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숭(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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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추존 황제
태황제 | 太皇帝

출생
연대 미상
후한 예주 패국 초현
(現 안후이성 보저우시)
사망
193년
후한 서주 태산군
(現 산둥성 일대)
능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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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조(曹)

숭(嵩)
부모
양부 고황제
양모 고황후
배우자
태황후
자녀
6남

거고(巨高)
시호
태왕(太王) → 태황제(太皇帝)

1. 개요
2. 생애
3. 연의
4. 조숭은 하후씨인가?
4.1. 긍정설
4.2. 부정설
5. 태위직 1억전 매관매직
5.1. 세상이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5.2. 난세가 모든 것을 망치다
6.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인물.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의 아버지이며 고조 문황제 조비의 할아버지, 아내는 태황후 정씨. 자는 거고(巨高).

출생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이 때문에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는 조조가 전한 초창기의 상국 조참의 후손이라면서도 그의 아버지의 본말을 알 수 없다고 했다.[1]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다.


2. 생애[편집]


성품은 인정이 많고 후하면서 신중했고, 도처에서 충효가 있었으며, 사례교위가 되었다가 영제의 발탁으로 대사농, 대홍려를 지내다가 최열을 대신해 태위에 올랐다. 중평 5년(188년)에 태위직에서 파면되었다.

장개에게 살해당할 당시 재산을 실은 수레만 100여 대에 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말로 엄청난 부자였던 듯하며, 이 재산을 바탕으로 환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영제에게 서원전(西園錢) 1억 전을 바쳐 매관매직해서 태위직을 샀다. 태위가 비록 명예직이라지만 사도, 사공과 함께 삼공 중 하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러한 그의 엄청난 재산은 조조가 성공하는데 있어서 큰 뒷받침이 되었다.

동탁 집권 중 동탁이 서도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하며 낙양에 방화하여 초토화되자, 조숭은 도겸 치하의 서주 낭야로 떠나 전란을 피해 있었다. 그 후 초 지역을 안정시킨 조조가 부친 조숭을 모시고자 하여 조숭은 조조에게로 간다. 그러나 낭야에서 조조에게 가던 도중, 도겸이 보낸 부장 장개에게 태산군에서 아들 조덕 등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서주 대학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에는 두 가지 상반된 기록이 존재하는데 서주 대학살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나중에 손자 조비가 조숭을 태왕(太王)에 추존했고 증손자 조예가 황제가 된 후에는 태황제(太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숭의 묘는 사망한 낭야군 안에 있는 양도현에 쓰여졌는데 놀랍게도 제갈량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에서 아주 가깝다. 차편을 이용할 것도 없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사실 어린 소년이던 제갈량이 조숭의 죽음으로 일어난 서주 대학살을 겪으며 융중으로 이주 했다는 설이 있는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하지만 지금은 평탄화로 사라졌고 옛 지도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3.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진류로 와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얘기하자 조숭은 조조에게 위홍(위자)을 소개해주며, 조조가 연주를 차지할 때, 도겸이 잘 챙겨 조조에게로 보내주려고 했다가 호위무사로 붙여준 장개가 본래 황건적 잔당 출신이었던 본성을 드러내어 재물을 빼앗고 죽인 뒤에 도망가는 이야기로 그려지는데 작가는 조조가 여백사의 일가를 죽인 것에 대한 업보라고 평가한다.


4. 조숭은 하후씨인가?[편집]


정사 삼국지》 <무제기>의 배주에서 《조만전》의 조숭은 원래 하후씨로 조등의 양자가 되었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이 때문에 조숭을 하후씨라고 하는 것이나, 어쩌면 원래 조씨였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조조의 딸 청하공주가 나중에 하후돈의 아들 하후무와 결혼하는데 하후돈과 사촌지간이었다면 어느 정도 근친혼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이미 부계, 모계를 포함한 동성동본 결혼을 금지했는데, 조숭이 하후씨라면 이를 어긴 것이다.


4.1. 긍정설[편집]


진수가 동성동본의 혼인을 대놓고 쓸 수 없어서 조숭이 하후씨라고 쓰지 않고 그렇다고 이를 안 쓸 수는 없어서 <종실전> 대신 <제하후조전>을 마련해 하후씨가 위나라 종실임을 암시했다는 의견도 있다. 학자중에선 반미처럼 진수가 대놓고 조숭의 출생본말을 알 수 없다고 뭉뚱그려 놓은 다음 여러 하후씨와 조씨를 한 권으로 만든 것 자체가, 하후씨가 조위의 종실임을 드러냈다고 보는 측도 있다. 하후씨가 조씨와 인척관계에 있을 뿐이라면 굳이 위나라 황실의 종실들만이 들어갈 자리인 '<종실전>'을 따로 두지,[2] '<제하후조전>'이란 이름으로 하후씨와 조씨를 묶지 않았을 것이다.

