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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네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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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덴마크 프레데리크 5세의 두번째 왕비.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29년 9월 4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와 안토이네테 여공작의 6남 6녀 중 6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으로 재위한 지 6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율리아네 마리는 고작 6살이었다.
형제들이 매우 많았는데 큰 오빠 카를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아버지가 되고, 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했다. 둘째 오빠 안톤 울리히는 이반 6세의 아버지이며, 둘째 언니 루이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어머니이자 빌럼 1세의 외할머니다. 또 셋째 언니 조피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으로 시집 가 훗날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조상이 된다.
2.2. 왕비[편집]
1751년 12월 19일, 프레데리크 5세의 왕비인 영국의 루이자가 여섯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사망했다. 프레데리크 5세는 여러 정부와 사생아를 두는 등 문란했으며 알콜 중독자였기 때문에 당시 정치적 실권은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백작에게 있었다. 루이세 왕비가 사망한 이후 프레데리크 5세는 영국의 공주와 재혼하고자 했지만, 당시 영국에는 적절한 신붓감이 없었다. 이에 몰트케 백작은 율리아네 마리를 새 왕비로 추천했고, 프레데리크 5세도 율리아네 마리의 초상화를 보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하였다.
결혼식은 루이세 왕비가 사망한 지 단 6개월 뒤인 1752년 7월 8일에 거행됐으며, 율리아네 마리는 덴마크의 새 왕비가 되었다. 국왕의 결혼식으로 온 나라에서 축제가 열렸음에도 당시 국민들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이는 인기가 많았던 루이세 왕비에 대한 애도기간이 갑자기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네 마리는 새 왕비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했지만,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선 인기가 없었다. 루이세가 정말 사랑받던 왕비였고, 프레데리크 5세가 너무 빨리 재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율리아네 마리가 루이세 왕비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었다.
프레데리크 5세는 전처 루이세 왕비와의 사이에서 1남 3녀의 아이들을 두고 있었다. 율리아네 마리는 의붓자녀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들의 양육에 큰 관여를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대신 친아들인 프레데리크 왕자에게는 덴마크어를 가르치는 등[3] 교육에 직접 관여했다.
프레데리크 5세는 재혼 후에도 예전의 버릇을 못 버리고 끊임없이 불륜을 저질렀으며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네 마리는 아픈 남편을 돌보고 덴마크어를 배우는 등 조용히 의무를 다하였다. 다만 결코 덴마크 국민들의 인기를 얻을 수는 없었다.
1760년 1월 14일, 남편 프레데리크 5세가 4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의붓아들 크리스티안 7세가 즉위했다.
2.3. 왕대비[편집]
새 국왕이 된 크리스티안 7세는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새어머니인 율리아네 마리를 무시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율리아네 마리는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도 않았고 영향력도 없었지만 국왕으로부터 무시를 받자 자연스럽게 반대파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티안 7세의 정신병은 점점 심각해졌고, 정치적 실권은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의 정부인 요한 슈트루엔제에게 넘어갔다. 요한 슈트루엔제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귀족들의 빈축을 샀다.
결국 율리아네 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요한 슈트루엔제와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를 체포했다. 1772년에 슈트루엔제는 처형됐고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는 이혼당한 후 덴마크에서 추방당해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율리아네 마리의 아들인 프레데리크가 정신이 불안한 국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게 되었다. 1772년부터 1784년까지는 사실상 프레데리크 왕자와 율리아네 마리가 덴마크를 통치했다. 율리아네 마리는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귀족들의 특권을 복원시켜주었다고 한다.
또 율리아네 마리는 크리스티안 7세와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의 자녀들인 프레데리크 왕세자와 루이세 아우구스타 공주[4] 를 보살폈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왕세자는 율리아네 마리를 굉장히 싫어했다.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장성하여 섭정이 된 후에는 율리아네 마리의 지지자들을 의회에서 해임시키고 정치적 간섭을 일제히 차단했을 정도.
2.4. 말년[편집]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섭정이 된 이후에는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785년에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가 프레데리크 왕세자를 섭정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섭정이 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1796년 10월 10일 프레덴스보르 궁전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로스킬레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프레데리크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율리아네 마리의 손자인 크리스티안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8세의 아들 프레데리크 7세에서 대가 끊기고 크리스티안 9세가 즉위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9세의 아내 헤센카셀의 루이제가 율리아네 마리의 증손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현재 덴마크 왕가는 율리아네 마리의 혈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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