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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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1. 2011-12시즌
3.2. 2012-13시즌 : 안식년
3.3. 2013-14시즌
3.4. 2014-15시즌
3.5. 2015-16시즌
3.5.1. 충격과 공포의 불법도박 혐의
3.5.2. 20경기 출장 정지를 마치고 복귀 이후
3.6. 2016-17시즌
3.7. 2017-18시즌
3.8. 2018-19시즌
3.9. 2019-20시즌
3.10. 2020-21시즌
3.11. 2021-22시즌
3.12. 2022-23시즌
4.1. 2023-24시즌



1. 개요[편집]


농구 선수 오세근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여타 농구 선수들에 비해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 동인천중 2학년 때, 길거리 농구 대회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농구부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 그 때서야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결국 부족한 기본기 때문에 1년을 쉬면서 유급해 기본기를 먼저 익혔고, 이 때문에 중앙대의 무적전설을 쓴 다른 동기인 함누리, 김선형보다 한 살 더 많게 되었다. 안남중으로 전학을 가서 농구부에 들어가 활약하기 시작해 제물포고 때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아마 농구 무대, 특히 대학 무대를 평정했는데 대학 입학 예정자 신분으로 참가한 2006 농구대잔치에서 프로 식스맨들이긴 했지만 프로 선수가 지키는 상무의 골밑을 상대로 21점에 25리바운드를 잡아내는 괴물같은 실력으로 이미 대학 무대의 레벨을 넘어선 선수임을 입증했다. 결과적으로 대학 무대에서 오세근을 잡을 선수는 아무도 없었고, 동기인 김선형, 함누리와 함께 중앙대가 대학 농구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52연승을 기록하는데 주역 중의 주역이었다.

심지어 졸업반인 2010년 대학리그에서는 상명대학교 상대로 14점 18리바운드 13어시스트 10블록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초의 쿼드러플 더블의 대기록을 달성했다.[1] 오세근이 중앙대학교에서 재학하는 4년간 중앙대가 아마 무대에서 진 경기는 단 여섯 번에 불과할 정도다. 이런 괴물을 두고 모든 팀들이 침을 질질 흘렸고, 탈 아마 무대의 실력을 과시하는 그의 조기 프로 진출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학 입학 조건이 4년을 모두 채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아마 무대에서 4년을 뛰고서야 데뷔할 수 있었다.[2] 하다못해 역대급 개망작이었던 09 드래프트에는 나왔어야 했다


3. 안양 KGC인삼공사 시절[편집]



3.1. 2011-12시즌[편집]


2011년 드래프트에서 로터리 픽을 가진 4팀 모두 1픽은 무조건 오세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중 1픽의 영광을 얻은 것은 전년도 8위였던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3] 1픽이 나오는 순간 이상범 감독은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주희정김태술과 바꾸면서 시작한 인삼공사의 대규모 리빌딩이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이상범 감독은 1픽을 얻기 위해 픽 뽑기 운의 황제(…) 허재 감독을 찾아가 허재의 기운을 얻기 위해 손을 잡았다고(…).[4]

오프시즌 동안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제대로 팀 훈련을 소화하지 못해 손발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데뷔부터 완전히 KBL 무대의 괴수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상 인삼공사는 외국인 선수를 두 명 쓰는 것과 다를 것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외국인 선수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몸싸움과 골밑 지배력을 보여주며, 김태술, 박찬희, 이정현, 양희종 등과 함께 초호화 멤버를 구축하며 인삼공사를 단숨에 우승 후보로 탈바꿈시켰다. 심지어 기존 외국인 선수인 로드니 화이트가 부상으로 이탈한 이후 대체 외국인 선수 위긴스가 엄청난 잉여력(…)을 뽐내고 있음에도 팀의 변함없는 연승행진을 이끌고 있다. 유례없이 뛰어난 신인들이 많이 나온 2011-12시즌이지만, 그 중에서 신인왕은 오세근이 유력하고 신인왕을 넘어 시즌 MVP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 김선형, 최진수 지못미 2011/12 시즌의 스탯은 52경기 출전 평균 15.0득점, 8.1리바운드, 1.5어시스트, 1.5스틸, 1.3블록으로 대형 신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5]

PO에서 kt 상대로 평균 13.8점 9.0 리바운드로 활약하면서 팀을 KBL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다. 이대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그야말로 자신이 왜 한국 농구의 차세대 기대주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매치업 상대인 김주성을 압도하면서 골밑을 장악, KBL 챔피언결정전 6경기에서 평균 17.5점 5.3 리바운드로 활약하면서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세근은 KBL 역사상 첫번째로 신인으로 챔피언결정전 MVP가 되었다. 물론 정규리그 때는 오세근을 잘 막으며 여전히 KBL 골밑의 지배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김주성이었으나 김주성은 4강 PO를 치르면서 지친 상태이기도 했고...압도적인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동부가 우승을 내준것은 충격적이었으나 골밑 문제보다는 동부의 가드진이 인삼공사의 가드진에 압도당한 점이 컸다. 하지만 어쨌든 이로써 김주성과 동부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챔피언전이었고 이제 오세근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012년 4월 10일에 열린 KBL 시상식에서 총 유표 투표 80표 중 72표를 얻어 신인상을 수상했다. 차점자는 7표를 얻은 김선형. 나머지 1표는 최진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11-12 시즌 Best 5의 센터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3.2. 2012-13시즌 : 안식년[편집]