손성은 조비가 하후돈의 죽음을 애도할 때 같은 성씨의 예법을 어겼다고 비판했다. 즉 조비와 하후돈을 동성으로 본 것이다.


4.2. 부정설[편집]


반대로 하후씨와 조씨가 서로 겹사돈을 맺었기에 진수가 이들의 열전을 한 곳에 묶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로 겹사돈을 맺을 정도로 끈끈한 가문이었고, 워낙 친밀한 인물들이기에 같은 열전에 묶었고, 그래서 마치 조조가 하후씨 아니냐는 소문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조조는 조인 등을 일족의 장수로 취급했지만 하후돈에게는 친구같은 신하라고 했을 뿐이다.[3]

또한 왕침 등이 쓴 《위서》에 따르면 조등은 조절의 막내 아들로 위로 백흥, 중흥, 숙흥이라는 를 가진 세 명의 형이 있었다고 한다. 조등은 환관이 되었지만 위로 세 명이나 되는 형들이 있고 그만큼 조카들이 많았을 것인데, 굳이 가까운 곳에서 자손을 찾지 않고 혈연도 없는 하후씨를 양자로 들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4] 물론 정황상 추측하는 것으로 사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아니며 조숭의 내면 등을 보고 일부러 혈연이 없는 조숭을 양자삼았을 수도 있다. 진수가 모르겠다고 한 것은 조숭의 내력이 아닌 출생이며 진수는 왕침의 《위서》에 있는 조숭의 내력에 대해 숨긴 적이 없다. 조숭의 양부가 조등이라는 사실은 <무제기>에도 나와 있는 기록이다. 일부 학자들은 조등에게 형제가 많았기에 조숭이 실제로는 조등의 조카였고, 따라서 조숭은 자연스레 숙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말은 곧 하후씨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단순히 조씨와 오래 전부터 친밀한 집안이며 실제 조조의 본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씨와 하후씨의 관계처럼, 중국사에서 단순한 인간관계가 혈통을 뛰어넘는 경우는 허다하다. 유비, 관우, 장비는 어린시절부터 서로 듣도 보도 못한 사이인데도 의형제를 맺은 후 죽을 때 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유비 그 자신도 성씨가 다른 구봉을 양자로 들여 유봉으로 개명시켰다.[5]

2013년 중국 상하이 푸단 대학교 연구진이 전한의 상국 조참의 후손들과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의 후손들, 하후돈의 후손들의 DNA를 비교한 결과 세 가문은 서로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상하이저널》 <조조 DNA 확정..다른 인물 연구>에 응용 일단 연구진은 조사 대상이었던 이들이 조조의 후손이 아닐 확률은 매우 낮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들이 정말로 조참과 조조, 하후돈의 후손인지는 별개의 이야기. 실제로 촉한 열조 소열제 유비의 후손이나 관우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각각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다 다르게 나온다. 단적으로 그 계보가 확실하다는 유럽귀족 가문의 DNA를 조사해봐도 모계 DNA는 맞는데 부계의 DNA는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계보와 달리 실제로는 불륜으로 인해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구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리처드 3세로, 실제 발견된 유해의 DNA조사 결과 부계 후손을 주장하던 이들은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 리처드 3세의 경우처럼 조조와 하후돈, 조참의 유해가 발견되어서 DNA를 직접 얻어서 확인하면 정확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엔 어려우니 중국의 연구도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했겠으나, 연구에 쓰인 방법이 애초에 2000여년 동안 계보대로 혈연이 유지되었을 거란 가정을 깔고 들어가기에 헛점이 많다.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나마 인정해주는 연구법일뿐 그 자체로는 신뢰도가 높은 방법이라 할 수 없는 셈. 연구대상들이 후손이 아닐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 또한 해당 연구법에 다른 변수를 상정하지 않았을 때나 성립하는 한계가 있다.

특히 나폴레옹 3세의 경우처럼 DNA를 논하는 것은 당대에 밝혀졌을때나 문제가 되지 먼 후대에 밝혀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쭉 그렇게 살았기 때문. 조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같은 가문임에도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이 섞였을 수도 있다.


