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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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내전
Guerra civil de El Salvador
Salvadoran Civil War

1979년 10월 15일 ~ 1992년 1월 16일
장소
엘살바도르 전역
원인
불평등한 토지소유
1979년 쿠데타에 따른 군사혁명정권(JRG) 수립
교전국 및 교전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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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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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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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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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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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FMLN
지원국 및 지원 세력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파일:온두라스 국기(1949-2022).svg 온두라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공화국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동독 국기.svg 동독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니카라과 국기.svg 니카라과
지휘관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알바로 마가냐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아돌포 아르놀도 마하노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하이메 압둘 구티에레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카를로스 비데스 카사노바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로베르토 도뷔송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도미니고 몬테로사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샤피크 한달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호아킨 비얄로보스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카예타노 카르피오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페르만 시엔푸에고스
병력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9,850명(1980)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39,000~51,150명(1985)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70,000명(1992)[1]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12,000~15,000명(1984)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6,000~15,000명(1985)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8,000~10,000명(1992)
피해규모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7,000~10,000명 전사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14,000명 전사[2]
결과
차풀테펙 평화협정
엘살바도르군 구조조정
엘살바도르 국가경찰엘살바도르 민사경찰로 대체
헌병군과 재무경찰(Policía de Hacienda) 해체
FMLN 무장해제 및 정당으로 전환
영향
총 70,000~80,000명 피살
8,000명 실종
난민 105만 명 발생[3]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979년~1980년: 내전의 시작
3.2. 1981년: "최후 공세" 對 "바다를 말려버리기"
3.3. 1982년~1984년: JRG의 해산, 과도정부의 수립, 지속되는 학살
3.4. 1984년~1989년: 두아르테 집권기
3.5. 1989년~1992년: 크리스티아니의 집권, FMLN의 총공세, 그리고 종전
4. 결과
5. 여담
6. 참고문헌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엘살바도르 내전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엘살바도르 정부와 파라분도 마르티 국민해방전선(이하 FMLN)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다. 일반적으로 1979년 10월 15일 쿠데타와 그 후 정부가 벌인 시위대 살해가 내전의 시작일로 여겨진다. 공식적으로 내전은 1992년 1월 16일 정부와 반군 양측이 차풀테펙 협정을 체결하여 끝났다.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Comisión de la Verdad para El Salvador, 이하 CVES) 보고서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최소 7만5천명이 살해되었고 약 8천명이 실종되었다. 정부측 보안군과 처형부대(death squads)는 FMLN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대대적으로 납치, 고문하고 살해했다. 잔혹행위의 85%는 정부측 보안군에 의해 저질러졌고 5%는 반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1993년 사면법 통과로 인해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2016년 엘살바도르 대법원이 해당 법에 위헌 판결을 내려 전범 용의자를 기소할 수 있게 되었다.

2. 배경[편집]


파일:El_salvador_land_1980.jpg
1980년 엘살바도르 토지이용 현황. 엘살바도르는 국토 대부분이 경작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엘살바도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했다. 엘살바도르는 대토지를 소유한 극소수 지배 엘리트와 절대다수의 빈곤층으로 나뉘었다.[4] 그래서 중앙아메리카에서 비옥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19세기말 수출의 95%를 차지하는 커피같은 환금작물 재배에 토지 대부분이 사용되는 까닭에 식량자급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커피 수출로 얻은 이익마저 인구의 2%가 독식했다. 1929년 대공황은 빈곤층의 삶을 더욱 악화시켰다. 1932년 파라분도 마르티가 이끄는 농민봉기가 발발하였으나 "그 학살(La Matanza)"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부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 3만여 명의 민간인이 진압군에 살해되었다.[5]

1950년대 레무스 군부정권은 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엘살바도르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투쟁과 정치적 민주화 요구투쟁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매도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 따라서 민중투쟁이 침체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9년 쿠바혁명을 계기로 엘살바도르 민중들은 합법적 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우선적으로 기독교민주당이 창당되어, 결사의 자유 보장, 신경제정책 수립 등을 주장하여 지지기반을 확대했다. 그리고 국민혁명운동(MNR)도 이 시기에 결성되어 도시에서 주로 활동영역을 넓혔으며, 1970년에 결성되어 활동했다.

1969년 온두라스와 벌인 축구전쟁은 엘살바도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흘 남짓한 전쟁의 결과 30만명의 엘살바도르인이 난민이 되었는데 대부분은 온두라스에서 추방당한 엘살바도르인이었다. 정부에겐 그들을 수용할 경제력이 부족했다. 1972년 대선에 부정선거로 당선된 국민연합당(PCN)의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 대령은 연이은 대내외적 악재에 직면했다. 이미 1970년 결성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 파라분도 마르티 인민해방군(FPL)이 소규모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72년에도 인민혁명군(ERP)이 창설되었다. 1975년 창설된 전국저항무장군(FARN), 1976년 창설된 중앙아메리카 노동자혁명당(PRTC), 1979년 창설된 혁명무장군(FAL) 등 1970년대에 여러 좌익반군 세력이 창설되었다. 좌익반군의 게릴라전은 식료품 물가 상승과 농업생산량 감소로 이어졌고, 여기에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벌어진 오일쇼크는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몰리나 정권은 토지개혁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려 했으나 이미 토지를 독식한 지배 엘리트들의 반발에 밀려 결국 무산되었다. 토지개혁 실패는 정부에 대한 전사회적 신뢰상실을 초래했다.

