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피 도로테아(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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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의 공자비[1]
조피 도로테아
Sophie Dorothea von Celle


이름
조피 도로테아
(Sophie Dorothea)
출생
1666년 9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뤼네부르크 공국 첼레 첼레 성
사망
1726년 11월 13일 (향년 60세)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알덴
배우자
조지 1세 (1682년 결혼 / 1694년 이혼)
자녀
조지 2세, 조피 도로테아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어머니
엘레오노르 드미에 돌브뢰즈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불행한 결혼
2.3. 맞바람과 이혼
2.4. 말년
3.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아내.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라고도 부르며 일반적으로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라고 부른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1666년에 첼레에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엘레오노르 드미에르 돌브뢰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게오르크 빌헬름은 프랑스의 하급귀족 엘레오노르 돌브뢰즈와 사랑에 빠졌고, 처음에 그녀를 정부로 두었다가 1665년에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나고 8년 뒤에 엘레오노르가 하르부르크와 빌헬름스부르크 백작부인 작위를 받아 조피 도로테아도 공식적으로 통치 가문의 여식으로 인정받았다.

게오르크 빌헬름과 엘레오노르 부부는 당대 귀족 부부답지 않게 서로를 매우 사랑했고, 유일한 자식인 딸 조피 도로테아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주었다. 조피 도로테아가 행복한 유년생활을 거쳐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라자, 부부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좋은 신랑감을 찾기 시작했다.

조피 도로테아가 9살일 때 게오르크 빌헬름과 엘레오노르는 딸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안톤 울리히의 장남인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공자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1676년 8월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가 전사하고 말았고, 결국 다시 조피 도로테아의 혼처를 찾아야 했다.

2.2. 불행한 결혼[편집]


게오르크 빌헬름이 결혼하면서 벨프 가문에 상속 문제가 발생했다. 본래 게오르크 빌헬름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의 막내동생이 영지를 물려받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가 결혼하고 딸이 태어나면서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다. 어차피 살리카 법 때문에 여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상속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겸, 딸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주고 싶었던 게오르크 빌헬름은 동생과 자녀들을 서로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피 도로테아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훗날 조지 1세가 되는 사촌 하노버의 게오르크 루트비히와 약혼하게 되었다.

조피 도로테아와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이 결혼을 원치 않았다. 특히 조피 도로테아는 약혼자의 초상화를 집어던지면서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지르며 울었다. 그러나 가문 내에서 정해진 혼사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1682년 11월 21일, 조피 도로테아와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럼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부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 자주 싸우고는 했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아내를 무시했고 종종 예의범절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는 후계자가 생긴 뒤로 아내에게 관심을 끊고 정부를 두어 즐겼다. 화목한 집에서 자란 조피 도로테아에게 이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부정을 알았을 때 조피 도로테아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에게 불륜에 대한 말을 꺼내자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역으로 화를 내며 아내의 목을 졸랐다. 이후 부부싸움을 하면서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종종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2.3. 맞바람과 이혼[편집]



파일:Philipp_Christoph_von_Königsmarck.jpg

스웨덴의 귀족이자 군인 필리프 크리스토프 폰 쾨니히스마르크

불행한 결혼 생활으로 지쳐가던 조피 도로테아는 1688년에 스웨덴의 귀족 필리프 크리스토프 폰 쾨니히스마르크 백작[2]과 재회했다. 두 사람은 어릴 적 첼레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쾨니히스마르크를 좋아했기에 조피 도로테아는 자연스럽게 그를 자주 보게 되면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전장으로 떠난 후 1690년에 쾨니히스마르크는 하노버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조피 도로테아와 쾨니히스마르크의 사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연애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워갔다.[3]

이들의 사이는 1692년에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아버지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발각되었다. 에른스트는 쾨니히스마르크를 하노버에서 추방시켰다. 그럼에도 소문은 퍼져 1694년에 이르러서 하노버에서 스웨덴 귀족과 선제후의 며느리의 불륜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사실을 알게 된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아내를 비난했다. 조피 도로테아는 남편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뒤 쾨니히스마르크와의 도피를 결심했다. 아니, 적어도 하노버 선제후와 궁중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1694년 여름에 쾨니히스마르크 백작이 실종되었는데, 정황상 하노버 선제후와 그 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4] 이후 조피 도로테아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상속권은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차지가 되었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상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처의 재혼을 금지하고 다시는 아이들을 볼 수 없게 했다. 결국 조피 도로테아는 죽을 때까지 첼레에 있는 알덴 성에 감금당했다.

2.4. 말년[편집]


알덴 성에서 조피 도로테아는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모든 방문과 서신은 검사를 받았으며 산책이라도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던 조피 도로테아는 알덴 성의 레이디, 알덴의 공녀로 불렸다.[5] 조피 도로테아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폐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죽기 전에 조피 도로테아는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한 전남편에게 죽어서도 당신을 저주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1726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전 남편 조지 1세는 조피 도로테아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상복을 입는 것을 금지했다. 심지어 그녀가 죽은 당일에 애인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갔다고 한다. 장례식은 우여곡절 끝에 1727년 5월에야 비밀리에 조용히 치루어졌다. 조피 도로테아가 죽고 약 7개월 뒤, 장례식으로부터는 약 4주 뒤에 전남편 조지 1세도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3. 자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phie_Dorothea_Prinzessin_von_Ahlden.jpg

조피 도로테아와 그녀의 두 자식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조지 2세
(George II)
1683년 10월 30일
1760년 10월 25일
안스바흐의 캐롤라인
슬하 3남 5녀[6]
1녀
프로이센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Queen in Prussia)
1687년 3월 16일
1757년 6월 2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슬하 7남 7녀[7]

조피 도로테아의 자식들은 어머니와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아버지 조지 1세를 미워했다. 아들 조지 2세는 대놓고 바람을 피우며 어머니를 박대하더니 결국 이혼하고 유폐시키기까지 한 아버지를 원망했고, 동명이인인 딸 조피 도로테아도 어머니의 사망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며 상복을 입어 조지 1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불운하게도 딸이자 동명이인인 조피 도로테아는 어머니와 똑같이 남편에게[8]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비록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받다가 이혼당하고 유폐당한 채로 사망했지만 후손들은 굉장히 번성해서 하노버 왕조 이후의 영국 왕실과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의 프로이센 왕실은 모두 조피 도로테아의 후손이다.

4. 여담[편집]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 외도, 이혼 후 유폐되어 사망했다는 점에서 증손녀 캐롤라인 마틸다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첼레의 장크트 마리엔 교회에 묻힌 것도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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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 조지 1세가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기도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영국의 왕비는 커녕 하노버의 선제후비도 되지 못했다.[2] 참고로 여동생 아우로라 쾨니히스마르크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정부였다. 둘 사이의 자식이 프랑스군의 명장 모리스 드 삭스.[3] 이 연애편지는 후에 쾨니히스마르크의 처남에 의해 공개되었다. 600통이 넘는 편지들이 하노버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한다.[4] 2016년에 라이네 강에서 발견된 유골이 쾨니히스마르크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는 딸이 이혼당한 후의 처사에 반대하지 않았고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죽기 직전에 딸을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고 한다.[6]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세[7] 프리드리히 대왕, 스웨덴의 왕비 로비사 울리카, 하인리히 왕자[8] 조피 도로테아의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얼마나 막장 남편이자 아버지였는지 알고 싶다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