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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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공적인 부분
2.1. 프린키파투스 확립
2.1.1. 내재적인 문제
2.1.2. 공화정 관련
3. 사적인 부분
3.1. 가정 관련
3.2. 사후 끼친 영향
3.3. 양아들 티베리우스
3.4. 친구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
3.5. 기타


1. 개요[편집]



아우구스투스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공적인 부분[편집]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이면서 평균 재위기간이 짧은 로마사에서 오랫동안 재위한 몇 안되는 황제였으며 뛰어난 정치력으로 유능한 내정을 펼쳤고, 이 덕분에 로마의 제정은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질서와 생활 환경을 정리하고 내실을 튼튼히 하여 로마 제국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수 국가로 만든 원동력을 키웠고 그가 통치하는 기간엔 물레방아를 발명한 비트루비우스, 위대한 역사가인 리비우스와 라틴 문학에 중대한 진보를 가져온 베르길리우스[1]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황제가 되기 이전의 달마티아 원정부터 시작해 칸타브리아 전쟁, 도나우 및 유프라테스 방어선 확립, 파르티아와의 평화 등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보조군 제도 등 원수정 시기 로마군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치세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나, 말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군단 3개를 말아먹고 라인강 너머 엘베강까지의 게르마니아 지역을 잃은 것이 흠으로 평가받는다. 정규 군단병에 기타 보조 병력까지 합치면 2만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카이사르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2]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사망한 이후 카이사르의 판단을 거스르고 게르만 정벌에 나선 것에서[3]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실수가 곧 제국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1. 프린키파투스 확립[편집]


파일:아우구스투스 제사장.jpg
폰티펙스 막시무스 (최고제사장)으로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프린키파투스(원수정)가 확립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은 당시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를 통치하였던 원로원은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최우선시하여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여러 차례 가결하였고 또한 과거 효과적으로 민심을 반영했던 시민 집회들은 몇몇 정치가들에게 의해 통제되어 이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 말기엔 로마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민 집회는 로마 공화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 평민 집회는 많아봐야 1만~2만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지중해를 거의 다 통치할 수 있는 거대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의 경우 자신의 퇴역병들 몇천명을 로마로 부르는 것만으로 평민 집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공화정으로는 거대 로마 국가를 통치하는데의 한계가 분명했다.

이런 까닭에 로마 공화정 체제의 붕괴와 프린켑스정의 성립 및 그 정착 부분을 연구한 로널드 사임과 같은, 고대 로마사 권위자들은 당시 로마 공화정 체제와 원로원은 로마 통치에 있어 한계가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는 과거 인물들과 달리 이 체제 한계를 극복하고 그 질서를 되찾는 일을 했다고 제정을 평한다. 사임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선동가적 기질이 뛰어난 정치가, 뛰어난 계략술과 은폐기술에 능한 혁명가, 잔인한 모험가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며, 그의 진정한 본질은 독재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프린켑스정이 당시 군대, 이탈리아와 로마 평민들에게 왜 지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도 공적인 부분에서 평가했는데, 대략 제정의 탄생, 확립에 대한 평가를 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그들(군대와 평민)의 요구를 잘 이행하면서, 평민들의 보호자로서 이를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에 그 체제가 성공했다"이라고 평했다.

사임을 비롯한 이 분야의 연구자들의 설명처럼,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잡은 뒤 당시 로마 정체와 여론, 개인의 권력과 지위 확립 등의 복합적 이유로 과거 과두정 체제의 원로원 중심 공화주의 체제를 프린켑스로도 불린 임페라토르 중심의 제정으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정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존 체제와 모호하게 다른 점을 제기한 반대파를 견제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파로 불린 세력 내의 다툼과 권력구도를 모두 제어해야만 했다. 특히, 로마인들이 을 바라지 않는 특수성은 그가 기원전 27년 공화정 복귀 선언 이후부터 그에게 정치적 상황을 우회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직책 및 제도를 조합하여 로마 "황제"라는 지위를 만들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종신) 호민관 특권, 군 통수권자(임페라토르)의 권위와 권한, 원로원의 1인자(프린켑스),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위, 마지막으로 황제가 가지는 막대한 양의 부(富).[4][5]


2.1.1. 내재적인 문제[편집]