2011-12 시즌에 달고 있는 발목 부상이 비시즌 동안 올림픽 예선 참가로 인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면서 결국 발목 수술을 받게 되었다. 당시 오세근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뛰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이상범 감독이 이를 극구 반대했고, 주치의도 자칫 평생 한 쪽 다리 불구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결국 2012-13 시즌을 통째로 다 날려먹었다(…).[6] 소속팀인 KGC인삼공사는 결국 어찌어찌 해서 4위를 했지만, 오세근의 공백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3.3. 2013-14시즌[편집]


13-14 시즌에 접어들어도 2라운드 쯤에야 복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회복이 빨랐는지 개막전부터 조금씩 출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기 때문에 경기감각 조율 차원에서 교체출전을 하는 정도. 그리고 아직까지는 100%가 아니라 위력도 전보다 훨씬 떨어진다. 더군다나 시즌 중간 중간 잔부상을 당하면서 오히려 켠디션 저하를 겪기도 하였다. 이 시즌을 기점으로 하여 플레이 스타일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전같은 운동능력과 힘을 이용한 골밑 플레이 보다는 외곽에서의 스트레치 빅맨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인 스탯은 49경기 출전 9.5 득점, 5.3 리바운드, 2.0 어시스트, 0.8 스틸, 0.8 블록을 기록했다.


3.4. 2014-15시즌[편집]


13-14 시즌이 끝나고 상무에 입대했으나 국가대표로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면서 광속 전역에 성공했다!!! 1쿼터 이병 오세근, 2쿼터 일병 오세근, 3쿼터 상병 오세근, 4쿼터 병장 오세근, 종료 전역!! 어찌나 기뻤던지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했던 말은 "오늘 내가 다 쏠게!!" 그리고 10월 24일 공식적으로 전역한 이후 30일 고양 오리온스와의 홈 경기에 복귀전을 가졌고, 팀은 오리온스의 연승을 막아냈다. 그 후로 KGC의 성적이 크게 좋아진건 없지만 오세근은 꾸준하게 활약하면서 리그 최고의 토종빅맨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KBL 최초의 센터 출신 올스타전 팬 투표 1위를 달성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러던 중 복숭아뼈 골절이라는 부상을 당해버려서 결장해야만 했다. 이후 복귀해 수위급 센터의 면모를 보여줬으나 팀은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다. 최종 스탯은 32경기 출전 12.6 득점, 6.9 리바운드, 2.6 어시스트, 1.2 스틸, 0.9 블록을 기록했다.


3.5. 2015-16시즌[편집]




3.5.1. 충격과 공포의 불법도박 혐의[편집]


2015년 9월 8일 현직 프로농구 선수 11명이 불법도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는데, 몇 시간 후 KBL에서 해당 11명에게 기한부 출전보류 처분을 내리면서 그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 명단에 오세근의 이름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어 팬들에게 충격과 절망을 안겨줬다. 2015년 10월 25일 현재 프로가 아닌 대학 시절의 도박, 소액 베팅 등을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 되었으며 그간의 KBL의 징계 수위를 봤을 때 김선형 등과 함께 조만간 복귀가 가능할 듯하다.

결국 20경기 출장정지에 연봉의 5%인 900만원 벌금이 결정되었다. 저 20경기는 개막전 경기 이후에 계산되는 것으로 11월 중순에 복귀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오세근은 발목이 좋지 않고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번 20경기 출장 정지는 오히려 오세근에게 발목 부상 회복 및 체력 회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평도 나오고 있다. 11월 10일 KCC와의 경기 시작 전 팬들에게 본인의 잘못을 이야기 하고 사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1월 14일 삼성과의 원정경기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존재감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팀 승리를 견인. 그리고 오세근 본인도 현재 선수단에 대해 굉장히 기대가 크다는 인터뷰를 했다. 본인도 출장 정지 기간 동안 느낀 것이 많은 듯.

아무리 복귀했다지만 징계받은 올해 김선형과 같이 올스타전 베스트5로 선정되었다.


