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드 샤 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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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니 왕조 초대 샤
아흐마드 샤 두라니


파일:두라니.jpg

이름
아흐마드 샤 압달리 두라니

출생
1720년 ~ 1722년
사도자이 술탄국 헤라트[1]
사망
1772년 6월 4일 (향년 49-52세)
파일:두라니 왕조 국기.svg 두라니 왕조 마루프[2]
재위 기간
두라니 왕조 샤
1747년 ~ 1772년 (25년)
대관식
1747년 7월
후임자
티무르 샤 두라니
부모
아버지 : 모하마드 자만 칸 압달리
어머니 : 자르고나 안나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일생
3.1. 인도 원정
4. 죽음
5. 여담



1. 개요[편집]


두라니 왕조의 초대 샤.

아프간인들의 국민 영웅.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대부분의 아프간인들이 파벌을 가리지 않고 존경하는 몇 안되는 역사적 위인들 중 하나다. 미국건국의 아버지들, 튀르키예아타튀르크 같은 존재인 것. 나디르 샤의 죽음 직후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을 통합한 뒤 파키스탄, 페르시아 일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용맹함과 동시에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관대한 편이었기에 인성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딱히 없는 위인이었다. 그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고 그가 세운 두라니 왕조는 아프간인들의 첫 민족국가이기도 했다.

어찌나 아프간인들이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존경하는지, 발리우드에서 2019년 제작한 인도 영화 '파니파트'에서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잔혹하고 교활한 인물로 묘사하자[3] 아프간들이 단체로 분노해 항의를 퍼부을 정도였다. 영화 제작자들은 해당 영화가 다큐멘터리나 역사적 고증을 따른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당시 아프간 외무부까지 유감 성명을 발표하고[4] 뭄바이 주재 아프간 총영사 나심 샤리피가 항의 트윗을 올릴 정도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인도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최대 후원국들 중 하나였음에도 아프간이 이렇게 강하게 나갔다는 건 그만큼 아흐마드 샤 두라니에 대한 존경심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2. 일생[편집]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아버지는 모하마드 자만 칸 압달리라는 사람으로, 헤라트의 총독이자 파슈툰계 압달리족의 우두머리라는 자리를 꿰찬 나름 끗발있는 인물이었다. 어머니 역시 알라코자이 부족장의 딸로 상당히 권력있는 가문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1722년 경 즈음에 아버지가 사망할 무렵 헤라트에서 태어났다.[5]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1729년 6월, 압달리 부족은 떠오르는 전쟁의 신 나디르 샤가 쳐들어오자[6] 별 수 없이 무릎을 꿇어 아프샤르 왕조 아래로 들어간다. 하지만 압달리 부족은 곧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되찾고 헤라트와 마샤드 일대를 수복했다. 반란의 세력이 커져 나디르 샤의 동생 이브라힘마저 꺾을 수준이 되자 나디르 샤가 직접 나서서 마샤드로 다시 쳐들어왔다. 딴 건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천재나 다름없던 나디르 샤를 이길 수는 없었고, 반란군에 속해있던 젊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일단 칸다하르 지방으로 도망쳐 반쯤 포로 신세로 붙잡혀 살았다.

압달리 부족을 제압한 나디르 샤는 동화 정책을 위하여 1729년부터 압달리 부족원들을 자기 군대에 편입시키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압달리 부족이 자연스럽게 편입되어가던 도중, 나디르 샤는 1738년 칸다하르를 정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볼모로 잡혀살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해방했다. 해방된 두라니는 나디르 샤 휘하로 들어갔고, 두라니의 형제 줄피카르는 마잔다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중용받았다고 한다. 기존에 칸다하르를 장악하고 있던 길지 부족은 쫒겨났고 압달리 부족이 대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갔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뛰어난 군재를 선보이며 나디르 샤의 총애를 얻는 데까지 이른다. 아흐마드 샤의 군재를 높이 산 나디르 샤는 그에게 압달리 부족으로 구성된 4,000여 명 가량의 기병대를 맡겼는데, 이 기병대는 나디르 샤가 1738년 무굴 제국에 쳐들어갈 때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나디르 샤가 당시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꽤나 신임했던지 무굴 제국을 정복한 나디르 샤가 델리의 황궁에서 아흐마드를 조용히 불러 '너가 내 자리를 이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어디까지나 야설이니만큼 아흐마드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과장된 스토리일 수는 있지만, 확실한 건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꽤나 뛰어난 군사령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아껴주던 나디르 샤는 1747년 6월 개인 호위병들에게 암살당했다. 군사적으로는 극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내치가 워낙 막장인데다가 성격도 좋은 편이 못되어서 호위병들의 원한을 샀던 것. 게다가 이란의 쿠르드족 반란군들을 진압하던 도중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근위병들을 죄다 죽여버리라고까지 지시했는데 이를 계기로 목이 잘려 죽어버린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기겁해서 압달리 병사들을 이끌고 샤를 구하러 왔지만 그가 나디르 샤의 숙영지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이미 목이 잘려버린 나디르 샤의 시신 뿐이었다. 나디르 샤의 죽음을 애도한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시신을 수습하고 칸다하르로 돌아갔는데, 이 철군 과정에서 자연스레 압달리 병사들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왕'으로 추대되어 두라니 왕조를 건국한다.[7]


