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7세(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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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VII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조
생몰년도
1211년 ~ 1242년 2월 12일
출생지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칼라브리아 마르티라노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212년 - 1217년
독일왕
1220년 ~ 1235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
어머니
아라곤의 콘스탄사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시칠리아 왕국 9대 국왕, 독일왕. 생전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와 갈등을 벌이다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편집]


1211년경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8대 국왕이자 독일왕 프리드리히 2세와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2세의 장녀 콘스탄사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모후 쿠스탄차 1세의 유언을 근거로 시칠리아 왕국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통일국가가 되면 교황령을 남북으로 압박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막고자 했다. 1212년 3월,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를 압박해 시칠리아 국왕으로 하인리히를 세우고 그가 아닌 콘스탄사가 섭정을 맡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신성 로마 황제를 자처하는 오토 4세를 타도하는 데 교황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1217년 인노첸시오 3세가 선종한 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독일로 불러들이고 자신이 도로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후 하인리히에게 스와비아의 행정을 맡겼으며, 1218년 슈바벤을 다스리던 체링겐가가 베르톨트 5세의 사망으로 단절되자 슈바벤 역시 관장하게 했다. 1220년 4월 2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로 독일왕에 선출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독일 제후와 주교들이 하인리히 7세를 세우기를 거부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그들이 자기 아들을 독일왕으로 선출하는 대가로 동전 주조와 통행료 부과, 요새 건설, 영주권 내에서 법정을 세우고 판결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등의 권한을 그들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을 제안하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 1세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던 황제의 권한은 많이 약해졌다.

122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시칠리아로 이동한 후, 쾰른의 대주교 엥겔베르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를 대신 맡았다. 1226년 엥겔베르트가 사망한 뒤 바이에른 공작 루프레히트 1세가 섭정을 맡았다. 당시 10대였던 하인리히 7세는 정책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당초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1세의 딸인 아그네스와 약혼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압력으로 1225년 11월 29일 뉘른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6세의 딸이자 7살 연상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마르가레테는 1227년 3월 28일 아헨에서 독일 왕비로 즉위했지만, 하인리히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1230년 레오폴트 6세가 사망한 후 지참금 지불이 늦어지는 것을 문제삼아 마르가레테와 이혼하고 아그네스와 재혼하려 했다. 하지만 성 갈리아 수도원장이며 하인리히 7세의 중요한 조언자였던 콘라트 폰 부스낭이 만류하자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간의 대립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1228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공작이 교황 편에 섰다. 이에 분개한 하인리히 7세는 그해 12월 25일에 직접 바이에른 정부를 장악하고 루트비히를 강제로 복종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 주교와 갈등을 벌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자유시 우선 정책을 이어받아 자유시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공작들은 이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권익이 침해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1231년 5월 1일, 귀족들은 보름스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자유시 선호 정책에 반대하는 법령을 공포하도록 강요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제후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자신을 중재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협력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아들이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한 몇 가지 규제들을 해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인리히 7세의 조언자 중 한 명이었던 슈바벤 백작 에기노 5세를 파면했다.

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화해하고 자신에게 선고했던 파문을 취소하게 한 뒤 하인리히 7세에게 치비달레에서 교황에게 복종을 맹세하게 했다. 같은 해, 하인리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의 카페 왕조 사이의 동맹을 갱신했다. 1233년, 하인리히 7세는 비텔스바흐 가문과 전쟁을 벌여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의 아들인 팔츠 공작 오토 2세를 굴복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일이 독일 제후들의 불만을 살 것을 우려해 아들에게 모든 인질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1233년 또는 1234년, 하인리히 7세는 스테딩겐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한 브레멘 대주교를 비난하는 칙령을 반포해 교회와 갈등을 벌였다. 이 십자군을 인정했던 그레고리오 9세는 하인리히의 칙령을 전해듣자 격분하여 하인리히를 파문했다.

어떻게든 교회와 화해하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이 자꾸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자 1234년 7월 5일 아들의 행동을 불법화하고 자신이 독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고 선포했다. 하인리히 7세는 이에 대응해 그해 9월 스와비아 귀족들과 독일 주교들을 집결시켜 동맹을 맺고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고,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롬바르드 연맹은 하인리히 7세의 구원 요청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사이 독일로 진군해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스와비아로 진격했다. 하인리히 7세는 스와비아에서 아버지와 대치했지만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대세의 흐름을 읽고 프리드리히에게 항복하자 어쩔 수 없이 1235년 7월 2일 아버지에게 귀순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35년 7월 4일 보름스에서 귀족들을 소집한 뒤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에서 폐위시키고 또다른 아들 콘라트 4세를 스와비아 공작이자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하인리히 7세는 폐위된 후 하이델베르크의 성채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스와비아의 부르크 알러하임 요새(Burg Alerheim)로 이송되었고, 나중에는 이탈리아로 끌려가 여러 요새를 전전했다. 1240년 멜피 인근의 로카 산 펠리체 성채로 이송되었다가 2년 후인 1242년 2월 12일 칼라브리아 마르티라노 성채로 옮겨졌다가 도중에 낙마하여 목숨을 잃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오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칼라브리아 코센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이 죽을 때까지 끝내 풀어주지 않은 것 때문에 자비심이 없는 냉혈한 아버지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던 2000년 이탈리아 연구팀이 시신을 조사한 결과, 하인리히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병은 당대인들에게 매우 불결하고 감염될 위험이 높은 질병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이 나병에 걸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아들의 유폐를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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