3.5.2. 20경기 출장 정지를 마치고 복귀 이후[편집]


대학 시절의 잘못으로 평생의 오명을 쓰게 되었으나, 김선형과 같이 그나마 복귀 이후에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비판은 많이 줄어든 편이다. 또한 스포츠인으로서 그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당시에 사설도박에 대한 법률이 없어 불법행위가 아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15-16 시즌 시즌을 앞두고 불법 도박 사건이 터지면서 20 경기 결장을 한 후 복귀했다. 그러나 예전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가끔 폭발하여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기복이 심해졌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농구선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전성기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르고 실제 NBA 선수들 같은 경우는 제대로 개인 퍼포먼스 포텐이 터지기 시작하는건 3년차 쯤, 즉 한국 대학교 3~4학년 나이때 찾아온다. 오세근의 경우는 1년 유급을 한 경험도 있고 4학년을 마치고 나온 케이스이기 때문에 비교적 늦게 프로에 진출했다. 더불어 30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선 부상이 없다는 전제가 매우 크다. 그러나 오세근은 계속해서 발목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다. 비록 폼은 다소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12득점 7.5리바운드 정도의 기록을 유지하고 있으며 팀 공격루트가 이정현, 박찬희 등 백코트로 옮겨간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수위급 센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규리그에서 34경기 출전 12.3 득점, 7.3 리바운드, 2.0 어시스트, 0.7 스틸, 0.6블록을 기록하며 팀이 3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2.7 득점, 8.6 리바운드의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전주 KCC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며 그대로 시즌 아웃을 당하였고 팀도 탈락하였다.


3.6. 2016-17시즌[편집]


16~17시즌 들어서는 FA로이드+분유버프 덕분인지 거의 신인 시절의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몸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다고. 그를 증명하듯 신인 이후 몸 상태 따문에 못했던 덩크슛도 무려 4년 8개월만인 12.30일 원주 동부전에서 기록했다. 트리플 더블에 근접한 경기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부상 없이 꾸준히 긴 시간 경기를 뛴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특히 어시스트에 눈을 떴는지 현재 경기당 3.7개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중이다. 여기에 공격과 수비에서도 무결점의 모습을 보이며 현존하는 최강의 KBL 센터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김승기 감독의 혹사에 가까운 출전 시간에 피로 누적 우려를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영향인지 2월에 허리 부상을 당하며 주변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3월 현재까지는 별다른 부상 없이 시즌을 잘 소화하며 사실상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3월 27일, MVP를 수상했다! 이로써 주희정, 김주성에 이어 역대 세번째로 신인왕+MVP+플레이오프 MVP를 모두 수상하게 되었다.

이같은 활약은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져서 울산 모비스와의 4강전에서 평균 11.7점 6.3리바운드, 챔피언 결정전에선 17.8점 9.7리바운드라는 더블더블에 가까운 활약을 보이며 기자단의 87표중 77표를 획득[7], 챔프전 MVP까지 수상하며 07-08시즌 김주성 이후 두번째 트리플 크라운 (정규리그 MVP+올스타전 MVP+플레이오프 MVP)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3.7. 2017-18시즌[편집]


안양 KGC와 계약기간 5년에 보수총액 7억 5천만원에 재계약 했다. 연봉은 6억이고 인센티브는 1억5000만이다. 기사 [8]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개막전에서는 15득점 7리바운드 1어시스트 1블록으로 분전했으나, 팀은 삼성에 패배.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0월 15일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28득점 20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10월 19일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전에서도 이종현을 탈탈 털어버리며 23점 9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2경기 연속 20득점+ 기록과 함께 미들슛의 장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9]

10월 21일 창원 LG 세이커스전에서 20득점 5리바운드 4어시스트 2블록으로 활약했으나, 팀은 패배했다. 김종규에게 3블록을 당한 것도 다소 아쉬운 점.

11월 2일 부산 kt 소닉붐을 상대로 14득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 개인 통산 2번째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였다.

11월 4일 1라운드 최종성적은 20.4득점(FG 55.9%) 10리바운드 4.3어시스트 1.1스틸 1.4블록. 외국인선수나 다름없는 굉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정규MVP 2연패에 일단 청신호를 켰다.

그러나 3월 21일 6강 PO 3차전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며 팀은 승리했지만 4차전에 나올지 미지수이다.


3.8. 2018-19시즌[편집]


2라운드로 접어든 시점까지도 부상 회복이 더딘 모양인지 심한 공격기복으로 스탯이 하락하였다. 확연히 떨어진 지표가 어시스트뿐이었다지만 문제는 용병 신장이 다 같이 줄어든 와중에 다른 장신 선수들은 스탯이 다 상승했다는 점이 문제. 컨디션점검차 5분전후로 나온 2경기 제외시 16.2 득점 9.1리바운드로 기록상으로는 여전히 토종빅맨들 중 돋보이는 수준이지만, 용병 키제한이 없던 2017-18시즌 부상이전까지 20-10이라는 용병급 페이스를 보였고, 이전 시즌들에서 언더사이즈 용병 빅맨들을 상대로 충분히 강한 면모를 보이던 오세근의 위엄을 생각하면 다소 초라한 성적이 맞다.[10]