3. 최후의 아프간계 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두라니 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일단 나디르 샤가 무굴 제국에서 약탈해왔던 막대한 부를 그대로 흡수해[8] 당시 서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들 중 하나였고, 나디르 샤의 급작스런 죽음 탓에 페르시아 전체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4천여 명에 달하는 정예병들을 그대로 온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단점도 있었다. 4,000여 명에 달하는 군세라지만 그 중에는 길지 부족처럼 압달리 부족 출신이 아닌 병사들도 있었고 심지어 타지크인, 키질바시, 하자라족, 우즈벡인, 발루치족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다만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이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후술할 인도 원정으로 서남아시아의 패권을 휘어잡는 데까지 이른다.

그는 제일 먼저 가즈니 지방을 정벌했으며, 카불페샤와르 지방을 전통적인 강자 무굴 제국에게서 뺏어왔고 인더스 강 유역까지 이르는 막대한 영토를 그대로 뜯어왔다. 1750년에는 옛 본거지 헤라트를, 1751년에는 바다크샨을, 1752년에는 카슈미르 지방이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는 호라산 지방으로도 2번 원정을 펼쳤는데, 1751년에 벌인 첫 원정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1754년에 떠난 2차 원정에서는 호라산의 중심지 마슈하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마슈하드를 다스리던 기존 통치자이자 나디르 샤의 손자였던 파로흐 샤는 그대로 호라산 지방을 다스리도록 허락받았지만, 그 대가로 상당한 크기의 영토를 아프간인들에게 할양해야했다.[9] 1755년 6월에는 니샤푸르를 공격해 7일만에 함락해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3.1. 인도 원정[편집]


파일:panipat-og.jpg
제3차 파니파트 전투

아흐마드 샤 두라니 역시 나디르 샤를 롤모델로 삼아 인도로 여러 차례 원정을 떠났다. 매우 부유하지만 전성기가 지나 스스로 지킬 힘이 없던 무굴 제국은 아흐마드의 입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었기 때문. 그는 페샤와르 지방을 기반으로 1748년부터 1767년까지 무려 8차례나 원정을 벌였다. 1748년에 떠난 첫 원정에선 무굴 제국의 최고 대도시들 중 하나이던 라호르를 흡수했으며, 1749년에는 라호르 주변의 펀자브 일대를 먹어치웠고 같은 해에 무굴 황제로부터 신드 지방과 인더스 강 유역을 싸그리 뺏어왔다. 당시 무굴 황제이던 무함마드 샤는 당연히 주기 싫었지만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수도 델리가 약탈당할 게 뻔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무굴 제국은 변변찮은 싸움 없이 인더스 강 일대와 파키스탄 일대 전체를 그대로 두라니에게 헌납했다.

인도 원정 도중 벌인 전투 중에서는 3차 파니파트 전투가 가장 유명한 편이다. 일단 파니파트 전투를 이해하려면 당시 인도의 상황을 간략히 알아야하는데, 당대 인도는 기존 패권국 무굴 제국이 망해가고 마라타 제국바지라오 1세 아래에서 힘을 기르던 상황이었다. 마라타 제국은 무굴 황제와 '아함디야 조약'을 맺어 인도 북부 대다수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무굴 황제의 영향력은 델리 안으로만 한정했는데, 이렇게 인도를 먹어치운 마라타 제국과 새로운 강자 두라니 왕조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라타 제국이 우위였다. 마라타 제국군은 아흐마드 샤의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를 쫒아내고 심지어 페샤와르까지 북상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이에 놀란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57년 직접 군대를 몰고 남하하며 상황이 조금씩 바뀐다.

