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나시르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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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의 9, 12, 14대 술탄. 칼라운의 막내 아들이자 아크레를 정복한 칼릴의 동생이다. 형 칼릴이 암살당한 후 술탄위를 이었으나 불과 8세였기에 원로 아미르들이 섭정하였고, 그마저도 1년만에 폐위당하여 요르단의 케라크로 유배되었다. 약 4년 후인 1299년 술탄 라긴이 살해되자 아미르들은 앗 나시르를 복위시켰으나 역시 실권은 바흐리 맘루크의 살라르와 부르지 맘루크의 바이바르스 알 자샨기르에게 있었다. 그해 가잔 칸의 몽골 대군에 맞서 앗 나시르는 아미르들과 출정하였으나 3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 군은 대패하였다#. 이로써 시리아는 약 5개월간 몽골의 통치를 받았으나 가잔 칸이 돌연 후퇴하며 1300년 봄 맘루크령으로 무혈 수복되었다. 몽골군은 3년 후 돌아왔으나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술탄과 칼리파까지 대동한 맘루크 군이 결사 항전하여 승리하였다#. 1304년 가잔 칸이 사망한 후 몽골의 위협이 없어지자 실권자 살라르와 바이바르스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1309년 앗 나시르는 메카 순례 (핫지)를 간다고 하며 카이로를 떠나 다시 케라크로 향하였고, 양위의 뜻을 표하며 양측의 대립을 부추겼다. 그후 바이바르스가 술탄이 되었는데, 그러자 앗 나시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었다. 바흐리 맘루크의 지지로 돌아온 앗 나시르는 1310년 바이바르스를 처형하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이제 25세의 성년이었던 그는 이후 31년간 안정적으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술탄 앗 나시르는 살라르 등 잠재적 위협이 될만한 맘루크 아미르들을 숙청하고 그들이 민중에게 휘두르던 전횡을 시정하였다. 1323년 일 칸국과의 휴전이 체결된 후 이집트 경제는 번성하였고 카이로에는 모스크, 마드라사, 궁전, 하맘, 수도교를 비롯한 여러 건축물이 증축 혹은 신축되었다. 기독교 세력과도 어느정도 선을 지키며 대처하는 노련함을 보인 앗 나시르는 1341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여러 자녀들 중 두 장성한 아들들을 남겼지만 그들이 모두 원로 아미르들에게 폐위당한다.[1]
카이로 시타델에서 태어났다. 부왕 칼라운은 킵차크계 튀르크 맘루크 맘루크였고 모친은 몽골계 여인이었다. 앗 나시르는 튀르크인 노예이던 카완드 토가이를 해방시켜 결혼하였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무려 43년간 집권 (친정만 따지만 32년)하며 평균 재위 기간이 5년여에 불과한 역대 맘루크 술탄들 중 최장기간 통치하였다. 따라서 맘루크 조의 역사를 공부한다면 무려 1/6에 해당하는 그의 치세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름 오래 재위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술탄들과 비교해봐도 압도적인 기간이다. 카이트베이 (28년), 바이바르스 (17년), 바르쿠크 (17년), 바르스바이 (16년). 깐수 (15년) 등. 맘루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부왕 칼라운도 재위기간은 11년에 불과?하였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권신들의 허수아비였지만 외침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무신들을 숙청한 후 장기간 집권하며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고려 현종에 비견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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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맘루크 조는 1363년 샤아반 2세의 즉위 전까지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