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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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00px-Johann_Tserclaes_Tilly.jpg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보헤미아 전역
2.3. 독일 전역
2.4. 덴마크와의 전쟁
2.5. 마그데부르크 학살
2.6. 스웨덴과의 전쟁과 최후



1. 개요[편집]


독일어: Johann t'Serclaes Graf von Tilly
네덜란드어: Johan t'Serclaes Graaf van Tilly
영어: 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프랑스어: Jean t'Serclaes de Tilly
1559년 2월 ~ 1632년 4월 30일

30년 전쟁 시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의 명장이자 충신. 예수회 수도자들에게 길려져서 "갑옷을 입은 수도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이 대단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보헤미아 전역, 독일 전역,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하며 제국을 수호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경계해 숱한 마찰을 빚었고 마그데부르크 학살을 막지 못해 맹비난을 받았으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대패하고 전사했다.

한줄로 요약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신이요 틸리 백작 자신만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1559년 2월 1일 현재의 벨기에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니벨 근교의 틸리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영주 가문이었다. 쾰른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은 뒤 15세에 스페인군에 입대했다.

이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휘하에서 네덜란드의 반란 진압에 참여해 1585년 안트베르펜 공방전에 참가해 스페인군이 안트베르펜을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594년엔 오스트리아오스만 제국 원정에도 참가했으며, 1600년 헝가리 왕국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고 빠르게 출세하여 5년만에 육군 원수의 직책에 올랐다.

1606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났고, 프라하에서 루돌프 2세를 섬기다가 1610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바이에른의 가톨릭 동맹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지명되었다. 체르클라에스는 바이에른군에게 머스킷 총병의 지원을 받는 스페인식 장창보병 밀집대형인 '테르시오(Tercio)를 훈련시켜 가톨릭 동맹군의 핵심 전력으로 길러냈다.


2.2. 보헤미아 전역[편집]


1618년, 보헤미아 왕국에서 신교도 귀족들이 보헤미아 국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톨릭 강요 정책에 반발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반란에 동조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수도 을 포위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체르클라에스에게 반란 진압을 부탁했다. 이에 체르클라에스는 카톨릭 동맹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반란을 속전속결로 진압하고 부쿼이 백작 샤를 보네벤튀르가 이끄는 황제군과 합류하여 보헤미아로 진군했다.

체르클라에스는 보병 18,500명과 기병 6,500명으로 이뤄진 가톨릭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의 서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 후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진격했다. 이에 보헤미아 반란세력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연합군은 라코니츠에 주둔해 그들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체르클라에스는 라코니츠의 적과 정면대결하기보다는 우회하여 프라하로 진군하는 길을 택했다.

신교도 군대는 프라하로 진군하는 가톨릭 동맹군에 맞서 안할트-베른부르크 공작 크리스티안 1세가 이끄는 2만 5천명의 군대를 프라하 근교의 요충지인 빌라호라(Bile hore, 백산)에 배치해 방어에 나서게 했다. 빌라호라는 우측에 수렵용 요새가 있고 좌측엔 얕은 강이 흘렀고 전방엔 습지대여서 수비하기에 매우 용이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본래 신교도군과 함께 싸우기로 약속했던 용병대장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백작이 봉급 지급이 연체되었다는 이유로 이탈하면서 신교도군의 숫자가 15,000명까지 줄었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춥고 습한 날씨로 괴로워했다.

1620년 11월 8일, 가톨릭 동맹군의 소규모 부대가 개울을 건너 신교도군의 측면을 정찰했다. 이에 신교도군은 적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에 놀라 물러섰다. 이걸 본 체르클라에스는 부쿼이 백작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휘하병력을 일제히 도하시켰다. 부쿼이 백작 샤를 보나벤튀르는 체르클라에스의 독단 행동에 반발했지만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가 체르클라에스를 전적으로 지지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또한 병력을 도하시켜 전투에 합류했다.

체르클라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은 테르치오 진형을 구축하고 언덕에서 농성하는 적을 향해 일제히 진군했다. 크리스티안 1세는 아들 크리스티안 2세에게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치게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가톨릭 동맹군 기병대에게 수적 열세로 밀려 패퇴했다. 바이에른군이 신교도군의 포격에도 굴하지 않고 진군하자 신교도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란실바니아 경기병들이 도망치면서 보급품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신교도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붕괴되었고 4천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가톨릭 동맹군의 손실은 700명에 불과했다.

며칠후 가톨릭 동맹군이 프라하로 향하자 프리드리히 5세는 도주했고 프라하는 곧 함락되었다. 프라하를 장악한 체르클라에스는 반란의 주모자 27명을 처형하고 나머지 참가자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후 그는 팔츠로 도망친 프리드리히 5세를 추격했다.