그러나 제1인자 혹은 아우구스투스란 직책은 당시로서는 편법에 가까웠다. 황제의 지위는 이러한 여러가지 "특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6] 최고 지휘관이었던 황제가 그저 세습에 의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곤 하나 사실 세습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가 있어야 했고, 또 최고 지휘관이 반드시 국가 원수여야만 한다는 관념만큼은 여전히 로마에서 불식되기 어려웠다. 황제로서의 직위가 이런 편법에 기대야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정체가 어느 일면은 도시국가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시민들이기도 한 군인들에게 옹립되면 누구든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자유민"인 로마 병사에게 자신의 지휘관 = 임페라토르를 선출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권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면 곧 각지에서 임페라토르가 선출되어 잦은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로마"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호민관 특권을 얻어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린켑스"로서 시민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황제들은 빵과 서커스를 풀어서 서민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결국 제정 체계는 처음부터 내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제위가 세습됨으로써 엘리트 간의 경쟁엔 분명한 한계선이 그어졌는데 그 이유는 공화정 시절의 명예로운 경력은[7] 명백히 로마 정부의 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출현으로 인해 황제의 정부가 새로 생김으로써 원로원의 정부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는 계속 공화정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의 정부를 그대로 남겨둔 채 황제 고유의 정부를 따로 출현시킨다. 따라서 집정관, 안찰관, 재무관 등 로마의 기존 정무관직은 예전처럼 시민에 의해 선출되나 따로 황제 정부를 구성하고 이 자리엔 자신의 측근들을 임용했다.[8] 참고로 4세기 초·중반쯤 콘스탄티누스 왕조 때 이 둘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처럼 돼버리고 점점 황제 정부로 힘이 쏠리게 된다. 하지만 황제 정부의 경우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 황제가 알아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므로 황제와의 연줄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황제와 혈연이나 인맥을 통해 인연이 닿아야 했고 능력 혹은 군사적 업적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출세하는[9] 상황은 불가능하였다.[10] 황제와 특권이 중복되는 호민관은 아예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황제는 원로원 계급으로 구성된 엘리트의 견제를 위해 기사 계급[11]이나 지방, 속주 출신 유력자들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용되는 기사 계급들은 모두 황제와 친한 사람들이었고, 점점 줄어드는 공화정 시대의 명문 귀족들을 대신해 원로원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지방 유력자 정도인 플라비우스 왕조나 속주 출신의 트라야누스 이후 황제들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들은 제위 계승권자로 여겨져 숙청되기도 했고, 때문에 더욱 정치적 움직임을 제한당하게 되었다[12].

제정으로 바뀌고 나서 단 200년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200년은 꽤 긴 세월이고, 그 세월 동안 로마는 외부 문제가 거의 없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이후 쇠퇴기에 들어섰어도 제국이 공화정으로 회귀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사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시기에서는 일종의 금권 정치적 요소가 너무 강하게 부각된 과두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의 몇 가지 요소의 미비로 나중 시대의 쇠퇴가 시작되기는 어렵다. 카라칼라,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후 원로원의 공화정 회복 시도를 근위대가 무산시킨 것, 베스파시아누스가 법적으로 황제정을 공식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인한 것,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양의 그것과 동일한 전제정 체제를 수립한 것은 당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이라는 인식이 강했음을 시사한다.[13]

하지만 여전히 일부 지식인들은 공화정 로마가 제정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4] 로마의 공화정은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제국을 통치하기엔 여러모로 부적합한 모순을 노출하긴 하였으나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장치를 발명한 정치 제도인 것이 분명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법들이 훗날 근대 법 체계의 기본이 된 것에서 입증된다. 때문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옹호하고 제정을 비하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의 서술에서 나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거리낌 없이 모략을 사용하고 공화정 인사들이 피해자인 것으로 서술된다.

당시의 로마 공화정을 현대의 공화정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수많은 속주가 생기는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이 분명히 한계를 드러냈고 개혁이 확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원수정의 대안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런 지속적인 불안감 때문에 제정이 확립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머나먼 뒷날에도 기존의 공화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2.1.2. 공화정 관련[편집]


로마식 공화정에 대한 이 환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없어진 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보편 제국"이라 불렸던 고대 로마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화정 로마의 행정적 한계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제정 로마 때 늘어난 체제 불안만을 강조하는 사관을 통해 현대 보수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이론적 기반들 중 하나가 형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도 당시 제시되어온 대중주의적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얻었고 이것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정치적 기반이 되어줬기 때문에 대중주의에 비판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이론적으로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원로원의 전횡으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가 피살당했을 때에 이미 그 정치적, 현실적인 정당성을 거의 상실했다.[15]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정은 분명 문제점이 있었으나 그게 공화정을 무너뜨려서 그렇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주목받을 때에는 이미 공화정은 실제 사례처럼 서서히 다른 제도가 되던지 그냥 완전히 망해서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던지 둘 중 하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오랫동안 개혁을 거부한 부패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 원수정을 확립한 사람들이지만 정책적으로는 언제나 귀족 vs 민중파의 로마사에서 민중파의 입장이었고 지금으로 따진다면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그라쿠스 형제를 이은 정책들을 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정의 특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실제로 그의 치세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말년에 나폴리를 들렀을 때 황제를 알아본 어부들이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모두 당신 덕분이다"라는 식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3. 사적인 부분[편집]


