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잔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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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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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란 가잔.jpg
파일:이란 가잔칸.jpg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가잔 칸
쿠란을 탐독하는 가잔 칸 내외
1. 개요
2. 생애
2.1. 불교와 기독교 박해
2.2. 반대파 귀족 숙청
2.3. 재상: 라시드 앗딘 함다니
2.4. 시리아 원정 (vs 맘루크 왕조)
2.5. 사망
3. 대외 관계
4. 종교적 관용
5. 최초로 지하드 대상이 된 무슬림
6. 기타


1. 개요[편집]


페르시아어, 아랍어 غازان خان
몽골어 Газаан хаан
영어 Mahmud Ghazan Khan

생몰 1271년 11월 5일 ~ 1304년 5월 17일
재위 1295년 10월 4일 ~ 1304년 5월 11일

일 칸국의 7대 칸. 바이두 칸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고, 집권 전후로 벌어진 여러 반란을 진압하며 내부를 안정시켰다. 가잔 칸은 애매했던 일 칸국의 정체성과 체제를 규정한 군주이다. 우선 도량형과 동전을 통일하고, 관료제를 확립하였으며 인구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이슬람을 일 칸국의 국교로 삼아 몽골식이었던 국가 체제를 이란식으로 바꾸었다.

또한 문화와 예술 사업에도 공을 들여 라시드 앗딘 타빕에게 '최초의 세계사'라 할 수 있는 집사 (자미 앗-타와리크)를 저술하게 끔 하였다. 다만 국가 안정에 힘입어 추진한 시리아 원정에서 맘루크 왕조의 결사 항전과 동맹인 십자군과의 엇박자로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일 칸국을 이슬람화한 가잔 칸은 현지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았고, 지금까지도 이란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가잔 칸 이란.jpg

가잔은 아르군 칸오이라트계 되르벤 부족 출신 쿠틀룩 에게치의 장남이며, 아바카 칸의 손자이다. 어린 시절 가잔과 동생 올제이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로 길러졌고, 중국인 교사로부터 중국어와 몽골어 및 불교 등을 배웠다. 부친 아르군이 칸으로 즉위하자, 가잔은 호라산의 부왕으로 임명되어 나우루즈의 반란을 진압하고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여러 전과를 올리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1291년 부왕 아르군 칸이 사망하자 동생이자 가잔 본인에게는 숙부가 되는 게이하투 칸이 즉위하였고, 이에 가잔은 불만을 가졌지만 일단 충성을 유지하였다. 1294년 니샤푸르에 포위되어 있던 나우루즈가 복종을 표하자 가잔은 그를 전격 사면하였다. 그리고 1295년 게이하투 칸이 암살되고 바이두 칸이 허수아비로 옹립되자 가잔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렇게 내전을 벌이던 도중 가잔은 나우루즈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결국 그의 도움으로 바이두를 사로잡아 죽이고 칸위에 올랐다.

2.1. 불교와 기독교 박해[편집]


1295년 10월 4일, 외곽에서 바이두를 처형한 후 가잔 칸은 수도 타브리즈로 개선하여 승리를 알렸다. 가잔의 즉위와 함께 넓은 영지와 나이브 (재상)의 권력이 주어진 공신 나우루즈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스스로 칙령을 내려 이슬람 외의 종교에 대한 박해에 나섰다. 이전 수도 마라게의 네스토리우스파 성당이 약탈당하였고, 타브리즈와 하마단의 성당들은 파괴되었다. 특히 우상 숭배라 여겨진 불교 사원들이 다수 파괴되었고, 이로써 반세기 가량 존속했던 이란 불교는 소멸하고 말았다. 가잔은 나와루즈의 정책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2.2. 반대파 귀족 숙청[편집]


종교 박해와 함께 나우루즈는 이전 정권의 충성파 귀족들을 연이어 처형하였다. 맘루크령 알레포로 피신한 훌라구의 사위 타라가이만이 목숨을 부지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숙청은 귀족들의 불안을 야기하였고, 1295년 말엽 차가타이 칸국의 두와 칸이 호라산을 침공했을 당시 파견된 소가이[1]와 에센 테무르가 이를 계기로 자신들 역시 숙청당할 것이라 여겨 탈주했다가 나우루즈에게 붙잡혀 이듬해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가잔에게 사면을 받은 보르지긴 왕공 아르슬란 역시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역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1296년 3월) 그후 한때 바이두를 옹립했다가 배신한 아나톨리아 (룸) 부왕 타가차르가 반역자로 선포되었고, 그는 토카트에서 농성했으나 사로잡혔다. 타브리즈로 압송된 타가차르에 대해 가잔은 내키지 않았지만, 중국 황제들이 전임자를 배신한 건국 공신들을 처형한 예시를 들며 그를 처형했다 한다.

