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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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의 왕녀
권한의 처 이영수 | 權鷴의 妻 李靈壽

본명
영수(靈壽)
출생
1502년(연산군 8년)
사망
미상
본관
전주 이씨
부왕
연산군
생모
숙용 장씨
남편
권한(權鷴)
자녀
미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연산군숙용 장씨의 딸로 중종반정 이후 권한(權鷴)에게 시집을 갔다.
《연산군일기》에는 靈壽로 《중종실록》에는 靈壽, 寧壽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편집]


《왕녀영수태지》와 《연산군일기》를 보면 1502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1][2]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3][4]

5살 때, 중종반정이 일어났기에 옹주 작위를 받지 못했으며 연산군의 아들들과 달리 어린 딸이기 때문인지 사사당하지도 어머니 장녹수와 함께 연좌되지도 않았다.

1517년, 1518년에는 이복자매인 이함금(李咸今)과 함께 재산을 받은 기록이 있다.[5][6]

1529년에 서자(庶子)인 권한에게 몰래 시집간 것이 알려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7][8] 이 때문인지 혼인할 정도로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록》에서 연산군의 딸은 구문경의 처신거홍의 처 2명만 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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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2]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靈壽)라고 했다. -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기사》[3] 명하여, 의원(醫員) 박계선(朴繼善)에게 1자급(資級)을 더하게 하고, 은대(銀帶)를 내렸다. 장 숙용(張淑容)의 딸 영수(靈壽)가 마침 염질(染疾)되었는데, 계선으로 하여금 고치게 하여 나았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 《연산 11년 9월 4일 을유 1번째기사》[4] 전교하기를, "영수(靈壽) 아기가 구수영(具壽永)의 집에 있으면서 천연두(痘瘡)가 차차 나아가니, 수영에게 쌀 50석과 안장을 갖춘 말 한 필을 내리라." 하였다. -《연산 12년 3월 21일 신축 3번째기사》[5] 예조에서 폐주가 아끼던 장녹수와 정금이 낳은 자식들에게 집, 노비 그리고 밭을 내려주고 선원록에 올리도록 아뢰다. -《중종 12년(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9월 1일 (갑술)》[6] 영수·함금에게 노비 15구와 가사 1좌 전지 15결을 하사하라고 명하다. -《중종 13년(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1월 17일 (정사)》[7] 헌부가 권한(權鷴)을 형장 추문(推問)한 공사(公事)를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예(例)가 아니기에 아룁니다. -《중종 24년(1529년 명 가정(嘉靖) 8년) 6월 1일 (갑자)》[8] 일반 왕족도 양반과 달리 첩 뿐만 아니라 천민 여성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도 왕족(혹은 양반)으로 간주했는데, 비록 폐위되었지만 왕의 딸이였던 이영수는 서자에게 시집갈 수 없었다. 비슷한 예로 양녕대군의 서녀 이구지가 남편 사후 천민 남자와 재혼해서 딸까지 얻은 것이 문제가 되어 사형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