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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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칸다하르.jpg
시가지 서부 옛 미군 시설에서 바라본 전경
파일:칸다하르 2.jpg
1738년 나디르 샤의 파괴 시까지 칸다하르 시가지가 있었던 현 시가지의 서남쪽 외곽 일대

칸다하르 (아프가니스탄)





1. 개요
2. 역사
2.2. 이슬람 정복과 저항
2.3. 몽골의 침입과 재건
2.4. 무굴 vs 사파비
2.5.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2.6. 근현대
2.7. 현대



1. 개요[편집]




카불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칸다하르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대략 60만 명이고, 대부분 파슈툰 족이다. 전통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중심지이자 이란 (호라산)과 북인도를 이어주는 실크로드 거점 도시였다. 그에 걸맞게 지명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현지 발음인 '스칸다르'에서 왔다 하며[1], 헬레니즘기에는 여러 알렉산드리아 중 하나였다.

18세기 들어서는 아프간의 첫 자체 독립국인 호타키 왕조, 근대 아프간 정체성을 형성한 두라니 제국의 수도로써 상징성이 크다. 현재에도 칸다하르는 남쪽으로는 파키스탄퀘타, 동북으로는 카불, 서북으로는 헤라트로의 교통로가 이어지며 파슈툰 족 거주 지대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파슈툰 중심 도시답게 탈레반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자 양귀비 재배의 거점이라는 오명도 있다.

2. 역사[편집]


파일:19 칸다하르.jpg
19세기 칸다하르 구도심을 그린 삽화

칸다하르 도시 외곽에는 문디가크라는 거주지가 있었고, 메디아아케메네스 제국의 아라코시아 총독부가 위치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라코시아 지방은 조로아스터교세가 강했기에 페르시아 인들과 관계가 좋았다.

2.1. 헬레니즘 시대[편집]


파일:칸다하르 1.jpg
칸다하르 구도심인 아라코시아의 알렉산드리아 전경. 1738년까지 이곳이 칸다하르 시가지였다.

칸다하르는 기원전 329년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알렉산드리아 심시티 식민도시 건설의 일환으로 '아라코시아의 알렉산드리아' 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곳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왕의 각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인도 그리스 왕국 하에서의 번영과 쿠샨 왕조의 지배를 거친 후, 칸다하르는 지방 샤시 왕조의 지배를 거쳐 사산 제국의 손에 들어갔다.

2.2. 이슬람 정복과 저항[편집]


에프탈의 침입이 가신 6세기 말부터 칸다하르는 시스탄 지방의 중심부로 성장하지만 7세기 중반에 아랍 군대에게 점령 당했다. 그러나 이슬람 내전(피트나)을 틈타 카불 샤시의 힌두교도인 준빌 왕조가 칸다하르를 통치하였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가 8세기 초에 잠깐 지배하기도 했지만 곧 쫓겨났고, 결국 870년에 이란 계의 사파르 왕조가 도시를 정복하며, 칸다하르의 이슬람 화가 진전되었다.

2.3. 몽골의 침입과 재건[편집]


이후 칸다하르는 가즈니 왕조, 구르 왕조의 지배를 받은 후 몽골 군대에게 점령된 후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다만 그 후로 재건되어 한 세기 후인 1333년에 이 곳을 지나간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칸다하르를 크고 부유한 도시라고 기술하였다.

이후 티무르 제국 치하에서 칸다하르는 번영하였고, 티무르 대왕의 손자 피르 무함마드는 1383년부터 이 곳에 궁정을 차렸고, 짧은 치세(1405 - 1407년) 동안 제국의 중심부가 되기도 하였다.


2.4. 무굴 vs 사파비[편집]


16세기 초에는 카불바부르가 칸다하르를 점령하였고, 1521년에는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나크가 힌두스턴에서 메카로 가는 여정에서 도시를 지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에게 인도로의 관문인 칸다하르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은 수르 왕조에게 북 인도를 뺏기고 이란의 사파비 왕조로 피신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후마윤의 선물로 칸다하르는 사파비 조의 동쪽 변경 도시가 되었다. 다만 1590년에 그의 아들 악바르 대제의 협상으로 칸다하르는 다시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가 죽자 사파비 군대는 칸다하르를 포위하였으나(1605 - 1606년)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1649 - 1653년에 걸친 무굴 - 사파비 전쟁에서 도시는 다시 이란의 영토가 되었다. 부하라 칸국의 카불 공격으로 무굴 제국이 힌두쿠시 산맥 이북에서 철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2.5.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편집]


파일:미르와스 칸.jpg
시가지 서쪽 외곽에 위치한 호타키 조의 창건자 미르와스 칸의 영묘.
파일:아흐마드샤.png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두라니 조의 창건자 아흐마드 샤의 영묘.[2]