아우구스투스는 밀짚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수에토니우스가 한 묘사를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물게 잘생겼는데 반짝이는 맑은 눈, 금발 곱슬머리, 불규칙적인 치아, 갈매기 눈썹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작아 키높이 신발로 단점을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 담당자였던 마리우스는 그의 키를 지금의 기준으로 약 175cm 정도로 기록하였는데 당시 로마인의 평균 키를 생각하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수에토니우스가 후대의 사람인데다가 그의 저서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마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해방 노예 출신이라는 점을 참고하여 각자가 판단하면 되겠다. 그리스 조각가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 예찬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이성적인 능력은 무척 뛰어났지만, 양부 카이사르와 달리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배려할 줄 몰랐다. 즉, 신체적인 매력은 카이사르 이상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매력과 호소력은 카이사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그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괴물에 가까웠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예민하고 까칠한데다 모든 관계를 이성적, 논리적으로 판단해 행동했다. 그래서 결단력과 추진력이 빠르지만 무척 냉정하고 냉혹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정을 주지 않았다. 허나 가식을 떨고 연기력이 뛰어나 겉으로는 무척 따뜻한 면도 있어보여, 정적들조차 그 재주에 혀를 내둘렀다. 즉, 한 사람으로 보면 친해지기 무척 어려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6]

전반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먹을 것이 생각나는 때에 바로 식사를 했지만 식사량이 매우 적어서 빵, 대추야자 약간, 물 정도를 조금씩 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며,[17] 아마 이 자주 먹는 소식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77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대단한 것이다.[18] 그리고 궁전 역시 카이사르가 머물던 최고 제사장 저택으로 검소했다.[19]

3.1. 가정 관련[편집]


가족, 가문에게도 그는 냉혹했고 매우 보수적인 로마인 아버지 그 자체였다. 젊은 시절부터 유일한 혈육 대 율리아에게는 아버지로서의 정이 없었고,[20][21] 가족조차도 마치 그의 신민들을 다루는 것처럼 통치했다. 사실 보수적인 동시대 로마인들은 가정 내에서 가족들의 생사 여탈 여부를 행사할 때 대부분 그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로마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 기준으로도 매우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며 보수적인 아버지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런 성향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과 주변 측근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략과 논리에 의해서만 일로 다루고 처리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정략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면, 금지옥엽처럼 아꼈던 양자,[22] 손주들[23]이 결정한 일이라고 한들 거진 그의 뜻대로 처리되고 결정됐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면 본인 뜻대로 일방적으로 명령했다고 하도, 앞뒤가 꽉 막힌 갈바와 같은 고지식한 로마인들과 달리 그 기준은 있었다고 한다. 그 기준이란 "네 주장을 나에게 행동으로 증명하라"였는데, 이는 강압적이고 명령조로 아들, 손자, 사위를 다룬 다른 로마 귀족, 로마 시대의 아버지들과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친조카 소 안토니아가 정절과 자녀들의 미래를 이유로 재혼명령을 거절한다거나, 양자 티베리우스가 완전 은퇴 선언 후 아예 로도스 섬으로 들어간 사건 등에서는 자신의 뜻을 거두고 도리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힘을 실어 주거나, 도리어 그들이 생각을 바꿀 시간을 꾸준히 주고 비밀리에 그들을 보호해줬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아우구스투스 일가 남녀황족들의 식사시간, 여가생활 등은 물론, 그들의 약혼, 결혼, 입양, 이혼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처리되고 통보됐다. 이는 일가와 함께 할 주변인 관리도 비슷했다. 여러 번의 암살 시도, 반란 미수 경험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남녀혈육들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주변을 조사한 뒤, 철저히 관리했다. 그래서 양자 티베리우스가 친딸 대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티베릴루스의 즉시 입양 명령, 친딸 대 율리아와 면담할 남성, 여성들의 신원파악 후 즉시 보고조치, 손자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함께 한 친구들 감시 및 즉시보고 조치 등 로마인들 기준으로 고압적이고 정략적인 명령이 가족사에서도 일상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사례처럼 손자가 관심있어하는 학문이 여러가지라고 해도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훈련과 관련 경험을 반드시 거치도록 명령했다. 다만, 이 명령에도 그는 혈육들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가정교사를 시켜 그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고압적으로 대하는 행동을 하라고 가정교사들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이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다른 부분이었고,[24] 인격자로 알려진 후대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인격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비열하고 냉혹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계자 육성 및 친인척 소년, 소녀들의 가정교육과는 천지차이였다. 즉, 그 방식이 오늘날 기준으로 매우 고압적이고 정략적으로만 이성적인 가부장 같아도 동시대 로마인 부모, 조부모와 달리 유연한 면도 꽤 있던 사람이었다.

