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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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한니발.jpg}}}

1. 개요
2. 배경
3. 사료
4. 전개
5. 결과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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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18년 10월,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여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사건.


2. 배경[편집]


기원전 218년, 로마 공화국은 9개월간의 사군툼 공방전을 치른 끝에 로마의 '친구'를 자처하던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한니발 바르카를 인도할 것을 카르타고 원로원에 요구했다. 그들이 단호히 거부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했다. 한니발은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우선 피레네 산맥의 원주민들을 제압한 뒤, 11,000명의 병력을 한노에게 맡겨 피레네 산맥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3만 8천 보병, 8천 기병,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한편, 로마는 전쟁을 선포한 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2개 군단(보병 8,000명, 기병 600명)과 비슷한 수의 동맹군 보병 및 기병을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한 뒤 여차하면 아프리카를 치게 했다. 또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같은 수의 병력을 맡겨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푸블리우스는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부관으로 삼고 마실리아를 경유한 뒤 이베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여러 켈트 부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들을 칠 의사가 없으며, 어디까지나 로마를 공격하러 가고자 할 뿐이니 막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선물'로 줬다. 이보다 앞서, 로마 원로원은 켈트인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카르타고인의 진군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은 "로마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게 뭔데 이런 부탁을 함부로 하는가?"라고 비웃으며 거부하였고, 카르타고인들이 건넨 막대한 자금을 보고 기꺼이 길을 열어줬다. 그 덕분에 여유롭게 진군할 수 있었지만, 9월 볼카이 족의 영토인 론 강 강둑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볼카이 족은 자기들 영토를 지나가려는 카르타고군을 적대해 모든 배를 강 반대편으로 끌고 가서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적이 건널만한 여울을 틀어막았다. 이에 한니발은 론 강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친 뒤 강을 도하했다.

한편, 마실리아에 도착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곧 한니발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짧은 교전을 벌인 뒤 돌아가서 본대에 보고했다. 스키피오는 즉시 한니발과 맞붙기 위해 북상했지만, 한니발은 그와 교전하지 않고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격했다. 스키피오는 곧 버려진 적진을 발견한 뒤, 더 추격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마실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한니발의 의도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것임을 깨닫고,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군대를 맡겨 이베리아로 파견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병력을 새로 소집한 뒤 한니발을 저지하기로 했다.

한편,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 인근에 도착한 뒤 북이탈리아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갈리아인 사절로부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압제에 이를 갈고 있으며 그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한니발은 이에 고무되었고, 로마군이 언제 추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한 빨리 산맥을 넘기로 했다. 병사들이 높고 험준한 산맥을 겨울에 넘겠다는 결정에 몹시 두려워하자, 그는 갈리아인 사절들을 그들 앞에 보이며 말했다.

"이 사절들이 하늘을 날아서 알프스를 넘었는가? 우리도 이 사절처럼 충분히 알프스를 넘을 수 있다."


그렇게 알프스를 넘기로 한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 너머에 살고 있는 갈리아 종족인 타우리니족과 접촉했다. 당시 이 종족은 족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두 세력가의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니발은 그 중 연장자이며 대중의 지지를 더 받는 브란쿠스를 지지하면서, 그와 동맹을 맺고 알프스를 횡단하는 여정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그 후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돌파하는 무모한 작전을 감행했다.


3. 사료[편집]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사건은 당대에도 대단한 화제가 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이 일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라케다이몬의 소시로스는 자신이 한니발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면서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일 아크테의 실레노스키케로로부터 한니발의 동행자로 간주되었으며, 나폴리의 찰리레스와 에우마코스 등도 한니발 편에서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폴리비오스로부터 "터무니없는 기록을 사실인양 써갈긴 허풍쟁이"로 폄하되었고, 그들의 저술 중 어느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한니발과 싸운 로마인들도 이 주제에 대한 역사서를 저술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 가이우스 아킬리우스, 루키우스 킨키우스 알리멘투스[1], 대 카토가 대표적인 인물들인데, 이들의 글 역시 현존하지 않으며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안티파테르 같은 후기 역사가들의 인용문 몇 개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코엘리우스의 역사서는 실레노스와 대 카토의 저서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주요 출처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고대 사료 중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과 관련한 주요 사료는 폴리비오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저서이다.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168년부터 인질로서 로마에 거주했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클리엔테스였다. 그는 저서 '히스토리아' 제3권 10장에서 12장까지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을 다뤘다. 그는 알프스를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제시하며 이를 극복한 한니발을 새로운 헤라클레스로 치켜세우는 이전 저서들의 과장법을 거부하면서, 자신은 한니발을 아는 갈리아 및 카르타고인들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폴리비오스보다 100년 뒤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역사>를 저술했다. 그는 이 저서의 21권 30~38장에서 알프스 횡단에 대해 설명했는데, 대체로 폴리비오스보다 낭만적이고 장황한 내용이 많다.