하지만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1296년 가을에는 잘라이르 부족의 발투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가잔 칸의 매제 쿠틀루그샤 휘하 3만 대군이 투입된 후에야 진압되었다. 타브리즈로 압송된 발투는 이듬해 처형되었고, 반란을 도운 제후국 룸 셀주크 술탄 메수트 2세 역시 체포되어 하마단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1297년 봄, 실권자 나우루즈가 사힙 디반 (총리) 사드렛딘 칼라디에 의해 맘루크 술탄 라긴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자로 지목되었다.[2] 나우루즈의 폭주를 경계하던 가잔 역시 그 일족을 대거 처형한 후 친히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으로 향하였다. 니샤푸르 전투에서 패배한 나우루즈는 헤라트카르트 왕조에 의탁했으나, 후자는 그를 가잔에게 넘겼다. 그해 8월 13일 나우루즈는 처형되었고, 1298년에는 재상 사드렛딘 잔자니가 뒤따랐다. 이로써 4년여간 지속된 일 칸국의 혼란이 종식되었고, 가잔 칸은 전권을 장악하였다.

2.3. 재상: 라시드 앗딘 함다니[편집]


대대적인 숙청 후 가잔은 유대계 무슬림 라시드 앗딘 함다니를 와지르 (재상)에 봉하였고, 그는 20년간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가잔은 라시드 앗딘에게 내정 뿐만 아니라 몽골족과 왕조에 대한 역사서 편찬을 맡겼는데, 이로써 탄생한 것이 바로 자미 앗-타와리크 (집사)였다. 본래 몽골사만 다루던 저서였지만, 점차 살이 붙으며 아담에서 출발하여 구대륙 역사 전반을 다룬 '최초의 세계사'로 확장되었다. 집사에 첨가된 세밀한 삽화들은 후세에게 중세 이슬람사와 몽골군, 일 칸국 황실 등을 재구성할 수 있는 훌륭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저술이 완성된 것은 후임인 올제이투 칸의 치세였다.

2.4. 시리아 원정 (vs 맘루크 왕조)[편집]


파일:몽골 이란 1.jpg
몽골-맘루크 전쟁에서 일 칸국 최대의 승리였던 3차 홈스 전투

권력을 공고히 한 가잔 칸은 비로소 외부로 눈을 돌릴 수 있었고, 조부 아바카 칸이 이루지 못한 시리아 정복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299년 봄 아나톨리아의 신임 총독 술레미쉬가 반란을 일으켰고, 쿠틀루그샤가 재차 진압하였다. 맘루크 조의 도움으로 재차 봉기했으나 사로잡힌 술레미쉬는 그해 9월 타브리즈로 압송되어 최고형인 화형에 처해졌다.[3] 다만 잔당들이 맘루크 왕조에 망명하였고, 반란 말엽인 1299년 여름 일단의 맘루크 별동대가 일 칸국령 국경 도시인 마르딘을 기습, 점령하고 파괴와 방화를 자행한 후 돌아갔다. 일 칸국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맘루크 군은 라마단 기간이었음에도 모스크에서 술을 마셨다 한다. 분노한 가잔 칸은 아르메니아 및 키프로스 왕국에 협공을 제안하였고,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파트와를 받아낸 후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친히 시리아로 진격하였다. 1299년 10월, 몽골군은 알레포를 무혈 점령하였다.