김종규 11.8득점 7.4리바운드(득점이 오세근 커리어로우 수준.)[11] - 리바운드만 커리어 하이
하승진 7.8득점 6.3리바운드[12]
양홍석 13.0득점 6.7리바운드 - 커리어 하이
강상재 11.8득점 5.7리바운드 - 커리어 하이
최부경 7.1득점 5.1리바운드
최진수 13.6득점 5.3리바운드 - 리바운드만 커리어 하이
이승현 11.6득점 6.4리바운드(15경기) - 커리어 하이
정효근 10.6득점 4.8리바운드 - 커리어 하이
함지훈 9.4득점 4.4리바운드
김준일 9.9득점 6.4리바운드(7경기) - 리바운드 커리어 하이
김민욱 8.6득점 4.1리바운드 - 커리어하이
김민수 12득점 4.3리바운드

이렇게 기록들을 나열해 비교해보면 오세근의 기록이 그리 초라하지만은 않다. 위에서 말했듯 타 국내선수들과 달리 용병과의 매치업에서 얻어낸 기록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나 외곽으로 돌기 시작한 노장 함지훈과 김민수와 시간을 쪼개 갖는 최부경을 제외하면 모든 선수들이 득점과 리바가 괄목상대할만큼 증가한 시기에,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전년대비 눈에 띄게 스탯이 떨어진 오세근은 적은 경기출장수와 맞물려 부진해 보인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잘 살펴보면 가비지 상태에서 올리는 득점이 많고[13], 경기력 부진으로 패배하는 날에는 급기야 팀의 외국인 선수 문제 때문에 체력적으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알려줬다.[14] 그 결과 대표팀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무릎타박상을 입어 선수보호 차원에서 12월 12일 전주 KCC와의 안양 홈경기와 12월 14일 원주 DB와의 경기에 결장한다. 부상을 안고 플레이를 해 휴식을 줘야 된다는 선수와 구단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12월 30일 홈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서울 SK 나이츠전에 선발 출장해 약 20일 만에 복귀했다.

그렇지만 2019년 1월 8일 안양 홈에서 열리는 KCC전부터 무릎 통증 재발로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복귀 시점은 미정이며 올스타전 출장 역시 불발되었고 시즌 종료 후 수술키로 했지만 1월 15일에 수술했다. 두 달간 재활키로 해 정규리그 출전은 불가능해 플레이오프 때 출전할 수 있으나 구단에서는 무리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지만 오세근 본인이 완쾌되어 3월 14일 안양에서 펼쳐지는 원주 DB 프로미와 경기 부터 정규리그 마지막 홈 4연전에 출장한다.

팀은 오세근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4년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다.


3.9. 2019-20시즌[편집]


10월 5일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고양 오리온과의 원정 경기에서 6리바운드 3어시스트 14득점 활약으로 새로 영입된 브랜든 브라운크리스 맥컬러와 함께 팀의 오리온전 6연패를 끊었다.

10월 6일 안양실내체육관 창원 LG 세이커스 홈경기 개막전에는 백투백 경기였지만, 34분 17초를 소화하며 무려 6리바운드 3어시스트 36득점을 기록해 커리어하이 득점을 했다. 팀 역시 2연승으로 공동 1위를 수성했다. 클립 영상 하지만 몸 상태의 여파인지, 이 시즌에는 흐름을 끊는 난사도 잦아서 오이도시(…)라고 농갤러들에게 까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12월 1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홈 경기에서 박찬희와의 충돌로 왼쪽 어깨의 쇄골과 날개뼈가 연결되는 부위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2018-19시즌에 절반을 뛰지못했는데, 올 시즌 역시 악몽이 반복되었다. 검진 결과 수술과 비수술로 각 병원의 의견이 갈려서, 선수 본인은 꼭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면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2월 9일 재검진을 받았고 수술을 받야아한다는 결정이 나오면서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수술후 재활까지 3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사실상 정규리그 말미에나 혹은 플레이오프 때 뛸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최근 가파른 회복세를 보여 팀 훈련에 합류해. 3월 첫째 주부터는 선수단과 함께 훈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어깨부상을 당했던 2월 29일 부터 출전명단에 합류한 것. 아직 경기를 뛸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지만 엔트리에 이름을 올림으로서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매 경기 출전명단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팀 훈련을 같이 하고 있는데 몸 상태가 나쁘지 않더라. 본인 말로는 팀에 미안해서 재활을 하루도 안 빠지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 우선 동료들과 함께 다니면서 경기 전 워밍업 하는 것부터 시키고 있다. 당장 경기 투입보다는 감을 살려주는 게 먼저다. 경기는 5라운드 막판이나 6라운드에 투입시킬 예정이다. 어깨보다는 무릎이 고질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에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김승기 감독의 말이다.

그런데 2월 29일 경기를 끝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KBL측에서 잠정 정규리그를 중단해서 1달의 휴식기가 또다시 생겼고 이로인해 3월 31일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창원 원정 경기에 정상적으로 투입될수 있다고 했는데, 3월 24일 KBL에서 이사회를 열어 시즌을 종료키로 해 그대로 2019~2020시즌은 끝나게 되었다.