이런 특징처럼 아우구스투스는 노예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처벌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상당히 인간적이고 배려심도 많은 주인이었다. 이는 본인 일가에 속한 노예 외에도 본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 귀족이나 부자들 아래 노예들에게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는 노예, 해방노예들에게 벌을 내리더라도 그들에게 변호권을 줬으며, 그들이 강력범죄, 명백한 비리 등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함부로 벌을 내리지 않도록 명하고 이를 실천해 모범적으로 보여줬다. 또 노예들이 필요 이상의 처벌을 받게 되거나 그런 위기에 빠질 때, 본인 일처럼 화를 내면서 그들을 손수 지켜주는 선행도 보여줬다. 따라서 본인의 노예가 사소한 실수만 해도 태형으로 혼쭐을 내거나, 식인 뱀장어들의 먹이로 던지게 하기로 악명난 폴리오에게 보인 일화처럼 "나에게도 똑같이 처벌해보거라!"라고 말하고, 불경죄로 숙청되기 싫으면 이런 악행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수시로 확인하는 등 노예, 해방노예들 입장에선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장면도 많이 보여줬다.

그는 카라칼라처럼 제 기분에 따라 혼을 내거나 시비를 거는 일이 없었고, 일부 귀족들처럼 여자노예들을 성적 도구로 사용하는 등의 악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우구스투스는 여자노예들이 출산 중 죽으면, 그들 가족에게 위로를 하고, 본인 일가 노예들이 병이 들어 아프면 치료를 돕는 등 처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즉, 본인의 직계 혈육들에게는 무척 강압적이라고 해도 집안 노예, 해방노예들에게는 무척 좋은 주인이었다. 그런데 이는 아우구스투스만 보인 특징이 아니라, 로마 사회에서 정신이 온전히 박힌 황제, 귀족들은 대개 그랬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인격자라서 그렇지 않았다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을 보호해야 본인과 가문의 명망이 높아지고, 위기에 빠졌을 때 피호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행동은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노예들이 대를 이어 아우구스투스 혈육들에게 절대 충성했고, 자유를 얻은 뒤에는 자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품성을 홍보하며 그를 기린 이들이 유독 많았던 비결이 됐다.

그는 아내의 친혈육들로서 입양관계로 맺어진 혈육들에게도 유독 다정했고 그들을 친혈육으로 생각해 과보호하기로도 유명했다. 몸이 불편했던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유독 아끼면서 살갑게 대한다거나, 어린 손주들의 사소한 노력이나 발전에 아기처럼 기뻐했고, 양자 티베리우스가 성년식을 치룬 직후부터 그에게 자신의 가문 일도 장남 자격에서 의견을 존중해 그의 의견을 늘 참고해 결정했다. 더욱이 그는 보수적인 가부장답지 않게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많은 결정권을 주고, 자신이 가정교사를 대신해 식사예절,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범절 등을 직접 담당한 뒤 부족한 부분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세심함도 많았다. 이런 성격처럼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의 성년식 등을 제 일처럼 직접 챙겼고, 친혈육들의 사소한 웅변 연습 등도 동행해 그들을 열심히 응원하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등 매우 보수적인 로마인 아버지, 할아버지 답지 않았던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개방적인 면이 많았던 양부 카이사르와 달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명예를 손상시키면 설령 친혈육이나 아끼던 집안사람이라고 해도 정적 대하듯 단호하게 처벌했다. 이는 한결 같았던 원칙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외동딸 대(大) 율리아와 그녀가 친구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소(小) 율리아,[25]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인데 세 사람이 혹독히 처벌받은 것을 보면, 티베리우스가 그토록 사랑한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를 살리기 위해 이혼을 받아들였는지 단번에 이해가 갈 정도다. 이중 가장 유명한 대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그들의 개인적 문제가 분명 문제가 많았고 당시 로마인 가정 내에서 이런 혈육들에 대한 처벌이 가부장법으로 명백한 탓에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취급됐다. 허나 외손녀 소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숙청 사건 피해자였고, 여러 학자들은 과거처럼 소 율리아의 간통 자체를 여러 근거로 의심하며 전형적인 아우구스투스식 정적 제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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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율리아는 아그리파와 대 율리아의 장녀이자 이들 부부의 둘째로, 외모가 뛰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허세가 심하고 거만한 단점이 있었다. 이는 아그리파가 대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의 공통된 단점이었는데, 소 율리아는 아그리파, 대 율리아 부부의 여러 자녀 중 지나친 허영심과 거만함이 오빠 가이우스 카이사르, 바로 아래의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 못지 않았음에도 유독 아우구스투스에게 단단히 찍혔던 부분이 됐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소 율리아를 명문귀족 가문의 자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시켰고 소 율리아는 어머니 대 율리아와 달리 남편과 사이도 좋고 남매를 낳는 등 별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그렇지만 소 율리아는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을 크게 지어 끝내 외할아버지에게 단단히 찍혔다고 한다. 이때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격노하면서, 소 율리아 부부가 거액을 들여 지은 대형 별장을 강제로 철거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소 율리아는 남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몰래 원로원 의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둘 사이에서 아이까지 가졌다는 의심을 받게 되더니,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8년 간통 혐의로 외손녀를 직접 기소한다. 그런데 이때 간통을 벌인 혐의로 똑같이 기소된 원로원 의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처럼 처형되기는거녕, 본인 스스로 자발적 망명을 하겠다고 요청해 허락받고 재산을 빼앗기지도 않는 선에서 유야무야 사실상 처벌받지 않게 된다. 반면 소 율리아는 임신 중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즉시 섬으로 추방된 다음, 재산까지 압류당한다. 이후 그녀는 간통에서 얻었다고 의심받은 아이를 출산했는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당장 그 아이를 산비탈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2년 뒤인 서기 10년경 소 율리아의 남편 파울루스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반역죄로 기소된 다음 처형되는데,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이들 부부를 몰락시키면서,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자신의 양손자인 클라우디우스 1세와 소 율리아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약혼을 "신부 부모의 불경죄와 부도덕함"을 이유로 들어 직접 파기해버린다.