리비우스 이후의 작가들 중 실리우스 이탈리쿠스는 서사시 3권의 주요 내용을 알프스 등반에 바쳤다. 그는 리비우스의 지리적 설명을 채택했는데, 특히 한니발의 군대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과정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지리학자 스트라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대 플리니우스 등은 한니발이 통과한 알프스 경로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풍자 작가 유베날리스는 다음과 갈은 시를 지었다.

"미쳐서 가파른 알프스를 달려, 마침내 학생들을 즐겁게 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라!"



4. 전개[편집]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개울을 10일 동안 따라가며 150km를 진군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개울'이 이제르 강이라고 추정한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뒤랑스 강을 향해 나아갔다고 한다. 이윽고 고개 입구에 도착한 한니발은 고개에 진입했지만 매복한 원주민들이 습격하면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에 야간 파견대를 야밤에 보내 높은 곳에 자리를 잡게 한 뒤 공격자들을 후방에서 치게 했다. 이리하여 적을 제압한 뒤 행군을 이어갔다. 한니발이 진군한 고개에 대한 논쟁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진행되었으며[2], 다음 5개 고개가 유력 후보로 제시되었다.

  • 프티 생베르나르 고개
  • 콜 드 클라피에르 고개
  • 콜 드 라 트라베르제트 고개
  • 콜 드 몽제네브르 고개
  • 케니스 산 인근 고개

19세기까지는 프티 생베르나르 고개가 가장 유력했지만, 현재 다수의 학자들은 콜 드 라 트라베르제트 고개의 지질학적 연구 결과 땅이 수천에서 수만 마리의 동물과 인간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 흔적이 발견되었고 토양에서 말과 노새와 대변이 대거 발견된 점을 근거삼아 트라베르제트 고개가 유력하다고 본다.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이 "가장 높은 고개"를 넘었다고 기술했는데, 실제로 트라베르제트 고개는 서부 알프스 산맥의 고개들 중 가장 높은 고개이기도 하다.

한니발은 고개 입구를 돌파한 뒤 산길을 따라 계속 이동하다가 전방의 언덕에서 알로브로게스족이 길목을 가로막고 요새화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적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정찰병들을 보냈다. 정찰병들은 적군이 낮에는 요새에 대기하고 있지만 밤에는 추위를 피해 요새를 떠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니발은 적이 야습을 경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불을 진영 내에서 피우게 했다. 그렇게 적을 방심시킨 뒤, 그는 적이 요새를 떠난 틈을 타 최고의 정예병을 이끌고 요새로 쳐들어가 고갯길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그렇게 요새를 돌파한 뒤, 한니발은 진군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이 가팔라서 행군에 지장이 생겼고, 원주민들은 이 때를 틈타 공격을 감행했다. 한니발은 사전에 산길 바로 위와 우측에 솟아 있는 절벽 위의 덤불에 투석병과 궁수들을 배치해서 적이 쳐들어올 때 위에서 쏘게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침략자들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고, 많은 짐을 실은 동물들이 혼란 속에서 절벽에서 추락했다. 이에 한니발은 정예 보병대의 선두에 서서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앞을 가로막은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원주민들은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밀어붙이는 카르타고군에게 패퇴했고, 카르타고군은 즉시 행군을 재개하여 평지에 도착했다. 그 후 자신들을 습격한 것에 보복하고자 마을로 쳐들어가서 모든 말, 짐승, 곡물을 빼앗고 군대에 필요한 3일분의 식량을 확보했다. 한니발은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설을 한 후 페허가 된 마을에서 하루 동안 푹 쉬게 했다.