3.10. 2020-21시즌[편집]


FA계약 이후 3시즌동안 평균 27경기밖에 소화를 못할 정도로 몸상태가 심각한 상태이다. 따라서 연봉 삭감이 불가피해보였고 결국 직전시즌 연봉 7억원에서 28.5%가 삭감된 5억원에 계약했다.

시즌을 앞두고 3점슛을 연습중에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마치 말년의 서장훈이나 김주성의 플레이 스타일이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아직 시즌 초반이기도 하고, 김승기 감독도 인터뷰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심각하다. 지금은 경기의 패인이 되는 수준. 1라운드 오리온전을 보면 폼이 완전히 떨어진 부분을 볼 수 있다. (최종스탯 4득점 2리바운드,7턴오버)

10월 17일에 벌어진 원주 DB와의 경기에서는 슛 감각은 좀 떨어졌지만 모처럼만에 대활약으로 팀승리를 이끌었다. (25득점, 2리바운드) 그렇지만 원주DB가 매치업 상대인 김종규선수 또한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에 좋은 빅맨선수와의 매치업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10월 18일 울산현대모비스와의 경기에서 야투율 100%를 기록하는 등 장재석과 함지훈이 버티는 현대모비스 빅맨진을 상대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안양팬들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고 있다.

10월 22일 부산 kt와의 경기에서 38분 10초간 출전해 25점 12리바운드 1어시스트 1블록으로 2차연장까지 가는 접전끝에 팀의 93:89 승리를 이끌었다.

11월 10일 고양 오리온과 경기에서 개인 통산 4,300득점을 달성했다.

오세근은 오리온과의 경기 이전까지 4,298득점을 기록했다. 불과 2점만 추가하면 또 다른 기록을 세우는 상황. 선발로 출전한 그는 1쿼터에 가볍게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재도의 패스를 받아 점프슛으로 자신의 4,300득점 기록을 올렸다.

KBL 역사상 4,300득점 고지에 오른 이는 총 51명에 불과했다. 오세근은 52번째 선수가 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12월 8일 서울 SK와의 경기에서 25분 9초간 출전해 19득점 9리바운드로 팀의 83:68 3연승을 이끌었다.

이후 그럭저럭 시즌을 보냈고 팀은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펼쳐진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큰 활약은 없었으나 4강 플레이오프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후 챔프전에서는 파이널 MVP 출신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전승우승에 일조했다. 챔피언결정전 4경기 평균 20득점 6.2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MVP까지 노려볼 만 했으나 MVP는 3,4차전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준 제러드 설린저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커리어가 하향곡선을 타던 와중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우승반지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던 시즌이었다.

정규시즌에는 잦은 부상과 노쇠화로 오세근이라는 이름값에 맞지 않는 모습들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및 챔프전에선 왜 오세근이 아직 현역 최고의 빅맨인지, 그리고 FA 때 KGC가 이정현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3.11. 2021-22시즌[편집]


KGC와 총액 4억 7천만원에 연봉 3억 6천만원 (인센티브 1억 1천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의 나이가 이제 한국나이로 35살로 KGC에서는 김철욱의 DB이적과 김경원의 상무 입대로 한승희를 백업으로 쓴다고 한데 어떻게 될지는 지켜 봐야 알듯 싶다.

2021년 10월 21일 안양 홈에서 열린 서울 SK 나이츠전에서 야투 12개를 던져 10개를 성공해주는 83%의 높은 야투율로 23득점을 올려 KBL 통산 4700득점을 올리면서 104:99로 승리해 팀의 3연패를 끊었다.

2021년 10월 26일 서울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서 16득점과 개인 통산 2500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스펠맨과 먼로의 부진으로 67:78로 패배했다.

2022년 3월 5일 고양 오리온과의 원정경기에 선발 출전해 그는 경기 시작 2분이 지나면서 박진철의 슛을 가로막으면서 300번째 블록을 달성했다. KBL 역대 18호 기록이다. 그리고 3쿼터 1분 10초가 지난 뒤 파울로 얻은 자유투 1구를 성공해서 5200득점을 KBL 역대 38호 기록했다. 그는 공격에서 20득점을 기록해 오리온을 88:67로 물리치는 첨병 역할을 했다.

2022년 4월 14일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공헌한다. 한국가스공사와의 시리즈에서 평균 20득점의 기록을 올리며 여전히 건재함을 알렸다.

2022년 4월 23일 수원 kt 소닉붐과의 4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 활약을 4강전 첫승을 기록해준 활약을 펼친뒤에 3차전 안양홈에서 26분여간을 뛰고도 28득점에 활약을 펼치며 2승으로 팀이 2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함에 있어서 공을 세웠다.