5. 태위직 1억전 매관매직[편집]


영제 시기에 매관매직이 성행했는데 각 관직마다 정가가 정해져 있었다. 금액도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데 기준은 당시 통용되던 주화인 동전 기준이고, 은전으로 환산하면 1/100, 금전으로 환산하면 1/2000로 치환된다. 당연히 저 정도 자리에 오르려면 주화가 아닌 금괴로 지불했겠지만 일부러 금액이 많아 보이도록 하기 위해 동전으로 표기한 것. 더하여서 확실한 보증인만 있다면 가격의 일부를 후불하거나 신용카드 분할납부 같이 후불이 가능했다고 한다.

  • 태수 - 2,000만 전
매관매직을 하는 관직 중 삼공도 제끼고 가장 비싸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여러모로 다양하게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정말로 난세에 걸맞는 실용적인 이유였다. 자사 같은 작위는 사실상 명예직과 같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태수가 백성들을 가장 많이 착취할 수 있었다.

  • 삼공 - 1,000만 전
계급은 태수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수취를 할 수 없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보다 저렴했다. 그런데도 가격이 어느 정도 높은 이유는 관직의 품격과 위상에 따른 평가도 작용하였다.

  • 현령 - 400만 전
현령이 저렴한 이유는 착취할 수 있기는 하지만 고혈의 일부를 태수에게 헌납해야 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복불복이며 특히 악질 태수가 오면 뜯어먹는 것보다 뜯기는 게 더 많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관직이기도 했다. 유비가 조정으로부터 현령 자리를 맡게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령직을 버렸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관직을 사고팔며 작위를 이용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그 중 일부를 헌납해야하는 이러한 권력 구조에 회의를 느꼈던 것이 아닐까?[6]

조숭은 위에 언급했듯이 실속이 없는 명예직인 삼공, 그 중에서도 최하위인 태위 관직을 정가 1,000만 전의 10배인 1억 전을 주고 샀다. 그 와중에 더 높이 불렀어야 된다면서 후회하는 영제까지 나오니 그 장면만 생각해본다면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을 보여주면서 조숭의 어수룩한 바보성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돈으로 삼공 중에서 가장 직위가 높고 전한 시대의 승상의 대체관직 겸해서 만들어져서 어느 정도의 권력도 있는 사도 관직을 사거나 아예 실권이 있고 군사력 동원이 가능한 대장군 관직이라도 샀으면 바보 소리는 안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7]


5.1. 세상이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편집]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조숭이 단순한 바보짓을 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고 복합적인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실제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 때 사람들은 삼국시대(중국)과 같은 대혼란이 온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단지 십상시 정도만 제거하고 영제(후한)을 잘 보좌하며 그의 후계자를 제대로 키운다면 후한이 정상화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원소(삼국지)나 조숭의 아들 조조도 진짜 난세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등이 가문을 창업하고 2대째인 조숭이 해야 할 것은 가문의 명예를 높여서 환관가문이라던지 졸부라던지 하는 평가를 희석시키고 3대째인 조조 이후에는 명가의 반열에 올라가서 후한의 귀족계층으로 확실하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대삼공이라고 불리는 원소네 집안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에 따라 조숭은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가문의 영예를 높이려면 고위직을 역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삼공은 정상적인 황제가 다스리는 경우에는 조숭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얻지 못할 최고위직들이었다. 보통은 조숭이 중간정도의 직위를 역임하고 조조 때에 이르러서야 도전해볼만한 관직인 것이다. 이것도 매우 빠른 테크인데 황제인 영제가 관직을 매관매직한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조숭부터 삼공이 되고 조조가 2대로 삼공을 지내면 조조 아들들도 능력이 좋을 것이니 조비대에는 3대가 삼공이 되므로 원소네 가문처럼 최고위 가문은 아니겠지만 나름 알아주는 후한의 문벌귀족이 될 수 있다.

조숭의 경우에는 조등 덕택에 워낙 돈이 남아돌아서 죽기 직전에도 재보를 가득 실은 수레가 100여 대 있었다고 하니 절대로 무리한 지출을 하여 관직을 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수도인 낙양과 그 근처에만 있었고 실무를 모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귀찮거나 부담스러운 나머지 실권이 있는 태수나 사도직은 본인의 능력을 생각해서 마다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태수직이 비싼 이유는 실권이 있어 백성들을 착취해 막대한 재산을 쌓을 수 있어서인데, 조숭같은 부자 입장에선 '백성을 수탈할 수 있다'는 것은 별 메리트가 없다.

