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템베르크의 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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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럼알렉산더르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1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2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000,#fff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막시마 소레기에타 세루티




네덜란드 빌럼 3세의 왕비
조피 프리데리케 마틸데
Sophie von Württemberg

파일:Koningin_Sophie_Württemberg.jpg
이름
독일어
조피 프리데리케 마틸데
(Sophie Friederike Mathilde)
네덜란드어
소피아 프레데리카 마틸다
(Sophia Frederika Mathilda)
출생
1818년 6월 17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사망
1877년 6월 3일 (향년 58세)
네덜란드 헤이그 하우스텐보스 궁전
장례식
1877년 6월 20일
네덜란드 델프트 신교회
배우자
빌럼 3세 (1839년 결혼)
자녀
빌럼, 마우리츠, 알렉산더르
아버지
빌헬름 1세
어머니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형제
마리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2. 혼담
3.3. 결혼생활
3.4. 네덜란드 왕비
3.5.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네덜란드 빌럼 3세의 정비이자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차녀이다.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견해로 유명했고 몇몇 유명한 지식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Sophie of Württemberg, Queen of the Netherlands.svg
파일:Royal Monogram of Queen Sophie of the Netherlands.svg
문장
모노그램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1818년 6월 17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루트비히부르크 궁전에서 빌헬름 1세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는 러시아의 여대공이기에 조피는 알렉산드르 1세니콜라이 1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조피가 태어난 지 6개월 정도 지나자 어머니인 카타리나 왕비는 폐렴으로 인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그 후 고모인 카타리나 공주[1]가 조피를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조피는 아버지 빌헬름 1세와 언니 마리와는 친밀한 관계였으나 조피의 새어머니인 파울리네 왕비하고 그닥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피는 아버지 빌헬름 1세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았었는데 당대 상류층의 소녀들처럼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역사, 지리, 문학을 추가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코르네유, 라신, 칸트, 헤겔의 작품에 능통했다고 한다.

조피는 고모부 제롬 보나파르트를 통해 보나파르트 가문과의 친척이었고, 특히 나폴레옹 3세, 마틸드 보나파르트과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진보적인 아버지 빌헬름 1세를 통해 조피는 어린시절 부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민주주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3.2. 혼담[편집]


조피의 아버지 빌헬름 1세는 다른 면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진보주의자였지만, 여전히 왕실과의 결혼을 선호했고 자신의 딸들이 일국의 군주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당시 조피는 그리스 왕국오톤과 브라운슈바이크의 빌헬름 공작과의 혼담이 있었다.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새로 수립된 그리스의 군주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오톤과의 첫 번째 약혼은 수포로 돌아갔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빌헬름과의 두 번째 혼담은 이미 조피를 네덜란드로 시집 보내려고 결정한 빌헬름 1세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조피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빌헬름과 결혼하는 것을 원했다.[2]

1839년에 조피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혼담 상대는 자신의 이종사촌인 네덜란드빌럼 왕자[3]였다. 이미 혼담이 결정된 상태에서 빌럼과 조피는 서로 만났는데 빌럼은 조피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지만 조피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조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 혼담을 진행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으며, 이를 안 빌럼의 어머니 오라녀 공비 안나는 매우 반대했다고 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 부모의 아버지인 빌헬름 1세오라녀 공 빌럼은 혼담을 진행했다고 한다.[5]

1839년 6월 18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빌럼 왕자와 결혼하게 된다.

3.3. 결혼생활[편집]


이제 네덜란드의 왕자비가 된 조피는 소피아(Sophia)로 불리게 된다. 결혼식 후, 조피와 빌럼은 헤이그의 팔레산 헤트 플레인에 정착했다. 1840년에 시아버지가 빌럼 2세로 즉위하자 빌럼-소피아 부부는 오라녀 공과 오라녀 공비가 되었다.

소피아는 시아버지 빌럼 2세과 시숙부 프리디리크 왕자[6]와 친밀한 사이였지만 빌럼의 어머니이자 소피아의 시어머니 안나 왕비와 결코 사이가 좋지 않을 뿐더러 시댁 식구들도 소피아를 탐탁치 않아 했다.

