서는 정담이 전사했다. 리덕스판에서는 정담이 등장했고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다.[78] 황진은 웅치 전투가 끝난 직후 안덕원에서 병력을 재정비하여 왜군의 추가 진격을 저지했다.[79] 깃발을 들고 돌격했다는 부분에서 의아해할 수 있지만, 군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소속 부대의 집결 위치를 나타내는 이정표였다. 깃발이 없으면 병사들이 진격해야 할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와해되기 쉬워서 적군은 깃발을 빼앗거나 기수를 사살하여 기를 무너뜨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 그에 따라 기수는 그런 공격에도 쉽게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가장 용맹한 사람이 담당했다. 준사가 무기 들기도 바쁜 상황에서 깃발까지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의와 불의의 싸움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바로세우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80] 명량에서는 임준영이 사망하고 정보름이 자신이 임준영에게 준 부적을 명량 앞바다에서 찾아 눈물을 흘리는데, 여기서도 그때와 같은 배경음악이 깔린다. 하지만 여기서는 임준영이 죽지 않았고 명량에서는 임준영이 죽은 후라는 차이점이 있다.[81]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운 이유는 왜군의 본진인 부산포와 더 가깝기 때문에 항상 감시하고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하려는 이순신의 의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약 4년 뒤 그들이 바라보던 바로 그 바다, 즉 거제도와 한산도 사이의 해역에서 원균 휘하 조선 수군의 대패인 칠천량 해전이 일어나고 이억기마저 죽은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물론 그 다음엔 명량 해전이라는 12척 대 133척의 전투에서 12척으로 31척을 격파한 그 결정적인 승리가 실현되었지만.[82] 분위기상 진지한 우려라기 보다는 그만큼 음식이 맛있다는 반응에 더 가깝다.[83] 백성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주고 있는 이순신을 위해 식자재를 선물한 것.[84] 직책이 전라도 순찰사로 언급되는데 권율은 이치 전투 당시까지 광주 목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