1977년 대선도 1972년과 마찬가지로 PCN 후보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 장군이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선서가 있었던 2월 28일 산살바도르 시내는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시위대가 운집했다. 보안군은 시위 현장에서 시위 참여자는 물론이고 단순 행인들마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당시 학살로 200~1,5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로메로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처형부대들을 조직했다. 창설 당시 처형부대는 엘살바도르 정규군으로부터 반독립적인 조직으로 민간인으로 구성되었지만 곧 로베르토 도뷔송이 수장인 엘살바도르 국가안보국(ANSESAL)의 지휘 하에 들어가면서 정부가 벌이는 억압의 핵심적인 조직이 되었다. 그들은 좌익 동조자로 간주된 노동조합 지도자, 운동가, 학생 및 교사 수천명을 살해했다. 기독교법률구조국(Socorro Jurídico Cristiano, 이하 SJC)에 따르면 1978년 당시 정부군이 살해한 민간인은 기록된 것만 687명에 달했고 이 숫자는 이듬해 1,796명으로 증가했다. 가톨릭 교회가 정부의 탄압을 비판하자 성직자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3. 전개[편집]



3.1. 1979년~1980년: 내전의 시작[편집]


무장분쟁 자체는 1970년대 초부터 좌익반군과 정부군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내전의 시작일로 간주되는 날짜는 1979년 10월 15일이다. 로메로 정권 치하에서 점증하는 불안과 반란의 기운을 방관할 수 없던 소장파 장교들이 이날 쿠데타를 일으켜 로메로를 내쫓고 민간인과 군인으로 구성된 이른바 군사혁명정권(JRG)을 수립했다. 이미 쿠바 혁명니카라과 혁명을 목격한 미국은 엘살바도르도 공산주의에 굴복하게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신 군사정권을 지지했다. 심지어 이때 미국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인권을 중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지미 카터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4년차인 1984년까지 미국이 엘살바도르 정부에 보낸 경제원조는 근 10억 달러에 달했다.

1980년 3월부터 JRG는 농업분야에 개입하여 토지개혁을 시도했다. JRG는 153호 법령을 통해 500헥타르 이상의 모든 경작지를 수용하고 농민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이 면적은 전체 농경지의 15%에 달하는 비중으로 당초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 재분배가 활발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기존의 엘살바도르 농업구조를 변화시키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다. 또한 토지개혁 법안은 엘살바도르의 군사 및 경제 엘리트들의 원성을 샀다. 그들은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곧바로 방해작업에 나섰다. 정부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협동조합을 조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지주들은 소유 가축을 도살하고 값진 농기계들을 과테말라 쪽으로 보내버렸다. 또한 협동조합 지도자 다수가 암살되거나 "실종"되었다. 동시에 JRG는 엘살바도르의 이전 정권처럼 반정부 세력과의 지난한 투쟁에 빠져들었다. 1980년 1월 22일 엘살바도르 헌병군이 평화로운 시위 군중을 공격하여 최대 50명을 살해하고 수백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주엘살바도르 미국 대사 프랭크 더빈(Frank Devine)은 2월 6일 미 국무부에 극우파가 군대와 연합하고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시간이 갈수록 정규군과 처형부대가 시민에게 가하는 폭력은 확대되었다. 그 대상은 반정부 운동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국가의 정책에 의문을 품는 자 모두에게 확대되었다. 2월 17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미 대통령 지미 카터에게 JRG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지할 것을 호소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3월 23일에는 엘살바도르 군인과 보안군 병사들에게 엘살바도르 민간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에 불복할 것을 호소했다. 이튿날 그는 미사를 집전하던 도중 암살되었다. 일주일 후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 정부군 저격수는 조문객 42명을 더 사살했다. 1980년 한해 엘살바도르 정규군과 3개 보안군 부대[6]는 11,895명을 살해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농민, 노동조합 운동가, 교사, 학생, 언론인, 인권운동가, 성직자들이었다. 1981년 5월 JRG는 1979년 5월에 내린 계엄령을 한층 더 강화했고 새로운 통행금지 규정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12일부터 2월 19일까지 보안군에 통행금지 위반을 이유로 살해된 사람은 168명에 달했다.

