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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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과
Managua
Leal Villa de Santiago de Managua

파일:마나과 시기.svg.png



국가
파일:니카라과 국기.svg 니카라과
지역
마나과 주
면적
267㎢
시간대
UTC-6
인구
1,055,247명[1]
인구 밀도
4,000명/㎢

1. 개요
2. 역사
3. 교육
4. 경제와 교통
5. 관광
6. 자매결연도시



1. 개요[편집]


마나과니카라과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인구는 2020년 기준 106만 명이고 도시권 인구는 140만 명이다. 지리적으로는 니카라과 서부 마나과호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와는 직접적으로 접하는 도시가 아니다. 중미에서 과테말라시티, 테구시갈파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지만 대도시 도시권으로 따지면 좀 많이 밀리는 편이다.[2]

2. 역사[편집]


마나과는 1819년 세워졌다. 독립 이후 니카라과는 진보성향의 레온과 보수성향의 그라나다로 나뉘어 이념대립을 벌였는데, 1852년 두 도시의 중간에 있는 마나과가 니카라과의 수도가 되었다. 1860년대 마나과의 인구는 1만 명이었다. 1931년 대지진으로 마나과는 초토화되었고 이후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소모사 정권 치하 니카라과(1937~1979)가 점진적으로 공업화되면서 마나과는 제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소모사 치하에서 인구는 50만 명으로 폭증했고,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대거 들어선 화려한 도시로 변모했지만 동시에 그 변두리에는 거대한 슬럼가가 형성되었다. 1972년 발생한 두 차례의 대지진은 마나과를 한번 더 초토화시켰다. 소모사 정권은 대지진에 무능하게 대처하여 계층을 막론한 전국민의 불만을 샀고 따라서 1972년 지진은 니카라과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1978년과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마나과는 정부측 헌병군(Guardia Nacional)과 FSLN 반군 사이의 격전이 벌어졌다. FSLN은 1979년 7월 19일 마나과에 입성하여 니카라과 혁명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마나과는 혁명과 내전으로 도저히 복구를 할 형편이 못 되었다.[3] 1990년 산디니스타 정권에서 자유주의 중도우파로 정권교체가 된 후에야 비로소 복구가 가능해졌다. 이후 기업이 입주하고 새로운 건설계획이 추진되어 현대적인 도시로 재건되었다. 오늘날 마나과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3. 교육[편집]


마나과는 니카라과 교육의 중심지이다. 1980년부터 시행된 FSLN의 문해율 캠페인으로 문맹자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오늘날 니카라과의 대학 58개 중 45개의 캠퍼스가 마나과에 있다. 가장 중요한 대학들은 니카라과 국립자치대학교(UNAM, 1812), 중앙아메리카대학교(UCA, 1961), 니카라과 폴리테크닉대학교(UPOLI, 1976)[4], 국립공과대학교(UNI, 1983), 아메리칸 대학교(UAM, 1992), 레뎀토리스 마테르 가톨릭대학교(UNICA, 1992)[5]가 있다.

4. 경제와 교통[편집]


마나과는 니카라과 경제에 중심지이다. 2018년 니카라과 GDP 125억 7,500만 달러의 30.4%(38억 2,300만 달러)가 마나과 주(Departamento de Managua)에서 산출되었다.# 같은해 니카라과 GDP의 46.1%가 마나과 주와 그 인근의 마사야 주, 그라나다 주, 카라소 주를 포함하는 마나과 대도시권(RMM)에서 산출되었다.[6] 다국적기업들의 니카라과 지사가 이 곳에 있고 국내 모든 대형은행의 본사가 소재한다. 마나과는 니카라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육류가공, 목재가공, 가구, 섬유 등 각종 경공업 품목을 생산하는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마나과는 니카라과의 모든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도 마나과를 지난다. 도시 북동쪽의 아우구스트 세사르 산디노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Augusto C. Sandino)은 니카라과의 유일한 국제공항으로 역내 다른 국가들과 니카라과를 잇는다.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치안은 좋으며 갱단 문제도 거의 없다.

5. 관광[편집]


솔직히 말해 별볼일 없다. 이게 다 그놈의 지진 때문이다 사실 니카라과 관광에서 제일 가볼만한 도시는 유서깊은 그라나다와 레온이지만, 유일한 국제공항이 마나과에 있기 때문에 육상으로 접근할게 아니라면 마나과는 들를 수밖에 없다(...) 마나과의 주요 랜드마크로는 국립문화궁, 루벤 다리오 국립극장, 혁명광장, 아카왈린카 박물관, 티스카파 석호, 데니스 마르티네스 국립경기장, 마나과 구 성당 및 신 성당 등이 있다. 북쪽에 면한 마나과호는 너무 오염되어서 딱히 가볼만한 곳이 아니다. 시내의 대중교통은 전적으로 시내버스에 의존하고 있다.

6. 자매결연도시[편집]


총 17개 외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암스테르담(네덜란드),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쿠리치바(브라질), 아바나(쿠바), 로스앤젤레스(미국), 마이애미(미국), 파나마시티(파나마), 키토(에콰도르), 레우스(스페인),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 산살바도르(엘살바도르), 산토도밍고(도미니카 공화국), 산티아고(칠레), 타이페이(타이완), 발렌시아(스페인), 리마(페루), 수후미(조지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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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기준#[2] 애초에 니카라과는 면적은 넓지만 인구는 엘살바도르보다도 적다. 이 인구도 상대적으로 선선하고 비옥한 서부에 몰려있고 동부 지역의 인구밀도는 20명/㎢도 안 된다.[3] 니카라과의 철도환경도 대지진의 결정타를 받았다. 이미 1960년대부터 쇠퇴하던 철도는 마나과 대지진으로 급속도로 경영이 악화되었고 니카라과의 정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보수되지도 못했다. 2001년 마지막 노선이 폐쇄되었으므로 현재 니카라과에는 운용 중인 철도가 없다. 현재 철도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시행하고 있긴 한데 나중에라도 재건될지는 미지수.[4] 1968년 니카라과 폴리테크닉연구소(POLI)로 설립되어 1976년 대학으로 인가됨.[5] 레뎀토리스 마테르(Redemptoris Mater)는 라틴어로 '구세주의 어머니'다.[6] 니카라과의 지역간 빈부 격차는 역내 국가에 비하면 덜한 편으로 2018년 가장 부유한 북서부 레온 주와 치난데가 주의 1인당 GDP가 가장 가난한 남동부 남카리브해안자치구(RACCS)의 2.64배였다. 물론 이게 좋은 일이라기보단 니카라과 전국이 그냥 고루고루 못 사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7] 현재 압하지야가 실효지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