소피아와 빌럼은 서로 잘 맞지 않았다. 남편 빌럼보수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조피는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서로 금슬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었다. 아들만 셋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으르렁댔다고 한다. 또한 빌럼은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다. 이를 본 소피아는 진절머리가 나 빌럼과 살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관심사와 취미에 전념했다고 한다. 빌럼 - 소피아 부부는 이혼을 고려했지만 시숙부인 프리디리크 왕자의 중재로 이혼을 하지 않고 별거를 했다.

3.4. 네덜란드 왕비[편집]


1849년 3월 19일, 시아버지 빌럼 2세가 승하하고 남편 빌럼 3세가 네덜란드 국왕이 되어 소피아도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다. 소피아는 남편 빌럼 3세와 함께 헤이그의 노르데인데 궁전으로 옮겨서 살았는데 분명히 팔레산 헤트 플레인보다 더 좋아했다고 한다.

왕비가 되고나서 부부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빌럼-소피아의 차남인 마우리츠가 뇌수막염에 걸렸는데 치료방법에 대해 의견차이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1850년에 마우리츠는 사망했다. 3남 알렉산더르를 임신했을때 빌럼 2세는 소피아의 반대에 불구하고 장남 빌럼을 기어이 기숙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소피아 왕비는 지적인 여성이었지만 남편인 빌럼 3세의 관능적인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빌럼 3세는 현대 회화, 음악, 연극을 좋아했지만, 소피아는 역사와 과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빌럼 3세는 여전히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소피아는 남편이 국왕이 되기에 열등하고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야말로 아들을 위해 섭정을 더 잘 할 것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알렸다.[7]

빌럼 3세와 소피아가 왕과 왕비가 된 후에도 이혼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소피아와 빌럼은 서로 이혼을 원했지만, 그들의 지위 때문에 이혼은 불가능한 스캔들로 여겨졌다.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의 중재로 1855년 이혼 없이 공식적인 별거가 확정되었고, 공식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다. 빌럼은 장남 빌럼 왕세자의 양육에 대한 결정권을, 소피아는 막내 알렉산더르의 양육권을 모두 부여받았다. 소피아는 공식석상에서 왕비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1855년 부터 빌럼-소피아 부부는 서로 별거하면서 살았는데, 소피아 왕비는 주로 친정인 슈투트가르트와 네덜란드 하우스텐보스 궁전에 오가며 살았고, 네덜란드에 있을때 남편 빌럼 3세를 피해 다른 궁전에 거주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 레넌, 율리우스 폰 몰, 레오폴트 폰 랑케, 존 로트롭 모틀리 등 다양한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소피아는 또한 나폴레옹 3세외제니 황후를 방문하기 위해 프랑스로 정기적인 여행을 즐겼다. 문화와 과학에 관심이 많던 소피아는 영성에 관심이 있었고, 1858년에 다니엘 홈을 노르데인데 궁전으로 초대하여 션을 개최했다.

소피아 왕비는 몇몇 유럽 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나폴레옹 3세빅토리아 여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소피아는 예술을 보호하고 자극했으며, 동물 보호와 공공 공원 건설을 포함한 여러 자선 단체를 지원했다. 왕비으로서 그녀는 1860년대부터 산업 전시회에 참석했고 정신 장애인들의 교육에 참여했다. 그녀는 또한 1867년에 동물 보호 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대표가 됨으로써 동물 보호 협회를 지원했다. 소피아 왕비는 또한 네덜란드에서 처음 여성 운동이 형성되었을 때 여성 운동을 지지했고, 1871년 첫 여성 단체인 아르베이드 아델트의 후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소피아는 좌파의 정치적 견해와 과학적 관심을 가진 특이한 왕비였으며, 종교에 대한 비독단적인 견해, 진보적인 발전에 대한 지지, 에티켓에 대한 경멸 등으로 인해 "la reine rouge" [8]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3.5. 사망[편집]


1877년 6월 3일, 소피아 왕비는 향년 58세로 생일 직전에 헤이그 하우스텐보스 궁전에서 사망했다. 부검 보고서에 따르면 소피아의 폐, 간, 창자, 담낭에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심장벽은 "거의 막질"이었다고 보고했다. 소피아의 소원에 따라 시신은 방부 처리되지 않고 웨딩드레스를 입혀졌다.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는 소피아의 삶은 이미 결혼식 날에 끝났기 때문이다. 이후 유해는 6월 20일 델프트에 있는 델프트 신교회에 안장되었다.

