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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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李快大 | Lee Qoede


파일:이쾌대화가.png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913년 1월 16일
경상북도 칠곡군 상지면 상지리
(現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 39번지)[2]
사망
1965년 2월 20일 (향년 53세)
직업
화가
학력
신동공립보통학교 (전학)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데이코쿠미술학교
배우자
유갑봉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주요 작품
파일:이쾌대자화상.jpg
파일:2021041210475387075_l.jpg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부녀도

대한민국 근대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 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강렬한 서사시적 에너지를 표현한, 한국 사실주의 미술의 뿌리.

인물을 위주로 현시대의 상황을 주제로 두는 그의 작품에서 르네상스 화풍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절묘한 응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서양의 고전적인 기법으로 인체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듯 하면서도, 수묵화와 비슷한 필법으로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입체적인 명암은 자제되고 전체적으로는 그림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서양과 동양의 기법을 혼합하여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특유의 한국적 리얼리즘을 탄생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1913년 1월 16일 경상북도 칠곡군 상지면 상지리(現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 39번지)에서 아버지 이경옥(李敬玉)의 2남 4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선형(李善炯)은 일찍이 금부도사를 지냈고, 1890년(고종 27) 나이 80세가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후 1903년(고종 40) 중추원 의관(議官)에 임용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군수를 지내고 삼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자였다. 1만 6000여㎡(5000평)에 이르는 그의 에는 교회, 학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향의 신동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0살 때 대구부로 올라와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現 대구수창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28년 상경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야구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 부모님이 야구 빼고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더니 뜻밖에 미술을 선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때부터 화가가 되는 꿈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서양화가 '장발(張勃)'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데뷔하였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유갑봉과 결혼식을 올렸고,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 후 일본에서 둘은 단란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이쾌대는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고,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여성상으로 변화하였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이과전'에 〈운명〉을 출품해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하였다. 1941년 동경에서 이중섭, 진환, 김학준, 김종찬, 최재덕,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서양화에 전통회화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했다. 특히 그림 속 주인공의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고심했다. 전통에 대한 관심은 기생·지게꾼·김치 담그는 여인 등 조선 풍속과 더불어 부여·군산·금강산 등의 명소, 무열왕릉·고구려 고분벽화 등 고대 유적이 담긴 엽서를 수집하고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다가 스스로 이탈하였다. 1947년 ‘진정한 민족예술의 건설’을 표방하면서 김인승, 조병덕, 이인성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1949년까지 4회의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여 대한민국 화단에 큰 영향 끼쳤는데, 이 때 시대의 역작 '군상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이 뒤틀어진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이다. 만삭인 아내를 두고 갈 수 없어 서울에 남았다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김일성, 스탈린이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서울 수복 때는 반대로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1953년 포로 교환 때 월북했는데 가족이 있는 고향 남한 대신 북한을 선택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서울에서의 초상화 강제부역과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에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또한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하다.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거제수용소에서 부인 유갑봉에게 보낸 편지.

북한에서는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삼일운동〉을 발표하고, 전국미술전람회에 〈농악〉을 출품하였다. 1958년 월북화가 김진항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 우의탑에 벽화를 제작하였고, 1961년에는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해 2등상을 받았다. 먼저 월북한 친형 이여성(李如星)도 북한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하다가 숙청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쾌대도 역시 53세인 1965년 위천공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3. 기타[편집]


  •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작가 작품에 대해 해금조치가 되기까지, 30년간 부인과 자식들은 이쾌대의 그림을 지켜왔다. 남편의 월북 이후 서울에서 포목점을 하며 자식들을 키운 유갑봉씨는 그림을 팔라는 수집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작품을 경찰에게 압수당할까봐 신문지에 둘둘 말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손상된 그림은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미술을 전공한 막내아들(이한우)이 복원해서 관리했다고 한다.

  • 이쾌대는 화가 김창열스승이다. 한 인터뷰에서 김창열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실끈기를 배웠지. 정말 존경했거든. 물방울 그리면서 선생님 영향을 내가 많이 받았구나 생각해. 우리 누가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그림 그리나 내기하자 그러셨다고. 선생님이…” #

  • 그가 현실과 시대 정신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였는가는, 도상봉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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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42세 건(鍵)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형 이여성(李如星)의 본명이 이명건(李命鍵)으로, 항렬자를 썼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