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마그달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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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구스타브 3세의 왕비
소피 마그달레네
Sophie Magdalene af Danmark


파일:CYMERA_20221003_210124.jpg

이름
덴마크어
소피 마그달레네
(Sophie Magdalene)
스웨덴어
소피아 막달레나
(Sofia Magdalena)
출생
1746년 7월 3일
덴마크 코펜하겐 샤를로텐보르 궁전
사망
1813년 8월 21일 (향년 67세)
스웨덴 솔나 울릭스달 궁전
배우자
구스타브 3세 (1766년 결혼 / 1792년 사망)
자녀
구스타브 4세 아돌프, 칼 구스타브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
어머니
영국의 루이자
형제
크리스티안, 빌헬미네 카롤리네, 크리스티안 7세, 루이세
종교
루터교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왕세자비
3.3. 왕비
3.4. 왕대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의 왕비이자,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어머니. 프레데리크 5세영국의 루이자 공주의 장녀이다.


2. 작위[편집]



  •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소피 마그달레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ophia Magdalena of Denmark and Norway (1746년 7월 3일 ~ 1766년 10월 1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Sweden (1766년 10월 1일 ~ 1771년 2월 12일)
  • 스웨덴의 왕비 폐하 Her Majsety The Queen of Sweden (1771년 2월 12일 ~ 1792년 3월 29일)
  • 스웨덴의 왕대비 폐하 Her Majsety The Queen Dowager of Sweden (1792년 3월 29일 ~ 1813년 8월 21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746년 프레데리크 왕세자조지 2세의 막내딸인 영국의 루이자 공주 사이에서 둘째 아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할머니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조피 막달레네로부터 따와 소피 마그달레네로 지어졌다.

태어난지 한 달 후에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가 사망하여 아버지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프레데리크 5세로 즉위하였다. 1747년에 오빠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요절해서 1749년 남동생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태어날 때까지 사실상 덴마크의 왕세녀로 여겨졌다.

1751년, 소피 마그달레네가 5세일 때 스웨덴구스타브 왕세자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 혼담은 오랜 시간 전쟁을 해왔던 덴마크와 스웨덴의 평화를 위해 스웨덴 의회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피 마그달레네의 어머니인 루이세 왕비는 딸의 시어머니가 될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소피 마그달레네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1] 이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굉장히 자존심이 세고, 강인한 성격인데다 덴마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는 딸의 결혼을 매우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는 그해 말 막내 아이를 유산하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소피 마그달레네는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할머니와 새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종교적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할머니와 새어머니, 동생들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는 종종 무서워했다고 한다.

구스타브 왕세자와 소피 마그달레네의 결혼은 로비사 울리카 왕비의 반대에 의해 위기를 맞는다.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구스타브 왕세자가 자신의 조카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와 결혼하길 바랐고, 소피 마그달레네와의 혼담은 의회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 2세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을 통해 혼담을 깨는 대신 덴마크에 정치적 이익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스웨덴 국민들은 덴마크 출신 왕비였던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친절함과 따뜻함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피 마그달레네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도덕적이고 종교적 가르침을 받고 자란 소피 마그달레네가 오만한 로비사 울리카 왕비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구스타브 왕세자가 소피 마그달레네와의 결혼을 원했다. 결국 1766년 4월 3일, 구스타브 왕세자와 소피 마그달레네는 공식적으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


3.2. 왕세자비[편집]


1766년 10월 1일 소피 마그달레네는 구스타브 왕세자와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고, 11월 4일 스톡홀름에서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소피 마그달레네는 스웨덴의 왕세자비가 되었고, 스웨덴식 이름인 소피아 막달레나로 불렸다.

아름답고 춤을 잘 췄던 소피아 막달레나는 스웨덴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스웨덴 궁정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게다가 소피아 막달레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시어머니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그녀를 항상 냉대했고, 아들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남편 구스타브 왕세자 또한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아내에게 잘해줄 수 없었다.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며느리 곁에 있던 덴마크 대사와 하인들까지 모두 내쫓아 버렸다.


3.3. 왕비[편집]


1771년 시아버지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사망하여, 남편 구스타브 3세가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1772년 구스타브 3세는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는데, 소피아 막달레나를 믿지 못했던 국왕은 아내에게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덴마크는 쿠데타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출신인 아내를 경계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로비사 울리카 왕대비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

