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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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초기 동북면을 방어하던 장군.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불비(不非)이다.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태조 이성계와 동향사람이다.곡산부원군 연사종(延嗣宗)이 졸(卒)하였다. 사종의 자(字)는 불비(不非)요, 황해도 곡산 사람으로서 함흥부로 옮겨 산 지가 삼대가 되었다
2. 생애[편집]
1366년 8월 8일 고려 동북면 함주(咸州)[3] 에서 태어났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연사종의 집안은 곡산군에서 함흥부로 옮겨 산 지가 이미 삼대째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함흥 사람이고 또한 조부는 곡산 사람이다.
후일 위화도 회군 때 조선 태조 휘하에서 장군 진무로서 공을 세워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후일 태종 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대장군으로서 정안군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상장군[4] ·호조 전서를 거쳐 곡성군에 봉해졌다.[5] 태종 9년 김남수(金南秀)·한규(韓珪)·이종무(李從茂)·마천목(馬天牧)·성발도(成發道)·조연(趙涓)등과 함께 조선군 주요 7인의 한사람으로 군정을 보좌하였다.[6]
태종 10년 요동군을 격퇴한 달단군을 방비하기 위해 동북면 출신 사종을 군 최고 직위인 동북면병마절제도사[7] 로 삼고 김승주(金承霔)를 서북면병마도절제사로 삼았다.[8] 뒤이은 태종 10년 조선이 경원군을 놓고 건주 여진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9] 와 대치중일때 조연(趙涓)을 대신해 사종을 길주도찰리사에 재임명하고[10][11][12] 태종 12년 사종을 다시 동북면도순문사에 등용하였으며[13] 태종 13년 최이(崔迤)·김승주(金承霔)·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동북면도순문사 겸 영흥부윤에 임명되었다.[14]
따라서 임금이 동북면과 관련된 의제를 논할 때면 사종을 불러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15]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다. 총제(摠制) 연사종(延嗣宗)이 동북면(東北面)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묻기를,
"동북면에 기근(飢饉)이 거듭 들어 백성들 가운데서 농사를 짓는 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사실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짓지야 아니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굶주려서 힘써 농사를 짓지 못하고, 소도 여위어서 갈고 심는 자가 적을 뿐입니다."
-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23일 을미 1번째기사 편전에서 정사를 의논하며, 총제 연사종에게 동북면의 기근을 묻다.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이 계하기를,
근일에 판부사(判府事) 이화영(李和英)의 가노(家奴)가 동북 방면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여러 야인 병영의 천호(千戶)들이 가만히 군마(軍馬)를 점검하며 떠드는 것이 행군할 것 같이 보이고, 공주(孔州) 등지에서는 인심이 부동(浮動)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화영(和英)을 불러 물어보니, 화영이 대답하기를,
"사종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즉시 병조 지인(兵曹知印) 장효생(張孝生)을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보내서 뜬소문이 퍼진 내용을 물어보고, 그로 하여금 잘 효유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라고 명하였다.
-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4일 경술 3번째기사 곡산군 연사종이 야인들에게 동요가 있음을 아뢰다
후일 세종에 의해 다시 삼군 도진무[16] 및 중군 도총제[17] 에 역임되었다.
3. 조선왕실과의 관계[편집]
現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의 묘
"큰 기업을 협찬함은 진실로 충의한 신하에게 힘입었으니, 큰 공을 생각하여 마땅히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뒤를 영화롭게 하는 은전(恩典)을 두텁게 하여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곧고 밝으며, 도량이 웅대하고 침착하여, 약관(弱冠) 때부터 성취(成就)함이 있었다. 드디어 태조를 잠저(潛邸)에 좇아 밤이나 낮으로 게으름이 없이 친군을 진무(鎭撫)하였고, 태종이 장차 머리를 들려고 할 때에 미쳐서는 간신(姦臣)들이 흉역(兇逆)을 꾀하여 국가의 안위(安危)가 호흡간(呼吸間)에 있었는데, 경이 갑작스런 즈음에 몸을 바쳐 경각간(頃刻間)에 난(亂)을 평정하였으니, 도와서 추대(推戴)한 노고와 천명을 도운 공적은 맹부(盟府)에 실려 있어, 길이 잊기 어렵도다.
- 세종실록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7월 7일 임오 5번째기사 죽은 곡산 부원군 연사종에게 제사를 내리다
고려 말기 사종의 가문은 곡산의 그저 한미한 토성이족 가운데 하나었지만 1400년 1월에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안군을 태종으로 옹립하는데 기여하며 좌명공신(佐命功臣) 가문으로 위상이 하루 아침에 격상되었다. 아울러 조선 왕실은 사종이 태조와 동향(同鄕)이라는 점을 고려해 사종에게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정릉을 정비하는 중임을 맡기고 그의 사후에도 사종의 충심과 무관으로서의 공적을 사려해 조정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정1품 곡산부원군에 훈봉하였다.
후일 곡산 연씨들은 선대가 좌명공신이라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특급승진을 당하거나 혹은 죄를 입어도 거진 면죄를 받는등의 특혜를 받았다. 사종의 아들 연경(延慶)은 1438년 판안주목사에 임명되었고[18] 후일 1450년 사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19] 사종의 조카 연정렬(延井冽)은 옥천 군수(沃川郡守)를 역임한 뒤 20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승진해 사헌부대사 이서장(李恕長)등이 부당함을 아룄으며 연정(延侹)은 사종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입거를 면책해주었다. 후일 숙종은 난에 휩쓸려 직위를 잃은 사종의 후손 연최적(延最績)을 복직시켜주고 그의 사후 영조 때 송인명의 건의로 최적의 후손들을 면죄하고 재등용하였으며[20] 후일 고종 역시 최적의 충성과 절개를 사려해 그의 후손들을 다시 등용시켜주었다.[21]
4. 어록[편집]
응견(鷹犬)이나 성색(聲色)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멀리 하였다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5월 8일 갑신 9번째기사
벼슬이 총질(寵秩)에 이르렀으니 호천(昊天)의 은혜는 뼈가 가루 되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지금 아비의 상을 만났는데, 기복(起復)하여 신이 당직(當職)이 되었으니 성은(聖恩)이 더욱 무겁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부터 종사(從仕)하여 집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였고, 지금 아비의 죽음도 또한 보지 못하였으니 애통하고 슬픈 마음이 더욱 깊습니다. 어미가 나이 85세인데 항상 병석에 누워 있으니, 신이 상제(喪制)를 마치고 겸하여 늙은 어미를 봉양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성자(聖慈)를 빕니다."
"내가 초래(草萊)의 천박한 재질(材質)로써 과분히 임금의 알아주심을 입어 가장 높은 직위에 이르렀으되, 항상 조심하여 혹 남의 헐뜯음을 당할까 걱정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