2.3. 독일 전역[편집]


체르클라에스의 진군에 놀란 신교도 연합 제후들은 하이델베르크에 집결하여 제국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1621년 초,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용병 부대가 라인 강을 건너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휘하의 용병 군대와 합류해 팔츠를 수비하려 했다. 여기에 브라운슈바이크의 '광인(狂人)' 크리스티안이 파더보른 주교 영지를 미친듯이 약탈해 막대한 자금과 식량을 확보하고 만스펠트에 합세하러 남진했다.

체르클라에스는 이 연합군에 맞서 1622년 4월 밍골스하임에서 만스펠트-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에 그는 빔펜으로 퇴각해 2만여 스페인군을 이끌고 있는 곤잘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반면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는 다음 목표와 행동에 대해 의견을 모으지 못했고, 만스펠트는 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프리드리히를 내버려두고 본진으로 후퇴했다. 결국 5월 6일, 체르클라에스와 코르도바가 이끄는 가톨릭군은 빔펜에서 프리드리히의 신교도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코르도바는 만스펠트를 추격했고 체르클라에스는 팔츠를 점거했다.

이후 1622년 7월, 체르클라에스는 회히스트에서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크리스티안을 크게 격파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틸리 백작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틸리 백작은 그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호칭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체르클라에스는 팔츠 선거후 프리드리히 5세와 함께 네덜란드로 도주하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슈타트론에서 따라잡아 대승을 거뒀다. 크리스티안 군 15,000~20,000명 중 2,000~6,000명만 네덜란드로 무사히 도주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한 9월엔 6주간의 공성전 끝에 하이델베르크를 함락시켰다.


2.4. 덴마크와의 전쟁[편집]


162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영주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팔츠 영지를 하사하고 선제후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그러자 홀슈타인 공작의 지위를 겸하고 있었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1626년 신교도 세력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군사를 일으켰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에 맞서는 군대를 파견해야 했지만 자신에겐 그럴 군대가 없었고, 덴마크와의 전쟁 마저 바이에른 공작과 체르클라에스에게 의존할 경우 바이에른 공작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또한 체르클라에스가 이끄는 군대 만으로는 덴마크, 만스펠트 신교 연합군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벅차다고 여겼지만, 추가 병력을 편성하기엔 재정이 바닥났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보헤미아의 용병대장이자 프리틀란트 공작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황제에게 접근했다. 그는 점령지에서 세금을 자유롭게 거둬들이는 조건으로 황제의 별다른 지원 없이 24,000명의 부대를 편성해주겠다고 제의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발렌슈타인을 황제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발렌슈타인은 황제의 대리로서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장군보다 상위에 놓이는 지위를 수여받았다. 심지어 체르클라에스마저도 지위상으로는 그의 휘하였고, 단지 카톨릭 동맹의 우두머리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만이 발렌슈타인과 동등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자 체르클라에스는 발렌슈타인에게 경계심을 품었고, 발렌슈타인 역시 체르클라에스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고 그가 더이상 명성을 쌓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1625년 10월과 11월, 발렌슈타인은 할버슈타트-아셔스레벤 지역에서 황제군을 소집한 후 체르클라에스를 만나 앞으로의 게획을 상의했다. 그 결과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은 만스펠트의 군대를 상대하고 체르클라에스의 가톨릭 동맹군은 덴마크군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상대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틸리는 먼저 크리스티안을 공격했고 크리스티안은 헤세 방백령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틸리의 집요한 추격을 받자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다.[1]

1626년 4월, 만스펠트가 이끄는 용병대는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에게 완패했다. 그후 그들은 남쪽으로 도주하면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크리스티안 4세는 남하하여 체르클라에스가 지휘하는 가톨릭 동맹군을 공격했다. 체르클라에스는 덴마크군의 숫자가 아군보다 우세하자 발렌슈타인에게 지원병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냉정하게 거부하다가 요한 폰 알트링겐의 분견대 5천명을 체르클라에스에게 넘겨준 후 만스펠트를 추격했다.[2]

아무튼 알트링겐의 분견대가 체르클라에스의 가톨릭 동맹군과 합류하면서, 덴마크군은 수적인 열세에 놓였다. 게다가 독일 신교도 제후들의 비협조로 인해 보급난을 겪게 되면서 덴마크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다. 크리스티안 4세는 후퇴를 고려했지만 비가 내리는 바람에 길이 진창으로 변하여 후퇴로가 막혀버렸다. 결국 크리스티안 4세는 1626년 8월 26일 체르클라에스와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아침 루터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덴마크군은 이 전투에서 22문의 대포 중 단 2문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 체르클라에스의 군대는 12문 대포를 전부 사용할 수 있었다. 사기가 매우 떨어진 덴마크군이 폭우가 내리는 상황에서 대포 및 탄약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반면, 체르클라에스는 대포 관리를 철저하게 수행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톨릭 동맹군은 테르시오 진형을 편성한 채 대포의 엄호를 받으며 일제히 진격했고 덴마크 보병대는 적의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러 무너졌다. 그러자 체르클라에스는 기병대에게 돌격을 명령했고, 그때까지 굳건히 버티며 적의 돌격을 저지하던 덴마크 기병대 마저 적군 기병대에게 패해 도주했다. 덴마크군은 거의 6천명이 전사하고 2,500명이 넘는 병사들이 붙잡히는 피해를 입었고, 크리스티안 4세는 타고 다니는 말을 4마리나 잃어버렸으나 근위 기병대의 헌신적인 호위 덕분에 간신히 도주했다. 이후 덴마크는 만스펠트의 잔여 세력을 섬멸하고 북진한 발렌슈타인의 대군의 공세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1629년 5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해 홀슈타인 공작령, 슐레스비히 공작령, 유틀란트 반도를 되돌려 받는 대가로 전쟁에서 이탈했다.