평범한 민간인들도 정부가 자행한 폭력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80년 5월 14일 헌병군과 친정부 민병대 국민민주조직(ORDEN)은 온두라스의 협조 하에 북부 찰라테낭고 주 숨풀 강변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마을의 탈출행렬이 강을 건너려 하자 온두라스군이 그들을 막아 사지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 학살로 600여 명이 살해되었고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학살 후 현장을 목격한 온두라스 사제는 시체를 쪼아먹는 독수리들이 너무 많아서 강 전체가 검은 카펫으로 보일 정도라고 보고했다. 이듬해 엘살바도르 정부가 자행할 바다를 말려버리기(Draining the sea) 정책의 전주곡이었다.

정부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민간인들이 반군에 가담했다. 아니, 어쩌면 정부의 폭력이 오히려 민간인의 반군 가담을 초래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980년 10월 10일 엘살바도르의 여러 반군조직과 노동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단일 혁명조직인 파라분도 마르티 국민해방전선(FMLN)을 결성했다. FMLN은 혁명이 성공한 니카라과산디니스타 국민해방전선(FSLN)으로부터 M16 소총M79 유탄발사기 등을 지원받았다.

3.2. 1981년: "최후 공세" 對 "바다를 말려버리기"[편집]


1980년 11월 4일 미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매파에 속하는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됨에 따라 중앙아메리카의 우익 독재정권은 든든한 뒷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취임일이 1981년 1월 20일로 예정된 가운데, FMLN은 그 전에 JRG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벌였다. 폰세카 만을 사이에 둔 인근 니카라과가 2년 전에 소모사 정권을 상대로 거둔 극적인 승리도 공세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81년 1월 10일, FMLN은 엘살바도르 전역에 "최후 공세(Ofensiva final)"를 벌였다. 공세에 투입된 병력은 2,500~5,000명에 달했다. 당시 FMLN 산하 각 게릴라부대의 상호협조(coordination) 능력은 FMLN이 단순히 치고 빠지기(Hit and run) 식의 비대칭전에만 능할 뿐 대규모 작전은 벌일 수 없다고 평가절하한 관찰자들을 경악시켰다. 17일까지 FMLN은 대부분 엘살바도르 북부의 모라산 주와 찰라테낭고 주에 있는 8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다. 이 공세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군사적 성과는 1981년 1월 말 수도 산살바도르 인근의 일로팡고 공군기지 기습이었다. 단 100명의 병력이 동원된 이 작전으로 기지의 헬리콥터 14기와 고정익기 8기(M.D.450 우라강 5기 포함)가 파괴되었는데 당시 엘살바도르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의 1/3에 해당하는 엄청난 피해였다.[7]

정부는 18일 반격을 개시하여 FMLN에게 잃은 영역들을 되찾았다. FMLN은 베트남 전쟁에서 구정 공세를 벌인 베트콩처럼 자기들이 공세를 벌이면 도시와 농촌에서 호응하는 봉기가 잇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살바도르 정부도 공세를 눈치채고 경계령을 내려 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임기 말 지미 카터 행정부도 엘살바도르 정부에 대규모 지원을 개시하였다. FMLN의 후퇴는 26일 종료되었다. 비록 공세에 참여한 FMLN 병력 대부분이 큰 손실없이 북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쨌든 1981년 최후 공세는 FMLN의 권력탈취가 무산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파일:map_el_salvador_guerilla.jpg
1981년 FMLN의 활동 지역

이것(역자 주―엘살바도르군의 초토화 전략)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효과적인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격, 기총소사, 포격, 그리고 때때로 민간인 학살과 같은 테러 전술이 수반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This may be an effective strategy for winning the war. It is, however, a strategy that involves the use of terror tactics—bombings, strafings, shellings and, occasionally, massacres of civilians.

Draining the sea: Six Supplement to the Report on Human Rights in El Salvador(March 1985), Americas Watch[8]