여기에서 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소 율리아의 간통남으로 지목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행적이다. 데키무스 실라누스는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약속이라도 한듯 로마로 복귀하고 예전처럼 멀쩡하게 승승장구하며 잘 살았는데, 그는 로마로 돌아온 뒤 명예회복까지 하며 재기했다. 따라서 여러 로마사 학자들은 이 사람의 복귀를 통해 아우구스투스가 친척이라고 해도 자신의 프린키파투스 체제에 불만을 품은 이들을 용서하지 않은 것에 더 주목하고 있다. 제정 시대 사가들 주장처럼 소 율리아의 남편 파울루스가 여러 인사들과 공모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암살을 계획했다가 체포된 것은 누명이 아닌 사실이며, 소 율리아가 외할아버지에게 불만이 컸던 것도 여러 부분에서 교차검증되기 때문이다. 또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가 간통죄에 엮여 처벌받을 실라누스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망명하는 선에서 용서했다가, 그 후계자 티베리우스 즉위 후 복귀시켜준 것 자체도 매우 특이하기 때문에 이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쨌든 아그리파의 딸 소 율리아 사건은 간통죄가 누명이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람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자비한지 보여주는 예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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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후 끼친 영향[편집]


그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혈연으로 탄생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혈연 관계에 대한 집착과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동 및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로 인한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먼저 정치적 판단 아래 복잡하게 꼬인 혈연 관계 탓에 후계 문제가 복잡해졌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41년이나 제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아그리파처럼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죽어버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객사[26]해 버렸다.[27] 또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양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주변에게 ‘두 손자[28]와 함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내 후계자이다’라고 솔직한 의중을 말해왔던 조카 딸 소 안토니아의 남편 대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29][30][31]처럼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버렸다.


3.3. 양아들 티베리우스[편집]


이런 까닭에 그의 제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결혼으로 혈육을 낳아주지 않았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였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이고 지나치게 차가우며 상대의 감정을 고려치 않은 행동들’은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양아들 티베리우스조차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유아기 때부터 그의 손에서 40여 년간 아들로 자라온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은퇴하기도 했다.[32][33]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혈통이 아니란 이유로 죽은 이후 유언장에서도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기보다는 한낱 대행 내지 징검다리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제위에 오를 때까지 기반을 잡고 자리에 앉아있는 존재로 치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은 뒤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된 유언장에다가 대놓고 '불행하게 두 손자가 일찍 죽어서 계승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공식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처음엔 제위를 거부했다. 9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아들로 자랐고 젊은 시절 험한 게르마니아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바친 티베리우스가 단지 양부의 외손자라는 타이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일찍 죽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보다 못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즉, 제위를 물려받을 무렵 모든 것을 갖춘 율리우스 가문의 공식 후계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유언장 문구 하나로 우습게 된 것이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고, 생전에 논리와 판단대로 제단하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아 놓은 정략혼들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단명할 단초를 제공했다.[34]

