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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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리아(시칠리아).jpg
Maria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생몰년도
1363년 7월 2일 ~ 1401년 5월 25일
출생지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 우르시노 성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렌티니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377년 - 1401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
어머니
아라곤의 콘스탄사
배우자
마르티누 1세
자녀
피에트로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시칠리아 왕국 20대 여왕, 아라곤 왕국왕자비.


2. 생애[편집]


1363년 7월 2일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의 우르시노 성에서 시칠리아 왕국 19대 국왕 프리드리히 4세와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인 콘스탄사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에 시칠리아 귀족들을 소집한 뒤 마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콘스탄사가 1363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뒤,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 집단의 수장인 아르탈 달라고(Artal d’Alagó)가 대부가 되어 마리아를 보호했다.

1370년대 초, 밀라노의 군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프리드리히 4세 간에 이중 결혼 동맹이 논의되었다. 프리드리히 4세는 베르나보의 딸과 결혼하고, 마리아는 베르나보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이 결혼을 강행한다면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비준하지 않겠다며 위협했다. 오랜 전쟁에 피폐해진 시칠리아를 살리려면 어떻게든 나폴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기에, 프리드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었다.

1372년 8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 아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시칠리아의 고대 지명)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1377년 2월, 프리드리히 4세는 다시 마리아와 베르나보의 아들인 안토니오 비스콘티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1377년 7월 27일 프리드리기 4세가 딸의 결혼을 미처 성사시키지 못한 채 메시나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마리아가 시칠리아 여왕에 등극했으나 아르탈 달라고, 만프레도 치아라몬테(Manfredo Chiaramonte), 페랄타의 굴리에모(Guglielmo di Peralta),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Francesco Ventimiglia)가 시칠리아 섬을 사실상 4등분하여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고, 마리아는 우르시노 성에 틀어박힌 채 별다른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여왕의 대부 노릇을 하던 아르탈 달라고는 선왕이 생전에 추진했던 비스콘티 가문과의 결혼 협상을 지속했다. 1377년 가을,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조카인 베르투스 백작 조반니 갈레아스 비스콘티와 마리아의 약혼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이 이 소식에 분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력권에 속한다고 여긴 시칠리아가 밀라노와 결혼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요르카 남작 길라베르 드 크뤼엘레스(Gilabert de Cruïlles)가 이끄는 아라곤 함대는 시칠리아로 항해하려는 모든 배를 공격해 불태워버렸고, 베르투스 백작은 그런 그들을 두려워해 시칠리아로 감히 가지 못했다.

1378년 가을,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추안 왕자의 아내 마르타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를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 비올란테와 약혼했다. 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한편, 마리아 여왕은 우르시노 성에서 아르탈 달라고의 감시하에 있다가 1379년 1월 23일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에 의해 성에서 빠져나와 아우구스타로 이송되었다. 이후 리카타로 인도되었다가 다시 아우구스타로 옮겨진 그녀는 그곳에서 예전보다 훨씬 안 좋은 환경에서 억류된 채 아르탈 달라고와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의 내전을 지켜봐야 했다. 아우구스타가 아르탈 달라고의 군대에 포위되자, 굴리에모는 1382년에 여왕을 샤르데냐의 칼리아리로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아라곤으로 가서 신랑과 대면해야 했지만, 아라곤까지 가는 데 필요한 자금과 물자가 부족해서 칼리아리의 성채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칼리아리 총독 조반니 드 몽부이가 샤르데냐 섬의 주군이자 아라곤 왕인 페드로 3세로부터 그녀를 여왕이 아니라 수감자로 취급하라는 지시를 따르는 바람에, 그녀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얼마 안 되는 수행원과 함께 지내야 했다.

1386년 봄, 마리아는 비로소 칼리아리를 떠나 마요르카로 옮겨졌고, 얼마 안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미래의 남편과 대면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의 페드랄베스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1390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마르틴과 마리아의 결혼을 허가하면서 비로소 결혼식을 치렀다. 그녀가 이렇듯 아라곤에 억류된 사이, 시칠리아 왕국은 아르탈 달라고, 만프레디 치아라몬테, 굴리엘모 디 페랄타,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의 네 섭정의 지도를 받았다. 1392년 3월 22일 마리아가 장인 마르틴, 남편 마르틴과 함께 시칠리아에 돌아오자, 이 네 명은 마리아에게는 여왕으로서 충성을 맹세했지만 두 마르틴 부자를 섬길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마르틴은 그들이 자신과 아들의 집권을 받아들이게 하고자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고, 시칠리아는 수 년간 아라곤 왕국군과 시칠리아 귀족 사병대간의 전쟁에 시달렸다.

1398년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한 마르틴은 반란을 이끈 귀족 가문을 숙청하고 그들의 영지를 자신과 함께 한 카탈루냐 귀족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시칠리아 토착 귀족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1398년 초 아들 마르틴이 마르티누 1세로서 마리아와 함께 공동 왕으로 등극했고, 마리아는 1398년 11월 17일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로 지었지만, 아이는 1399년 성 요르요스의 날에 우르시노 성 예배당에서 프리드리히 대신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마리아는 갓난아기를 직접 기르고 싶어했지만, 아이의 성격을 강인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에게서 떨어뜨려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녀는 아이를 친히 기르지도 못하는 현실에 깊은 충격을 받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1400년 11월 8일, 시칠리아 왕실이 마상창시합을 지켜보던 중 창 하나가 날아오면서 피에트로의 머리를 가격했고, 피에트로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마리아는 절망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401년 봄 카타니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렌테니 성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역병에 걸려버린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5월 25일 새벽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 있던 장인 마르틴은 그해 6월 14일에 마리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아들에게 "마리아와 다시 관계를 맺어서 자식을 낳으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마리아의 유해는 렌테니의 카푸친 교회에 임시로 묻혔다가 나중에 카타니아 대성당으로 옮겨져 그녀의 조상인 프리드리히 3세의 묘지 인근에 안장되었다. 사후 남편 마르틴이 시칠리아를 단독으로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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