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왕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부여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모수왕
부루왕
금와왕
대소왕
해두국
갈사국
말대
초대
제2대
제3대
해두왕
갈사왕 1세
갈사왕 2세
도두왕
중국사서
초대
시조
계보 미상
칭왕 초대
영품리왕
동명왕
부여왕
계보 미상
초대
제2대
제3대
시왕
부태왕
위구태왕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간위거왕
마여왕
의려왕
의라왕
제8대
제9대
계보 미상
말대
현왕
울왕
잔왕
졸본부여
말대
말대
연타발
추모성왕
남부여
문헌상 언급
두막루
초대
왕족
수령
성왕
위거
낙개제







[ 펼치기 · 접기 ]
원삼국시대 이전
단군조선
위만조선
진국
삼한연맹
단군
역대 군주
진왕
천군
예맥
부여
예맥족장
최씨낙랑국
비류국
역대 군주
남려
최리
송양
고리국
졸본부여
비류백제
온조백제
영품리
추모
비류
온조
마한
초대
제2대
제3대
제?대
준왕
마한왕 2세
마한왕 3세
마한왕
진한
실직국
감문국
골벌국
음즙벌국
안일왕
금효왕
아음부
타추간
진한
변한
탐라
사로국
금관국
반파국
탐라국
거서간
김수로
이진아시
역대 군주






부여 제2대 군주
夫台王 | 부태왕

출생
연대 미상
부여
사망
연대 미상
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2대 군주
167년 전후

[ 펼치기 · 접기 ]
성씨
해(解)

부태(夫台)
왕호
부태왕(夫台王)


1. 개요
2. 행적
3. 기타



1. 개요[편집]


2세기 중후반에 등장하는 부여의 군주.


2. 행적[편집]


桓帝 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의) 조정에 나아가 하례하고 조공을 바쳤다.

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영강(永康) 원년(167)에 왕 부태(夫台)가 20,000여인을 이끌고 현도를 노략질하자, 현도 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니, 참수함이 1,000여 급(級)이었다.

至靈帝 熹平三年, 復奉章貢獻.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이르러 다시 봉장(奉章)하고 조공해왔다.


167년에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현도군을 노략질하자 현도 태수 공손역[1]이 이를 격퇴하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침략은 기록상 몇 안 되는 부여의 대외 원정이다. 이후 부여는 174년에 공물을 바쳐 후한과의 국교를 재개했는데, 부태왕이 이 시기까지 재위했는지는 알 수 없다.


3. 기타[편집]


본래 부여는 오랫동안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다가 전한한무제 때 부여의 요청으로 요동군의 관할로 바뀌었는데,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부여사》, 《조선 전사》 2권에 따르면 이는 부여가 현도군(고구려)이 아니라 요동군(동연)을 통해 후한 황실과 거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부여와 현도군 사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악화되었고, 167년에 일어난 부여의 현도 공격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후대의 위구태왕과의 관계는 불명확한데, 위구태왕과 동시기에 즉위한 공손도의 양부인 현도 태수 공손역과 동시대의 사람이므로 한 세대 위의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05:54:48에 나무위키 부태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훗날 요동 공손씨 정권을 수립하는 공손도가 이 사람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