도시는 1709년에 파슈툰 길자이족의 봉기와 함께 호타키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나 1738년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되어 구도심이 크게 파괴되었다. 나디르 샤는 자신이 파괴한 구도심 옆에 자신의 이름을 딴 나데라바드라는 신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1747년에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그의 부관이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현 아프가니스탄의 전신인 두라니 왕조를 개창, 칸다하르를 수도로 삼았다. 1761년 3월, 아흐마드 샤는 현재의 위치에 도시를 재건하였다. 비록 1776년에 수도는 카불로 옮겨졌지만, 칸다하르는 여전히 아프간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19세기 초엽 두라니 조가 내전에 돌입하자 칸다하르에서는 1818년 바라크자이 왕조의 인척인 셰르 딜리 칸이 자립하여 칸다하르 공국을 세웠다. 1823년 세르 딜리 칸이 사망하자 그의 네 동생들이 내전을 벌이며 칸다하르는 성벽이 방치되는 등 쇠락하였다. 1826년에는 시크 왕국에 대한 지하드를 주장하던 인도 무슬림 학자 세이드 아흐마드 샤히드가 칸다하르에 당도하여 무자헤딘을 모집하자 4백여가 호응하였고, 아흐마드는 그렇게 모인 병력과 남하하여 페샤와르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으나 칼리파를 칭하는 등의 행보로 무슬림 기득권층에서도 반감을 산 끝에 결국 1831년 카슈미르에서 시크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와 함께 1만의 무자헤딘과 전멸하였다.[3]

1839년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손쉽게 점령되었다. 다만 케르만으로 추방되었던 코한 딜리 칸이 카불 봉기로 영국군이 철수한 1842년에 칸다하르로 돌아와 재집권하였고, 혼란을 틈타 시스탄발루치스탄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헤라트 에미르 국과 대립하던 코한 딜리 칸이 1855년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아들들이 내전을 벌였고, 그 틈에 바라크자이 왕조의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원정하여 일대를 병합하였다. 바라크자이 왕조의 아프가니스탄 에미르국 하에서 칸다하르는 간만에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2.6. 근현대[편집]


파일:칸다하르 영국.jpg
1880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칸다하르 성채 앞에 주둔한 영국-인도군

1880년 6월, 영국의 2차 아프간 침공 당시 칸다하르는 격전지 중 하나였다. 7월 마이완드에서의 첫 전투에서는 아윱 칸의 아프간 군이 승리했으나, 9월의 칸다하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아프간을 보호국화 한 후, 약 1년간 칸다하르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영국 여왕을 새긴 동전을 발행하였다. 1929년 아프간 내전 당시 찬탈자 하비불라 칼라카니는 칸다하르를 봉쇄하였고, 이로써 주민들은 그해 10월 나디르 칸이 해방할 때까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치세에 칸다하르는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겪었다.

1960년대에는 (카불과 바그람 등에 비행장을 건설하던) 소련을 견제한 미국이 공항을 세워주었다. 이렇게 아프간에 이롭던 건설 내전은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함께 재앙으로 변했고, 무자헤딘의 근거지였던 칸다하르는 소련군의 무자비한 포격에 큰 타격을 받았다. 1984년 7월에만 3백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소련 철수 후에는 1992년 무자헤딘 대장 굴 아가 셰르자이가 군벌로 군림했으나 불안정하였고, 전쟁 전 20만에 달하던 인구는 2만 5천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다 1994년 8월, 탈레반이 점령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으며 또다른 재앙이 시작되었다.

2.7. 현대[편집]


파일:칸다하르 3.jpg
2005년 세워진 칸다하르 대학 모스크

아프간 전쟁에서 미군의 주요 기지가 위치하였다. 그래서인지 칸다하르 학살 사건이란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와 기나긴 전쟁에 도저히 이길 기미가 없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느낀 미군이 철수하여 상당수 기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다. 다만 이 철수의 반작용으로 안 그래도 개떡 같던 치안이 더 개떡 같아져, 현재 아프간 제1의 막장이라는 헬만드 주 급의 지역이 되어버렸다.

칸다하르시에서의 교전과 함락 과정을 그린 영상

여기도 헤라트, 라쉬카르가[4] 처럼 정부가 간신히 통제하는 중이었지만, 점점 밀리다가 2021년 8월 12일 밤(현지시각) 결국 탈레반에 함락되었다. 헤라트도 같은 날 함락되었다. 다만 칸다하르 비행장엔 후퇴한 정부군이 16일날까지 버티면서 공군 수송기편으로 탈출했다.

2021년 10월 15일에 칸다하르의 쉬아 모스크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 33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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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렉산드로스의 아랍/페르시아어 발음인 '이스칸다르'와 유사하다[2] 두 무덤이 거의 비슷하게 생겨 후자의 경우 굴뚝에 구멍이 있는 것 정도로만 구별이 가능하다[3] 시크측 사상자는 5천여였다[4] 헬만드 주의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