빌럼 3세의 소피아 왕비의 자녀들 중 차남 마우리츠 왕자는 요절했고, 장남 빌럼과 삼남 알렉산더르는 결혼하지 않고 죽어 소피아의 후손은 끊겼다. 소피아의 사후 남편 빌럼 3세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와 재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빌헬미나 여왕이다. 당시 소피아 소생의 왕자들이 모두 후손없이 죽었기 때문에 빌헬미나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Princess Sophie of Württemberg)
빌헬름 1세
(William I)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아우구스테 여공작
(Duchess Augusta of Brunswick-Wolfenbüttel)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영국의 어거스타 공주[9]
(Princess Augusta of Great Britain)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Catherine Pavlovna of Russia)
파벨 1세
(Paul I)
표트르 3세
(Peter III)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오라녀 공 빌럼
(Willem, Prince of Orange)
1840년 9월 4일
1879년 6월 11일

2남
마우리츠 왕자
(Prince Maurits)
1843년 9월 15일
1850년 6월 4일

3남
오라녀 공 알렉산더르
(Alexander, Prince of Orange)
1851년 8월 25일
1884년 6월 21일



5. 여담[편집]


  • 네덜란드에서 소피아 왕비로 부르지만 소피 왕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피 왕비라고 부르는 인물이 이사람이 유일하다.

  •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영국빅토리아 여왕하고 서로 친하게 되어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뿐만 아니라 나이대가 거의 같은 또래이기도 하다.[10] 이 계기로 인해 조피의 장남인 오라녀 공 빌럼과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과의 혼담이 진행했으나 무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던 케임브리지의 어거스타 공녀[11]도 서신으로 많이 주고받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조피의 외사촌인 알렉산드르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돈이다.

  • 정략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왕비의 대표적인 케이스이기도 하다. 양가 아버지들이 정한 결혼이었지만 본인이 네덜란드로 시집을 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시어머니이자 이모인 안나 왕비는 너무나 결혼을 반대해 조피가 네덜란드에 시집을 갔음에도 고부관계는 최악이었다고. 조피도 안나 왕비가 어머니 카타리나 왕비와 본인을 매우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더욱 네덜란드의 왕자랑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 카를 1세의 이복누나이며, 알렉산드르 2세,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독일 제국의 황후 아우구스타와 서로 사촌지간이다.[12]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마지막 왕인 빌헬름 2세의 이모 겸 당고모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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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부인이기도 하다. 카타리나의 동서인 쥘리 클라리의 여동생인 데지레 클라리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친척들을 못 보게 되어 매우 상심해하자 데지레를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다.[2] 훗날 조피가 빌럼 3세와의 결혼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친 희생이었다고 언급을 했다고 한다.[3] 막내이모 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의 아들.[4] 빌럼의 어머니이자 조피의 막내이모인 안나 파블로브나는 조피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언니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를 너무나도 싫어해 그의 딸이자 조카인 조피도 탐탁치 않은 일화가 유명하다.[5] 당시 오라녀 공이었던 빌럼 2세 자신도 조지 4세의 외동딸이었던 샬럿 공주과의 혼담이 있었다가 깨지는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의 아들이 유럽의 공주들에게 파혼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결혼을 진행시켰다. 빌럼 왕세자도 조피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6] 스웨덴 칼 15세의 왕비인 네덜란드의 루이제의 아버지이자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의 외조부이다.[7] 하지만 지적을 과시하는 면이 있어 빌럼 3세를 종종 무시하곤 했다고. 때문에 빌럼 3세가 소피아를 폭행하기까지 했으며, 아내를 향한 빌럼 3세의 가정폭력은 당대에도 꽤 유명했다.[8] 프랑스어로 '붉은 왕비'라는 뜻. 정치적인 차원에서 붉은색은 예나 지금이나 좌파적인 상징이다.[9] 조지 2세의 손녀이자 조지 3세의 누나.[10] 소피아 왕비는 1818년 6월 17일생, 빅토리아 여왕은 1819년 5월 24일생.[11]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의 이모이다.[12] 올가 왕비의 경우 조피의 이복남동생인 카를 1세의 처이기에 시누 - 올케 사이이다.[13] 빌헬름 2세의 어머니 카타리나 공주가 조피의 이복여동생이며 아버지 프리드리히 왕자는 조피의 친사촌이다. 카타리나와 프리드리히가 사촌간 혼인을 하면서 맺어진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