칼을 갈며 기회를 엿보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1761년 마라타 제국과 전루를 벌이기로 결심한다. 1761년 1월에 델리 인근 파니파트에서 '제3차 파니파트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두라니 군대가 승리를 거두며 마라타 제국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된다. 이 전투로 인해 두라니 왕조는 일시적으로나마 북인도의 패권국으로 떠올랐고 무굴 제국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아흐마드 샤 두라니 사후 두라니 왕조가 급속도로 몰락하는 동시에 영국 같은 유럽 열강들이 인도에 진출하며 두라니 왕조의 헤게모니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4. 죽음[편집]


파일:아흐마드샤.png
칸다하르 도심의 아흐마드 샤 영묘

위대한 왕, 아흐마드 샤 두라니,

그가 집무를 보는 것은 저옛날 호스로 1세에 비견될 정도였고,

그의 시대에, 그의 영광과 위대함의 경외에,

암사자가 제 젖을 먹여 사슴을 키웠으며,

그의 대적들의 귀에 사방에서 그의 날카로운 단도의 책망이 들려올지니,

필멸의 집을 향하여 그가 떠난 날,

그 날은 히즈라 1186년(그레고리력 1772년)이니라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무덤 비문

아흐마드 샤는 1772년에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1766년 카불에서 승마 도중 낙마해 코에 상처를 입었다는 말도 있고, 전투 도중 화약에 폭발한 벽돌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어쨌든 아흐마드 샤는 코에 상처를 입었는데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라 이 상처가 곪아 왼쪽 눈, 점차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의사는 병의 빠른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시원한 마르가 평야 일대에서 요양하라 권고했지만 병세 악화를 막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한참 시름대던 아흐마드 샤는 결국 1772년 6월 4일 칸다하르 동쪽에 있는 도시 마루프에서 숨을 거뒀으며, 그의 시신은 칸다하르 지방에 안장된다.

의외로 북인도 지방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두라니 왕조는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북인도의 패권을 휘어잡았지만 의외로 더 남하하는 건 꺼렸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와 직접적으로 충돌할 일은 없었다. 특히 영국의 핵심 이권지대였던 부유한 벵골 지방은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아서 영국과 직접 마찰이 생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영국 역시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군사적 역량을 잘 알고 있어서 그를 '왕중왕'으로 인정하는 한편 카자르 왕조에 사절을 보내 두라니 왕조가 더이상 인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서쪽에서 견제를 부탁하기도 했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 역시 영국과 대놓고 마찰하는 일은 꺼렸던 덕분에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재위기에 두라니 왕조는 나름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다만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후계 군주들은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19세기 말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정복한 영토 대부분이 외세에 넘어갔고, 아흐마드 샤의 후계자 티무르 샤 두라니는 내전을 막는 데에도 급급한 수준이었다. 티무르 샤, 자만 샤 두라니 등이 연이어 인도로 원정을 계속해 인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안에서 무너지는 두라니 왕조가 이를 성공시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만 샤 두라니는 그 형제 마흐무드 샤 두라니에게 폐위당했고, 이후 두라니 왕조는 서남아시아 왕조의 전통(...)이나 다름없는 제위계승전쟁에 휘말리며 급속도로 쇠락한다. 이같은 혼란기는 1820년대에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등장해 두라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을 세우기까지 약 50년 가까이 계속된다.


5. 여담[편집]


2023년 새로 발행되는 아프가니스탄 50아프가니 지폐에 도안으로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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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헤라트.[2]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마루프.[3] 실제론 매우 자비로운 인물이었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기도를 마친 뒤 포로들을 싸그리 죽여버리는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인도를 침공한 무자비한 약탈자로 묘사되는 등 논란이 될만한 장면이 몇개 있긴 했다. 이는 영화가 인도의 민족주의 사학에 따라 '인도를 지키는 마라타 제국 VS 인도를 쳐들어온 아프간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구도를 만들려 했기 때문.[4] 이때까지는 아직 탈레반 정부가 아니라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설립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였다.[5] 무굴 제국이 통치하던 물탄 지방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6] 나디르 샤는 페르시아 최후의 불꽃, 혹은 페르시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불릴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다만 그 좋은 군사 재능과는 별개로 내치 능력은 거하게 말아먹었던 바람에 얼마 못가고 암살당했다.[7]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추모와는 별개로 상당히 영악하게 행동했다. 죽은 나디르 샤의 시체에서 페르시아 황제의 인장을 벗겨내고 그의 팔에 장식되어있던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빼내갔다.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환이었다.[8] 나드라 샤가 이때 무굴 제국이 소유하고 있던 상상을 초월하던 부를 어찌나 싹싹 긁어왔던지 무굴 제국은 나디르 샤의 침공 이후 사실상 망한 상태로 전락한다.[9] 참고로 이 파로흐 샤는 꽤나 오래 살아남았지만, 하필이면 얼머 가지 않아 포악한 성격의 아가 모하마드 칸이 쳐들어와 나디르 샤가 숨겨놓은 보석의 행방을 추궁하며 고문한 탓에 그 휴유증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