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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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제2대 국왕
빌럼 2세
Willem IIII


파일:King_Willem_II.jpg

출생
1792년 12월 6일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 노르트아인더 궁전
사망
1849년 3월 17일 (향년 56세)
네덜란드 틸뷔르흐
재위기간
네덜란드 국왕[1]
1840년 10월 7일 ~ 1849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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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오라녀나사우 가문
이름
빌럼 프레데릭 조지 로데베이크
(Willem Frederik George Lodewijk)
아버지
빌럼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형제자매
프레데리크, 폴린, 마리아너
배우자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1816년 결혼)
자녀
빌럼 3세, 알렉산더르, 헨드릭, 에른스트 카시미르, 소피
종교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1. 개요
2. 생애
3.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국왕. 전 유럽을 지배하고자 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하고 물러난 후 유럽의 사회상이 정리되고 아버지 빌럼 1세네덜란드 국왕이 되자 왕세자가 되었다.


2. 생애[편집]


어린 시절 나폴레옹의 네덜란드 침공으로 일가가 영국으로 망명해서 영국에서 자랐다. 웰링턴 공작의 초대를 받고 영국군과 함께 스페인에서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다. 이후 워털루 전투 당시에도 제1군단을 지휘해서 참전했다.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고 아버지가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러시아 제국 황제 파벨 1세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하여 4남 1녀가 태어났다.

1830년 벨기에 혁명이 발발하자 네덜란드군을 지휘하여 벨기에군을 격파했고, 1840년 아버지가 퇴위하자 뒤를 이어 네덜란드 국왕이 되었다. 1848년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여 왕권을 제한하는 헌법에 서명, 입헌군주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초대 네덜란드 총리로 게리트 쉬멜페닌크(Gerrit Schimmelpenninck)를 임명했다.[2] 또한 룩셈부르크에게 자치권을 주고 룩셈부르크 최초의 의회 설립을 인정해주었다.[3] 오늘날 룩셈부르크 시에는 이를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있다.

1849년 틸뷔르흐에서 급서했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빌럼 3세
(Willem III)
1817년 2월 19일
1890년 11월 23일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슬하 3남
발데크피르몬트의 엠마
슬하 1녀[4]
2남
알렉산더르 왕자
(Prins Alexander)
1818년 8월 2일
1848년 2월 20일

3남
헨드릭 왕자
(Prins Hendrik)
1820년 6월 13일
1879년 1월 13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말리아
프로이센의 마리
4남
에른스트 카시미르 왕자
(Prins Ernest Casimir)
1822년 5월 21일
1822년 8월 22일

1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소피
(Sophie, Großherzogin von
Sachsen-Weimar-Eisenach)

1824년 4월 8일
1897년 3월 23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
슬하 1남 3녀


4.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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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룩셈부르크 대공, 오라녀 공, 림부르크 공작 겸임.[2] 빌럼 2세는 급진적인 개혁 없이는 왕국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그가 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보수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liberal)가 되었다."[3] 이때 룩셈부르크 초대 총리로 가스파르 테오도르 이그나스 드 라 퐁텐(Gaspard-Théodore-Ignace de la Fontaine)을 임명했다.[4] 빌헬미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