소피아 막달레나 왕비와 로비사 울리카 왕대비고부갈등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으며 대중은 왕대비보단 왕비를 더욱 옹호했다. 우화에서는 나쁜 여우(로비사 울리카 왕대비)가 순진한 비둘기(소피아 막달레나)를 괴롭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곤 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소피아 막달레나는 한번도 구스타브 3세의 정치적 신임을 얻지는 못했지만, 왕비로서의 의무에는 최선을 다했다. 또 국민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왕비였다. 하지만 남자를 좋아해서 당시 동성애자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남편과 항상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소피아 막달레나가 왕의 침실에 찾아갔을 때 그의 침대에서 자고있는 다른 남성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9년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왕위를 이을 후계자도 없었다. 구스타브 3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남동생인 칼 왕자를 결혼시켰지만 결국 후계자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소피아 막달레나는 구스타브 3세에게 이혼당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결혼한 지 12년만인 1778년 소피아 막달레나는 드디어 대를 이을 후계자인 구스타브 아돌프 왕세자를 생산했다. 하지만 워낙 부부관계가 없는데다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구스타브 아돌프가 구스타브 3세의 아이가 아니고 국왕의 시종인 문크 백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성적으로 미숙했던 국왕 부부를 돕기 위해 문크 백작과 왕비의 시녀인 안나 소피아가 성관계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고, 심지어 국왕 부부가 함께 있을 때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특정 시점에 들어가서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러한 소문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 왕대비가 구스타브 아돌프가 사생아라는 소문을 지지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를 공론화하며 정말 구스타브 3세의 아이가 맞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소피아 막달레나는 큰 충격을 받고[2] 시어머니에게 완전히 학을 떼며 남은 평생동안 로비사 울리카와 대화는 커녕 상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3]

1782년 소피아 막달레나는 둘째 아들 칼 구스타브를 낳았지만 6개월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구스타브 3세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3.4. 왕대비[편집]


1792년 3월 16일 구스타브 3세가 무도회에서 자신의 전직 경호원이었던 요한 앙카르스트룀 대위에게 공격당해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소피아 막달레나였으나, 남편이 다쳤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은 소피아 막달레나가 섭정이 되기 위하여 남편을 죽이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구스타브 3세는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자신에게서 냄새가 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아내의 접근을 금지했다. 결국 1792년 3월 29일 구스타브 3세는 사망했고, 그녀는 그가 죽을때까지 접견하지 못했다.

조용한 삶을 좋아했던 소피아 막달레나는 왕대비가 되어 공직 생활에서 물러난것에 대해 오히려 만족했다. 섭정은 시동생인 칼 왕자가 맡게 되었다. 이후 어떠한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지냈다.

시어머니 로비사 울리카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당해서인지, 며느리인 바덴의 프리데리케에게는 의전을 생략하고 잘해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겪었던 냉대를 며느리까지 겪고 싶게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1809년 아들이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핀란드 전쟁에서 패전하여 핀란드를 러시아에 내주게 되었고, 그 여파로 쿠데타가 일어나 폐위되었다. 소피아 막달레나는 이후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아들이 폐위되어 스웨덴에서 추방당하고 시동생 칼 13세가 즉위했지만 소피아 막달레나는 계속 스웨덴에 머물렀다. 새로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에 왔을 때 그는 왕대비가 자신을 보고싶지 않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고 한다. 아들을 폐위시킨 사람이 베르나도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베르나도트의 아내 데지레 클라리에게도 호의적이었던 몇 안되는 왕족이었다.

조용한 삶을 좋아했던 그녀였지만, 말년에는 고립된 삶을 살아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1813년 5월 뇌졸중에 걸린 이후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8월 21일 스웨덴에서 사망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네
(Sophia Magdalena of Denmark)
프레데리크 5세
(Frederick V)
크리스티안 6세
(Christian VI)
프레데리크 4세
(Frederick IV)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루이제
(Louise of Mecklenburg-Güstrow)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조피 막달레네
(Sophie Magdalene of Brandenburg-Kulmbach)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크리스티안 하인리히
(Christian Heinrich, Margrave of Brandenburg-Kulmbach)
볼프슈타인의 조피 크리스티아네
(Sophie Christiane of Wolfstein)
영국의 루이자
(Louisa of Great Britain)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1세
(George I)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of Celle)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Caroline of Ansbach)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John Frederick,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드무테
(Eleonore Erdmuthe of Saxe-Eisenach)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구스타브 4세 아돌프
(Gustav IV Adolf)
1778년 11월 1일
1837년 2월 7일
바덴의 프리데리케
슬하 1남 3녀[4]
2남
스몰란드 공작 칼 구스타브 왕자
(Prince Carl Gustav, Duke of Småland)
1782년 8월 25일
1783년 3월 23일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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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결혼을 왕실 측에서 추진한 것이 아닌, 의회에서 추진하였기 때문에 소피 마그달레네를 인정하지 않았다.[2] 비단 소피아 막달레나뿐만 아니라 구스타브 3세도 후계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며 자신의 권위까지 손상시킨 어머니에게 분노했다. 로비사 울리카에게 손자인 구스타브 아돌프를 보여주지도 않을 정도였다고.[3] 로비사 울리카 왕대비가 사망하기 전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가 보고싶다고 하는데도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도 않았다.[4] 바덴 대공비 조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