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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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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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8호
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
親臨光化門內勤政殿庭試時圖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 2가 2-1, 서울역사박물관)
분류
유물 / 일반회화 / 기록화 / 궁궐도
수량 / 면적
병풍 한틀(8幅)
지정연도
2001년 12월 31일
제작시기
조선 후기(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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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1]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1747년(영조 23년) 9월 19일에 영조경복궁 근정전 터에 직접 가서 정시 문과 생을 뽑고 시를 지은 일화를 그린 그림이다. 2001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받았다.


2. 상세[편집]


경복궁임진왜란 때 불탄 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 약 273년 간 빈 공간으로 있었다. 다시 짓기에는 재정도 많이 들 뿐 더러, 풍수 상 문제가 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왕들이 무작정 경복궁 터를 버려둔 것은 아니었고 조금씩 관리는 했다.

경복궁 터를 가장 많이 활용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근정전 터에서 여러 국가적 행사들을 많이 치렀다. 그 중에는 정시라는 과거 시험을 연 것도 있었다. 영조가 그때 근정전 터에 방문하여 합격생을 선발하고 "창업중흥만세법(創業中興萬世法)", "용준호거한양성(龍蹲虎踞漢陽城)"이라는 시를 읊은 뒤 입시한 신하들에게 시에 화답하라고 했다.# 저 그림은 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총 8폭을 병풍 하나로 합친 그림인데, 맨 오른쪽 폭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나머지 폭에는 글이 쓰여있다. 글의 내용은 저때 참석하여 영조의 시에 화답한 관리들의 시 및 인적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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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의 그림 부분[2]
그림 속 모습은 다음과 같다. 북악산 아래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그 밑에는 기단 위에 흰 천막이 쳐져 있고 붉은 의자가 놓인 근정전 터가 있다. 붉은 의자는 임금이 앉는 의자로, 영조가 저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조 본인은 그림 속에 없지만, 왕은 원래 어진 말고는 그리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이었다. 근정전 터 아래로는 마당에 쳐진 간이 천막과 드문드문 관리하는 이들이 머무는 건물이 보이며 군데군데 소나무가 있다. 제일 아래에는 돌로 만든 담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1칸 짜리 문 3개가 띄엄띄엄 있다. 영조 시기 기록에 '광화문'이 간혹 보이는데, 오늘날같은 육중한 궁성문이 아니고 저 문을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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