엘살바도르군의 대게릴라전 전략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및 20년째 내전을 치루는 이웃국가 과테말라 정부를 모방했다. 즉 농촌에 있는 반군의 지원기지를 박멸하여 반군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주요 표적은 다름아닌 민간인 주민들이었다. 민간인이 반군을 지원할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거나 소개하는 것이 대게릴라전의 핵심이었다. 아메리카즈 워치(Americas Watch)의 보고서 제목에 사용된 바다를 말려버리기(Draining the sea)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즉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에 비유한 마오쩌둥의 관점을 게릴라 진압자의 입장에서 적용한 것이었다.[9] 현지 주민을 반군과 한패로 여긴 미국과 과테말라의 시각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므로 그 결과도 똑같았다. 대게릴라전은 본질적으로 초토화 작전이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민간인 주민들이 엘살바도르군의 손에 학살되고 생존자들이 대거 난민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1년 3월 15일, 엘살바도르군은 온두라스와 접경한 북부 카바냐스 주의 소탕전을 개시했다. 엘살바도르군은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붙잡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10] 엘살바도르 공군은 민간인 피난행렬을 폭격하고 기총을 난사하여 수백여 명을 죽였다. 소탕전의 생존자들은 군을 피해 동굴밀림으로 숨어들었다. 18일에는 4천~8천여명의 피난민이 렘파 강을 건너 온두라스로 도망치려다 엘살바도르군과 온두라스군에 붙잡히는 일이 있었다. 11월 11일 엘살바도르군 1,200명은 카바냐스 주에 2차 소탕전을 개시하여 민간인 수백명을 추가로 사살했다.[11] 뒤이어 북동쪽 모라산 주도 소탕전이 벌어졌고 이곳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엘모소테에서 12월 11일부터 이틀간 대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살해된 민간인은 811명으로 현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학살이었다.[12] 원래 엘모소테 마을은 집 20채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어서 수백명이 죽을 일이 없었지만 당시 민간인을 가혹하게 대하는 정부군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일종의 충성심 인증을 찍기 위해 주변 마을에서 민간인들이 몰려왔고, 정부군은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여 800명이 넘게 살해되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SJC는 1981년 한해 정부군에 즉결처형된 사례 13,353건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규군과 보안군에 처형된 사람은 훨씬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벌어진 초법적 살인 대부분이 보고되지 않았으며, 피학살자의 유족 대다수가 보복을 두려워하며 피해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즈 워치 보고서는 SJC의 추산치를 "판정 기준이 엄격하므로 보수적 추산치로 여겨져야 한다"고 보았다. 후일 SJC는 추가 발견된 사례를 더하여 추산치를 최대 1만 6천건으로 올렸다. 국제앰네스티는 1981년 보고서에 보안군 부대의 비전투 민간인 고문, 살해 및 시체 훼손이 만연하며 그 방식은 점점 조직적, 체계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보안군은 피해자의 시신을 처분할 목적으로 육류포장 시설을 이용하였다.

3.3. 1982년~1984년: JRG의 해산, 과도정부의 수립, 지속되는 학살[편집]


1982년 3월 28일, 기존의 JRG를 대체할 과도정부를 수립할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과정은 친정부 민병대와 FMLN의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엘살바도르 전국변호사협회는 계엄령 하에 모든 기본권과 자유가 중지된 상황에서 선거를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룰 순 없다고 밝혔다. 아무튼 그렇게 구성된 국회에서 4월 29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선출하기 위한 대선이 실시되었다. 대선후보 3명은 모두 군부가 지명한 사람들이었다. 60명 중 36명의 지지를 받은 알바로 알프레도 마가냐 보르하가 당선되었다. 마가냐는 5월 2일에 취임선서를 했고, 이로서 JRG가 해산되었다. 마가냐 정권은 평화, 민주화, 인권, 경제 회복, 국가안보 및 국제위상 강화를 목표로 했지만 내각에 참여한 각 정치세력간의 이견과 정부-반군간 무력분쟁으로 인해 그의 임기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정부군과 민병대의 학살은 지속되었다. 미주인권위원회(IACHR, 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13]는 5월 24일 보고서에 산살바도르에서 12km 떨어진 판치말코 군 푸에르타델디아블로에서 실종자 시신 150구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 6월 10일에는 엘살바도르 정부군 4천명이 반군 통제하에 있는 찰라테낭고 주의 소탕전 과정에서 민간인 최소 600명을 살해했다. 현지 지휘관은 작전 성공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민간인 반군 동조자들이 살해되었다고 인정했다. 1982년과 1983년에 정부군에 살해된 민간인은 각각 8천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1980년과 1981년 인권단체가 집계한 숫자보다 낮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군과 보안군은 표적 처형과 무차별 살해를 정책의 핵심요소로 삼았다. 이것은 민간인 주민과 반정부세력을 대상으로 한 공포통치의 일환이었다.


3.4. 1984년~1989년: 두아르테 집권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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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1984년 3월 25일 대선의 승자는 기독교민주당(PDC) 후보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였다. 토목공학자이자 산살바도르 시장 출신인 두아르테는 이전 1972년 대선에서 출마한 바 있었는데, 실제 득표수는 그가 더 많았다고 추정되지만 부정선거로 인해 몰리나가 승리한 바 있었다. 이 해 두아르테를 지지하는 좌익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두아르테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베네수엘라망명했다. 그러다 1979년 JRG가 정권을 잡자 1980년 3월 3일 귀국하여 외무장관이 되었고, 12월 22일 JRG의 의장이자 대통령이 되었다. 두아르테의 집권에 FMLN은 이듬해 1월 10일 전면적인 총공세로 화답하였다(위의 1981년 "최후 공세"). 1982년 5월 2일 그는 국회에서 실시한 대선에 당선된 마가냐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JRG 의장으로 있는 동안 두아르테는 토지개혁, 일부 산업의 국유화를 시도하고 군과 FMLN이 저지르는 인권유린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엘살바도르는 정부군과 처형부대의 잔혹행위로 얼룩졌다. CIA는 엘살바도르군에 재정 및 물자를 지원하고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 수입을 중개했으며 직접 처형부대 훈련까지 맡았다.