위에서 언급했듯 혈육에 지나치게 집착한 그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의붓 아들과 친누나 소 옥타비아의 자녀들, 외동딸 대 율리아를 ‘문자 그대로’ 정략 결혼과 후계자 양성의 도구로 이용했다.[35] 특히 유일한 혈육이었던 대 율리아는 말 그대로 후계자 양성 도구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6] 그녀는 부모가 일찍 이혼해 어머니 스크리보니아의 손에서 크다가 이후 관심도 크게 주지 않던 아버지에 의해 처음 고종사촌인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37]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남편이 요절하자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아버지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가 죽자 이번에는 대 율리아를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티베리우스의 가정 생활까지 파괴해버렸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멀쩡히 아그리파의 전처 소생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아들 소 드루수스를 낳고 금슬도 좋았는데, 아그리파 죽음 후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대로’ 대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정해져 최대 피해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38] 그렇다고 그 결혼이 행복했으면 다행인데, 아무리 티베리우스가 노력해도 대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과 두 사람의 성격차,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죽음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끝내 파탄나고 만다. 이후 지쳐버린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렸고, 대 율리아는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하는 등 문란한 생활을 일삼다가 아버지가 만든 간통죄로 고발당해 유배당하게 되며, 티베리우스 황제 때 죽게 된다.[39]

  • 이 유배는 율루스 안토니우스[40][41]와 대 율리아의 간통이 표면적 이유였는데,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처형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대 율리아가 반역을 도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어린 동생들을 황제로 삼고 섭정을 하려고 했으며, 딸을 죽일 수 없었던(부정에서든, 대 율리아의 자손들의 제위 계승을 위해서든) 아우구스투스가 간통죄를 적용해 처벌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42]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와 같은 생동감 넘치고 열정적인 서술에 비해서[43] 아우구스투스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의 업적을 나열한 《업적록》만을 남겼다.



3.4. 친구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편집]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에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 ? ~ 15년)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노예를 곰치[44]에게 먹이로 주는 악랄한 주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아우구스투스가 베디우스 폴리오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한 노예가 비싼 유리잔을 깨트린 일이 터졌다고 한다. 그러자 베디우스 폴리오는 그 노예를 평소대로 처벌하겠노라고 했다. 즉, 아우구스투스가 돌아가면 그 즉시 곰치의 밥으로 던지기로 한 것인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우구스투스가 처벌을 멈추라고 명령 후 그 집안의 모든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자기 손으로 모두 깨트리고 정색하면서 노려봤다고 한다.[45][46] 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을 알아챈 폴리오는 사색이 되었고, 노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그 자리에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Publius Vedius Pollio, Naturalis Historia, 9장 29절).

이 외에도 자신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아이들 중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죽이지 않고 신분을 유지해주고 돌봐준 점 등을 보면, 정치적으로 냉정하긴 해도 사적인 인품이 잔인무도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이자 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나 대 드루수스도 비록 정략 결혼에 이용하긴 했어도 오히려 친딸인 대 율리아보다 더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다만 문란한 사생활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친딸 대 율리아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는 유능하고 총명했기에 그 역시 특유의 정치적 냉정함으로 쓸모에 따라 대한 것일 수도 있다.


3.5. 기타[편집]


그런데 의외의 모습으로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주는 등 도박에 부정적인 국가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 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47]

태양력에서 2월이 짧아진 이유가 아우구스투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로마 달력에서도 현재 1월과 2월에 해당하는 Ianuarius와 Februarius는 각각 29일과 28일이었단걸 모른 오해다.[48]