1630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지 않으면 그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선출하지 않겠다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를 비롯한 선제후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발렌슈타인을 총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켰다. 한편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덴마크의 패전으로 독일의 신교도 세력이 위태로워지고 스웨덴의 안보마저 위험해지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1630년 7월 4일 우제돔 섬의 북쪽에 있는 페네뮌데에 13,000명의 병력과 함께 상륙했다. 이에 페르디난트 2세는 체르클라에스에게 작전 지휘를 맡겼다. 체르클라에스는 황제군의 기병장군 고드프리드 하인리히 파펜하임과 함께 구스타브에게 호응한 마그데부르크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서 초대형 사건을 초래하고 만다.


2.5. 마그데부르크 학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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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데부르크의 처녀들. 1866년 Eduard Steinbrück 작.

1631년 3월 20일, 가톨릭 동맹군은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다. 이때 체르클라에스는 다른 곳에서 작전을 지휘했고 고드프리드 하인리히 파펜하임이 마그데부르크 공방전을 지휘했다. 2달간의 포위공격 끝에, 가톨릭 군대는 도시 요새의 여러 곳을 장악했다. 이에 체르클라에스는 마그데부르크 수비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도시 수비군은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체르클라에스에게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요청이 체르클라에스에게 닿기 전인 5월 20일에 도시가 완전히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그데부르크는 지상에 강림한 지옥으로 전락했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스페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이탈리아 반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용병들은 부유한 도시로 유명한 마그데부르크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오전 10시 경 도시의 대부분이 불에 탔고 수많은 희생자들이 질식사하거나 화상으로 사망했으며 도시의 건물 1,900여 채 중 1,700채가 파괴되었다. 또한 병사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수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여성들을 모조리 강간했다. 2만 5천여 주민중 오직 5천명만 살아남았고 그을린 시신들은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엘베강에 버려졌다. 이러한 학살극은 5월 24일에 이를 알게된 체르클라에스가 약탈 중단을 명령한 후에야 중단되었다.

이 마그데부르크 학살은 체르클라에스의 경력에서 가장 큰 논란을 야기한 사건으로, 역사가들은 그가 이 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체르클라에스의 적들은 재빨리 그를 비난하면서 "그가 대학살을 명령했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 마그데부르크 학살을 들먹였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그가 도시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강 유역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스웨덴과의 다가오는 전투를 위한 지원 기지로 필요했다. 이때문에 여러 역사가들은 "체르클라에스처럼 노련한 지휘관이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마그데부르크 학살이 벌어지고 있을 때 도시의 아이들은 줄을 지어 서서 마르틴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아이들은 곧 병사들에게 학살되었는데, 체르클라에스가 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지시했는지의 여부는 오늘날까지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체르클라에스가 학살 명령을 내렸는지는 불확실하더라도 그가 학살을 자행한 병사들과 현지 지휘관 파펜하임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마그데부르크가 철저하게 파괴되는 와중에 살아남은 성당에서 가톨릭 미사를 드려 신교도들을 자극시켰다. 이후 그는 '마그데부르크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2.6. 스웨덴과의 전쟁과 최후[편집]


1631년 9월 17일, 체르클라에스는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인근의 브라이텐펠트에서 스웨덴-작센 연합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그는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해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3만 5천중 2만 7천명의 희생을 내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채 도주했다. 체르클라에스는 발렌슈타인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황제군에 대한 일체의 지원도 하지 않던 발렌슈타인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이에 체르클라에스는 스웨덴군이 레흐강을 건너 바이에른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레흐 강 전투 초기 다리에 입은 상처가 악화되면서 15일 만인 1632년 4월 30일에 잉골슈타트에서 병사했다. 향년 73세. 그의 시신은 바이에른의 알퇴팅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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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크리스티안은 북부 독일 신교도 영지를 돌아다니며 지원병을 모집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실의에 빠지다가 1626년 6월 16일에 2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때 발렌슈타인은 체르클라에스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고 "병력이 필요하다니 넘겨준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는 훌쩍 떠났다고 한다. 체르클라에스의 부하들은 그런 발렌슈타인의 오만을 비난하는 기록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