알레포에서 가잔 칸은 봉신인 아르메니아의 하이톤 2세 및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레바논에 상륙한 키프로스 병력 등의 '십자군'과 합류하였다. 한편 홈스에 집결해 있던 맘루크 군은 얼마전 오이라트 부대의 폭동으로 섭정 바이바르스 알 자샨기르가 부상당하는 등 사기가 낮았다. 가잔 칸은 적에게 동선을 숨기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였고, 성탄 전야에 벌어진 3차 홈스 (와디 알-카잔다르) 전투에서 몽골-십자군은 거짓 후퇴를 통해 승리하였다. 전투 직후 홈스와 다마스쿠스가 항복하였고, 역사적인 우마이야 대사원에서는 가잔 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1300년 2월, 가잔은 말먹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4] 다음 겨울에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회군하였다. 아직 함락되지 않은 다마스쿠스 시타델 포위를 위해 가잔 칸이 남겨둔 물라이 휘하 1만 몽골 기병대는 한때 예루살렘을 지나 가자까지 습격했지만, 1300년 5월 맘루크 군이 북상하자 역시 철수하였다.

파일:1200px-Mongol_raids_into_Syria_and_Palestine_ca_1300.svg.png
파일:몽골 이란.jpg
가잔 칸 시기 2차례의 시리아 원정 (1299-1300, 1303)
두 원정 사이에 감행된 쿠틀루그샤와 십자군의 연합 작전 (1300-1301)

1300년 7월, 16척의 키프로스 함대가 시리아 해안을 습격할 때에 가잔 칸의 특사 치알 역시 동승하였다. 그후 십자군은 타르투스 앞의 루아드 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가잔 칸의 귀환을 기다렸다. 1301년 2월, 쿠틀루그샤 휘하 6만 몽골군이 십자군과 함께 시리아로 진군하였다. 쿠틀루그샤는 다마스쿠스에 몽골인 총독을 두고 요단강 일대에 2만 병력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가잔 칸이 차가타이 칸국의 카이두와의 대결에 전념하며 시리아 원정을 연기하자 쿠틀루그샤는 회군하였고, 십자군 역시 루아드 섬에 소수의 수비대만을 남긴 채로 돌아갔다. 가잔 칸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예루살렘 할양을 대가로 파병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잔 칸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남겨진 루아드 섬은 1302년 9월, 맘루크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제서야 동부 전선이 정리된 가잔 칸은 나폴리 왕국에 사절을 보내었고, 샤를 2세는 돌아가는 사절편에 구알테리우스 데 라벤델을 보내었다.[5]

1303년 봄, 아르메니아측 지원군까지 합쳐 8만 대군을 소집한 가잔 칸은 쿠틀루그샤에게 지휘를 맡겨 시리아로 보내었다. 쿠틀루그샤는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주민들은 결사 저항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칼리파와 술탄을 대동하고 당도한 맘루크 군과 몽골군은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격돌하였다. (마르즈 앗-사파르 / 샤카브 전투) 3일에 걸친 처절한 전투 끝에, 초반에는 몽골군이 우세를 점하였으나 맘루크 군의 분투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마지막 날 몽골군이 물을 마시려 언덕에서 내려오자 맘루크 군이 총공격을 가하여 섬멸하였다. 결과는 8만 대군 중 수천만이 생환한 대패였고, 충격을 받은 가잔 칸은 코피를 흘리고 쓰러졌다고 한다. 한편, 재판에 넘겨진 패장 쿠틀루그샤는 참석자 전원에게 침 세례를 받은 후 직위해제되어 길란으로 유배되었다. 마르즈 앗-사파르 전투를 마지막으로 일 칸국은 더이상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 침공에 나서지 않았고, 변경에서의 국지전만이 이어졌다.

2.5. 사망[편집]


파일:이란 가잔 칸.jpg
이란 동북부 샤루드 인근 바스탐에 위치한 가잔 칸 영묘

패전에 의한 충격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가잔 칸은 1304년 1월, 아끼던 아내 카라문이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욕을 잃었다. 라시드 앗딘에 의하면 그후 가잔 칸은 '인생은 감옥이고, 이익이 하나 없다'는 말로 우울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한편 슬하에 아들이 없던 가잔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한 동생 올제이투를 후계자로 낙점하였다. 이미 1303년 9월 딸 올제리 쿠틀루그를 그의 아들 비스탐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고, 이듬해 4월 병세가 악화되자 공식적으로 올제이투를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1304년 5월 17일 가잔 칸은 이란 북부 카즈빈 인근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엘부르즈 산맥의 라르 다마반드 협곡에서 씻긴 후 이란 동북부 비스탐의 영묘에 매장되었다. 사후 예정대로 동생 올제이투가 칸으로 계승하였다.

