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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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時言
1557년(명종 12) ~ 1624년(인조 2)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중(季仲).
조선 제2대 정종의 6번째 서자 진남군의 5대손이다.
2. 생애[편집]
1557년(명종 12)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덕천군수(行德川郡守:종4품)을 지낸 이의경(李義卿)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이신언(李愼言)·이심언(李審言)과 누이 한 명이 있었다. 충의위(忠義衛)로 복무하다가 23세 되던 1579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병과 6위로 급제했다.
1589년에 이산해의 천거로 오위(五衛)의 사용(司勇:정9품)에 등용되었으며 이후 사과(司果:정6품)에 오르고 1592년에 상호군(上護軍:정3품)으로 승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황해좌방어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경주 전투에서 활약함으로서 가선대부로 올라갔다. 1594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6년에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였다. 명군의 울산성 전투를 지켜보면서, 마귀가 거느리던 몽골인 용병 달자(㺚子)에 머리가 깨져 도망가는 왜군을 보고 '일본군이 마치 조선군이 도망가듯이 도망가는구나'(麻貴所率㺚子二百餘名,皆持環鞭,亂打如雨疾雷,不及掩耳,銃筒亦不暇放.賊兵之走,亦如我國人之走)' 하고 자조적으로 평가한 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의 후임으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1] 이어서 경상우수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5년에는 함경도순변사, 1610년에는 공조판서에 올랐다. 1618년에 전흥부원군에 봉해졌고 훈련대장도 지냈다. 이시언이 그러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을 둘러싸고 남이공과 김신국이 반대했다. 그래서 사태 수습을 위해 정인홍과 유영경이 토론 배틀을 벌였으나 서로 합의가 안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정인홍이 중심이 되고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이 이끄는 대북과 유영경이 중심이 되고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끄는 소북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시기에는 대북과 소북이 권력을 나누다가 1623년에 인조반정이 터졌다.
반정 직후에 서인과 남인은 북인에 대해 2가지로 나눴는데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했거나 유배간 북인은 살려졌지만 북인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재기하면 반드시 서인과 남인의 권력이 견제당할 것이라는 미명 아래,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 정인홍, 류희분이 목숨을 잃었고 의병 모집을 시도 했던 박승종은 이미 궁궐이 점령되었고 임금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처벌 직전에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 유몽인은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하고 박홍구는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이 되면서 처형되었다. 한편 이시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을 거치는 격동기 동안에 광해군의 정책에 협조하였다는 추정을 근거로 광해군 측근 세력으로 간주되면서 결국에는 중북의 원로 기자헌을 비롯한 여러 북인 정치범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정기룡(소설)에서는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며 타 장수의 공적을 탐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징비록(드라마)에서도 29회 엔딩쯔음에 류성룡이 소서행장 생포를 지시할 때와 30회에 도주하는 소서행장 잔적들을 소탕할 때 매복해있다가 공격하는 장면으로 등장. 역임했던 황해좌방어사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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