1984년 대선에서 두아르테와 경쟁한 후보자는 민족주의공화동맹(ARENA) 후보이자 처형부대 지휘관, 퇴역장교 로베르토 도뷔송이었다. 도뷔송은 진성 네오 파시스트엘살바도르의 평화를 회복하려면 20만에서 30만을 죽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벌린 작자였다. 또한 서독 언론인 앞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고 유대-볼셰비키 음모론을 진지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훗날 1993년 UN은 도뷔송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암살을 명령했다고 결론내렸다. 도뷔송만큼은 도저히 안된다고 판단한 CIA는 그나마 온건파인 두아르테를 전폭 지원했다.[14]

두아르테는 엘살바도르에서 지속되는 소요사태와 학살을 멈추고 파탄에 이른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제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ARENA를 위시한 극우파의 반발,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 내란의 지속 등으로 인해 불행한 임기를 보냈다. 엘살바도르군과 보안군의 인권유린은 지속되었지만 두아르테 정부가 군의 구조를 개혁한 결과 그 규모는 감소했다. 정부는 3개 보안군 부대를 국방차관의 직접 감독 하에 맡겨 그들이 정부에게 보다 큰 책임을 지도록 했다. 하지만 정규군 장교들의 부대 지휘는 유지되었으므로 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부는 또한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에 가담한 장병들을 퇴역시키지 않고 대신 다른 지역으로 전근보냈다. 보안군에 대한 개혁은 있었지만 정규군은 농촌의 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중단하지 않았다. 아메리카즈 워치 보고서는 1984년 7월 아틀라카틀 대대가 카바냐스 주의 비무장 민간인 80명을 살해하고 한달 뒤 찰라테낭고 주에서 난민 5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일행 중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모두 조직적으로 처형되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엘살바도르군은 찰라테낭고 주에 "시민행동"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것은 농장과 사업장을 반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시민보호위원회"를 창설하고 다수의 자유발포구역(Free-fire zone)을 선포하는 것이었다.[15] 이 조치를 적용한 사람은 1981년 카바냐스 주를 민간인의 피로 물들인 그 시히프레도 오초아였다. 1985년 오초아의 병력은 찰라테낭고 주에 12개 자유발포구역을 지정하였다. 이 구역들은 엘살바도르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 허용되었으며 이 곳에서 발견된 민간인은 군이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반군으로 간주되었다.

반정부 인사 또는 반정부 인사로 간주된 자들에 대한 정규군과 보안군, 처형부대에 의한 초법적 살해는 내전 내내 그치지 않았다. 1983년 3월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CDHES) 회장 마리아넬라 가르시아 비야스는 군의 백린탄 사용 의혹을 조사하다가 붙잡혀 죽을 때까지 고문당했다. 1984년 2월 7일에는 노동조합 지도자 9명이 국가경찰에 체포되어 고문과 위협을 당하고 게릴라의 일원이었다는 자백을 했다. 1987년 10월 26일 CDHES의 국장 에르베르트 에르네스토 아나야는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암살당했다. 1988년 10월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18개월간 처형부대에 체포, 고문, 살해된 사람은 수백명에 달하며, 피해자는 대부분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구성원, 인권운동가, 인권유린 사건의 책임규명에 참여한 판사, 귀환 난민, 석방된 정치범들이라고 보고했다. 피해자들은 종종 지나가는 차 사이에서, 백주대낮에, 목격자의 면전에서 살해되었다. 어떤 경우는 집이나 거리에서 납치되었고 그 시신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기되었다. 어떤 사람은 강제로 "실종"되었다. 피해자는 관례적으로 팔다리가 잘리고, 참수되고, 교살된 채로 발견되었으며 그 시신은 고문과 강간의 흔적이 역력했다.

1987년 8월 6일, 중앙아메리카의 5개국 정상[16]이 과테말라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 중앙아메리카에 만연한 무력분쟁을 잠재우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10월 엘살바도르 국회는 내전에서 발생한 모든 범죄를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릴라 또는 게릴라 동조자 혐의를 받는 모든 수감자를 석방하는 이 법안에 따라 정치범 400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반군에게 사면의 댓가로 15일 내에 보안군에 자수할 것을 요구했다. 사면법은 게릴라와 정치범뿐만 아니라 정규군과 보안군, 친정부 민병대에게도 적용되었다.