[1] 라틴 서사시 중 가장 유명한 아이네이스(Aeneid)를 집필한 시인, 문학가.[2] 그래서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이 있는 평민인 아그리파를 일부러 아우구스투스에게 붙여주었다.[3]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긴 했으나 게르만족이 사는 곳에는 로마의 손이 미치지 않을 거라며 더이상 욕심내지 않았다.[4] 이집트가 망한 후 그 영토는 로마 황제 직할령이 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의 곡물 수급이 안정적이게 된 것은 덤..[5] 에드워드 기번은 이를 "교묘한 권력 배합"(국내 번역본 기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6] 사실 뒤에 나오듯 이것은 명목상이나마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 국가 로마를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공화정을 대놓고 폐지해 버리면 아무리 내전 종식 직후의 옥타비아누스라고 해도 엄청난 국력 손실, 나아가서는 황제로서 새 정치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도 원수정을 만드는 것보다 성공하기 몇십배는 힘들었을 것이다.[7] 호민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 등.[8] 중근세 일본에서 교토에 천황의 정부인 조정(공가 公家)을 남겨두고 쇼군의 정부인 막부(무가 武家)를 따로 꾸린 것과 유사하다.[9] 가령 마리우스, 술라와 같은 케이스.[10] 하지만 예시로 든 마리우스, 술라 등은 모두 사실상의 독재자들이었고 그들의 사병으로 민회를 완전히 좌지우지하였다. 이것은 민회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이것은 공화정 체제가 허울만 남은 사실상의 과두정(원로원은 일단 돌아가니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11] 에퀴테스라 불렸으며 귀족은 아니나 자력으로 무장을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다.[12] 단,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위협이 되지만 않으면 오래된 전통 귀족 가문을 존중하고 지지자로 끌어들이려는 성향이 강했다. 본격적인 원로원 귀족 숙청이 시작되는 것은 티베리우스 치세 중기 이후부터이다.[13] 사실 공화정은 오늘날처럼 과학기술이 뒷받쳐주지 않는 이상 도시국가 정도가 한계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선거제도 자체가 도시 밖에서 표를 가져오는 것조차 어려웠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14]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과학기술이 뒷받침하고 제도 자체도 로마 제국의 크기에 걸맞게 발전할 수 있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시대의 한계상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 제대로 된 민주공화제 국가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야 했다.[15] 술라가 원로원을 강화시키는 개혁을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앞장서서 그것을 폐지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16] 다만 양부 카이사르는 그 사람친화적 성격 때문에 경계를 소홀히 하다가 암살을 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황제로서는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가장으로서 그의 가족들한테만 나빴을 뿐이다.[17] 소화불량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먹은 것이겠지만.[18]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일반인이 아니었고, 격무에 시달리는 로마 제국 황제였다. 끊임없이 사방에서 보고가 밀려들었고,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40년 넘게 대제국을 다스리며 영토를 확장하고 법률까지 제정하며 그 당시에 77세까지 장수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병약했고 특별히 강한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누구 하나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본인 역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다.[19] 물론 황제의 권위를 위해서 외곽에 호화 별장들을 보유하기도 했다.[20] 유일한 혈육 대 율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끝까지 정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리아의 친모와는 원래 원수 사이였고, 대 율리아에게 정을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 율리아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한 누나 소 옥타비아와 딸 율리아와 사이도 나빴고, 집안에서는 늘 아내 리비아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과 대립한 데다, 행실 또한 거리의 노예들도 알 정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21] 과거에는 아우구스투스 개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아우구스투스와 대 율리아의 관계는 대개의 로마 귀족, 기사계급 가정 내 정략혼, 가세 확장을 위한 친인척 관계 사이에서 맺어진 친부모-친자녀/장인-사위 사이에서 흔히 나타난 현상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이렇게 된 이유는 내전기 과정에서 있던 정략혼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두루 엮인 까닭이 컸다. 본래 아우구스투스의 첫 아내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조카인데 결혼 시점에서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워서 해적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해상을 주름잡으면서 로마에 곡물이 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쪽의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가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세력이 한풀 꺾이자 협정을 깨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딸과 이혼한 뒤 그를 쳐 없앴다.[22]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23]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24]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는 자신의 친손자 클라우디우스가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벌어진 문제라며 가정교사들에게 혹독하게 벌을 주라고 명령했으며, 24시간 내내 손자, 손녀들의 모든 것을 감독해 엄격히 다루도록 지시했다.[25] 빕사니아 율리아 아그리피나[26]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27]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집착 수준의 혈통주의자였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선정된 후계자로 갖은 노력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고 인망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둘이 줄줄이 죽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 사회에선 별다른 반향도 없이 시큰둥했다.[28]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29]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대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말은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살 위의 티베리우스의 혼처와 대 드루수스의 혼처 모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결정으로 진행된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30]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를 모두 아들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인 티베리우스보다는 개방적이고 활발한 대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 유해가 이탈리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죽은 양아들 추도사를 직접 읽었고, 자신에게 대 드루수스와 같은 죽음이 선사되길 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혈육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앞으로 대 드루수스 같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대 드루수스의 묘비에 자신이 손수 지은 시문을 새기고도 만족 못해서 전기까지 산문으로 만들었다.