3. 대외 관계[편집]


1301년 가잔 칸은 중국에 있는 훌라구 칸의 영지에서 세금을 걷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였고, 동시에 대칸 테무르에게 조공하였다. 이 외에도 일 칸국과 원나라 사이에는 종종 왕래가 있었고, 가잔 칸의 궁정에도 중국인 의사들이 상주하였다. 맘루크 왕조에 대한 협공을 위해 서방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가잔의 궁정에는 피사인 이솔과 부스카렐로 디 기졸피 등의 기독교도 관료도 있었다.

4. 종교적 관용[편집]


치세 초반의 종교 박해로 묻히긴 했지만, 가잔 본인은 꽤나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에도 몽골 문화 보존에 힘썼고, 제국 내부의 쉬아 공동체와 제후국인 조지아 및 아르메니아 왕국의 기독교 신앙을 존중해주었다. 치세 초반의 박해 당시 불교 승려들이 살아남기 위해 거짓으로 이슬람 개종을 했다가 배교한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고 티베트나 인도 등 불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몽골법인 야사 역시 유지되었으며, 몽골인 샤먼 (무당)들의 정치적 위상 역시 여전하였다. 또한 나우루즈가 벌인 종교 박해도 가잔이 기독교도에 대한 지즈야를 면제시키는 칙령으로 중단시킨 것이었고,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 마르 야발라하 3세를 복위시켰으며 1298년 7월 타브리즈의 교회를 파괴한 이들을 처벌하였다.

5. 최초로 지하드 대상이 된 무슬림[편집]


가잔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한발리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그가 진정으로 '샤리아를 따르는' 무슬림이 된 것이 아니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그 배경에는 가잔 칸의 시리아 원정이 있다. 1300년 1월, 다마스쿠스 북쪽 앗 나브크에 있던 일 칸국 진영에 맘루크측 사절단이 당도하였다. 이븐 타이미야를 포함한 이맘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가잔에게 다마스쿠스 시타델에 대한 공격의 중단을 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301년 8월 이븐 타이미야를 포함한 이맘들은 다마스쿠스로 파견된 일 칸국의 카디 디야 웃딘 무함마드를 포함한 몽골측 사절단을 만났다. 두 경우 모두 맘루크측 이맘들은 감히 가잔 칸을 언급하지 못했는데, (둘중 한 경우에서) 이븐 타이미야만이 대놓고 그를 비판했다고 한다.

당신은 무슬림이라 주장하고 무앗다딘 (무엣진), 무프티, 이맘, 셰이크들을 지니고 있다 자처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같은 무슬림인) 우리를 침공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나라에 온 것입니까? 당신의 부친과 조부 훌라구는 비록 불신자였지만, 적어도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고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슬림이라) 약속을 한 후, 그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ㅡ 이븐 타이미야, 가잔 칸에게


이븐 타이미야 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집트 무슬림 대부분은 가잔을 혐오하였다. 당대의 학자 이븐 하자르 알-아스칼라니는 그의 저서 무자마아 앗-슈유크에서 가잔 칸이 시리아 원정 당시 배교자였으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을 위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잔 칸은 기독교 국가들과의 동맹을 선호하였고, 맘루크 군대를 학살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반발 기류는 이븐 타이미야가 가잔 칸이 샤리아 대신 야사를 따르는,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는 배경이 되었다.

6. 기타[편집]


언어적으로 특출했다고 전해진다. 구사 가능한 언어만 해도 몽골어, 중국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에 이르렀다고. 취미도 다양했는데, 그중에는 신발 제작 과 화학 실험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쟁 중에는 뜨개질과 장신구 만들기 등의 소일로 스트레스를 달랬다고 한다.

가잔은 대다수의 몽골-튀르크 군주들이 그랬듯 개인적으로 수피즘에 매료되었고, 수피 의복인 양가죽 상의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1303년 수피 셰이크들이 자신을 폐위시키고 사촌 알라 피렌그를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는등 양측의 관계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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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쉬무트 장군의 아들[2] 맘루크측 사료에 의하면 사실이었다 한다[3] 사실 이슬람에서 화형은 금지되어 있다[4] 실제로 맘루크 조가 얼마 있지도 않은 시리아의 목초지를 전부 태워버리는 청야 전술을 벌였다[5] 이듬해에도 가잔 칸은 부스카렐로 데 기졸피를 통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협공을 제안했으나 별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한편 가잔은 아제르바이잔 남부의 숙영지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