서울 SK를 상대로한 챔피언결정전 무대에서는 체력이 소모된 탓인지 수비에서는 최준용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고, 공격에서도 도망다니다 김선형에게 블락을 당하거나 허일영을 밀어내지 못하는등 심각한 부진을 보이며 동기 김선형의 파이널 MVP등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3.12. 2022-23시즌[편집]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는데 열심히 플레이를 펼칠 것으로 기대가 되는 시즌이다.

2023년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펼쳐진 플레이오프에서 괴력같은 활약을 펼쳐 생애 세 번째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3회 수상은 현대모비스 양동근과 타이 기록이다.


4. 서울 SK 나이츠 시절[편집]


팀의 네 번째 우승을 만든 뒤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다. 나이도 세는나이 37세로 고령이된 오세근이 KGC의 상징과 같은 선수이기 때문에 남지 않을까 예상이 많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2023년 5월 18일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을 확정지었다. 계약 내용은 계약기간 3년, 보수총액 7억 5천만 원(연봉 5억 5천만 원, 인센티브 2억 원)이다.

하필 이틀 전 문성곤이 kt로 이적한 터라 KGC 팬들은 제발 오세근만큼은 잡아달라고 했으나 팬들의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게다가 오세근에게 영구결번도 못해줄지 언정 아무리 모기업에서 지원을 안해줘도 레전드 대우는 해야되는거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봇물터지듯 나오고 있다.

KGC가 오세근의 이적 직후 8억 1000만원까지 제시했는데 이적해서 서운하다고 기사를 냈지만 KGC 팬들은 누가봐도 언플이라고 확신한다.[15] 아니나 다를까 오세근이 본인의 SNS에 올린 이적 소감에 직접 KGC와의 협상 과정에서 "큰 실망과 허탈감"을 느꼈다고 밝히면서 애초에 KGC 프런트가 오세근을 대놓고 후려치려 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계약 과정을 살펴보면 KGC는 당연히 오세근이 남을꺼라고만 생각하고 오세근에게 3년 7억원을 제시했는데 이 금액은 같은 포지션의 빅맨 김종규이승현보다 적은 금액이다. 오세근은 내심 서운한 감정을 냈고 이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와중에 김선형이 같이 뛰자는 연락을 한 직후 SK와 협상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KGC는 뒤늦게 8억 1000만원을 제시했지만, 이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오세근은 "제시할 수 있으면서 왜 안했냐"며 서운함이 배가 되었고 원소속구단 KGC와 18일 아침에 계약을 않겠다 밝히면서 오후 5시에 결국 SK와 계약을 체결[16], SK로 이적을 택한다.

이로서 KGC는 프런트의 실책으로 차기 영구결번 레전드를 잃었으며 KGC의 전성기를 연 5인방 (김태술, 양희종, 박찬희,이정현, 오세근)은 오세근을 마지막으로 전부 KGC 유니폼을 벗게 됨에 따라 2011-12 시즌에 결성된 인삼신기는 이 날을 기점으로 전부 해체되었다.

오세근은 이번 이적으로 중앙대 시절 52연승을 합작한 김선형과 13년 만에 한 팀이 되어 손발을 맞추게 되었다. 등번호 41번은 마침 SK에 이 번호를 달고 있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41번을 계속 달게됐다.

4.1. 2023-24시즌[편집]


비시즌 동안 손상된 아킬레스건에 항생제를 맞는 시술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아시안게임 로스터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빠르면 컵대회때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10월 8일 컵대회 삼성과의 경기에서 11분 34초를 뛰면서 3점슛 1개를 성공시켰다.

10월 12일 소노와의 경기에서 16분 39초를 뛰면서 11점 9리바운드의 활약으로 팀이 4강에 진출하는데 일조했다.

10월 14일 컵대회 준결승 현대모비스와의 경기에서 23분 51초를 뛰었고 5점 5리바운드의 기록을 남기면서 컵대회 일정을 마무리했다.

10월 21일 정규리그 개막 첫 경기로 친정팀 KGC에서 이름이 새롭게 바뀐 정관장을 상대하게 되는데 이적 이후 첫 안양 방문이다. 경기전 챔피언 반지를 받은 오세근은 24분 10초를 뛰면서 8점 5리바운드로 SK의 개막 첫승에 일조했다.

10월 22일 kt와의 통신사 라이벌전 홈 개막전에 20분만 뛰고도 6득점을 올려 팀 85:80 승리를 지켰다.

11월 1일 고양 소노 아레나에서 펼쳐진 EASL 동아시아슈퍼리그 류큐 골든 킹스와의 경기에서 23분 42초를 뛰고 12득점 6리바운드 활약으로 팀의 82:69 승리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퍼포먼스에 대해 1라운드에는 굉장히 평이 좋지 않다. 아직 워니와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워니와 겹치는 포지션 때문에 둘이 같이 뛸 때 외곽 수비에서 어려움을 겪고 동선이 꼬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노쇠화의 영향이 쎄게 온 것인지 워니 의존도는 더 심해졌고, 이 영향으로 SK도 1라운드부터 시즌 플랜이 상당히 꼬인 데다가 EASL 타이베이 원정 대패의 원흉이 되는 등 오완용, 프내뛰, 워내뛰[17], 고세근 등으로 불리며 까이고 있다. 하지만 비시즌 내내 부상으로 팀 훈련도 제대로 못했고 복귀한지 얼마 안 된 오세근이기 때문에 안양 시절처럼 좋은 활약을 보이려면 적응이 많이 필요해 보인다.