[31]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결혼식 후 3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진짜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가지고 ‘아이 부모는 참으로 운이 좋다네. 아들을 3개월 만에 얻었으니’라는 내용의 풍자시와 노래까지 나왔다.[32]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부인 빕사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 아그리파, 동생 대 드루수스가 연달아 죽고 난 뒤, 양부의 정치적 판단과 혈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아내였던 빕사니아와 강제로 이혼당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토록 혐오하던 대 율리아와 강제로 결혼을 했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얼마 안가 죽은데다 대 율리아의 사생활도 문제가 되자 로도스 섬으로 은거해버렸다.[33] 사실 티베리우스의 전처 빕사니아는 원래 아그리파가 대 율리아 전에 결혼한 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즉, 티베리우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장모와 결혼한 셈이다. 개족보.[34] 그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정치에 질린 나머지 아에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서 원격 통치를 했다. 그래서 세야누스가 섭정을 하며 사람들을 고발하고 마구 죽였는데 이때 율리우스 혈족 남성들 중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제위 계승자들이 모두 제거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소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다. 먼저 그 후계자로 손색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자신의 아내 리빌라가 간통을 벌이다 공모하여 독살당했고, 증손자 네로 카이사르는 역모죄로 유배형, 또 다른 증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아내와 함께 누명을 쓰고 난 뒤 아내는 간통죄로 자살, 본인은 황궁 지하실에 유폐되어 방석을 뜯어먹으며 버티다가 굶어죽었다. 더해서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처럼 ‘그보다 더 충실한 노예는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역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만다. 칼리굴라는 인격 형성기 동안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두 형이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무관심과 세야누스의 음모로 숙청되고, 성년식도 또래들보다 늦게 치루게 된 상황에다가 은둔 정치를 하던 티베리우스와 함께 제왕 교육을 받기 위해 같이 살면서 안 좋은 영향은 죄다 받았다. 그리고 칼리굴라의 사촌 동생이자 양자이면서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친손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칼리굴라가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직후 칼리굴라에 의해 살해당해버린다. 이후 칼리굴라마저 짦은 치세 이후 암살당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35] 이중 정상적인 결혼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를 사랑했던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이들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투스에게 차차기 황제로 지명된 게르마니쿠스와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 부부를 제외하고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란 것처럼 되지 못했다.[36]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는 이를 두고 아예 아우구스투스가 딸 율리아를 돌렸다고 써버렸다(...).[37] 누나 소 옥타비아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아들[38] 이 결정이 내려지자, 애처가였던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강제로 이혼하는게 정말로 싫었기에 양부의 결정에 반대하고 어미니 리비아를 찾아가 양부의 결정을 제발 물려달라고 사정까지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결심이 워낙 확고했고, 어머니 리비아가 계속 설득한 데다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어린 아들 소 드루수스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자 티베리우스는 그 결정에 굴복했다. 훗날 로마의 거리에서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우연히 만난 티베리우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안타까운 일화도 전해진다.[39] 티베리우스가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40]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들[4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들로, 전처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장남만 처형했을 뿐 나머지는 살려주었다.[42] 율루스 안토니우스가 기소되어 재판받기 전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진상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게 됐다.[43]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저술을 제외한 카이사르의 모든 저술들을 없애버렸다. 카이사르는 신이었고, 그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없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연애 편지, 지인들과 주고받은 귀중한 기록들은 전부 없어졌다. 후대인들에게는 정말 애석한 일이다.[44] 칠성장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역이다.[45] "어디 나도 한 번 곰치에게 던져봐라."라는 뜻. 그리고 벌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리는 상당히 고가품이었기 때문.[46] 다른 썰로는 이렇게 던지면서 나도 던져 보거라라고 한 뒤, 경고를 보냈다는 것도 있다. 만일 본문 내용이 진짜라면, 폴리오가 친구라서 유리잔을 깨는 정도로 덮어버렸다고 봐야 한다. 만약 폴리오가 황제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황제에게 인육 사료로 키운 고기를 대접한다는 것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47] 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전, 71장[48]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를 Martius로 두고 1주일에 8일, 1년에 38주(총 10개월, 304일)를 두는 달력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를 겨울로 부르며 딱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 해의 한달은 관습적으로 보통 달의 주기와 비슷한 30일 또는 31일이었다. 이후 겨울에 해당하는 두 달(연초인 Ianuarius와 연말인 Februarius)을 도입하고 매달 홀수인 29일과 또는 그 다음 홀수인 31일을 부여해 1년 356일을 만들고 다시 1년을 홀수로 맞추기 당시 달력에서 마지막 달에 해당하는 Februarius에서 하루를 뺐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2년~3년마다 Februarius 23일부터 한달을 27일로 하는 일종의 윤달인 Mercedinus을 시행했으니 일반적으로 Februarius는 28일을 채우지 못하는 보조적인 달로 취급받았다. 28일로 정하는 건 수백년 간 지켜온 로마의 전통인 셈.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달력 개혁은 율리우스력에서 확립된 윤년 제도를 재조정하기 위해 당분간 윤년을 미루는 제도를 도입한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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