3.5. 1989년~1992년: 크리스티아니의 집권, FMLN의 총공세, 그리고 종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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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1988년 3월 20일 총선의 승자는 ARENA였다. 본래 ARENA는 극우파였지만 1984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도뷔송을 대신해 1988년 당수를 맡은 무명의 기업가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에 의해 비교적 중도화되었다. 크리스티아니는 1989년 3월 19일 대선에서도 53.82%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로써 엘살바도르는 최초로 민선 민간인 정부 간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크리스티아니의 당선은 소련의 쇠퇴와 동구권의 붕괴 와중에 이루어졌다. FMLN도 사회주의 이념과 혁명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따라서 전쟁보다 협상에 점점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 9월 13일 멕시코에서 종전 협상을 위한 최초의 계획안인 멕시코 협정이 타결되었고 한달 뒤 코스타리카에서 추가 협상이 예정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아 결국 파국을 맞았다.

FMLN은 1989년 중순 니카라과 마나과에서 열린 지도부 회의에서 총공세를 결의했다. 11월 11일 산살바도르, 산미겔, 우술루탄, 사카테콜루카의 군사기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FMLN의 2번째 "최후 공세"가 개시되었다. 개전 이래 최초로 산살바도르 교외의 부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17] 지난 1981년 공세에서 털었던 일로팡고 공군기지도 FMLN의 주요 목표였지만 이번에는 엘살바도르군이 격렬하게 저항한데다 지원군이 도착하여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 정부측은 새로운 탄압으로 대응했다. CDHES에 따르면 1989년 5월부터 1990년 5월까지 군에 2,868명이 살해되었다. CDHES는 이에 더해 같은 기간 친정부 민병대에 1,916명이 불법 구금되고 250명이 실종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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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16일 예수회 사제 학살사건의 희생자
FMLN의 총공세가 개시된지 5일 후인 1989년 11월 16일 아틀라카틀 대대 병력이 중앙아메리카 대학 캠퍼스로 진입하여 예수회 사제 6명과 다른 2명을 살해했다.[18] 사제들은 침실에서 끌려나와 기관총에 맞아 죽었고 시신을 훼손당했다. 가정부와 그의 딸도 침실에서 살해되었다. 이튿날 산살바도르에서 다른 7명이 정부군에 처형되었다. 예수회 사제 학살사건과 1989년 FMLN의 총공세는 종전을 요구하는 국내외적 압력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FMLN과 정부가 싸울 수 있도록 후원한 열강들도 점점 내전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1990년 FMLN을 후원하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대선에 패배하였고, 비슷한 시기 소련도 국내외적 위기가 심화되어 FMLN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도 부시 행정부로 교체되면서 엘살바도르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였다. 그리고 냉전 종결 자체가 미국이 걱정하던 이른바 도미노 이론에 대한 불안을 줄였다. 후원자들이 원조를 줄이자 내전의 두 주체도 협상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 FMLN의 총공세 자체도 비록 막히긴 했지만, 정부 측에 자기들은 군사력으로 굴복시킬 존재들이 아니며 그러므로 협상이 필요하단 것을 납득시켰다.

FMLN의 2번째 "최후 공세"는 12월 초에 끝났고 이듬해 4월 제네바 협정을 체결하여 정부와 FMLN간 협상이 재개되었다. 5월 카라카스 협정, 7월 산호세 협정, 이듬해 4월 멕시코 협정, 9월 뉴욕 협정까지 종전을 양한 일련의 협정들이 체결되었고, 1992년 1월 16일 체결된 차풀테펙 평화협정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총 9개 장으로 구성된 차풀테펙 평화협정의 핵심 내용은 엘살바도르 정규군 재편 및 FMLN의 무장해제, 보안군[19]을 엘살바도르 민사경찰(Policía Nacional Civil de El Salvador, PNC)로 대체, 사법제도 및 선거제도 개혁 및 인권 보호에 관한 것이었다.

UN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평화프로세스 전반을 감독했다.

1991년 4월 멕시코 협정에서 엘살바도르 정부와 FMLN은 내전 기간 발생한 인권유린과 학살 사건을 덮어둔 채 평화가 올 수 없으며, 반드시 이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양측은 향후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CVES)를 출범하여 사건을 세부적으로 조사하기로 합의했다.[20] CVES는 1992년 7월부터 1993년 3월까지 활동했고 최종보고서 "광기에서 희망으로(From Madness to Hope)"를 출간했다. 보고서는 인권유린에 책임이 있는 40여 명의 실명도 공개했다.

1996년 미국 정부는 엘살바도르 내전에 미군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전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복무한 미군은 최소 5,000명에 달했고 그 중 21명이 작전 중 사망(KIA)했다.

4. 결과[편집]


엘살바도르인 7만 5천명이 살해되고 8천명이 실종되었다. 피살자 대부분(약 2/3)은 민간인이었다. CVES 보고서에 따르면 인권유린의 85%는 엘살바도르 정규군과 보안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정부에 살해된 사람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게릴라 동조자로 의심된 반정부 세력도 상당수였다. FMLN은 5%의 책임이 있었다.