11.18 kt와의 원정 경기에서 20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시즌 처음이자 SK 이적 이후 첫 더블더블을 기록했다. 공수 밸런스가 뛰어난 안영준 복귀의 시너지 효과로 오세근도 이름값에 걸맞는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5.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편집]


파일:오세근2017국대.jpg
이름
오세근(吳世根 / Oh Se-Keun)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
등번호
41번
국제대회 경력
올림픽 최종예선 (2008 광저우, 2012 런던)
윌리엄 존스컵 (2015, 2016, 2017)
아시안게임 (2010 광저우, 2014 인천)
FIBA 아시아컵 (2017)
FIBA 아시아 챌린지 (2016)
FIBA 농구 월드컵 예선 (2017)

고교 졸업자 신분으로 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상무를 20-으로 털어버리는 모습으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기 때문에 대학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농구 세계 예선전부터 대표선수로 발탁되어서 각종 대회에 국가대표로 뛰고 있다. 물론 대학시절에 국가대표 골밑의 주축은 김주성, 하승진, 이승준이었으며 오세근은 김민수와 함께 이들의 백업 역할을 했다. 전반적으로 몸싸움이 KBL보다는 관대한 국제무대에서 터프한 골밑 장악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슛이나 세기 면에서는 좀 더 관록이 붙어야 한다는 평. 하지만, 그간 국가대표의 대들보 역할을 한 김주성의 후계자로 오세근이 가장 유력하고, 가장 재질이 있다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허재가 김주성의 뒤를 이를 빅맨으로 오세근이 아닌 대학 신입생이었던 김종규를 꼽는 등 2m라는 신장의 한계로 회의적인 시각도 분명 있었다. 어쨌든 오세근은 하승진, 이승현 등과 함께 한국 국가대표 팀의 골밑을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농구 은메달을 차지했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따면서 광속 전역이 가능해졌다! 바로 나가는 것은 아니고 절차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약 한 달 정도 걸리며 이에 따라 복귀 시점은 빨라야 1라운드 후반이나 2라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세근은 규정에 따라 2014-15시즌에는 샐러리캡에 포함되지 않는다.

2017 FIBA 아시아컵에서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하여 대회 베스트5에 들었다. 대회 기록은 평균 16득점(FG 62.3%) 5.7리바운드 1.7어시스트.

2017년 11월 23일 2019 FIBA 농구 월드컵 중국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전에서 뉴질랜드를 상대로 14득점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작성했다. 한국도 86-80으로 승리.

최근들어 부상이 많아짐에 따라 몸상태로 인해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기 여의치 않은 듯 하다. 김종규가 발전 없이 식물센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에이스인 라건아를 제대로 도와줄만한 파트너 빅맨이 워낙 부족한지라 오세근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라건아-오세근의 트윈타워라면 높이는 좀 아쉬울지언정 굉장히 강력한 시너지를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운 부분.