대장군 같은 관직은 실력도 있어야 하고 군사력을 다루기 때문에 돈 있다고 아무나 시켜주는 관직이 아니며 정치적인 능력까지 있어야 하므로 자기 아들인 조조급 능력이 있지 않으면 담당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논외대상이다.

정가보다 10배 주고 산 것도 나름대로 잘 한거다. 현직 황제에게 합법적으로 뇌물 주는 것과 마찬가지고 이를 통해 황제의 신임을 받으면서 태위직 산 것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희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영제의 사람됨을 보건데 정가 낸 후에 이런저런 이유로 더 뜯김을 당하느니 그냥 한번에 큰 돈 주고 사고 더 이상 말나오는 일이 없게 하는 것도 좋았다. 여기에 더해서 조숭처럼 어마어마한 부자는 정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뇌물을 질러 자신의 재력과 배포에 대해 과시 +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전략으로 쓸 수도 있다. 어차피 죽을때까지 돈이 남아도는 양반이었으니 말이다.


5.2. 난세가 모든 것을 망치다[편집]


하지만 실제 역사는 난세로 흘러갔고 조숭은 아무런 쓸모 없는 명예직에 거금을 낭비한 셈이 되었다.

차라리 태수자리를 사거나 대장군 밑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군직중 하나라도 매관매직했으면 조조에게 초반부터 무관직 + 정규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줄 수 있었고 만일 이게 되었다면 조조가 거병했을 때 더 빠른 창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조조 당대에 통일 및 선양이 정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아무런 정규 직함없이 돈만 가지고 병력을 대규모 동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18로 제후만 봐도 지방의 태수나 자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관직으로 정규군을 동원해서 동탁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조숭이 각종 미디어 믹스에서 바보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6.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숭/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이 때문에 조조가 조참의 후손이라는 내용도 '손견이 손자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서술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게 되었다.[2] 촉한은 유비의 아버지 유홍이 일찍 죽은데다가 유비의 숙부인 유자경이나 그를 후원해서 노식 문하에서 수업을 듣게 해준 친척어른인 유원기 정도 외에는 다른 형제나 친척 등이 있다는 기록이 없어 마땅히 종실이랄 사람이 없어서 '<종실전>'대신 '<이주비자전>'으로 유비의 가족들을 분류했고, 동오에는 '<종실전>'이 있어서 손권의 작은아버지와 사촌 형제 및 그 자손의 전을 묶어두고 있다.[3] 혈육관계가 어땠든 간에 조조에게 하후돈은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조조의 침실 (즉 군주가 완전히 무방비인 상태)에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조조는 친척인게 확실하고 능력도 뛰어난 조인보다 하후돈에게 더 높은 직위를 줄 정도로 하후돈을 신임했다. 거기에 겹사돈까지 있으니 이것만으로 하후돈은 조조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란 걸 알 수 있다. 즉 열전을 같이 묶었다는 것만으로 친척이란 근거로 쓰긴 어렵다는 것이다.[4] 실제로 이런 식으로 가계를 잇기 위한 양자를 들이는 경우는 보통 친척 중에 양자를 들이는게 일반적이었다. 원소 역시 원봉의 친자식이자 얼자였지만, 원봉의 형 원성이 요절하자 삼촌의 가계로 입적되었다. 원소 역시 자신의 눈밖에 난 장자 원담을 형의 아들로 입적시켜 조카 취급을 했다. 즉 조숭의 세 형이 모두 아들이 없지 않은 이상, 굳이 조카들을 두고 혈연이 없는 하후씨의 후손을 양자로 들이는 경우는 일반적이진 않다.[5] 유봉의 경우는 모친이 한의 황족인 유씨였다.[6] 참고로 소설 《포청천》에서도 포청천이 현령으로 공무원 일을 시작했는데 뇌물을 안 바쳐서 괘씸죄로 승진을 못 한 걸로 되어 있다. 이게 그저 소설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울 개연성이 상당히 높은데, 50대 후반까지 중상급 관료 정도의 5품에 머물다가 송인종에 의해 한번에 3품으로 승진한 후 개봉부윤(수도의 시장)에 특별 발탁되기 때문이다.[7] 전한 시기 삼공은 승상, 어사대부, 태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태위직은 공석이 되고, 승상직도 실질적인 권한을 외척들이 임명되던 대장군에게 빼앗기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가 후한 시기 사도, 사공, 태위로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후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상국' 관직을 부활시켰고, 조조가 화북을 평정한 이후 승상직을 부활시켜 조정의 일을 좌지우지하였다.

[[분류:19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