엘살바도르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초토화되었다. 1980년대 말 인구의 75%가 빈곤층이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1991년 엘살바도르의 1인당 실질GDP는 1978년의 66%에 불과했다. 실업률과 불완전고용률은 50%에 달했다. 전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105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는데 그 중 55만 명은 국내실향민이 되었고, 다른 50만 명은 온두라스 등 외국으로 피난했다.

평화협정에 명시된 대로 군사 및 사법 개혁이 이루어졌다. 1993년 인권유린과 부패에 연루된 군 장교들에 대한 숙군이 완료되었다. 내전 당시 최대 6만 3천명에 달했던 엘살바도르 정부군(정규군, 보안군)은 1999년 1만 5천명으로 감소했다. 보안군은 해체되었고 그 자리는 엘살바도르 민사경찰이 대체했다. 1999년 당시 민사경찰의 수는 1만 8천명에 달했다.

5. 여담[편집]


냉전 당시 중앙아메리카 좌익 게릴라 조직들의 군사력을 평가한다면 FMLN은 가장 강력했다. 1981년과 1989년의 최후 공세는 국내외 관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특히 1989년 공세는 종전 협상을 가속화하는 정치적 이득을 올렸다. 이때 엘살바도르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어 FMLN은 사실상 엘살바도르 정부와 미국을 둘 다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FMLN은 정부와 거의 비등하게 싸웠다.

쿠바 혁명피델 카스트로가 지휘한 반군과 니카라과 혁명산디니스타 반군은 정권교체에 성공하긴 했지만, 애초에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과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은 최대 병력이 각각 2만과 1만 1천밖에 안되는 의외로 군사력이 허약한 정권이었다. 과테말라 반군은 비록 과테말라 군사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36년에 걸친 내전 내내 정권을 털끝만큼도 위협해보지 못한 채 동부 산악지대(초기)나 북서부 고원지대(후기)에만 처박혀 있었고,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 당시 좌익 게릴라들은 이렇다할 해방구조차 전무했고 과테말라 반군처럼 뒤늦게나마 일부 민중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나중에 등장한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반군은 부사령관 마르코스 덕에 유명해졌지 솔직히 군사력은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다. 온두라스의 모라산주의 애국전선(FPM)은 아예 테러단체에 더 가까웠고.

게릴라 조직에서 합법정당으로 변모한 FMLN은 1994년 총선에서 84석 중 21석을 획득하여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아예 제1당이 된다.[21] 2009년 대선에서는 FMLN 후보 마우리시오 푸네스가 승리하여 최초로 대통령도 배출했다. 이후로도 ARENA와 양당체제를 구성하였으나 2019년 대선에서 ARENA와 같이 참패했고, 2021년 총선에서 득표율 6.9%에 의석수 4석만 건지며 군소야당으로 전락했다. 해당 총선의 승자는 나이브 부켈레새로운 생각으로 56석을 독식했다.

전쟁 당시 가장 거대한 학살이 벌어진 엘모소테는 1992년부터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992년 10월 13일부터 11월 17일까지 아르헨티나 법의학팀(EAAF)이 교회의 성구실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한 결과 최소개체수(Minimal Number of Individuals) 143구를 수습했는데 그 중 131구는 12세 이하, 평균 6세의 어린이들이었다. 2018년 현재 엘모소테는 추모지로 탈바꿈하였고 희생자들의 묘지도 들어섰다.

6. 참고문헌[편집]