2023 남자 농구대표팀 16인 선수 명단에 오세근이 포함되었다. 다만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본과의 평가전에는 뛰지 않는다. 결국 오세근은 부상으로인해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 최종명단에서 제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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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08:14:43에 나무위키 오세근/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 기록은 NBA에서도 단 네 번밖에 나오지 않은 초유의 대기록이다.[2] 가장 최근에는 대학리그에서도 우수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중앙대 후배 양홍석도 4년을 다 채우는 게 조건이라고 밝혔기에 얼리로 나올 가능성은 낮아보였으나, 학교를 자퇴하고 2017 드래프트에 참가를 선언했다! 본인도 1년 유급 + 4년 재학 등의 요소 때문에 병역특례를 받았지만 꽤 늦은 나이에 FA를 신청했던 만큼 대학리그 최고급 선수의 얼리 진출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3] 이 때 2순위 SK는 김선형을 3순위 오리온스는 최진수를 뽑았다. 뽑기 운이 지지리도 없기로 유명한 전자랜드는 함누리를 뽑았는데...[4] 허재는 현역 선수 말년이던 원주 TG삼보 시절에 김주성 1픽으로 우승 한 번 더 하고 은퇴했고, KCC 감독이 되어서는 1픽으로 하승진전태풍을 뽑았다. 심지어 전태풍은 뽑기 순번 상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앞의 9팀이 모두 1픽을 못 뽑는 기적이 일어나서 뽑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2012년에는 아예 1.5%를 뚫고 1순위로 심스를 뽑았다.[5] 2011년 드래프트 당일 네이버 라디오 바스켓카운트와의 인터뷰에서 예상하고 있는 루키 시즌 기록에 대해 질문받자 오세근은 '15-7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고 답했는데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되었다.[6] 사실은 이 때 오세근은 무리를 했다면 시즌 막판이나 플레이오프에 복귀는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이상범 감독은 "내 감독인생과 선수생명을 맞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혔고, 결국 1월 17일 울산 모비스와의 홈 경기 이전에 오세근을 최종 시즌 아웃시켰다.[7] 나머지 10표는 사이먼이 가져갔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basketball/news/read.nhn?oid=351&aid=0000028510[8] 이는 비대외적으로 알려졌지만 오세근은 한국인삼공사KGC 홍삼 제품 광고에 출연해 광고 출연료까지 덤으로 받았고 2년을 기간으로 잡으면 실질적으로 이적한 이정현보다 더 많은 연봉을 보장받은 셈.[9] 이날 밤 이종현은 3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했다.[10] 다만 오세근이기에 초라한 성적일뿐 용병 키제한으로 스탯이 대폭 상승한 최진수, 정효근, 강상재, 김종규, 이승현등과 비교시 스탯상으로는 떨어지는 모습은 아니다. 심지어 KGC 역사상 손에 꼽히는 식물용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인 스몰포워드 맥킨토시(195cm)를 데리고 상대팀 용병 상대로 얻어낸 득점과 리바인것을 감안하면 폄하하기 힘든 기록이다. 참고로 맥킨토시의 경우 김종규, 함지훈, 김준일, 정효근등 토종빅맨 상대로도 어이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막히는 모습을 자주 연출하였기에 김승원의 출전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11] 용병 최장신이 본인보다 7cm나 작고 KCC의 브라운의 경우 마족보다 13cm나 작음에도 리바운드만 늘어났다.[12] 다만 은퇴를 앞둔 시기였기에 정상 컨디션은 아니었다.[13]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라건아, 메이스, 펠프스 등 상대팀 제 1옵션 용병과 매치업을 했다. 그나마 윌리엄스나 헤인즈 상대로는 할만하겠지만, 이외의 용병들 상대로 지금의 몸 상태로 득점을 해내는 게 여의치 않았다. 사이먼도 이정현도 없었기에 오세근 외의 공격옵션이 없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후에 레이션 테리가 돌아오고 공격에서는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14] 식물 용병인 미카엘 매킨토시는 스몰포워드 유형의 선수이고, 수비는 꽝인데다 공격 역시 단순 돌파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해 공격과 수비를 양쪽을 책임지려는 오세근의 체력 적인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매킨토시를 퇴출시키고 데려온 레이션 테리는 공격 능력이 있는 KBL 경험자이지만, 오세근과 잘 맞는 정통센터는 아니다.[15] 일부 팬들은 오세근이 문성곤이 KGC에 남으면 남으려고 했으나 kt로 이적해버린 바람에 세는 나이 37이라는 적지않은 나이에 출전시간 조절을 위해 이적을 택한것라는 소리를 해서 난리를 치지만 전부 헛소리다. 결국 이렇게 해서 KGC의 고질적인 문제로 잘알려져 있는 프런트의 소극적인 투자 및 FA 선수 흘려보내기가 또 한 번 터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타 구단들은 벌써부터 KGC를 FA 선수들(김태술, 이정현, 이재도, 전성현, 문성곤, 오세근)을 타 팀으로 보내는 기부천사 혹은 인장훈이라고 불리고 있다.[16] SK의 최초 제시액도 7억원이었지만, 자밀 워니가 팀에 남아서 다음시즌에도 뛸 수 있는 여부 등 내년 SK의 윈나우 계획에 대해 많이 물어보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다만 다른 매체에서는 오세근이 이 이야기를 한적이 없다고 해명했다.[17] 워니 내년에도 뛰나요, 프림 내년에도 뛰나요를 줄여서 농구 갤러리에서 오세근의 퍼포먼스를 비꼬던 말. SK 이적 후에 밝혀진 사항인데, 이 FA 사가 당시 정관장 프런트의 문제도 없던 건 절대 아니었지만 오세근 또한 이적각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여러 구단의 간을 봤었다고 한다. 대학과 대표팀 시절의 절친한 동료인 김선형 등 다른 선수들도 아니고 워니와 프림의 팀 잔류 여부를 먼저 물어본 이유는 오세근이 커리어에서 우승 반지를 더 원했던 것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연하게도 저렇게 각을 잰 것은 정관장이 연봉 관련 기만으로 오세근의 뒷통수를 친 이후이다. 이미 친정팀이 먼저 팀에 헌신한 레전드를 저버리고 계산기부터 두드린 마당에 타 팀의 우승 가능성을 떠본 것은 결과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이름값과 연봉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기에 이러한 이적 과정에서의 비하인드가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