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뷰컨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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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존 스튜어트(뷰컨 백작).jpg
성명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생몰년도
1381년 ~ 1424년 8월 17일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 에이셔
사망지
프랑스 왕국 베르뇌유
아버지
로버트 스튜어트
어머니
무리엘라 키스
형제
로버트, 엘리자베스
아내
엘리자베스 더글러스
자녀
마거릿 스튜어트
직위
제2대 뷰컨 백작, 프랑스 무관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적했지만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1381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 에이셔에서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두번째 아내 무리엘라 키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로버트,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아버지 로버트 스튜어트는 첫번째 아내인 마거릿 그레이엄과의 사이에서 8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유일한 아들인 머독 스튜어트가 훗날 올버니 공작위를 계승했다. 1406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가 사망했을 때, 왕위를 물려받은 제임스 1세는 어렸던 데다 잉글랜드에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이에 왕국의 섭정을 맡고 있었던 아버지 로버트 스튜어트가 사실상 유일한 군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두번째 아내 무리엘라 키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에게 영지를 물려주기 위해 군도의 군주를 칭하고 있던 도널드 맥도널드와 갈등을 벌였다. 1411년, 도널드 맥도널드는 존 스튜어트를 위해 로스 백작령을 넘기려는 것에 반발해 국정을 농단하는 올버니 공작을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병했고, 양자는 1411년 7월 24일 할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양자 모두 큰 손실을 입었지만, 맥도날드가 먼저 철수했기에 올버니 공작은 승리를 주장했다. 그 후 올버니 공작은 북부로 공세를 개시해 맥도널드를 압박한 끝에 로스 백작령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1419년, 아버지 로버트 스튜어트는 프랑스 서부 도시 부르주에 본거지를 둔 샤를 도팽을 중심으로 한 아르마냑파를 도와 잉글랜드를 물리치기로 하고, 상당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1419년 10월, 존 스튜어트는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라 로셸에 상륙했다. 그들은 앙주, 메인, 투르 및 일드 프랑스 일대의 아르마냑파 요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21년 3월 21일, 존 스튜어트는 아치볼드 더글러스, 프랑스 장성 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와 함께 앙주에 쳐들어온 클라렌스 백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기 위해 출진해 루아르 강을 건너 보제 마을 인근에 숙영했다. 3월 22일, 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정찰을 나갔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토머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심문 끝에 아군이 보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토머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보제 전투에서, 그는 토머스가 섣불리 공격하느라 궁수병을 한 명도 대동하고 오지 않은 틈을 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역공을 가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토머스를 사살했다.

샤를 7세는 승 소식에 기뻐하며 스코틀랜드 장군들을 영주로 만들어줬다.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는 오비니쉬르네르 등지의 영지를 받고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되었고, 아치볼드는 롱그빌 백작에 선임되었고 던 쉬르 오롱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또한 24명의 스코틀랜드 궁수병을 "왕의 경호병"으로 삼았다. 다만 샤를은 잉글랜드군이 회복하기 전에 노르망디를 침공해야 한다는 뷰컨 백작의 조언에 병력이 아직 부족해서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방어에 전념했다.

1422년 8월 31일, 7년간 프랑스를 침략해 수많은 영토를 공략하고 정신병에 걸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를 공인받았던 헨리 5세모 공방전 도중에 걸린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형제인 베드퍼드 공작 존을 프랑스의 섭정으로 지명하고, 샤를 7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그 후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하면서,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샤를 도팽은 지금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력이 닿는 지역에 전령을 잇따라 보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 하니 프랑스를 구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남부 전역의 장정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고, 아라곤, 롬바르디아에서도 용병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이 용병들은 이미 프랑스에 와서 보제 전투의 승리에 공헌한 스코틀랜드군과 통합되었다. 1423년 여름,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방돔 백작 루이가 이끄는 8,000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오셰르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욘 강에 있는 크라방을 먼저 공략한 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베드포드 공작은 이 소식을 접하자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크라방을 구원하게 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아르투아의 본은 1,000명의 부르고뉴군을 파견해 잉글랜드군과 합류하게 했다.

이후 벌어진 크라방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완패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롬바르드인과 아라곤인이 먼저 대열을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프랑스인들이 뒤따라 도주했다. 반면 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도주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섬멸되었다. 특히 다리에 갇힌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몰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존 스튜어트 방돔 백작 루이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스튜어트는 한쪽 눈을 잃었다. 샤를 도팽은 생포된 장군들을 데려오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1423년, 존 스튜어트는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전달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기꺼이 프랑스를 돕기로 했다. 이후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6,500명을 이끌고 프랑스로 떠났다. 1424년 3월 7일 라 로셸에 상륙한 뒤 4월 24일 부르주에 도착해 샤를 7세의 영접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은 도팽 샤를을 지지하다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메인으로 진격하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이브리를 구하기 위해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드퍼드의 군대가 이브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존 스튜어트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도팽 샤를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 다르쿠르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베드퍼드 공작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두고 부르고뉴 부대를 다른 곳에 보낸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존 스튜어트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 다르쿠르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1424년 8월 17일에 벌어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고, 존 스튜어트는 아치볼드 더글러스, 제임스 더글러스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는 생전에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딸인 엘리자베스 더글러스와 결혼해 마거릿 스튜어트를 낳았다. 머거릿은 제3대 세턴 영주 조지 세턴과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더글러스는 존 스튜어트가 전사한 뒤 마르 백작 알락산더르 스튜어트의 아들인 토머스 스튜어트와 재혼, 제1대 케이스니스 백작 윌리엄 싱클레어와 삼혼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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