이후 행군을 재개한 카르타고군은 도중에 선물과 가축을 가져온 켄트로네스라는 현지인을 만났다. 켄트로네스는 한니발에게 그의 대의에 싸울 의사를 표명하며 인질을 바쳤다. 한니발은 그의 진의를 의심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켄트로네스는 이틀 동안 안내인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좁은 산길에 카르타고군 절반이 들어섰을 때, 켄트로네스는 돌연 사라졌고 매복병들이 카르타고군을 습격했다. 게다가 전방에는 원주민들이 사전에 쌓은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켄트로네스의 속임수를 예상한 한니발은 코끼리, 기병을 최전방에 배치하고 수하물들을 중간에 배치했으며 중보병대를 후방에 배치했다. 켄트로네스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와 평행한 경사면에 자리를 잡고 적을 향해 바위를 굴러서 많은 짐승과 인간을 죽였다. 하지만 한니발이 배치한 중무장한 후위대가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는 사이, 앞서 진군한 절반의 병력이 앞을 가로막은 바위들을 모조리 치우고 돌파했다. 원주민들은 적이 장애물을 돌파한 것을 보고 물러났고, 카르타고군은 산길을 돌파한 후 이틀 동안 휴식을 취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윽고 정상에 오른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출신 장병들이 극한의 추위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본 한니발은 그들을 모아놓고 포 계곡과 인근 평원을 가리키며 "우리가 이제 내려가면 성공과 영광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3] 3일간 정상에서 휴식을 취한 뒤, 한니발은 전군에 하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은 이탈리아 쪽에서 훨씬 가팔랐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발을 헛디뎌 추락사했다. 그러던 중 길 일부가 산사태로 막혀 있자, 한니발은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동물과 인명을 희생해가며 전진한 결과 우회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자, 다시 끊어진 부분 인근으로 가서 진을 친 뒤 부하들에게 노새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고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이 교대로 일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 기병대가 건널만한 길이 확보되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목초지로 파견해 목재를 최대한 확보해서 코끼리도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고 명령했다. 이 작업은 3일이 더 걸렸다고 한다.[4] 그렇게 고생하면서 진군한 끝에, 그들은 16일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한니발은 지칠대로 지친 장병들에게 장기간 휴식을 줬다. 그가 진영을 세운 장소는 오늘날 이브레아 평원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결과[편집]


강추위에 원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험준하기로 악명높은 알프스 산맥을 등반한다는 한니발의 계획은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진입했을 때, 그를 따라온 군대는 3만 8천 보병에 8천 기병, 코끼리 37마리였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을 돌파한 뒤 남은 병력은 보병 2만, 기병 6천, 코끼리 수 마리에 불과했다. 한니발은 군대를 쉬게 하는 한편, 로마의 거듭된 침략과 착취에 이를 갈고 있던 북이탈리아의 켈트인들을 모집하여 병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당초 그에게 협조하기로 약속했던 타우리니족은 카르타고군의 규모가 작은 것에 매우 실망해 동맹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한니발은 켈트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타우리니족의 주요 정착지를 공격하여 저항하는 자들을 살육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았다. 그렇지만 켈트인들이 그의 병력이 적은 걸 보고 가담을 망설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길 희망했다. 그러던 중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군대를 소집한 후 카르타고군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니발은 즉각 응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기원전 218년 11월 티키누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격돌했다.
[1] 몇년간 한니발의 군대에서 포로 생활을 한 인물이다.[2] 본인도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진군한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논쟁에 참여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몽제네브르 고개를 주장했다. 참고로 나폴레옹 본인은 알프스 진군 당시 생베르나르 고개를 이용했다.[3] 현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이 클라베르제트 고개에 카르타고군이 올랐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본다. 생베르나르 고개에서는 포 평원이 보이지 않지만 클라베르제트 고개에선 보이기 때문이다.[4]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식초를 이용해 얼어붙은 바위를 깨는 방식으로 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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