  •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연구(1990), 원성묵 외, 도서출판 친구
  • 중미의 정치 변동: 정치적 폭력에 대한 기원을 중심으로(1997), 곽재성, 이베로아메리카연구 제8권,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 중남미 인권과 화해: ‘진실위원회’의 특성(2002), 송기도, 4.3과 역사 제2호, 제주4.3연구소
  • 엘살바도르 내전과 냉전의 상처: 엘모소떼(El Mozote) 학살의 진실과 의미(2011), 노용석, 민주주의와 인권 제11권 제2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가치 있는 고통이었나?: 중미의 내전과 민주주의(2013), 리카르도 사엔스 데 테하다(강성식 譯), 2013 라틴아메리카-대통령 선거와 정세 변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원제: ¿Valió la pena?: guerras civiles y democracia en Centroamérica(2012), Ricardo Sáenz de Tejada, Nueva Sociedad 240: p.149-162)
  • The UN's Role in Nation-Building: From the Congo to Iraq(2005), James Dobbins, RAND Corporation
  • Wars of Latin America, 1948-1982: The Rise of the Guerrillas(2013), René De La Pedraja, McFarland; Illustrated edition
  • A Guide to Intra-state Wars: An Examination of Civil, Regional, and Intercommunal Wars, 1816-2014(2015), Jeffrey S. Dixon, Meredith Reid Sarkees, CQ Press; 1st edition
  • Peace Without Justice: Obstacles to Building the Rule of Law in El Salvador(2020), Margaret Popkin, Penn State University Press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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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규군 55,000명, 준군사조직 15,000명[2] 피해규모는 A Guide to Intra-state Wars: An Examination of Civil, Regional, and Intercommunal Wars, 1816-2014(2015), Jeffrey S. Dixon, Meredith Reid Sarkees, CQ Press; 1st edition 참고.[3] 국내실향민(IDP) 55만명 포함.[4] 전통적으로 14가문이라 불리는 극소수의 과두집단이 군부와 결탁하여 경작 가능한 토지의 42%를 독점했다고 한다.[5] Tommie Sue Montgomery의 Revolution In El Salvador: Origins And Evolution(1982)에 의하면 민간인 피살자 중 봉기에 가담한 수는 1/10도 되지 않았다.[6] 엘살바도르의 보안군(Cuerpos de Seguridad)은 헌병군(Guardia Nacional), 국가경찰(Policía Nacional), 재무경찰(Policía de Hacienda)로 구성된다. 헌병군은 농촌, 국가경찰은 도시, 재무경찰은 세관/국경의 치안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엘살바도르의 법집행기관이자, 정규군과 함께 엘살바도르 국방부의 하부조직이었다.[7] 단 일로팡고 기지 기습으로 엘살바도르 공군 자체가 무력화된 것은아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에게 파괴된 우라강보다 대게릴라전에 더 적합한 A-37 공격기를 지원했다. A-37은 반군 기지와 대열 공습, 근접항공지원, 항공후방차단(Air Interdiction) 등에 투입되었다. 내전 기간 총 30기(A-37B 21기, OA-37B 9기)가 엘살바도르 공군에 공급되었다.[8] 아메리카즈 워치(Americas Watch)는 1978년 출범한 헬싱키 워치의 활동이 성공을 거둔 이후 세계 각지에 세워진 여러 '워치' 조직 가운데 하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했다. 세계 각지의 워치 조직들은 후일 1988년 휴먼라이츠워치(HRW)로 통합되었다.[9] 1981년 1월 17~18일 온두라스 국경지대에 형성된 난민촌을 방문한 미 의회 조사단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바다를 말려버리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방식은 지도상의 모든 마을들을 없애고 게릴라를 고립시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모든 농촌 기지에 대한 게릴라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10] 1980년대 엘살바도르군 합참의장을 지낸 아돌포 블란돈은 1983년 이전 군대는 "절대로" 포로잡지 않았다고 밝혔다.[11] 2차 소탕전을 지휘한 전직 재무경찰청장 시히프레도 오초아 중령은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초아는 기자들에게 게릴라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자랑했지만 기자들에게 보인 노획 무기는 15개에 불과했다.[12] 당시 학살을 저지른 정규군 아틀라카틀 대대 지휘관은 모든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심지어 어린이들도 자라면 게릴라가 될 것이니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1990년대에 비밀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엘모소테 학살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아틀라카틀 대대는 골때리게도 미국이 직접 훈련하고 무장시킨 그야말로 미군의 수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엘모소테 학살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미국 정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엘모소테 학살뿐만 아니라 다른 잔혹행위들도 미국 정부와 그에 우호적인 미국 미디어들에 의해 은폐되었다.[13] 약자가 같은 미주인권재판소(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와 다른 기관이다. 미주인권위원회는 미국 워싱턴에 있고, 미주인권재판소는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있다. 둘 다 미주기구의 인권보호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이다.[14] 골때리게도 도뷔송은 미국이 세운 미주 군사학교(School of the Americas)에서 교육받은 적 있다. 근데 애초에 SOA가 도뷔송 같은 놈들을 양성하는 곳이긴 했다.[15] 이 자유발포구역의 원조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남베트남 일부 지역에 지정한 FFZ다. 어차피 이 시절 라틴아메리카 군사정권의 장교들은 죄다 미국이 교육했으니 이들이 뭘 보고 배웠을지는 안봐도 비디오.[16] 과테말라의 비니시오 세레소, 엘살바도르의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니카라과다니엘 오르테가, 온두라스의 호세 아스코나 델 오요, 코스타리카의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17] 산살바도르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아예 교외까지 반군이 진출한 것은 1989년 대공세가 유일했다.[18] 희생자 명단: 이그나시오 에야쿠리아, 세군도 몬테스, 이그나시오 마르틴바로, 호아킨 로페스이로페스, 후안 라몬 모레노, 아만도 로페스(이상 사제), 엘바 라모스(가정부), 셀리아 마리셀라 라모스(엘바 라모스의 딸)[19] 헌병군, 국가경찰, 재무경찰[20] 냉전 이후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군사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조사하기 위한 진실위원회(Truth Commission)를 설치하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었다. 이웃한 과테말라도 내전 당시 인권유린과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를 조직했다.[21] 단 2000년 총선의 총 득표율 자체는 ARENA가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